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22일, 전남 강진에서 제주도로 훈련 장소를 옮긴 NC다이노스. 때마침 강풍이 몰아치는 날씨로 훈련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아침 9시부터 시작되는 훈련 스케줄은 변함없이 제주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사진=순스포츠 홍순국) |
프로야구 제9구단인 NC 다이노스가 전남 강진에서 제주도로 캠프 장소를 옮겼다. 지난 10월 9일부터 첫 가을캠프를 시작한 이후 단 한 차례의 휴가도 없이 체력 훈련을 실시했던 NC 다이노스는 오는 1월 미국 애리조나로 스프링캠프를 떠나기 전까지 제주 캠프에서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한다.
오로지 야구장만 존재했던 강진베이스볼파크와 달리 제주도 캠프는 관광객도 많고 숙소에서 훈련장으로의 이동 시간이 발생해 선수들 입장에선 조금 피곤한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수들은 “여길(제주도) 거쳐야 집에 갈 수 있다”면서 “제주 훈련을 마무리해야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짧은 휴가를 받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하긴 50여일 동안 단 한 번도 숙소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하니 선수들의 집에 대한 그리움이 오죽할까 싶다.
NC 다이노스 선수들 중 공개 트라이아웃을 통해 선발된 25명의 선수들은 저마다 다양한 스토리를 안고 있다. 그중에서도 프로야구 유니폼을 입었다가 방출된 4인방의 스토리가 흥미진진했다. 파란만장한 사연들을 안고 있는 주인공을 만나본다.
김동규, “막걸리 배달하다 야구 재도전!”
2005년 신인드래프트 2차 3번으로 SK 입단했던 김동규. 어렸을 때부터 소원했던 프로야구 유니폼을 입었다는 기쁨은 1군이 아닌 2군 무대를 맴돌면서 조금씩 희석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6년 말 공익근무요원으로 훈련소에 들어갔다가 퇴소하는 날, SK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고 나선 더더욱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제대 후 아는 에이전트가 월 20만 엔에 일본 독립리그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해서 현해탄을 건넜다가 전혀 다른 계약 조건을 듣고 돌아와야 했다. 그 팀에선 8만 엔을 불렀고 숙식도 모두 내가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8만 엔에서 세금 떼고 숙식비 내고 나면 교통비조차 빠듯했다. 너무 형편없는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해서 다시 보따리를 싸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게 눈치가 보였던 김동규는 급기야 막걸리 제조업체에서 실업야구팀을 병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서울생조주’에 정식 직원으로 입사하게 된다.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서 방금 나온 막걸리를 냉동 탑차에 싣고 배달을 나가는 게 김동규의 주업무였다.
배달을 마치면 슈퍼마켓이나 동네 가게를 돌며 영업을 시작했다. 막걸리 회사이다보니 영업할 때 막걸리를 마시는 일이 다반사였다. 말이 실업야구였지 그 회사에서 야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도 채 안 됐다. 야구를 하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 막걸리 배달을 선택한 김동규로선 점차 야구 훈련은 게을리하게 되고 막걸리 배달과 영업으로 살이 찌기 시작하는 사회인 김동규를 발견하곤 4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 둘 결심하고 말았다.
“막걸리 회사를 나와서 인사차 모교인 장충고등학교를 찾았다가 유영준(현 NC스카우트) 당시 감독님께서 나한테 야구팀 코치 자리를 제의해주시는 바람에 다시 야구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코치를 하면서 20kg이나 늘어난 체중조절에 들어갔고 NC다이노스에서 공개 트라이아웃을 실시한다는 얘기를 듣고 지원을 하게 된 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김동규는 1차, 2차 공개 테스트를 통해 NC유니폼을 입었지만 여전히 선수들 사이에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토로한다.
![]()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인해 고된 훈련을 하면서도 연신 스트레스 속에 파묻혀 산다고 말하는 김동규. 그러나 막걸리 배달도 해봤던 용기와 극기를 잊지 않고 NC에서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다짐한다.(사진=순스포츠 홍순국) |
SK 최정, 정근우가 입단 동기라는 김동규는 올시즌 포스트시즌을 지켜보며 두 선수의 활약에 큰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최정, 정근우와 출발은 비슷했지만 결과가 천양지차인 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김동규가 치여란 내부 경쟁을 딛고 NC 다이노스의 최종 멤버로 승선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황덕균, “이상훈 선배가 내 은인!”
2002년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황덕균(28). 그러다 2004년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고 조용히 사라져야만 했다. 그렇다고 야구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 황덕균은 지인을 통해 전설적인 대선배 이상훈을 소개받게 된다.
“처음 이상훈 선배를 만날 때 굉장히 두렵고 긴장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좌완투수로부터 조련을 받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고 떨렸다. 처음엔 다소 무뚝뚝하셨지만, 나중엔 ‘선배’라고 부르지 말고 ‘형’으로 부르라며 살갑게 대해주셨다. 송파구청에서 공익근무를 했는데 일이 끝나면 이상훈 선배한테 달려가서 훈련을 반복했었다. 그 사이에 LG에서 두 번, 한화에서 한 차례 테스트를 받았고 좋지 못한 결과를 받았다. NC 다이노스 공개 트라이아웃은 마지막 기회라는 비장한 심정으로 치른 테스트였다.”
