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삶의 무게 감응과 시간성의 흔적 --라춘실 시집 『나도 다섯 살 아이였다』 김 송 배 (시인. 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상처 있는 삶, 그 무게는 얼마일까 우리 현대시에서 감응할 수 있는 소재나 주제는 삶의 궤적(軌跡)에 대한 회상을 통해서 생성하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과정이 상상력으로 재생하면서 하나의 이미지를 창출하여 작품을 발상하게 되고 이를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완성하게 된다. 이처럼 시 창작에서 이미지를 중시하게 되는 연유도 시인들의 마음속에서 재생되는 삶의 현상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心象-마음의 그림) 하는 문제는 그 시인이 살아온 삶의 행로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일찍이 청록파 박두진 시인은 ‘시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새롭게 출발하도록 고무하며 그 삶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라는 명언으로 시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근원으로 출발한다는 시적 발상과 동기가 삶에서 근원(根源)하고 있다는 시작 원리를 명백하게 적시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여기 라춘실 시인이 상재하는 첫 시집 『나도 다섯 살 아이였다』의 시편들을 일별하면서 그의 과거 회상의 상상력에서 생성하는 이미지를 깊이 이해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서 불망(不忘)의 체험들이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그의 심중(心中)에 접근하게 된다. 어찌보면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라는 말처럼 라춘실 시인이 체험을 여과(濾過)시킨 인생의 진실이 바로 시로 승화하고 있는 것이다. 라춘실 시인은 이미 ‘시인의 말’에서 ‘다섯 살 아이는 사라졌다 해도 / 호기심을 잃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거나 작품 「전봇대」 중에서도 ‘따뜻함이 흐르는 가느다란 전선들이 / 멀리 떨어진 친구의 손 같이 / 희망의 생명줄 꼭 붙잡고 / 바람으로 소근거린다 // 어쩌면 모두가 삶을 흔적하는 / 한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내면에 잠재한 흔적들이 이제 삶을 더욱 가치 있게 지향하기 위해서 작품으로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낡은 유모차에 폐지를 가득 싣고 달팽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할머니 가만히 들여다보니 가느다란 숨소리 색색거리고 있다 이 골목에서 가끔 목격되는 할머니 깡마르고 까뭇한 조그만 얼굴 쪼그라든 너무나 안쓰럽다 가끔은 폐지를 실은 유모차 앞에 앉아 꽁초를 태우는 할머니 잠시 삶의 무게를 덜고 싶어서일까 입에서 나오는 연기는 연기가 아닌 삶의 무게를 세상으로 내보는 것이리라 할머니의 삶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유모차에 실린 폐지 만큼일까 아니면 깡마른 몸의 무게 만큼일까 아무도 가늠할 수 없는 무게가 오늘도 할머니의 어깨와 등을 누르고 있다. --「삶의 무게」 전문 우선 라춘실 시인이 감응하고 있는 삶의 양상은 대체로 현실적인 삶(real life)에서 아직도 누구에서나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약간 미흡한 채 어쩌면 고행(苦行)으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응시(凝視)하는 ‘삶의 무게’에서 자신의 삶을 조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폐지를 줍고 있는 할머니의 행색(行色)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감지하고 이 현실적인 불운에 대한 깊은 사유(思惟)가 시적으로 형상화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들에서 ‘할머니의 삶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 유모차에 실린 폐지 만큼일까 / 아니면 깡마른 몸의 무게 만큼일까’라는 어조로 삶에 대한 미지의 의문으로 그의 고뇌는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으로 적시한 ‘아무도 가늠할 수 없는 무게가 / 오늘도 할머니의 어깨와 등을 누르고 있다.’