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킬(외 4편)
고훈실
너는, 그랬어 검은 길바닥에 비닐봉지처럼 널부려져 있었어
붉은 다후다 치마를 두른듯 서녘 하늘은 불콰했어 매번 이런 식의 풍경이 반복됐지 기시감이 너와나를 열거했어 불투명 막을 뚫고 너는 도망가야 했어 검은 말풍선을 훅훅 불어 올리면 옴짝 않던 네가 아무일 없던 것처럼 걸어 나올까 나랑 골목을 헤집고 너는 도망가야 했어 음식 쓰레기통을 뒤지던 앞 발이 지워져도 눌러붙은 털이 직설의 갈기로 그날을 내동댕이 칠 수 없어도 노란 두 눈 알로 선명하게 달아나야 했어 스퀴드 마크가 네 눈을 비켜 갔어 하늘을 담는 말간 두 개의 유리볼, 너는 끝끝내 도망갈 수 있어 빛의 속도로 자동차가 오가고 검은 도로 위엔 창같은 화살표들 꽃 잎 밖의 맛일까 길바닥에 스며들어 잿빛 거죽만 해져 가는 너 말이야 맨발로 야유처럼 풍등처럼 헐겁게 연결된 우리 사이, 조각 난 네 발가락 사이에선 검은 새가 날아 올라 나 이제 너를 덜어내야 하는걸까 큰 센바람이 널 흔들 때 몸을 바꿔가며 달아나던 그 순간을 뭐라 말할까 여기는 이상해 너는 없는데 너는 있거든 검은 입이 입에 고이는 밤 난 너를 내 안에 들여 놓을거야
저 아래 나무는 입도 없고 발도 없어
동백꽃 인생
태양은 범람하고 공중을 분해한 바람이 폰쵸를 흔들고 라마를 타고 오던 신은 어두운 모가지가, 떨어진다
안데스의 속눈썹을 역광으로 만지는 것 바람의 결을 몇 번씩 갈아 끼우는 것 손톱이 다닿는 하루를 반토막씩 비워내는 것 때론 빈 항아리의 입을 검게 봉하는 것 뒤를 당부할 수 없는 기도에 왼발을 한사코 디미는 것 천길 낭떠러지 아래 실족한 태양을 색실로 시침질 하는 것 저녁이면 해진 등지느러미가 골목길에 돋아 나는 것 흰 눈이 오고 콘돌의 날개가 뽑힐 때 지상의 불행은 침묵하는 것 면도날 하나 꽂을 수 없는 돌담을 부르튼 입술로 버티는 것 먼지 날리는 계단밭에 알감자 하나 돋우는 것 지평선을 본 적 없으나 나선으로 명멸하는 하늘을 등짐으로 지고 다니는 것 잿빛 웃음과 울음이 개짖는 소리에 고꾸라지는 것 몸을 지우고 말을 지우고 얼굴을 지우는 일에 익숙해 지는 것 흰 라마의 다리와 솟구친 꼬리가 돌담에 견고히 고용되는 것 아무도 없으나 도처에 넘쳐나는 긴머리 누런 얼굴을 견디는 것 퀵배달 오토바이가 붉은 그림자를 자르며 달려 간다 황금의 요람 초케키라오* 신의 모가지는 헐값이다
*초케키라오 : 해발3천미터에 위치한 잉카 유적 도시
눈 올것 같은 날 비가 왔다
히야신스, 보랏빛 꽃 벙그는 알뿌리 하나 샀다 유리컵에 아랫도리만 살짝 담근다 몸통과 뿌리 사이, 안부와 통증 사이, 밥과 동백 사이, 어제의 인사와 때늦은 답말 사이, 엄마는 손매를 들고 다녔다 참새 깃털같은 등짝에 푸른 멍이 떨고 있었다 유로파 행성에 두고 온 엄마를 꿈꾸는 일, 다복솔 가지에 눈물샘이 걸렸다 궁륭의 해안선은 눈을 베었다 나무통 가득 입갑을 담고 뻘을 회칠한 엄마의 얼굴, 내 발가락을 물었다 춘설이 뻘 묻은 얼굴을 긁고 지나갔다 난 뻘밭 한가운데 검은 말뚝을 박는다 철공 서너 개를 매단다 엄마는 종신형이다 나는 참새보다 빠르게 엄마를 빠져 나간다 빈 사이다 병 사이로 드나드는 공기처럼 엄마는 마침내 가늘어 졌다 마음의 담벼락을 뚝뚝 꺽은 가늘고 흰 다리들, 엄마의 헐거운 엉덩이 사이로 촘촘히 돋아 났다 유리컵에 담근 뿌리의 발끝이 차다 비애의 느낌은 미지근한 아랫목 이불속에 잡힌 엄마의 휜다리, 늙은 여자, 무연히 씨앗을 맺었다 늙은 유모차 한 대 현관에 부려 두고 양파같고 비늘같은 뿌리를 내밀었다 히야신스, 보랏빛 자궁 안에 내가 갇힌다 눈빛을 오래 받아야 피어 난다 올 겨울은 눈 빛이 오래도록 희다
