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이미 수상했다. 미국 중서부를 난타한 회오리 돌풍은 1934년 4월과 5월 초에 불어 닥쳤지만 1931년, 1932년, 1933년에 일부 지역은 이미 더운 바람만 불고 비 한 자락 없는 한발로 고통을 받았다. 1934년 5월 9일 북서부 몬태나 주에서 시작한 먼지 폭풍(Dust Bowl)은 수일 동안 중서부 시카고를 휩쓸고 뉴욕과 워싱턴, 더 나아가 대서양 해안까지 날아갔다. 불어 닥치는 먼지의 농도가 너무 심해서 항공기 출발이 취소되었으며 시카고 곡물시장의 밀 가격은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 넓게는 1억 에이커에 이르는 먼지 폭풍 지대에서 미국 농민들이 겪게 되는 30년대의 재난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물론 불운은 농민들에 한정되지 않았다.
1932년 뉴욕 거리에는 따듯한 국 한 그릇을 배급받기 위해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줄을 섰으며 사과 파는 행상인은 수도 없는 듯 했다. 중부의 공업 중심지 시카고도 마찬가지였다. 1929년 10월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으로 은행이 먼저 연쇄 도산을 일으켰고 불황은 건설업, 농업을 무너뜨리고 조선업과 광업, 또 목재업에 타격을 가했다. 자동차와 다른 소비재 시장도 깊은 침체에 빠져 사람들은 집도 일자리도 빵도 잃어갔다. 빙 크로스비가 부르는 노래 “형, 한 푼만 주겠어?” 가 1932년의 히트곡이었다. 어두운 시절은 곧 끝나지 않았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7년 두 번째 임기 취임사에서 “나는 국민의 3분의 1이 집도 초라하고 입을 것도 형편없고 먹을 것도 모자란 것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루즈벨트는 1933년 대공황을 타개할 책임을 지고 당선된 후 “무엇보다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허황되고 비이성적이며 근거 없는 두려움 그 자체”라고 선언하고 대기업, 대자본 위주의 정책을 벗어나는 새 판짜기, 뉴딜(New Deal)을 벌였다. 그런데 정부는 경제 회복과 고용 증대가 우선 급했지만 어려운 시대를 맞아 이 시기를 기록해야 한다는 감각도 보였다. 2차 대전 후 번영 속에서도 미국민이 그 시절을 잊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해서 수집된 자료들 덕분이다. 미국 의회 도서관 소장품인 16만장의 네거티브 필름이 그러한 자료들이다. 그 중에도 도로시아 랭의 사진, [이주민 엄마(Migrant Mother)]는 대공황… 하면 떠오르는 대표작이 되었다. 주름이 파인 어느 여성의 얼굴과 목, 상반신이 전면에 보이고 어린아이들이 그 목과 어깨를 둘러싼 모습이다.
카메라를 메고 실업자들이 늘어선 거리로 나오다
미국 여성들의 사진 활동은 이미 1차 세계대전 종군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도로시아는 처음부터 그러한 계열에 섰던 사진작가는 아니었다. 미국 동부의 뉴저지에서 자란 그는 어머니의 뉴욕 취업으로 처음에는 이스트사이드에서 다음에는 맨해튼에서 학교를 다녔다. 어려서 7살에 소아마비에 걸린 후 내내 오른편 다리를 절었다. 12살에는 아버지가 떠나기도 했다. 도로시아는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모두 혼자 겪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를 마친 후 카메라가 없는 채 사진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는 여러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배웠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사진학과 강의를 들었을 뿐 거의 독학이었다. 하지만 뉴욕은 사진 예술의 선구자인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가 뉴욕 5번가에 사진 화랑을 열고 유럽의 전위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때였다.