는 어조는 무겁기만 한 삶의 고뇌에 대한 해법이 자신의 삶과 형태는 다르지만 마치 실재(實在) 행장의 무게처럼 의식이 흐르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이처럼 다변적인 삶의 양상은 우리 인간들의 운명으로 치부하지만 이는 인간들의 생사(生死)에서 탐색하는 생명과도 불가분의 상관성이기 때문에 라춘실 시인은 우리 인간들의 행, 불행이 삶의 무게를 측정하는 단초가 되는 것을 인식하고 그의 시법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너도 나도 안과 밖에서 받은 상처들 들어내지 못한 고통을 이겨낸 삶인가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먹먹한 가슴으로 인고의 시간을 챙긴다 상처 없는 자연도 삶도 없다. --「상처 없는 자연도 삶도 없다」 중에서 다시 라춘실 시인은 다변적인 기후 변화의 ‘시커먼 상처’에도 ‘봄이면 탐스런 꽃송이를 피워’ 내는 자연 현상에서 인간의 삶을 반추(反芻)하고 있다. 그는 ‘상처 없는 자연도 삶도 없다.’는 결론으로 삶을 정리하고 있어서 ‘고통을 이겨낸 삶’과 ‘인고의 시간’을 용해(溶解)시키고 있는 점에서 그의 시정신(poetry)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작품 「얼만큼 잘 살고 있는가」 중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 /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 물려받은 지혜로 / 얼마만큼 잘 살고 있는가 // 그 분들이 체험한 지혜를 / 물려받았으니 / 얼마나 잘 살아야 할까 --중략--훗날 나를 닮은 후손은 / 더 지혜롭고 사랑 받는 사람으로 / 살게 되기를 희망한다.’는 그의 성찰과 희망이 그의 내면에 명징(明澄)하게 흐르고 있다. 2. 돌아갈 수 없는 시간성에 대한 행장(行狀) 라춘실 시인의 사유에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집착이 요즘에 와서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사유와 정서의 변화는 단순한 시간성이 아니라 인생과 세월이 결합된 인생론에서 형성하는 어쩔 수 없이 수긍(首肯)해야 하는 순리의 수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간성(혹은 세월)도 지금까지 연속된 삶의 한 단면이 재현되면서 생성하는 자연 섭리와 동일하게 순응하는 진리일 것이다. 어쩌면 생사고락(生死苦樂)에서 긍정하는 인생관이 이제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다는 방증(傍證)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작품 「전화선을 타고 온 슬픈 소식」 중에서도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때문에 / 다시는 볼 수 없는 아쉬움에 / 가슴이 아려온다 / 남은 시간 / 남겨진 친구야 / 만나고 싶을 때 / 미루지 말고 열심히 얼굴 보면서 / 그렇게 살자’라는 친구와의 전화 교감을 통해서 ‘다시 볼 수 없는 아쉬움’과 ‘남은 시간’이 그들의 남아있는 기대이며 소망으로 ‘열심히 얼굴 보면서 / 그렇게 살자’라는 어조의 결론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나도 예전에 다섯 살 아이였다 겨울 눈바람에 옆으로 밀려가며 아랫말 사시는 꼬부랑 할마이 찾아가던 작은 계집아이였다 따뜻한 햇살 아래 혼자 김장움집 볏단에 기대어 작은 오빠가 사다준 요지경을 요리조리 돌리며 신기해하던 그땐 난 다섯 살 아이였다 큰언니가 예쁘게 짜준 스웨터 입고 사진관에서 가진 찍고 돌아오는 길에 언니들과 냉면 먹고 강아지와 뒹굴던 아이 지금도 액자 속 다섯 살 아이는 웃고 있다 내 속에 있던 아이는 어디로 가고 어른이 된 난 아직 어설프기만 하고 세상살이는 서툴기만 한데 나는 자란 것일까, 늙어가는 것일까. --「나도 다섯 살 아이였다」 전문 그는 다시 과거의 ‘다섯 살’ 시간으로 자신을 조망하고 있다. 