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힐러리 브래트는 당시 둘도 없는 친구 조지와 함께 에콰도르와 페루의 국경 근처에서 들은 소문을 좇는 젊은 배낭여행객이었다. 그 소문은 페루 안데스 산맥 깊숙이, 고대 잉카 제국의 수도인 쿠스코를 출발해 마추픽추로 이어지는 트레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수 없이 많은 날 길을 잃고, 풀섶을 헤쳐 나아가 두 사람은 마침내 트레일 전모를 밝혀냈다.
이 때 손글씨로 적은 노트북이 영어로 잉카 트레일을 처음 소개한 간행물이 됐고, 지난 5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가이드북 발행사 '브래트 가이드'의 모태가 됐는데 올해 출범 50주년을 맞는다. 1980년 돌연 결혼하겠다며 회사를 떠나는 바람에 브래트는 잉글랜드로 돌아와 이전에 했던 심리치료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 없이 가이드북을 계속 만들어냈다. 좀처럼 가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우간다, 유고슬라비아, 북한, 에리트레아, 마다가스카르 등을 소개하는 책자를 발간하는 데 열심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008년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해 그녀의 관광과 자선에 대한 기여를 치하했다.
그녀는 늘 여행에 진심이었다. 석 달 동안 히치하이킹으로 중동을 횡단했고, 탄자니아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되는 곤경도 치렀다. 이제 팔순이 되는 브래트는 곧 출간되는 책 '위험을 감수하며(Taking the Risk)를 통해 길 위의 모험을 돌아본다. 최근 데본주 자택에서 BBC 와 인터뷰를 갖고 왜 항상 많은 이들이 찾지 않는 곳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장기적으로는 사람들의 버킷 리스트를 계속 확장하는지, 지난 반 세기 여행이 특히 여성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털어놓았다.
무엇이 당신과 조지가 1974년 '브래트 가이드'를 출범시키게 이끌었는지?
출범은 거의 잘못된 단어다. 우리는 1973년에 첫 가이드북을 집필했는데 아마존 지류인 볼리비아의 어느 강 바지선 위에서였다. 책 이름은 '페루와 볼리비아의 고대 길들을 따라 백패킹(Backpacking Along Ancient Ways in Peru and Bolivia'였는데 이듬해 보스턴에 있는 조지의 어머니가 인쇄해줬다. 솔직히 그것을 "출범"이라 부를 수 없는 일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팔렸는데 우리는 그곳에 있지도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남미를 여행 중이었다.
우리가 영국에 돌아왔을 때, 은행 계좌에 680 파운드 밖에 없었다. 당시에 유일하게 가이드북을 발간하던 유명 출판사는 페루 메인스트림 가이드를 출간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보고 페루를 다시 찾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가져온 브로슈어 몇 가지로 책을 쓰면 그만이라고 말해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만약 그런 식으로 출간한다면, 우리 스스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진짜 출발이었다.
무엇이 당신 둘이 가이드를 집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했는지?
회사를 이끄는 내내, 우리 생각에 여행자들이 필요로 하는 가이드를 출간하겠다는 것이 늘 내 목표였다. 우리는 '오, 수익 좀 보겠는데' 하는 생각보다 여전히 그 일을 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다른 그링고들(gringos,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는 히스패닉이나 라티노가 아닌 이들)을 만나고 있고 그들은 우리에게 어디를 가봤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단지 하이킹을 사랑했고 잉카 트레일을 비롯한 새로운 트레일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해서 사람들이 '당신이 진짜 이것에 대해 써야 해요'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이런 것이 책으로 발전했다. 첫 번째 책은 잘못 인쇄된 것들로 가득했고, 진짜 아주 끔찍해 보였는데 그 정보는 괜찮았다.
50년 전 첫 책을 낸 이후 브래트는 이들 오지 여행지를 다루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당신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가이드는 어떤 책인가?
가장 의미있는 것은 르완다였다. 첫 판 저자의 친구가 대량학살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친구의 가족을 찾으러 그곳에 가 가족을 찾는 데 성공했지만 그만 그 나라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그녀는 1998년에 가이드북을 썼는데 대학살 4년 뒤였다. 그 나라에서 일어난 일은 너무 끔찍해 그 나라를 운영하는 이들은 관광객들이 다시 찾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니스 부스는 여행사들이 감히 꿈도 못 꾼 일을 해냈다. 외람될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그녀의 일은 그 나라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왔다. 르완다 대통령이 그녀를 만나길 청할 정도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가 베트남 가이드북을 처음 집필한 것도 의미가 상당했다. 모잠비크 가이드북을 처음 냈다. 우리가 지금 발간하고 있는 가이드북의 절반가량은 우리가 그 여행지를 처음 다룬 것이다.