20대 후반인 1918년 도로시아는 사진 일을 찾아 친구와 함께 오클라호마를 거쳐 샌프란시스코까지 왔다. 미국 서부의 예술 중심지인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는 후원자를 만나 스튜디오를 차릴 수 있었다. 1920년에는 한참 연상인 화가 메이너드 딕슨과 결혼하였고 두 아들을 두고 “온 힘을 다 해” 초상 사진 작업에 열중했다. 1932년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도 실업과 불황이 닥친 속에 두 사람은 자주 다투었다고 하며, 도로시아가 이 무렵에 만난 사람이 농업과 노동에 관심이 많은 버클리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 폴 테일러였다. 테일러는 캘리포니아의 긴급구호관리 현장 책임자로 북서부에서 몰려드는 이재민들의 생활조건을 조사하는 과제를 맡았다. 하루 6천명의 이재민이 먼지 폭풍을 피해 캘리포니아로 유입되는 1934-5년에 테일러의 강의를 들으러 다닌 도로시아는 그의 조사팀에 합류하여 사진을 찍었으며 1935년 늦게 테일러와 결혼했다.
1 |
2 |
1 1931년 시카고에서 실업자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2 뉴욕 월스트리트에 모인 군중들. 1929년 10월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은 미국 경제를 깊은 침체에 빠지게 했다. |
1933년 [화이트에인젤의 빵 줄서기]가 보여주듯이 랭은 이미 스튜디오 초상화를 벗어났다. 샌프란시스코 거리에 실업자들이 줄을 서고 부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상황에서 랭은 다른 사진작가들처럼 카메라를 메고 거리로 나왔다. 랭은 “내가 나에게 돈을 내는 사람들의 사진만 찍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말했다.
위기의 국민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미국 정부의 프로그램
랭의 이재민 사진들은 뉴딜 정책의 일환인 농장안전운영단(FSA)에 보고되었다. 처음에는 재배치정책으로 출발한 이 프로그램은 소작농과 빈곤한 농민들에게 캠프와 일거리를 제공하고 나아가 경작지와 농장 현대화를 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홍보 책임자, 로이 스트라이커는 농민들이 어떤 상황에 있고 정부는 무슨 일을 하는가를 알리는 데 사진을 사용하기로 했다. 스트라이커는, 이미 1924년에 어린이 노동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던 루이스 하인을 만났었다. 하인의 [작업인Man at Work 1932]은 노동자의 용기, 기술, 도전,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스트라이커의 주도로 농장안전운영단은 1935년, 농촌 미국을 이미지로 기록할 사진작가들을 모았다. 뉴딜 초창기에는 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재크 들라노(Jack Delano), 벤 샤안(Ben Shahn), 도로시아 랭, 남부 농민들의 사진으로 [이제 저명인사들을 찬양하자]는 앨범을 발간하는 워커 에번스(Walker Evans), 마리온 포스트 월콧(Marion Post Wolcott), 아더 로스스테인(Arthur Rothstein), 러셀 리(Russell Lee) 등이 지금까지는 기록되지 않았던 미국인들의 이미지를 수 만 장씩 스트라이커에게 보냈다. 이 사진작가들은 길에서 살았고 하루 4달러의 일당으로 모텔에서 묵었다.
1 |
2 |
1 도로시아 랭의 전기를 다룬 [도로시아 랭: 한계를 넘은 삶]의 표지. <Linda Gordon, October, 2010, Norton & Company>
2 1936년의 도로시아 랭. <출처: Rondal Partridge at en. wikipedia.org> |
랭은 무거운 그라플렉스(Graflex) 카메라와 다른 카메라들을 들고 차로 다녔지만 사진을 위해서는 늘 들판을 걸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 간단히 물었다. “무엇을 따고 있으세요? 여기 얼마나 오래 있었어요? 점심은 언제 하셨지요?” 랭이 “당신 사진을 찍고 싶은데요…”하면 그들은 대체로 “그러죠 뭐” 하고 대답하고 잠시 포즈를 취했다. 하지만 랭은 그런 모습은 모른 척 하면서 “그들이 우리를 잊어버리고 다시 일하러 가기까지 그들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기다렸다.”