아스피린
통유리를 거울삼아 가구점 앞에 선 튤립나무 두 그루 나무의 발바닥이 두껍다 가구는 모두 치워지고 바닥엔 반값세일 빨간 포스터가 누워있다 발자국을 잃은 12월은 차압 당했다 나무의 빈 속은 점점 더 허물어진다 에덴 빵집과 프로방스 가구점이 문을 닫고 맞은편 인테리어 가게가 셔터문을 내렸다 나무의 발바닥이 보도블럭을 들어 올린다 넘어지는 북새바람 이마에 열이 오른다 나무는 전단지가 된 나무를 접는다 짧은 해가 해열을 마다하고 나무의 이파리를 바닥낸다 수피 (樹皮) 말라 터지는 가구거리에 저녁이 오고 온기 가신 삼첩 밥상을 나무가 한 술 뜬다 혀가 의심하는 건 구도 밖의 부서지는 입 새볔 다섯시 반 일용직 근로자가 반값세일 가구점을 말아 피운다 허탕을 친 달력에 붉은 열이 난다 가구점 바닥에 나무가 드러 눕는다 제집에 돌아온 허리를 펼 수가 없다 세일 현수막을 걸었던 오른쪽 옆구리가 오래 쑤신다 발바닥 엇나간 적요가 나무 곁에 팔랑, 드러누운다 발포정으로 컵 속에 녹아드는 나무의 표정 윌리암 터너의 비,증기,속도 속으로 스르르 스며든다 건너편 공실 상가 창가에 현수막이 내걸린다 완전 노마진 세일
빨간 바탕에 노란 글씨가 거리의 체온을 올린다 나무의 그림자가 현수막을 덮는다 부피 줄인 열감, 가뭇 가라 앉지 않는다
정개밭
- 제주 무릉 곶자왈을 다녀 와서
어멍 이곳의 밤은 오랏줄이라오 망개넝굴 쥐똥나무 구지뽕나무 한데 엉켜 숨골 깊은 곳까지 동여 매고 있다오 어제는 검은 돌무덩 하루 종일 치웠소 아침이면 늦은 동백 핏빛으로 혼절하고 사철 맨발은 말발굽 되던 걸 등짝에 콩짜개난처럼 들러 붙는 지게, 저혼자 밭담을 넘고 산담을 오른다오 치워도 치워도 검은 숲은 붉은 속곳을 보여주지 않으니 명년에도 몽생이 엉덩짝이나 후려 쳐야 할런지. 손바닥만한 밭뙈기 인동풀처럼 뻗어가는 꿈은 오늘도 어둡기만 하오 후들거리는 가랑이 사이로 곶자왈 땅지게를 던지고 숯검댕 내려앉은 얼굴도 고시래 던져 버리오 손발톱이 다닳은 육박나무, 짚신도 없이 미명을 끌고 있소 던져버린 몰골을 다시 찾아 얹고 도새기만도 못한 하루 손바닥만한 하늘에 들킬까 두 손으로 가리오 조 수수 근심없이 커가는 말간 배경은 껍질 벗겨줄 환한 때만 기다리고 있다오 꼭지 떼고 잇 사이로 질겅 씹어 보는 노을, 어멍 젖가슴에 파묻혀 바라보던 그날의 것과 겹쳐 분간이 안돼오 둥그래 당실 둥그래 당실 어멍 오돌또기 오름을 타고 울음으로 쏟아지는 날, 조여오는 질긴 오랏줄일랑 땅속 깊이 심어 버릴테오 내년이면 무심한 밭에 연두콩처럼 흐드러지려나... ... 원수같은 개망초 흐벅지게 문드러 진대도 어멍 젖살같은 밭 한배미 눈이 부신, *어멍 호꼼만 이십 서게
※정개밭 : 제주 대정읍 무릉리 곶자왈에 있는 유일한 묵정밭.
※ 어멍 호꼼만 이십 서게 : 어머니, 조금만 계십시오
- 《시문학》2014년 5월호
첫댓글 참 오랜만에 고훈실 시인님의 명편들을 보니 참, 반갑습니다. 여러번 읽어서 감동을 안아가겠습니다.
필사해주신 선생님의 아름다운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멋지세요. 저도 여러 번 읽어보겠습니다.
애써서 올려주신 박정원선생님 감사합니다 김필영 임희선쌤 반갑고 고맙습니다
호흡이 긴 시들, 잘 읽었습니다. 시어들이 독특해서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따뜻한 관심 고맙습니다 언니도 홧팅
실신까지나 ㅎ 고맙습니다
시어가 시어를 밀고 가는 숨가쁜, 덜어내기 힘든 시인의 사유 잘 읽었습니다.
행간까지 읽어 주는 류시인의 사유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