알바니아 역시 재미있는 곳이었다. 처음 가이드북을 냈을 때 그곳은 아직도 공산주의 국가였다. 북한과 많이 비슷하게 조직된 투어를 통해서만 그곳에 갈 수 있었다. (우리는 북한과 이라크, 이란에 대한 가이드북을 처음 펴냈다) 하지만 알바니아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몇백명만이 첫 판을 샀는데 두 번째 판은 수천명으로 늘어났고, 계속 그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예사롭지 않은" 장소들은 꾸준히 늘고 있다.
1970년대와 80년대 관광객들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같은 곳들에 가보고 싶어한다는것을 알았을텐데도 무엇이 당신과 조지를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로 이끌게 했는지?
개척자적인 면모였다고 말하겠다. 그게 나였다. 조지와 내가 결별한 뒤였다. 내 힘으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태국처럼 이미 가이드북이 있는 나라들에 대해 다른 가이드북을 펴내는 것이 가능한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작은 출판사가 대형 출판사들과 경쟁하는 일은 힘들었다. 상식에 속하는 일인데 당신이 새로운 나라를 소개한다면 사람들은 그곳에 가보고 싶어 사본다. 반면, 익숙한 나라를 소개한다면 컬러 사진 몇 장만 건지고 나머지는 진정 원치 않는 일이라고 미뤄놓을 것이다.
당신이 다룬 여행지들은 스스로 흥미를 느낀 곳이었는가?
때때로 내가 주도권을 쥐긴 하지만, 대체로 누군가 우리에게 "전쟁도 끝났는데 왜 너희는 베트남 가이드북을 안 펴내는 거지, 나 거기 가봤는데 그 문화를 사랑해"라고 적어 보내기 때문이다. 2년 뒤 우리의 첫 베트남 가이드북이 출간됐다. 우리 저자들은 그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에게 가이드북을) 던져주는 이들은 그 문화에 대해 열정적이어야 한다. 열정에 이끌리는 일이며 열정주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지인에게만 알려졌던 마추픽추와 잉카 트레일 같은 곳을 버킷 리스트로 만든 것에 대한 당신의 느낌은?
좋은 질문이다. 나는 아주 종종 "이런 곳들을 망치고 있는데 괜찮아?" 자문하곤 한다. 50년이 흘러 나는 잉카 트레일과 몇몇 다른 트레일들을 지도 위에 표시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출판인으로나 작가로서 실제로 아주 쉽게 망가지기 때문에 취약한 원주민들이 사는 이곳들을 소개하는 일이 매우 조심스러워진다.
15년 동안 페루 여행을 선도해 왔는데 부주의한 관광이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익히 목격하고 있다. 우리는 항상 책임있는 여행, 특히 현지인들과 어떻게 접촉하는 것이 최선일에 대해 얘기해 왔다. 당신도 알듯이 그들과 교류하라. 그들에게 물건만 주지는 말라, 그래서 많은 (원주민 사회)는 상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고, 나는 그것이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생은 모든 여행으로부터 혜택을 받는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좋아하는 나라 마다가스카르에 대해 많이 쓰기도 했는데 여우원숭이(lemur)와 다른 야생동물들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부터 많은 이득을 얻는다. 관광객들이 그곳에 가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국립공원들은 특별보호구역 같은 것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나는 관광에 의해 아주 빠르게 영향받는 사람들과 대체로 이득을 보는 야생동물들을 따로 생각한다.
당신은 20대 초반에 석 달 동안 중동을 히치하이킹으로 한 번도 중단하지 않고 횡단했다. 그렇게도 히치하이킹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때의 경험은 내 안의 모험심이 불꽃을 튀게 만든 결정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히치하이크를 한다. 82세였던 지난해에도 히치하이킹을 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가장 놀라운 방법이다. 조지와 아메리카를 히치하이킹한 것은 우리의 최고 경험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들은 무척 친절했으며 재미있었으며 관대했다. 그래, 나쁜 일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내겐 일어나지 않았다. 중동에서의 경험은 호색한들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가르쳐줬다. 하지만 모든 종류의 예측하지 못한 상황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대단한 삶의 경험을 제공했다.
