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 당총지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 김학봉이 운동대회서 연설하고있다.
2년에 한번, 14번째로 되는 훈춘시 영안진 영안촌운동대회가 영안진조선족소학교에서 25일까지 3일간 진행되였다.
500여세대가 살고있는 영안촌, 촌운동대회는 전 촌민이 한자리에 모여 단합하고 즐기는 특별한 명절로 되였다. 촌당총지와 촌민위원회에서는 전문 조직위원회를 내오고 남녀로소 전 촌민이 참여하여 즐길수 있는 수십가지 경기종목을 내놓았다.
촌민들은 3일간의 운동회시간이 가는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촌 당총지서기 겸 촌민위원회주임인 김학봉은 이번 운동회에서도 늘 하던 그 말을 했다.
《영안촌에도 인구가 많이 줄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촌민들의 화합이 더 필요한거지요. 어떻게 하면 더 잘 살겠는가? 나간 이든 남아있는 이든 잘 살자면 노력할수 있는만큼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다 같이 영안을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듭시다!》
9만원 경비를 내놓은 이번 운동회는 영안사상 제일 풍성한 대잔치였다. 파격적인 이번 투자를 영안사람들은 화합과 발전을 다진 보람있는 투자라고 말한다.
500여세대, 1400여명 인구에 경작지가 고작 200여헥타르뿐인 영안, 영안은 오늘날 《길림성시범촌》으로, 새농촌건설의 선두주자로 주목받고있다. 인구당수입(로무수입 제외)이 5000원선을 넘어섰고 집체 고정자산도 일정하게 마련하였는가 하면 수년간 문제시 되였던 촌민들의 음료수문제가 해결되였으며 주요 촌들의 근 14킬로메터길이 콩크리트화 되였고 가로등까지 가설되였다.
오늘 촌운동대회에 촌에 남아있는 촌민들은 물론 외국에, 국내 전국 각지 대도시에 진출한 본 촌 촌민들까지 찾아와 얼싸 안고 《반갑다!》며 함께 운동장을 달리고 바줄을 당기며 촌민 자체의 큰잔치―영안촌의 운동대회를 치렀다.
달리고 당기며
《애들아, 어서 오너라》 3대가 같이 즐기는 가정 릴레이.
《어쌰, 어쌰!》《짜유, 짜유》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바줄당기기.
촌토촌금의 시기를 당겨
영안촌 새농촌건설의 시범공사이며 희망공사인 오미자기지일경.
연길―훈춘 교통요도에 린접하고 훈춘발전공사, 훈춘탄광과도 이웃하여 훈춘시 교외에 위치한 영안촌에서는 촌토촌금(寸土寸金)의 시기를 당겨오고있다.
500여세대에 경작지가 200여헥타르뿐인 실정에서 잘 살자면 지리우세를 리용해야 한다는 판단에 영안촌지도부에서는 조업에 최적격의 땅 10만여평방메터를 촌의 공업구로 획분, 대상, 기업 유치란 장기적인 전망계획을 내놓았다. 7, 8년이 지난 지금 영안촌엔 과연 그 열매가 주렁지기 시작했다. 연변명태가공산업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꼽히는 룡선식료품유한공사, 중약재가공업에서 손 꼽히는 연변발해농부산물가공공사, 수출권까지 따낸 《고려봉》 반찬가공기업 등 13개 기업을 영안촌에 《모셔》왔다.
가공업구역 총 투자액이 680여만원에 달하는 가운데 영안촌에서는 토지로 기업주식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땅값을 승격시켜 촌에서 년수입을 수십만원씩 올리고있다. 뿐만 아니라 기업들이 들어앉아 300~400명의 일자리가 나졌고 촌지도부에서는 기업에 본촌 촌민들을 우선 채용해야 한다는 조건부를 내놓아 무릇 일할수 있는 영안촌의 로동력은 일당 급여 혹은 월급을 받는 일자리가 있게 하였다. 영안촌민들은 그 부업수입만으로도 해마다 400여만원을 더 얻고있다.
외국으로, 발달한 타지역으로 나가면서 한때 영안촌의 경작지도 외래호거나 타촌 사람들에게 헥타르당 몇백원이란 헐값에 임대되였던 시기를 겪었다. 허나 촌의 장기전망계획에 따라 촌지도부에서는 본 촌의 경작지를 본촌 촌민외 타인에 임대주는것을 막고 본 촌내에서 임대주게 하면서 무릇 헥타르당 임대료를 2500원으로 규정해놓았다.
