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涅槃)의 경지(境地)’
제행이 무상이라 시간상 느리고 빠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천지간에 변하지 않는 만물은 없는 것인데,
그 변하는 것이 찰나이기 때문에 능히 그것을 보고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전체로 크게 변하는 양상을 보고
무상을 알아차리고 놀라는 것이 세태인정(世態人情)이 아닌가.
사람도 죽는 것이 죽을 원인이 쌓이고 쌓여서 죽는데
쌓이는 상태는 찰나의 변이요 이동이거늘 그 찰나 찰나에는 감각 하지 못하고,
즉 말하자면 평소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다가 끝내 크게 변하여 죽는 마당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그것을 중대시하여 일대 소동을 일으키는 것이 보통이 아닌가.
인과를 살피는 눈이 무딘 까닭이며 정견(正見), 정사(正思)에 미혹이 크다 할 수밖에 없다.
참으로 멸하는 것만이 찰나가 아니라 생도 또한 찰나이다.
생과 멸(滅)이 순환 반복되면서 진전하는 것은 나나찰나(那那刹那)에 있는 것인데,
만일 멸(滅)만 있고 생이 없어도 우주는 허무에 돌아가는 건 물론이지만
생만 있고 멸(滅)이 없어도 또한 이 같은 것이다.
멸(滅)의 필요는 이미 생이 있었기 때문이니,
생은 멸(滅)의 전제요 멸(滅)은 생의 장본이다.
천하의 일물(一物)이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무상 아님이 없어서 생멸 그 상태이다.
그러나 생멸을 멸(滅)-함으로 얻어지는 초월한 신경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이 적정(寂靜)의 안락경(安樂境)으로 열반의 경지이다.
열반경(涅槃經)에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 그것이다.
적멸은 허망이 아니요, 허망이 아니므로 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생이 본래 진생(眞生)이 아니요 가생(假生)이며,
멸(滅)이 또한 진멸(眞滅)이 아니요 가멸(假滅)이니,
그리하여 생이 영생(永生)이 아니요,
멸(滅) 또한 절멸(絶滅)이 아닌지라 생과 멸(滅)에 집착하지 않고
초월함으로써 불생불멸의 참된 경지에 스스로 안주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소위 열반의 경지이다.
우리는 그런 까닭에 생(生)하였다고 기뻐 날뛰거나 멸하였다고 슬퍼하는
희로애락의 현상에 마음 정할 바를 상실하는 곳에 안심입명(安心立命)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소년에서 노년으로 변하는 끝에 죽음(死, 종합적 변화)으로 변하였다가
죽음에서 생(生) 하는 인연법으로 생멸하는 것이니
생멸도 법이요 적멸도 법이다, 현상도 법이요 본체도 법이다.
가(假)에서 살면서 가(假)를 여의는 모순 없는 생활이 진망불이(眞妄不二)의 경애(境涯)요.
집착 없는 무아의 경(境)으로 필경 우주대(宇宙大)의 인격을 얻을 수 있으려니와
유(有)에 즉 하는 무(無) 무에 즉(卽)하는 유(有),
색공불이(色空不二)의 중도성(中道性) 이상경(理想境)의 ‘진(眞)’을 얻어야 할 것이 아니냐.
다시 말하거니와 있고 없는 것이 별개이면서 그대로 둘이 아닌 하나로 통일하여
다시 그 하나로 통일하여 다시 그 하나에 집착하지 아니하는 곳에 해탈이 있으니,
공도 공해 버리는 속에 창조적 묘유로 총체적 묘유(妙有)로 총체적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 생멸과 적멸의 상으로 인하여 무상이 아님을 체험하여 ‘상(相)’을 얻을 것이요
2. 生과 滅에 着하지 않고 희로(喜怒)를 초월하여 항상 태연하니 ‘樂’이 될 것이요
3. 그 자리는 생사에 해탈되고 망집(妄執)의 小我에서 大自在하니 참 ‘我’가 될 것이요
4. 망집과 번뇌를 여의어 청정한 경지가 될 것이니 ‘정(淨)’이 안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얻어지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은 열반의 경지가 안 될 수 없는 것이다.
감[往]이 따로 있고 옴[來]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감 그대로 옴이 되는 법이다.
고통 속에서 고통을 극복할 것이요, 사바 그대로 정토가 될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요 생사가 곧 열반이다. 생사 그대로의 실체실유(實體實有)가 아니라
초연한 기상으로 임운자재(任運自在) 우주 인류로 공생할 것이요,
탐진치 삼독을 여읜 정신상태로 무아안온(無我安穩)의 심적 상태를 얻으리니
한낱 예지(叡智)의 상태로 무명을 지양 탈각(止揚脫却)하는 갱생(更生)의 원리이다.
백척간두에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생사 초탈의 절대 경, 지혜와 자비를 포함한 절대의 용기로만 얻어지는
경애(境涯)로 유유히 충실(充實)-하는 인생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 추담 스님 - 1974. 03. 10.
※ 추담 스님 (1898년~197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