1936년 캘리포니아 이재민 촌인 임페리얼 계곡에서 찍은 97장의 사진은 관개용 도랑의 둑에 지은 임시 천막을 보여주었다. 이주민들이 취사와 세탁에 관개용 물을 사용하는 실정도 포착되었다. 구조사무실에 몰려든 군중들의 표정도 살려냈다. 유랑하는 여성들이 청결을 유지하려는 모습은 여러 장의 사진으로 반복 표현되었다. 랭은 임페리얼 사람들에게 공공원조를 얻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낼 사진이라는 설명도 했다. 랭의 동료는 나중에 무엇보다 그 여자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사진을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도로시아 랭이 캘리포니아 임페리얼 계곡에서 찍은 어느 농민의 모습. 1936
그런 조사자의 태도는 유럽의 비엔나 사회학과 연구자들도 보여주었다. 대공황으로 오스트리아를 덮친 실직자들을 조사하고 있는 비엔나 사회학도들도 성급히 설문지를 내밀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석 달을 같은 곳을 찾고 말없이 실직자들을 살피고 나날이 침울해지는 그들의 심정, 점점 힘을 잃어가는 일상사를 기록했다. 도로시아 랭도 하나의 사회과학도였다. 카메라를 닫으면 곧 바로 자동차로 와서 사람들이 해 준 말을 그대로 노트했다. 랭은 어느 날은 이런 구절도 적었다. ”사람은 누구나 서 있을 권리가 있다. 마치 나무가 서 있을 권리가 있듯이.“
콩 따고 당근 캐고 상치 베는 농업노동자들을 기록하다
도로시아 랭의 [이주민 엄마], 1935. <출처: Library of Congress>
1930년대 랭의 사진에는 하루 종일 몸을 구부리고 일하는 농장 일꾼들의 모습이 많다. 그는 플래시 전구 사용을 꺼리기도 했지만 집안에 들어가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유심히 본 것은 당근을 파내고 감자를 캐고 상치를 거두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면화 따는 이들이 17장, 콩 따는 이들이 171장, 홍당무 따는 이들이 54장, 감자 캐는 이들이 32장, 상치를 빼내는 이들이 41장이 되었다.
그들의 얼굴은 해를 가리는 모자로 보이지 않았지만 면화를 따고 홍당무를 집어내고 양배추와 콜리플라워를 베어내는 그들의 몸은 땅의 일부였다. 랭은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 몸에 앵글을 맞추었다. 면화 부대를 끌고 가고, 당근이 가득 든 나무통을 운반하면서 무게 중심을 잡으려 몸을 길게 늘어뜨린 장면을 그렸다.
캘리포니아에는 11000대의 트랙터가 있지만 헐값으로 부릴 흑인이 많은 남부 플랜테이션 농장에는 통틀어 1000대의 트랙터만 있는 시기였다. 무거운 당근 부대를 끌고 와 무게를 재는 관리자를 기다리는 표정은 저울 달기로 노사 양측이 맞서던 시대를 보여주었다. 랭은 멕시코 노동자들, 일본인 소유의 농장에서 상치를 따고 있는 필리핀인들에게도 카메라를 맞추었다. 힘없는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은 끊임없는 그의 주제였다.
이 사진들이 이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이주민 엄마]는 랭의 개인 작품이 아니라 공공 소장품이었지만 주인공은 후에 이 사진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소득이 아무 것도 없다는 불만의의 편지를 보냈다. 사실 시간이 지난 후 기자들이 농장안전 팀 사진들의 몇몇 주인공을 추적했을 때 이들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랭은 일거리가 없는 남자들에게 살림살이 일을 나누자고 하지 않고 물을 얻고 텐트 안을 깨끗이 치우고 아이들의 몸을 청결히 하고 어떻게든 음식을 마련하는 여자들을 기록했다.
농장안전단의 사진은 언론의 관심을 모았다. 한 정치인은 이들 사진으로 정보를 얻을 뿐 아니라 국민이 감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 자체가 인기였다. 1938년 4월 18일 오후 뉴욕 시의 그랜드 센트럴 팰러스 밖에서는 첫 번째 국제사진전시회가 열렸는데 개막 전부터 사진을 관람하러 온 인파가 몰려 저녁때가 되자 7천명이 40센트짜리 입장권을 구입했다. 전시장 본관에는 3천장의 이미지가 걸렸고 수백 개 회사가 최신 사진 기술을 선보이는 부스를 차렸다.