이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여기에서는 라춘실 시인이 회상하는 과거, 유년의 추억은 천진난만한 순정성으로 ‘지금도 액자 속’에서 웃는 모습으로 남아있어서 세월의 덧없음을 감지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흘러간 시간성에서 반추하는 것은 마지막 연, 결론에서 ‘내 속에 있던 아이는 어디로 가고 / 어른이 된 난 아직 어설프기만 하고 / 세상살이는 서툴기만 한데 / 나는 자란 것일까, 늙어가는 것일까.’라는 어조로 어설픔과 서툴기만 한 노년의 넋두리로 인생을 성찰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공감을 유로(流露)하고 있는 것이다. 라춘실 시인이 이 작품을 시집 제재(題材)로 선택한 이유도 아쉽게 떠나 가버린 세월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정감어린 감성의 발현으로 인생을 재조명하려는 그의 내면에 잠재된 깊은 시간의 가치성을 음미(吟味)하는 일종의 시적 진실의 탐구하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듯 실버문화센터에서 한 철 보내며 나이 학력 종교를 내려놓고 사는 이야기에 열 올리며 활기차게 소통하다보면 외로움 잊게 되고 날마다 새록새록 즐겁다. --「황혼의 문턱에서」 중에서 이젠 허방천지 당황하지 말고 가뭇한 지난날들 넌지시 보며 또 다른 세상 속으로 나를 챙겨서 또박또박 걸어갈 채비 해야지. --「고개를 넘으며」 중에서 이 두 편의 작품에서는 그가 직면한 황혼(노년)의 시간에서 다시 새롭게 도전하면서 활기찬 소통을 실행하고 있다. 그는 요즘 실버문화센터에 나가서 시간과 교감하면서 이유 없는 쓸쓸함과 ‘낙엽이 곱게 물들어도 공연히 슬프고 / 가을비 내리면 눈물도 괜스레 흘’리는 심정의 흔들림을 ‘황혼의 문턱에서’ 교유(交遊)하고 있다. 또한 시간이 달리는 ‘고개를 넘으며’ 그는 ‘가뭇한 지난날들’을 회상하고 이제 ‘또 다른 세상 속으로 / 나를 챙겨서 또박또박 / 걸어갈 채비’를 해야 한다는 자성(自性)에서 그의 시간성과 인생론이 화해하는 현실적인 그의 사유는 진정한 라춘실 시인의 시적 진실임을 이해하게 한다. 이 밖에도 작품 「어울려 흘러간다」 중에서도 ‘푸르고 푸른 시절 / 내 젊은 날들의 꿈을 싣고 / 저 개울을 지나면 돌아갈 수 없는 / 아쉬움으로 강어귀에 닿으니’라는 어조로 ‘한 줄기 살아온 날들’과 ‘주름강’이라는 그의 시적 상황에서 ‘아쉬움’을 시간성으로 흡인(吸引)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나와 ‘기억속의 그리움 하나’ 어머니 라춘실 시인에게서 다시 교감할 수 있는 시법은 그리움에 대한 심리적인 불변의 시적인 원류(源流)를 확인하는 일이다. 누구나 지나간 사연에 대해서는 그리워하는 것이 우리들의 보편적인 심리이다. 이처럼 삶의 궤적에서도 유년의 회억(回憶)에서 재현하는 안온한 일상적인 일에서도 그리움을 애타게 재생하면서 ‘회색으로 물든 하늘 바라보면서 / 걸어가는 순간 나는 사라지고 / 머릿속에 만들어진 낱말 / 외로움, 슬픔, 코끝이 싸해지며 / 눈가에 물기가 나(「회색으로 물든」 중에서)’오도록 그리움에 몰입하는 그의 내면에는 ‘나’와 주변의 가족 특히 어머니와의 상관성에서 시적인 원천으로 현현되고 있다. 풀밭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색 흰 구름 몽실몽실 눈을 감아버렸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햇볕도 나와 나란히 누운 클로버 풋풋한 향기에 서성인다 언니와 함께 평상에 누워 한여름 밤 빛나는 별을 세다가 쑥불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그 쌉쌀한 향기에 취해 또 다른 내가 별과 나란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에 누워있던 내가 그립다. --「내가 그립다」 전문 라춘실 시인은 우선 자신이 ‘언니와 함께 평상에 누워 / 한여름 밤 빛나는 별을 세 ’는 동심에서 별과 나를 동시에 발견하면서 당시의 ‘언니’와 ‘나’를 동시에 그리워하고 있다. 