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 환단
허인회가 연단실로 들어간 지 보름이 지났지만 허인회는 연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당문추와 당화련이 연단실 앞에서 본 것은 끊임없이 들어가는 약재와 그것을 나르는 사람들 뿐이었다.
두 사람은 달리 불편한 것은 없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지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돌아갈까도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할머니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같아 그마저도 못하고 또 하루가 저물어 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허인회가 부른다 하자 기대를 갖고 따라간 곳은 연단실 입구였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데, 연단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전갈에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엄청나게 큰 구리항아리와 족히 수십 개는 돼 보이는 단로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단로 하나에 한 사람이 붙어 단로의 검은 액체를 둥글게 원을 그리며 젓고 있었고, 허인회는 그 사이를 다니며 맛을 보고 손가락으로 찍어 농도를 살폈다. 단로를 전부 살핀 허인회가 다가와 당문추와 당화련을 보며 물었다.
"당문에서도 연단을 하는 것을 보셨소?"
"세가에서도 연단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연단에는 많은 비법이 숨겨져 있고, 만드는 과정에서 그보다 많은 주의가 필요하니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기는 하지요."
허인회는 구리항아리 옆에 놓인 것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갖고 오신 것이 맞는지 확인하시오, 아직 봉인도 풀지 않았으니 잘 살피시기 바라오."
당문추가 받아들고 당가주 당무천의 글과 당가의 인을 확인하고 허인회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소생이 세가에서 갖고 온 물건이 확실합니다."
"무엇인지는 아시오?"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돌아가 당가주님을 뵈면 소생이 거듭 감사드린다 전해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허인회는 봉인을 풀고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저울에 조금씩 덜어 놓으며 일정한 양을 단로마다 넣고는, 남은 것을 유지로 만든 봉투에 넣고 연단실 안에 있는 작은 금고에 넣고는 다시 금고에 봉인을 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져온 것이 무엇이기에 저리 소중히 다루는지 궁금한 마음이 일었지만, 세가에서도 말하지 않은 것을 알려줄 까닭이 없었기에 그저 바라만 봤다.
남은 것을 봉인한 허인회가 당문추에게 다가서며 은근 당화련의 표정을 살피고 물었다.
"이곳은 촌이라 볼 것도 없었을 텐데 어찌 지내셨소?"
"누님과 함께 있으니 장원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건곤장의 손님으로 있는 동안에는 어디를 가시든 안전할 것이외다.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마음껏 다니시오. 안채의 연무장도 나름 잘 꾸며 놨으니 늘 수련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연무장에 가도 되는 것입니까?"
"장원 안의 모든 것에 마음 가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 앞으로 오늘처럼 몇 번을 더 확인하시면 당 소협의 임무는 끝나게 될 것이니 그리 아시고 편히 지내시오."
당화련이 허인회를 바라보며 입을 쭈뼛거리자 허인회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생은 당분간 연단실을 떠나지 못합니다. 우선 당 소협과 구경을 하시면 연단이 끝나는 대로 소생이 모시겠습니다."
당화련은 허인회의 말을 되짚어 보면 앞으로도 두 달 가까이 연단실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것과 같아 실망하다가 연단이 끝나면 함께 하겠다는 말에 환하게 웃었다.
당화련의 웃음은 허인회의 마음에도 파문이 일 정도로 아름답게 보여 허인회는 얼른 당문추에게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당 공자 저 금고에 공자의 서명을 적고 비문을 표하시오. 다음에 와서 확인해야 하니 비문이며 잘 기억하시기 바라오."
당문추는 허인회의 말에 금고에 허인회가 봉인하고 서명해둔 곳 옆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고 작은 용을 그렸다. 당문추가 이름 옆에 작은 용을 그리자 허인회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당 공자의 나이가 어찌 되시오."
당화련은 당문추가 작은 용을 그리는 것을 보았기에 허인회가 무슨 생각에 묻는지 짐작하고 얼른 대답했다.
"이제 지학입니다."
"당 공자가 나이는 어리나 생각은 깊은 것이, 앞으로 당문의 미래가 밝을 것 같소이다."
허인회는 다시 당문추를 보며 말을 맺었다.
"스스로 다 컸다 생각하지도 않고 어리다 여기지도 않으니, 그에 걸맞게 노력해야 하지 않겠소. 이곳에 있는 동안 수련에 힘쓰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당문추는 허인회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나갔고, 당화련은 아쉬움이 남은 눈빛을 허인회에게 보이고 나갔다.
두 사람은 보름 간격으로 연단실을 찾았고, 이번이 네 번째로 허인회가 말한 마지막 연단인 셈이었다.
당문추는 그동안 해온 대로 봉인을 확인했고 허인회는 당문추가 확인한 것을 마지막으로 단로에 나눠 넣었다.
"그동안 수고했소이다, 내일이면 완성될 것이니 그동안 수고에 대해 보답을 하고자 하오, 기대해도 좋을 것이니 내일 보도록 하십시다."
