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를 보이십시오
요한삼서 1:11-12 2023/12/24 구주강림 제4주
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국감리교회에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동예식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가 나오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마음을 거처로 삼아주시고,
종일토록 우리 안에 머무시어 잘못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오늘 하루 우리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해주시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도우시어 주님과 더불어 그리고 이웃들과 더불어 깊은 사랑의 친교 속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다른 이들이 주님께 바치는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이 세상에 희망의 징표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아멘.
저는 개인적으로 이 기도문이 참 좋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로 시작되는 기도의 내용들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마음을 거처로 삼아주시고,
오늘 하루 우리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해주시고,
오늘 우리가 다른 이들이 주님께 바치는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바로 이 기도가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마지막 구절인데,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이 세상에 희망의 징표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세상에’ ‘희망의 징표’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주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에 희망의 징표가 될 수 있을까요?
첫 번째 희망의 징표는
우리 몸과 마음과 생각을 주님의 거처로 내 주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거처가 되었던 구유처럼
우리 몸과 마음과 생각을 구유로 여기고, 예수님께 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선한 것을 본받아, 선을 행하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일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첫 번째 성탄’
그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유대 땅에 칙령을 내립니다.
자기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등록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렇게 황제의 백성임을 증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황제의 백성입니다.
그러자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던 요셉이
황제의 백성이 되고자, 자기 고향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 만삭인 아내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100Km가 훨씬 넘는 거리를 걸어서 겨우 도착한 베들레헴.
하지만 어느 누구도 황제의 백성이 되고자 찾아온 요셉과 마리아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자기 고향에서 배척을 당합니다.
배척도 두려운 일이었지만
요셉에게는 더 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만삭의 아내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새로 태어날 아기의 거처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겨우 찾아낸 거처가 바로 나귀의 피난처 마구간이었습니다.
나귀의 피난처가 요셉과 마리아의 피난처가 된 것입니다.
눅2:1 그 때에 가이사(황제)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2 이 호적은 구레뇨(퀴리노)가 수리아(시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2: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2: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묵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런데요.
예수님의 탄생을 아주 자세히 기록한 누가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이를 어떻게 해석한 줄 아십니까?
이렇게 해석합니다.
눅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공)눅2:11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2:12 너희는 한 갓난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하고 말하였다.
구유에 누인 아기가 그리스도(메시야) 탄생의 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어떻게 해서 이런 해석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마태가 전한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God is with us)’
그 임마누엘을 누가는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본 것입니다. 구유라는 비천한 공간, 그 낮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유에 누인 아기가 그리스도(메시야) 탄생의 표적이 되었다고 누가는 당당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가 예수 탄생을 통하여 전한 복음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구유에 누인 예수님이 구유와 같은 너희 안에도 거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여러분
구유와 같은 여러분의 몸
구유와 같은 여러분의 마음
구유와 같은 여러분의 생각을
예수님이 묵을 수 있는 거처로 내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행하셨던 선을 본받아,
하나님의 선을 행하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태도를 권면했던 것입니다.
(새)빌2: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2: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2: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우리 주님이 취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비워고 낮추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구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속한 선한 행실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희망의 징표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주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에 희망의 징표가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기도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해주시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도우시어 주님과 더불어 그리고 이웃들과 더불어 깊은 사랑의 친교 속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용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서 우리의 청원 부분만 보겠습니다.
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곧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②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③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무덤)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이 기도 중에서 우리가 두리 뭉실하게 지나가는 기도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두 번째 기도입니다.
②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왜요?
일단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또 용서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에 걸린 가시 것처럼 이 기도가 불편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이 기도를 ‘십자가의 기도’라고 별명을 붙였겠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에 대한 용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에 대한 용서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에 희망의 증표인 사랑의 친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첫 마디가 이거였습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세 번째 희망의 징표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주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에 희망의 징표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다른 이들이 주님께 바치는 기도의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님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칙(태도)을 이렇게 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선한 일을 하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할 수 있는 한 모든 곳에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때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모든 선한 일을 하라.
오늘 본문 12절에 나오는 ‘데메드리오’처럼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진실한 삶으로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새)요한삼서1:12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고, 또 바로 그 진실한 삶으로 그러한 평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첫째 우리 몸과 마음과 생각을 우리 주님의 거처인 구유로 내 주십시오.
둘째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용서함으로 깊은 사랑의 친교 속에 머물러 계십시오.
셋째 할 수 있는 한 모든 선한 일을 다 하심으로 주님께 바치는 기도의 응답이 되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