|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 탐방기
- 제1코스 고난의 길을 중심으로 -
올 겨울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11월에 중순에 대설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폭설이 내리더니 12월 접어들면서 영하 10도를 밑도는 강추위가 엄습해 심신이 꽁꽁 얼어붙었다.
오늘은 서부경남 지자체에서 후원하는 백의종군로 팸투어를 하는 날이다. 새벽부터 잠을 설치며 일어나보니 날씨가 잔뜩 흐려 있다. 엊저녁 일기예보를 들었던 터라 큰 눈이라도 오면 어쩌나 걱정하였는데 다행이다.
서울역에서 8시 40분에 출발하는 마산행 KTX 열차에 몸을 실었다. 객실은 주말이라 만원인데 운좋게도 출입문 끝 창가 순방향에 자리를 잡았다. 창밖은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온통 희뿌옇다.
<마산역에서 일행과 함께>
서울역을 떠난 지 세시간만에 마산역에 도착했다. 중식 후 마산대학교 이장환 교수님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차내 강의를 들으며 한산도로 향했다. 마창대교와 거가대교를 지나 통영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구름으로 뒤덮인 채 햇살 한줌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노루꼬리 만한 겨울 해는 이미 설핏 기울어 을씨년스럽다.
<1박2일 동안 우리의 발이 되어준 버스>
통영 여객선 터미널에서 오후 네 시에 출발하는 한산도행 카페리호를 타고 한산도에 다다랐다. 한산섬 일대는 몇 해 전 가족들과 샅샅이 돌아다니며 여행했던 터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반감되어 흥미를 잃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교수님과 동행하는 관계로 나름 의미를 갖고 열심히 귀동냥을 하며 따라 나섰다.
<한산도 선착장>
장군의 유명한 진중시 한산도가(閑山島歌)의 산실인 수루(戍樓)에 올라 임란 당시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노심초사 불면의 밤을 지샜을 장군을 생각하며 잠시 해 저문 바다를 바라보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일행을 뒤따라 제승당 뒤편의 한산정(閑山亭)을 찾았다.
한산정은 충무공이 부하들과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으로 과녁은 바다 건너 산자락에 있었다. 굴곡진 만(灣)을 끼고 활터와 과녁사이에 바다가 있도록 배치한 것은 조선수군이 해전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특히 이곳에서는 장군의 건의로 한때 무과특별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다고 전한다.
<제승당과 수루>
<한산도가의 산실인 수루 : 머잖아 철거되고 다시 고증을 거쳐 복원될 예정이란다>
<활터 한산정>
<한산정에서 바라본 사거리 145m의 과녁>
<제승당 입구 근처에 자생하는 팔손이나무:추위도 아랑곳없이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바람에 서둘러 유적답사를 끝내고 배에 올랐다. 사위는 어느새 어둠에 휩싸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이 캄캄하다. 선실에 앉아 등을 기대니 간밤의 피로가 일시에 엄습한다. 벌써 나이 탓을 하기는 이른데 아무튼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오늘은 뒷풀이 술자리도 마다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야겠다.(2012. 12. 15 토요일)
엊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인지 일찌감치 눈을 떴다. 우리가 투숙한 호텔(아시아레이크사이드)은 진양호가 보이는 산자락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안개가 자욱해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다.
조반 후 사천시 곤양면소재지에 위치한 응취루(凝翠樓)를 찾았다. 응취루는 세종 12년(1430)에 완공된 곤양읍성의 객사 문루다. 이순신이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던 중 정유년(1597) 7월 16일에 원균(元均)이 이끄는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황을 살피기 위해 7월 18일 도원수 진영을 떠났다가 7월 22일에 하룻밤 유숙했던 장소다. 본래 곤양초등학교에 내에 있던 것을 1963년에 철거하였다가 2011년 백의종군로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였는데 원래의 위치에 복원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응취루 가는 길의 피라칸사스 열매:겨울 한철은 따뜻한 남쪽에서 지내고 싶다>
<최근에 복원을 끝낸 응취루, 하지만 본래의 위치가 아니라서 못내 아쉽다>
응취루 답사를 끝내고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에 위치한 이홍훈의 집을 찾았다. 이홍훈 집은 이순신 장군이 합천의 도원수 진영에 머물던 중 원균의 패전 소식을 듣고 권율의 명으로 전황을 살피러 나섰다가 사천 곤양과 남해 노량을 둘러보고 되돌아가는 길에 7월 24일부터 26일까지 3일을 유숙한 집이다. 이홍훈 집은 초가로 복원되어 있었는데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유숙지 이희만 집은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쉬웠다.