당문추는 그동안 여러 번 좋은 일이 있을 거라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보름에 한 번 연단실에 들었다 나가면 어디 갈 곳도 없고 연무장에 나가 당문의 무공을 익혔다.
처음에는 누가 보는가 싶은 마음에 주의를 기울였지만 안채의 연무장에 두 사람이 나오면 누구도 가까이 오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이 안채에서 만난 사람은 두 사람을 도와주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가끔씩 보는 군사라 칭하는 서문자숙과 총관 천막동 뿐이었기에 언제부터인가 당문의 연무장처럼 부담 없이 마음껏 당문의 절기를 수련해왔었다.
당문추는 허인회의 말에 그저 그런가 보다 했지만, 당화련은 연단이 끝나면 함께하겠다는 허인회의 약속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기에, 내일 보자는 허인회의 말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당화련의 가슴은 설렘과 기대로 콩닥거렸다. 사천 당문에서는 한 달 전 열린 당대부인의 고희연을 보름 가까이 성대하게 치렀다.
전국에서 이름난 광대와 놀이패가 몰려들고 경극 패왕별희가 끝날까지 열려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당대부인이 들고 나온 주장자는 가장 눈길을 많이 받았다.
운남에서만 나는 희귀목에 온갖 화려한 금장식으로 꾸미고 그 사이마다 박혀있는 보석이 내는 빛은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내뱉었고, 한껏 흥이 오른 당대부인이 취중에 한 말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이 주장자로 말하면 이 늙은이의 손서가 될 사람의 선물이오."
한마디로 손녀 사윗감이 준 것이라는 말이었고, 그 말은 천하제일미인 당화련의 남편이 될 사람이 주었다는 말이었기에, 당화련을 바라보던 무수한 젊은이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고, 당화련을 질투하던 무수한 여인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소문이 퍼지자 당문은 취중에 그랬으면 좋겠다 한 말이 오해를 부른 것이라 해명을 내놓았지만, 당문으로 축하하러 온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당화련이 보이지 않는 것에 심증을 굳히고, 이미 당화련이 사윗감과 함께 당문을 떠났다고까지 소문을 확대시켰다.
일찌감치 당문에 축하를 다녀온 사람들로 진평에서까지 당문의 회갑연 소문이 돌았고, 당문추가 어이없어하는 동안 당화련은 얼굴을 붉히고는 방문 밖 출입마저 자제했다.
서문자숙이 전해준 소문을 들은 허인회는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지만 서문자숙의 놀림은 그치지 않았다.
"주공, 당 소저께서 건곤장의 안채에 머문다는 소문이 더해지면 기정사실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 참에 혼례를 올리시지요?"
"운룡, 그랬다가는 전 무림의 소협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올 것인데, 막을 자신은 있소이까?"
"주공, 그래도 싫지는 않은가 봅니다. 안 한다 하시지 않고 막을 방도를 물으시니......"
"이제 연단이 끝나 당 소저와 서안 구경을 하려 했더니, 서안은 고사하고 문밖출입도 어렵게 됐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주공답지 않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대부인께서 아무려면 취중 농담을 하셨겠습니까, 당문의 최고 어른이 말입니다.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허언은 없습니다. 단지 주공께서 당문의 뜻대로 움직이시는가, 아니면 주공의 뜻에 맞게 당문이 움직이는가, 둘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당문의 의도는 뻔하지만 그때 오대 세가가 모두 있었다는 것이오, 당문이 소생을 위험하다 여겼으면 다른 세가들 역시 같을 것이 아니오. 급하게 당문과 엮기는 것은 많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소이다."
"주공의 뜻은 충분히 이해하고 당연히 소생도 그리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씀하셨듯이 그곳에 오대 세가가 모두 있었고, 고희연 동안 무림의 거의 모든 문파가 그들과 만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이 주공을 놓쳤다 생각하면 방법을 달리 할 것이나 아직도 주공을 잡을 방법이 남아있다 여기면 그것만으로도 꽤나 주공을 괴롭힐 것입니다."
"죄지은 것도 아니고 두고 봅시다."
"그리 쉽게 생각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주공이 그들이 말하는 마교나 사파도 아니고 쉽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쓸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쉬운 것이 당문과 같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래서 당대부인께서 그리 말을 흘렸다는 말씀이로군."
"맞습니다. 대문파에 취중 농담 같은 것은 없다 말씀드렸지요, 그 말이 진실로 실수였다 해도 이제는 오히려 사실이라며 굳히려 할 것입니다. 조금만 말을 늦춰도 그 틈을 뚫으려는 많은 세력이 있으니 어찌 늦추려 하겠습니까?"
"편히 살 팔자는 못 되는 모양이외다. 두 달을 고생하고 이제 조금 쉬려 하는데, 연단실이 편할 지경이니....."
"주공, 선남선녀 아닙니까, 편하게 편하게 가시지요."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오?"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주공께서 당장 혼례를 발표하지 않으시면 그들이 취할 공세는 정해져 있습니다. 각 문파의 혼기 찬 여인들은 모두 몰려오겠지요. 이유 정도 만드는 것은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혼례를 올릴까요?"
