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관중(라쇼드퐁
대표)
(글·사진_ 서정욱)
내게 있어‘시계’는 또 하나의 소통입니다
한국인 워치 메이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김관중은 우리나라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시계(時計)장인이다. 외식업에 종사하셨던 아버지의 성실함 덕에 부족함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 시대의 가장들이 그러하듯이 김 대표의 아버지 역시 가족들을 위해“간과 쓸개는 집에 빼놓고, 이따 다녀와서 다시 넣으마”라는 말씀을 습관적으로 할 정도로 헌신적인 삶을 사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의지를 보아오며 성장한 김대표는 가업을 키워서 효도하겠다는 일념으로 고려대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던 외식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신념은 취업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삼성에 입사한 김관중 대표는 삼성시계‘마케팅부서’에 부서배치를 받았는데, 어린 시절부터 아버님이 하시던 식당을 통해 장사하는 법을 보며 커왔고, 경제학을 전공한 김대표에게는 어쩌면 운명적인 업무배치였는지도 모른다.
1994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199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밝힌 자신의 경영구상을 통해,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다 바꿔라”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게 된다.
당시“전 계열사에 명품을 하나씩 만들어라”라는 회장의 지시에 따라, 전자에서는‘名品TV’, 제일모직에서는‘120수 원단’을 만들던 때였는데, 제가 근무했던 삼성시계에서는“못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도 기술도 없습니다.”라고 그만 포기를 선언했었습니다.
Q. 시계장인(Watch Maker) 김관중에게, 시계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나요?”
A. 소통(Communication)이 아닐까 싶어요.
Q. 시계와 소통을 하신다고요?
당시 삼성시계는 일본 세이코의 무브먼트를 만들어 납품을 했었는데, 이게 1000분의 1밀리미터의 정밀기계이면서 설비투자를 통해 대량으로 만들어야만 생산원가가 떨어지는 구조였기 때문에, 회사가 생산하여 세이코에 납품을 하던 무브먼트에서는 항상 적자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건희 회장이 대단한 시계광이어서 독자적인 무브먼트 개발 및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일념으로 삼성전자 산하의 시계사업부를 만들었다가 나중에 독립시킨 것이‘삼성시계’가 된 것이었죠. 결과적으로 삼성시계의 ‘카파(kappa), 돌체, 론진’, 오리엔트의‘갤럭시’, 아남의‘카리타스’, 한독의‘오딘’등 국내 시계 메이커들이 엄청나게 돈을 벌어 들이게 되고, 이후 우리나라에는 500여개의 크고 작은 시계 생산업체가 난립하게 됩니다. 사실 이를 촉발한 계기가 당시 한 방송사의“추적 60분”이라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당시 한국시장에서 예물로 값비싸게 유통되던 시계인‘롤렉스’, ‘오메가’등이 대부분‘이미테이션(짝퉁)’이라는 폭로보도를 했고, 이때부터 국내 소비자들이 국산 시계를 찾기 시작한 계기가 된 거죠. 한국의 시계사업은 이렇게 황금기를 맞았습니다. 이렇게 시계산업의 황금기가 오기 전 삼성시계는 이른바‘명품’ 을 만들어 내라는 그룹의 지시를 받은 상태였고, “역사와 기술이 없으면 배워 와서라도 만들어라”는 특명을 받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기술을 배워올 용사(?)를 뽑게 되는데, 그 뽑기에 그만 덜컥 제가 당첨이 된 겁니다. 저도 우선“안 해~!”를 선언했죠. 그도 그럴 것이, 식당사업을 보며 자랐고, 경제학을 전공해 ‘마케팅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던 저에게 갑자기“시계제조기술을 배워와라!”고 등 떠밀리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상부에서 저를 지목한 이유가“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와“용감하다”는 정도였는데, 상부의 지시이다 보니, 상황은 이미 제 의지와 관계없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생존영어랑 강의영어는 다르지 말입니다. 저는 그 정도 영어도 못하고, 게다가…… 시계를 만들라는……”“됐고! 6개월 미국 영어연수! 끝나면 바로 스위스 시계학교! 기부입학! 월급! 생활비 받고 용돈까지! 오케이?”