이상훈 외에도 전승남은 황덕균에게 새로운 야구에 눈을 뜨게 해준 은인이다. 2002년 두산에 입단할 때만 해도 프로란 벽이 그렇게 높은 벽인 줄 모르고 기고만장했었다는 황덕균. 오랜 2군 생활로 인해 야구에 대한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황덕균은 막상 팀에서 나와 보니 그 울타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운 존재인 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황덕균은 김경문 감독과의 남다른 인연도 공개했다.
![]() 김경문 감독과 NC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황덕균. 두산 시절 스쳐지나간 인연이었지만 NC에서는 김경문 감독과 굳건한 사제의 연을 맺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낸다.(사진=순스포츠 홍순국) |
김경문 감독은 황덕균을 ‘꼴뚜기’라고 부른단다. 다른 코치들 사이에선 ‘덕구’로 통한다. 2013년 황덕균이란 이름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1군 마운드에 올라가는 게 소원이라는 ‘덕구’는 훈련이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꼭 써달라고 부탁한다. 김경문 감독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이다.
김진성, “1군 마운드에 오르는 날, 할머니 초대할 것"
처음 기자 앞에 나타난 김진성은 말수가 없고 표정도 어두웠다. 훈련이 고돼서 그런가보다 싶었지만 그는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조금씩 자신의 진심을 꺼내보였다.
“난 태어났을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이혼하시는 바람에 나한테는 할머니, 할아버지 밖에 안 계셨다. 초등학교 시절, 비가 올 때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우산을 들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그러나 난 그 비를 온전히 맞고 집으로 향했다. 아무도 날 데리러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부모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사춘기 시절을 지배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할머니한테 많이 못 되게 굴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행동은 자꾸 비뚤어진 모습만 보이게 됐다. 그렇게 고생하신 두 분에게 처음으로 효도했던 게 SK 유니폼을 입었을 때이다. 손자가 프로야구 선수가 됐다고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지금도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쁨은 SK에서 두산으로 트레이드 됐다가 지난 해 방출되면서 산산조각이 되고 만다. 고등학교 때 입은 팔꿈치 부상이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고 결국엔 수술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방출당한 후 재활센터에 들어가 재활 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한 달에 50만 원 정도하는 재활비를 낼 수 없어 동네 헬스클럽에서 혼자 재활 훈련을 소화해냈다고 한다.
![]() 불행한 어린시절이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에 어두운 터널을 잘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김진성. 자신으로 인해 마음 고생이 심했던 두 분을 위해 그는 힘든 경쟁 속에서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다짐을 보인다.(사진=순스포츠 홍순국) |
김진성은 감독, 코치, 모두 감사한 분들이지만 선수들을 위해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치료실을 떠나지 못하는 트레이너들한테 큰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재활센터 등록비 50만 원이 없어서 동네 헬스장을 찾았던 김진성으로선 지금의 트레이너들이 은인이자, 큰 응원군이기도 한 셈이다.
한윤기, “입단 동기, 김광현보다 더 성공하고 싶다!”
2007년 신인드래프트 2차 4번으로 SK에 입단했던 한윤기. 김광현과 동기였다. 2군에서만 머물다가 군 입대를 자원해 2년간의 현역 복무를 마치고 복귀했지만 잇단 부상 속출로 인해 결국 올해 초 방출 통보를 받고 만다.
“광현이랑은 신인 때 많이 친했다. 그러다 내가 줄곧 2군에만 머무르는 바람에 자주 볼 수 없었는데 광현이가 지난 해 2군으로 내려오면서 다시 친하게 지냈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 틀려서 많은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더 이상 SK와 인연을 이어가지 못하는 나로선 광현이가 많이 부러웠었다.”
갑자기 소속팀이 없어진 한윤기는 잠시 방황을 거듭했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백수’로 전락한 자신의 신분이 어이없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 시간들이 많았다.
“NC의 공개 트라이아웃 1차 때 살 떨리는 긴장감을 맛봤다. 한 번 프로 생활을 경험해 보니까 다시 그 세계로 들어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었고, 선수들 모두 쟁쟁한 실력을 갖고 있어서 합격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SK에 첫 입단했을 때보다 NC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가 열 배는 더 기뻤다(웃음).”
한윤기는 가장 최근까지 선수 생활을 한 덕분에 체력적인 면에선 크게 힘들지 않다고 한다. 구단측에선 한윤기의 곱상한 이미지가 여학생 팬들한테 어필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 얘기를 듣고 한윤기는 “1년 계약 후 재계약을 할 수만 있다면 여학생 팬들 뿐만 아니라 창원의 야구 팬들을 위해 몸 바쳐 뛰겠다”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 SK 김광현과 입단 동기였던 한윤기. 올해 초 방출된 후 마음 고생이 심했지만, 그는 NC에서 제2의 야구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사진=순스포츠 홍순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