뉴욕 시민들은 사진 자체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지만 대도시 아닌 다른 곳에서 사는 미국인들도 알고 싶어 했다. 대공황은 사진뿐 아니라 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웠다. 1940년에 발간된 로렌스 스보비다의 [먼지의 제국An Empire of Dust]은 독자를 확보했다. 캔자스의 먼지 폭풍을 뚫고 어떻게든 토지를 놓지 않으려는 사람의 체험을 현장에 있는 듯 그렸다. 그는 9년간 먼지와 가뭄, 홍수에 맞서 싸웠으나 한 번 수확을 했을 뿐 모두 실패했다. 이웃들이 떠나고 먼지 폭풍 지대가 밀려오고 정부의 프로젝트는 무망한 것을 보았다. 후에 건기 사이클이 끝나고 토양보존국의 개발로 중서부 농지가 회복되지만 이 주인공은 이제 땅은 사막화 되리라고 비관한다. 헨리 폰다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어 더 유명한 [분노의 포도Grapes of Wrath]도 같은 시기에 발표되었다. 캘리포니아의 이재민 캠프를 그린 존 스타인벡의 이 소설은 오래 지켜온 땅을 잃고 정처 없이 도시로 떠나는 대가족 속에서도 꿋꿋한 엄마, 정의를 찾아 다시금 길을 떠나는 아들을 보여주었다.
영화 [분도의 포도](1940)의 한 장면.
가진 것이 없는 자들, 감옥에 갇힌 자들, 농장노동자들, 집 없는 이들이 미국민으로 인식되는 시기였다. 연방정부는 사진뿐 아니라 2500곳의 벽화로 국민의 일상을 표현했다. 또 아프리카-아메리카인들의 사라져가는 노동요, 뉴멕시코의 스페인 민속음악, 남부와 뉴잉글랜드의 음악도 모아 1940년 4000장의 포크 뮤직 디스크를 소장하게 되었다.
“카메라는 카메라 없이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도구”
랭은 1941년 탁월한 사진작가로 구겐하임 상을 받았다. 그러나 랭은 이 상에 만족하지 않고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 후 새로운 임무를 맡았다. 진주만 사건 3개월 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내 일본인들을 서부 군대 내의 캠프에 재배치하도록 명령했고, 미군 당국은 일본인들의 구역, 프로세싱 센터, 캠프 시설들을 촬영하는 데 랭을 고용했다. [만자나의 재배치 센터](1942) 같은 랭의 사진들은 수용소에 들어온 후 미국 국기에 충성을 맹세하는 일본계 미국 어린이들의 모습, 수용소에 배치된 일본인 할아버지와 손자들의 표정을 전해주었다.
“미국민이 미국을 자부하게 만든” 사진작가 앤셀 애덤스(Ansel Adams)는 1945년 마침내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교에 예술사진과를 개설했고 도로시아 랭을 교수로 초빙했다. 랭은 병으로 중단하기도 했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아일랜드, 아시아, 이집트를 돌면서 계속 사진 에세이를 제작했다. 1965년 식도암으로 사망한 랭의 작품은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1 |
2 |
1 일본 할아버지와 손자 (1942), 도로시아 랭
2 국기에 충성을 맹세하는 일본 어린이들(1942). 도로시아 랭 |
화이트앤젤 급식소의 그 남자(1933), 상추를 수확하는 필리핀인들(1935), 가뭄에 내몰린 오클라호마의 이재민 여자(1936), “다음에는 기차를 이용하세요” 하는 큰 광고판을 지나 로스앤젤레스로 먼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1937), 미시시피의 농장 감독과 그의 일꾼들(1936). “하늘도 땅도 끝이 없는” 남부 텍사스에서 기계가 땅을 갈고 사람은 떠나 비어버린 집(1938), 너무 고된 밭일을 하면 그 일상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설명이 붙은 어린아이의 모습(1938), “여왕만큼 당당하다”는 쨍쨍한 시선의 엘패소 흑인 여성(1938)…
한 연구자는 한결같은 랭의 그 사진들을 살피며 그가 민주주의의, 민주주의를 위한 사진작가였다고 평가했다. 고독했고 말할 수 없는 고뇌 속에 잠겨 있는 그 사람들을 상류층을 찍을 때나 다름없이 기품 있는 개인으로, 시민으로 올려놓은 작가가 도로시아 랭이었다는 설명이다. 랭 자신, 카메라는 카메라 없이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도구라고 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