이 그리움의 저변에는 나를 위시한 가족들의 애환이 진솔하게 발현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삶의 행보(行步)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모정(母情)이 더욱 그리움을 확대시키고 있어서 그의 애절한 시법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발상은 작품 「추억 너머에서도」 중에서 ‘어느덧 기억속의 그리움 하나 /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그 시간 / 분홍빛 물든 이 봄이 나는 슬프다’라고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에서 만감(萬感)의 회한(悔恨)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탐색하는 그리움의 화두(話頭)는 어머니이다. ‘너무너무 보고픈 어머니! /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 마지막 가시는 날에도 / 누리 자매 훌쩍거리는 것 보시고 / “사람은 누구나 다 가는 거란다” 하시며 / 등 떠밀어 보내시던 어머니(「몸살」 중에서)’처럼 그리움의 진원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거울을 사이에 두고 / 마주앉아 있는 어머니가 들어 있다(「거울 속에 나」 중에서) - ‘무겁게 왜 이건 들고 와요’ / 하며 퉁퉁거리는 막내딸 / 바라보며 말없이 웃으시던 어머니 // 사랑이 손끝에서 가슴으로 전해졌다(「서울역에서」 중에서) - 엄마는 봄이면 마당 한편에 / 상추와 쑥갓 씨를 뿌렸다 / 봉숭아꽃 지고 열매 익을 때쯤/ 먹기 좋을 만큼 자랐다(「상추쌈」 중에서) - 여름날 꽃이 만발하면 / 꽃잎 뜯어 / 사기그릇에 백반과 함께 / 곱게 찧어 / 아주까리 잎 에 손가락 하나하나 / 밤톨만큼씩 얹어 / 무명실로 감아주시던 어머니(「봉숭아꽃」 중에서) - 아랫목 같은 어머니 손길이 그리워져 / 엄마. 하고 부르면 달려올 것 같아 / 눈물이 주루 루 흘렀다(「몸살」 중에서) - 일곱 살에 피난온 나는 / 엄마의 손에 아프게 때를 밀어도 / 비누거품 만드는 손길이 신기 하고 / 엄마의 맨살에 안겨 행복했다 (「기억속의 목욕탕」 중에서) 이와 같이 어머니는 영원히 잊지 못할 그리움의 대상이며 내 생명의 모태(母胎)이다. 그가 ‘일곱 살에 피난’ 왔다는 당시의 국가적인 전란(戰亂)에서 어머니와의 애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신적인 또는 현실적인 삶의 지주(支柱)가 되어 지금까지도 그의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는 사랑의 결정체로 각인(刻印)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기억에서 재현되는 그리움의 대상은 아버지도 존재한다. 작품 「아버지」 에서 ‘아버지 그는 누구인가 / 내 마음속에 있는 / 아니면 내 피속에 / 그의 인생 칠팔십은 너무 쩗다’는 부성애(父性愛)에 대한 그의 심려(心慮)가 형상화하고 있다. 다시 그는 ‘아버지 살아 계실 때 / 그 시간의 한 조각도 / 기억하지 못하고 / 아버지 함께 사라졌다--중략-- 그리움은 너울 되어 / 눈은 왜 뜨거워지는 걸까’라는 어조로 어머니와 동시에 회상 속에서 그리움으로 흡인되고 있는 것이다. 4. ‘대자연의 풍경화’에 동화하는 서정성 라춘실 시인은 만유(萬有)의 자연과 친화하는 서정적인 향기에 몰입하고 있다. 우리들 생활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자연과 동화하면서 거기에서 감응하거나 탐색하는 의식의 정화는 어떤 것인가를 예리하게 통찰하면서 정감적인 시법으로 자연과 교감하고 있다. 그는 ‘우리네 생활 속에서 / 다친 아픔 같이 / 한 겹 한 겹 껍질 벗으며 / 자작자작 가냘픈 숨소리 // 한 잎 두 잎 덜어내는 가지 위로 / 이름 모를 새들의 조잘거림 / 오늘은 가고 내일의 되풀이 / 뜀박질 빠른 계절 앞에 / 하얀 세월 한 끝을 잡고 서 있다.(「자작나무」 중에서)’는 어조와 같이 항상 대할 수 있는 자연(자작나무 등)에서 감득(感得)하는 메시지는 잔잔하면서도 아픔의 ‘가냘픈 솜소리’를 인내하고 무엇인가 의미가 넘치는 자연의 섭리를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바람은 불지 않고 날씨는 차고 맑다 여린 나뭇가지 사이로 오가는 참새들 발소리에 놀라 날개짓 파닥거리고 개울가 물오리 한 마리 무엇을 찾는지 물갈퀴로 휘저으며 기웃거린다 천변에 왜가리 홀로 하늘을 쳐다보다 무심한 듯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언제인가는 다 혼자가 돼야하는가 외로움 슬픔 다 허허로운 일이지만 허물어지는 중심이 구름에 두둥실 얹혀간다 숲 그늘 뚫고 나타나는 햇살 잎에 얼룩을 남기는 빛의 그림자 대자연의 풍경화다 석양을 짊어지고 물속에 그림자를 늘이고 서서 혼자만의 감상이었어도 항변하는 숲의 드라마는 신비롭다. --「숲에서」 전문 라춘실 시인은 친자연적 서정시인이다. 