<초가로 깨끗이 단장한 충무공의 유숙지 이홍훈 집>
이홍훈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옥종면 문암리 덕천강가의 강정(江亭)에 도착했다. 강정은 동네 이름을 빌어 문암정(文岩亭)이라고도 부르는데 장군께서 원균의 패전 소식을 듣고 전황을 살피러 도원수 진영을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인 7월 20일에 잠시 들러 쉬어간 곳이다. 또한 사천과 남해를 둘러본 후 7월 26일 이홍훈의 집에 머물 때 권율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 진주목사 이현(李玹)과 더불어 국가안위를 걱정하며 이야기를 나눈 곳으로 이충무공이 백의종군할 때 두 차례나 쉬어간 유서 깊은 곳이다.
<문암정(강정)>
<문암정에서 바라본 덕천강과 문암교>
강정 건너편 진주 원계(元溪)마을에는 손경례 집이 있었다. 덕천강을 가로지르는 문암교를 건너 군사들을 점검하고 훈련시켰던 장소라고 전하는 진배미(진을 쳤던 논) 터를 둘러본 후 손경례 집을 찾았다.
손경례 집은 공께서 3일간 머물던 하동의 이홍훈 집을 떠나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유숙하던 곳으로 선조임금으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 교서를 받은 곳이자 지고지난했던 백의종군길을 마감했던 뜻 깊은 곳이다. 그런데 여러 해 동안 손길을 거치지 않아 처마 밑에 걸린 공의 빛바랜 영정처럼 볼품없이 쇄락하여 무척 안타까웠다. 충무공 일생일대의 전환점이자 역사적인 현장이었던 만큼 후세를 사는 현대인에게 새 삶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거듭 날 수 있도록 본래 대로 복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원계마을 입구에는 당시의 상황을 모두 지켜봤을 수령 600여년 된 느티나무 한그루가 고사 직전에 처해 있다.
<손경례의 집: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을 받은 곳이자 백의종군을 마감한 유서깊은 곳>
<원계마을 입구의 600년된 느티나무:생전의 공의 모습을 보았을 터지만 나무는 말이 없다>
이제는 이번 팸투어의 하이라이트이자 마지막 일정인 2010년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된 백의종군길 탐방체험만이 남았다. 우리가 체험하기로 한 걷기 코스는 제1코스 ‘고난의 길’로 정유년(1597) 6월 1일에 하동읍성을 출발하여 산청군 단성 땅에 있는 박호원의 농사를 짓던 종의 집[農奴家]으로 이동한 하룻길 중 산청군 단성면 창촌리 금만마을에서 남사리 남사마을에 이르는 4.95㎞다.
<백의종군로 곳곳에 세워놓은 도보탐방로 지도>
우리 일행은 소풍 나온 초등생마냥 마산대 이장환 교수님을 따라 금만 마을회관을 떠나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날씨가 푸근하고 햇살이 따스해 마치 봄날씨 같다. 논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포장길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자 산길 양편으로 감나무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양지바른 산밭에는 아직도 이파리가 청청한 배추가 널려있다. 포기가 변변찮아 수확을 포기한 것일까? 아니면 수확을 미뤄놓은 것일까?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한파에도 이렇게 시퍼런 잎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남쪽지방이 별세상이기는 한 것 같다.
감나무골을 지나 야트막한 고갯길을 넘어 다시 마을길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 산자락에 자리한 송덕사(松德寺)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송덕사가 자리잡은 곳은 당시 객사가 있던 곳으로 공께서 쉬어갔다고 전하는 곳이라 뒤처진 일행을 기다릴 겸 다리쉼을 하며 숨을 고르다가 왼편으로 난 대숲길을 따라 다시 산길을 오른다. 밤나무가 군락을 이룬 산길을 거쳐 고리지(남사제)라는 작은 저수지를 지나 둑방을 내려서자 갑자기 잡풀 우거진 양지바른 길 가에서 낮잠을 즐기던 노루가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껑충껑충 달아난다. 한낮의 평화를 깨트린 죄책감에 공연히 미안하다. 누군가 뜬금없이 어제 버스에서 팽현호 사무국장께서 우스갯소리로 얘기하시던 논개(論介)이야기를 꺼낸다.