"당문에서야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다른 세력들을 막아주겠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건곤장이 은혜를 입는 것이 되고, 당문의 요구들을 들어주기에는 건곤장으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떠나 군사로서의 운룡의 책략은 무엇이오?"
"주공을 빼고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주공의 생각이 소생의 전략이지요."
"소생이 운룡의 뜻에 따른다 하면 어떤 방책이 있겠소이까?"
"당 소저와 혼례를 늦추는 것이 건곤장에는 도움이 됩니다. 상황에 따른 변수는 있어도 한 곳에 휩쓸리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주공께서 힘드실 것입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주공을 노릴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 소생도 당 소저가 마음에 들고 혼례를 올려 집안에 안정을 취하고는 싶지만, 이제 연단이 끝나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주공, 환단이 여러 가지라 하셨는데 어떤 것들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것을 설명하려던 것이 말이 길어졌습니다. 우선 상처를 치료하는 것으로 지혈고와 재생고가 있습니다. 앞엣것이 피를 멎게 하는 것이고 뒤엣것이 새살을 돋게 하는 것입니다. 효과는 매우 빨라 지혈고의 경우 바르면 바로 효과가 있고, 재생고는 바르고 하루 이틀 상처가 커도 닷새 정도면 새살이 채워질 것입니다. 또 보력단과 보기단, 보혈단이 있는데, 보력단은 힘든 일을 한 후에 힘을 보충해주게 되고, 보기단은 기력을 보충해주게 되고, 보혈단은 흘린 피를 채워주거나 피가 모자란 경우에 쓰입니다. 세가지 모두 빠른 효과를 본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효과만큼 과욕을 부리면 오는 부작용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더구나 이 세 가지는 부작용이라 할 수 없는 부작용이 있는데, 고자가 아닌 고자에게 좋습니다. 그래서 과욕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하하하 좋은 일 아닙니까, 천하에 웃음꽃이 피지 않겠습니까?"
"좋은 면만 보면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렇습니까?"
"주공, 그 세 가지 환단을 아주 작게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효과는 줄어도 의원들에게 알맞게 내주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없다면 최선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좋은 방법이십니다. 그렇게 만들지요."
"다른 것은 없습니까?"
"건곤단이라 했습니다. 무인들의 내공을 늘려주는 효과가 있고 진기를 빠르게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얼마나 말씀인지요?"
"한 알에 일 년 정도이고, 한 달에 한 알씩 일 년을 복용하면 십 년 정도의 공력이 늘게 됩니다. 사람에 따라 다소 다를 수는 있지만 늘어나는 것은 틀림이 없고, 그 후로는 아무리 먹어도 효과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하하, 은자를 쓸어 담겠군요. 무인들의 욕심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구하려 할 것입니다. 무림의 지평이 바뀌겠지만, 십 년 정도의 공력이라면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어찌 내면 되겠소이까?"
"지혈고와 재생고를 먼저 섬서의 의방에 내시고, 보력단과 보기단, 보혈단을 다음에 내십시오. 건곤단은 오대 세가에 세가마다 십 인분 정도 선물로 돌리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다."
"가격은 어찌하시렵니까?"
"모두 작은 병 하나에 은자 다섯 냥으로 하고 건곤단은 한 알에 열 냥으로 하십시다."
"너무 저렴한 것 아닙니까?"
"그래도 백 배는 남으니 더 받기도 꺼려집니다."
건곤장에서 만든 지혈고와 재생고를 사용해본 의방들은 그 놀라운 효과에 경악하며, 비슷하게라도 만들어 보려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만들어 내지 못하고 결국 건곤장으로 몰려들었다.
섬서의 의방에 먼저 내줬지만 소문은 어느 사이 전국으로 퍼져나가, 건곤장의 지혈고와 재생고는 어지간한 집안의 상비품이 되어 찾는 사람이 늘어나자, 의방이 아닌 약재상들마저 서로 달라 경쟁이 심했다.
그 뒤에 보력단과 보혈단, 보기단을 사용해본 사람들 사이에 치료과정에서 달랐던 것이 소문을 타자 병과는 상관없이 찾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건곤장에서 물건을 내며 주의 사항과 부작용을 재삼 설명했지만 제대로 들으려 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건곤단은 선물로 받은 오대 세가의 불신으로 방치되다, 자질이 떨어지는 제자들에게 복용시켜 효과가 나타나자 오대 세가의 가주들이 모여 회의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오대 세가의 입장에서는 무림에 이런 물건이 공공연하게 나돌아도 되느냐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변화할 무림 세력의 균형에 초점을 맞춰 갑론을박을 거듭했다.
오대 세가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중소 문파로 소문이 퍼져 나갔고 그들의 요구는 들불처럼 거세졌다.
한 무리의 비적들이 건곤장에 몰려들어 강탈을 시도하다 수십 명이 피떡이 되어 관아로 넘겨지고, 중소문파 몇 곳은 대량을 요구하다 거절되자 시비가 붙어 모조리 내공을 잃어버리는 불상사를 겪고서야 건곤장은 안정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