그가 지향하려는 서정적 시법은 바로 자연이 우리 인간들과 어떤 진리의 교감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 시인들이 그 해법을 찾기 위해서 온갖 지혜와 용기를 배가(倍加)하여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숲에서’ 참새들 발소리와 물오리의 물갈퀴, 두둥실 구름과 ‘숲 그늘 뚫고 나타나는 햇살’ 그리고 ‘잎에 얼룩을 남기는 빛의 그림자’ 등 ‘대자연의 풍경화’를 혼자 ‘무심한 듯’ 감상하고 있지만 그의 내면에는 ‘언제인가는 다 혼자가 돼야하는가 / 외로움 슬픔 다 허허로운 일이지만 / 허물어지는 중심이 구름에 두둥실 얹혀’가는 자신의 몰입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석양의 숲에서 신비로운 한 편의 드라마를 감상하면서도 우리 인간들의 유한(有限)한 존재문제와 거기에 부수적으로 동반하는 애환(哀歡)까지도 형상화하는 그의 서정적인 심성의 시적인 원류에는 그에게서만 발현할 수 있는 환경적 요소가 삶의 한 부분으로 동행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들으며 언 땅 뚫고 가랑잎 속에서 노루귀와 복수초 빼꼼 내밀었다 조그만 키 일으켜 세우며 얼굴 펴 하늘 향하니 곷샘바람 어느새 나타난 현호색과 괴불주머니 꽃잎 사이로 파고든다 산동백 산벚꽃 피어나니 꽁무니바람이 새들 몰고 와 깃털 날리며 봄맞이 바쁘다 바쁠 것 없는 바람이 나뭇잎을 건들고 진달래꽃 향기 높이 실어나르니 내 마음도 봄꽃처럼 피어났다. --「바람의 형제들」 전문 그렇다. 라춘실 시인의 시야에는 노루귀와 복수초, 현호색과 괴불주머니 그리고 산동백과 산벚꽃뿐만 아니라, 이 산천에 생존하는 만유의 꽃들에게 그는 시선을 보내고 담론을 시작한다. 이팝나무꽃, 산수유, 달맞이꽃, 도라지꽃, 민들레, 산딸기, 밤꽃, 고마리, 봉숭꽃, 꽃잔디 등등 이루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작품 속에 두루두루 저마다의 역할로 시각적인 이미지와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 사물들이 무형(無形)의 자연현상인 ‘바람’과 밀접한 상관(相關)으로 동행하면서 동류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바쁠 것 없는 바람이 / 나뭇잎을 건들고 / 진달래꽃 향기 높이 실어나르’는 불가분의 공존의 자연섭리라는 진실을 이해하게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에서 생명 순환의 신비성과 동시에 ‘내 마음도 봄꽃처럼 피어났다.’는 어조로 자신의 정서적 정화에도 기여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은 자연 생물과는 불가피하게 상호 협조와 견지를 교감하면서 우리 인간들과 친숙해지려는 정감의 이미지가 은근하게 발현되는 시인들의 절대적인 시적소재이며 주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다시 ‘바람이 지나온 산을 바라보면 / 오리나무 물푸레나무도 / 새 옷을 갈아입고 뽐내고 있다’거나 ‘바람이 데려온 / 풀꽃 같은 손길 바라보며 / 나는 어떤 옷으로 치장할까(이상 「봄바람」 중에서)’라는 ‘바람’과 ‘풀꽃’의 관계처럼 라춘실 시인과 자연의 서정적인 정감은 그의 작품 속에서 영원히 동화하는 시법으로 지속될 것이다. 이 밖에도 작품 「풀꽃 고마리」 「호박꽃 친구」 「늦은 봄비 내리는 날」 「9월이 오면」 「겨울나무」 「떨어질 때」 등에서 그의 심연(深淵)에서 발흥하는 서정성을 공감하게 한다. 이제 라춘실 시집 『나도 다섯 살 아이였다』 읽기를 마무리해야겠다. 그는 ‘나는 저 길을 되돌아갈 수도 지울 수도 없다 / 살아온 흔적처럼(「흔적」 중에서)’과 같이 그가 황해도 사리원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피난 와서 이룩한 생존의 현장에서 감응한 삶의 무게가 인생궤적의 애환이 잘 가미된 소중한 흔적의 절규가 형상화하고 가슴 찡한 시적 진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첫 시집이라는 현실에서 앞으로 더욱 충분한 정진으로 보다나은 작품을 창작할 것으로 기대한다. 일찍이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도 안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설파한 로마의 대시인 호라티우스의 유명한 저서 「시론」을 새겨둘 필요도 있으리라.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