지난해 독일에서 7마일을 걸은 뒤 다시 히치하이크를 했다. 트레일의 나머지는 5마일 정도였는데 내 생각에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몇 살이나 되는지 알아보고 차가 설지 어떨지 알 수 없었는데 사랑스러운 남성이 나를 게스트하우스까지 태워다줬다. 맞다 내 생각에 여전히 먹힌다. 나는 여전히 사랑하며 굳게 믿고 있다.
지난 50년 여행은 어떻게 바뀌었나?
오, 엄청 바뀌었다. 인터넷 덕에 많이 바뀌었고, 재미있어졌다. 4~5년 전 출판계 소식지에는 "가이드북의 종말" 운운하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모든 사람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구하는데 누가 가이드북을 찾겠는가? 여행 가이드는 정말로 취약한 존재였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을 수 없는 장소들에 집중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겪지 않았다. 우리는 현재 200종 이상의 가이드북을 펴냈는데 아마도 절반은 인터넷에서 이렇게 북한 같은 곳을 찾는 방법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내가 처음부터 갖고 있던 이론은 새로운 여행지를 열어젖히는 일은 이미 출간된 것들로 수지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일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이며 종국에는 우리에게 혜택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이렇게 될줄 몰랐는데 우리는 이제 스리랑카 같은 곳에 대해 조금 더 메인스트림 책들을 출간할 여력이 생겼다.
또 항공료가 싸졌다. 1964년 미국을 처음 찾았을 때 항공료를 낼 여력이 안돼 배를 타고 갔다. 그때 영국으로 돌아갈 배편 삯도 없었다. 지금은 확 달라졌다. 70년대와 80년대만 해도 미국이나 북극, 남극에서 휴가를 보낼 꿈도 꾸지 못했다. 그곳들은 상상 너머의 곳이었다. 세상은 더 작아졌고 여행객들은 넘쳐난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정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더 나은 책을 만들어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50년 여성들의 여행은 어떻게 바뀌었나?
흥미롭다. 우리는 지난 25년 동안 책으로 다루지 않은 최고의 여행지를 찾고, 새로운 저자를 발굴하기 위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은 기준을 세워 운영하고 있는 여행자 수기 경진대회 travel writing competition 심사를 방금 마쳤다. 심사에 올라온 거의 모두가 여성이었다. 익명으로 심사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여성들은 거의 모두 최고 점수를 얻었다.
올해 주제는 "위험을 감수하라"였는데 나는 여성들이 해낸 믿을 수 없는 모험적인 여행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생각에 여성들은 항상 모험적으로 여행했다. 하지만 아마도 지금은 여성들이 집안과 아이들에게 덜 묶여 있어서 쉬워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여성들은 독보적으로 좋은 여행자들이다. 내 말뜻은, 남자들도 좋지만 여자들은 훨씬 훨씬 좋은 여행자들이란 것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취약점을 활용할줄 알고 그것들이 잘 보살필 수 있도록 관리하는 적극성과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여러분이 세상을 떠난 위대한 아일랜드 여행 작가 더블라 머피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녀는 믿기지 않을 만큼 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말하길, '나는 용감하지 않다, 다만 두려워하지 않을 따름'이라고 했다.
오늘날 여성 여행자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겠는가?
위험을 감수하라. 최고의 조언은 "두려움을 느끼거든 어떻게든 해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 걱정이 많다. 나도 늘 여행 전 신경이 쓰인다. 공항이 싫고 뭔가 잃어버릴까봐 걱정한다. 물리적 위험에 대해선 그리 걱정하지 않지만 사회적 위험에 대해선 걱정한다. 하지만 해보면 당신의 열정은 두려움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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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이 흘렀는데 가이드북 출판인과 저자로서 어떤 점을 가장 큰 성취로 여기는가?
계속하는 일이다. 내 말뜻은, 조지가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예상하지 못한 채 스스로 일해야 했다. 포기할 수도 있었다. 나는 과거 하던 일이 있었고, 그때만 해도 책을 많이 내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예전 일을 다시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가장 커다란 성취는 끈질김과 지속성이었다. 운 좋게도 내가 하는 일에 열정이 있었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정말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