일정하게 어려움도 겪는 작업이였지만 영안촌에서는 2년여 시간을 거쳐 그간 본 촌 촌민외에로 임대나갔던 70여헥타르의 경작지를 지난해까지 몽땅 회수하였다. 이로부터 본 촌 실농군들의 집약화농사가 시작되였고 10헥타르 이상 규모농사호가 8호로 늘었는데 영안촌 50%이상의 경작지를 이들이 다루고있다. 13헥타르를 다루고있다는 6촌민소조 장조장은 《국가정책, 촌의 정책이 좋아 농사짓는 사람도 농사지을 멋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촌 가공업구역에 이어 한창 넝쿨져가는 오미자기지(10헥타르)가 쭈욱- 보이는데 이는 영안촌 새농촌건설에서의 중점 건설대상으로서 영안촌 자체의 산업이다. 다각적인 고찰과 문앞에 자리한 중약재가공기업우세에 대비하여 영안촌지도부에서 결책한 또 하나의 시범공사이다.
오미자기지 림승철관리원(촌민이 아님)은 깔끔한 오미자밭을 가리키면서 《예서 영안촌사람들의 일본새와 합심을 볼수 있다》고 말했다. 묘목심기, 김매기, 넝쿨대세우기… 일손이 하루에 30명까지 투입될 때도 있었는데 촌민들은 누구든 자기집일을 뒤로 하고 달려왔고 일을 제집일처럼 알뜰히 하였기에 오늘의 오미자밭은 잡초 한대없이 푸르렀다. 물론 촌민들은 오미자밭에서도 일당 30원씩 꼭꼭 챙길수 있었다.
촌민들의 경작지를 집약화시켜 촌의 집체 대상으로 운영, 현재 근 60만원이 투입되였다. 봄가뭄에 일정한 영향을 받았지만 그래도 사름률이 비교적 리상적인 편, 3년후 년수입을 보수적으로 쳐도 200만~300만원으로 전망하고있다.
《비행기타고 왔어요》
땅은 떠났지만 고향은 마음속에
촌 당총지 부서기 겸 공청단지부서기 김상룡(오른쪽)이 멀리 의오에서 온 남학철 등 젊은이들을 찾아보고 있다.
외국에 나갔거나 국내 발달지역으로 나간 로동력이 40%정도를 차지, 본 촌 혹은 본 지역에서 음식업 등 서비스업을 벌인 촌민이 40여집, 그외 본촌에 자리한 가공기업에 장기적으로 《취직》한 농민이 100여명… 영안촌은 다원화 경제결구를 실현함과 아울러 다수 농민의 비농업화와 도시화를 실현하였다. 즉 영안촌의 대다수 농민은 농사를 짓지 않는 제2, 제3산업의 직업인으로 전이했고 도시화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의연히 영안사람, 땅은 떠났지만 고향은 떠나지 않아 영안의 발전과 부름에 호흡을 같이하고있다. 촌민운동대회는 이들을 포괄한 모든 영안사람들의 대잔치, 대명절로 영안사람들이 가장 많이 응집하는 때라고 촌민들은 말한다. 이번 운동대회에도 외국에, 외지에 나간 관계로 몇백명의 얼굴이 빠졌지만 대신 2년전부터 외국에서 돌아왔거나 외지에 나가보지 못했던 수십명 촌민들이 서로 반기고있었다…
《영안생각을 언제 잊어보았겠습니까? 촌운동대회에 몇년만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국갔다 5년여만에 지난해 돌아왔다는 40대의 김씨녀성은 촌의 변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했다.
《운동회가 우리의 제일 큰 명절이지요. 가뜩이나 오고싶은걸 촌민소조에서 차비까지 대주겠다며 불러주니 연길에서 달려왔습니다》
제3촌민소조 30대의 장해연녀성, 영안은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이고 남편도 영안사람이며 영안만큼 좋은 곳은 없다며 배구장에서 고향자랑까지 아끼지 않는다.
《회사에 청가를 맡고 비행기 타고 왔다》
뽈개지 친구들이 운동회에 오라는 전화 한통에 멀리 절강성 의오에서 회사를 다니던 제2촌민소조 20대의 남학철씨는 고향에 온 기쁨에 싱글벙글했다.
길림신문
2007-08-30
첫댓글 저기 우에 병사리 들고 달리는거 잼잇겟네요 어릴적에는 했었는데 오랜만에 보네요 ㅎ
올여름에 훈춘에갔었는대 도로에 보도불럭까는냐구 공사가한참진행중이더라구여 내년에 또다시 훈춘들릴건대 그때쯤이면 깔끔해져있갯죠,,,
잘보고 갑니다
참말로 조선족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립습니다 .근 십년이다되여 화면이나마 구경해보네요. 올린화면 참 감사합니다.
잼잇엇겟다 나도보구싶어요 응원이랑하면서 ㅎㅎ
ㅋㅋㅋㅋ 학철아 대단하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