<백의종군로를 걷다가 남사제를 배경으로>
당시 진주를 공격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대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란 자로 조선말을 약간 알아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논개는 ‘저 짝으로 갑시다’라며 남강 절벽으로 유인했다. 왜장은 그 말을 음흉스럽게도 ‘젖 짜러 갑시다’로 잘못 알아듣고는 희희낙락 따라왔다. 결국 왜장은 논개의 작전에 말려 수중고혼이 되고 말았다.
나는 여태껏 어제 버스에서 들었던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경상도 특유의 억양과 사투리는 역시 어려우면서도 재밌다.
남사마을 이구산(尼丘山) 입구 도로에 다다랐다. 백의종군길은 남사천을 건너 이구산자락을 끼고 마을로 이어졌는데 엊그제 내린 비로 남사천 보가 넘쳐 부득이 도로를 따라 남사예담촌에 도착했다.
<남사천의 겨울:어제 종일 내린 겨울비로 보가 넘쳐 부득이 탐방로를 수정해야만 했다>
남사예담촌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될 만큼 예스런 풍취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한옥마을이었다. ‘예스런 담’이라는 뜻의 ‘예담’에서 알 수 있듯이 담쟁이넝쿨이 우거진 오래된 담장과 더불어 오래된 재실(齋室)이나 고가(古家) 등 전통 한옥이 즐비한 마을은 전체가 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스러웠다. 게다가 이구산 등 공자가 태어난 곳의 지명을 따라 이름을 지을 정도로 학문을 숭상하여 수많은 선비를 배출해 내었다고 하니 놀랍다.
<남사마을 입구의 효자비>
<사효재>
<복원된 남사예담촌의 담장>
<남사천과 예담촌>
<박호원의 재실 이사재>
공께서 하룻밤 유숙하신 곳은 다름 아닌 남사마을, 지금의 남사예담촌이었다. 정유년(1597) 6월 1일에 하동읍성을 출발하여 저물녘 남사마을에 도착한 공께서는 박호원(朴好元)의 농사를 짓던 종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권율 도원수의 진영이 있는 합천 초계(草溪)로 향한다. 박호원은 명종 대에 임꺽정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고 이후 대사헌과 호조참판을 지낸 인물인데 박호원의 농사를 짓던 종의 집은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다만 재실 이사재(尼泗齋)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호원의 재실 이사재를 끝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 팸투어를 마쳤다. 팸투어를 준비하는 동안 공(公)과 관련한 책을 두루 읽으면서 당대 조정의 무능함과 당리당략에 휘말린 벼슬아치들의 행태에 분노하기도 했고, 국난극복의 의지를 불태우는 민초들의 용기에 감동하기도 하였다. 특히 공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흠모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문득 퇴계선생께서 지으셨다는 시조가 생각났다. 공과 관련지어 살짝 개사해 읊조려 본다.
장군도 날 못 보고 나도 장군 못 뵈
장군을 못 뵈도 발자취 여기 있네
발자취 여기 있거든 아니 걷고 어쩌리
※ 도움을 주신 분
팽현호 : 사단법인 한국문화관광개발원 사무국장
이장환 : 마산대학교 국제소믈리에과 교수
유명규 : 21세기 이순신 연구회 회장, 전 해군대학 교수
노창운 : 남사예담촌 문화유산해설사 겸 체험지도사
|
첫댓글 와우~~
기행문 잘 읽었네..
이순신 장군의 전기를 읽었던 소녀시절로 돌아가 다시한번 생각을 해보게 되었어
문화탐방로로 한번 가보고 싶어진다
영남 친구들 월례모임 때 함께 걸으면 정말 좋을 듯...
의미있는곳이라면 모두 접수를 하는군,나도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좋은 기회를 잘 활용했을 뿐이야.^^
응기 옆에서 같이 여행하는 느낌이네
어찌나 생생하게 전해주는지.......
응기 역사 쌤 때문에 잊어버렸던 기억들 되찿을수 있어 감사혀요 ㅎㅎ
쌩유^^
함께 댕겨온 걸까??
그저그저~ 감사하쥬
고마워.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