그리고는 얼마 후, 저는 첫 목적지에 던져졌습니다. 시애틀~! 혹자는 이 글을 읽으시면서“부럽다”고 하실 수도 있겠으나, 제 의지나 준비 없이 맞이한 외국에서의“학생 어게인 시즌 1”의 생활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시애틀 스타벅스 1호점의 커피 맛도, 제겐 형편 없었고요. 어쨌거나 며칠이 지나 정신을 차리고 제 상황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혼자 와서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6개월 코스시험을 수료하면 되는 거고, 월급도 생활비도 게다가 용돈까지(매일 60불) 나오는데, 까짓 거……” 그렇게 마음을 먹고 덤벼드니 6개월 어학연수 시험과정을 4개월에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미 6개월 선 지불해놓은 학비와 숙소 비…… 그래서 2개월은 신나는 현장학습으로 어학연수를 마무리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엄습해오는“학생 어게인 시즌 2”…이번에는 시즌 1과는 달리 차원이 조금 달랐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이번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스위스 뇌샤텔이라는 낯선 도시에 다시금 던져져 있었습니다. 이전의 어학연수와는 전혀 다른, ‘시계 장인들의 세계’, 게다가 스위스에 있는 네 곳의 시계학교 중, 세 곳은 프랑스어 교육과정이고, 오직 한 곳만 영어로 가르치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관련 대학 졸업학위 및 최소 3년의 시계생산 현장경험을 가져야만 겨우“입학”이 허락되는 조건…세계 최고 수준의 스위스‘보스텝(Wostep) 시계 학교’에 달랑‘6개월 영어 어학연수’와‘삼성시계에서의 상품개발’이라는 경력만을 장착하고, 입학을 시켜 달라고“떼를 쓰게”된 것입니다. Wostep 측에서는“3주간 지켜보겠다.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면 퇴출이다. 만약에 퇴출되면 입학금 등에 대한 환불은 없다”
아직도 기억하는 첫 과제가‘오메가1012’라는 시계를 3시간 안에 분해해서 재조립하는 것이었는데, 동기생들은 이 과제를 시간 안에 완벽히 해냈지만, 저는 3시간이 아닌 3일만에 겨우 겨우 해 낼 수 있었습니다. 시계장인을 뜻하는‘워치 메이커’로서의 손끝 기술이 전무했던 것이었죠. 동기생들은 이론은 물론 모두 풍부한 현장경험을 지닌 1급 기술자들이었기에 저는 우선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있어‘보스텝(Wostep) 시계학교’의 수업방식은 한마디로‘혹독함’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학교 설립자이기도 한 교장 ‘시모닌’은 그 악명을 떨쳤는데, 수업 중에 학생의 작업대에 먼지라도 보이면 가차없이 작업대를 손을 쓸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작업대에는 맨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수천 가지의 부속들이 정리되어 있는데, 작업에 몰두하다가 이런 일을 당하는 입장에선 수습조차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교장‘시모닌’은 냉정하게 말합니다.
“시계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수많은 부속물의 집합체다. 먼지가 끼어들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작업대의 먼지를 없애는 것은 워치 메이커의 기본이고, 기본이 지켜지지 않은 시계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원칙과 혹독함을 적응하고 이겨내며 이를 악물고 버틴 끝에, 동기들 사이에서 꼴찌로 시작한 제가 졸업할 때는 3등으로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시모닌’교장은 제게 악수를 청하며, “지금까지 관심을 가지고 당신을 지켜보았습니다. 당신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말을 건넸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아이글래스를 쓰고 시계를 들여다 본 탓에 한 쪽 눈이 비정상적으로 커져 있고 등 또한 곱사등처럼 구부정해져 버린 50대의 시계장인의 그 한마디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 날, ‘론진’이라는 회사의 대형 자동화 설비를 견학하던 중, 우리 앞에서 처음으로 눈가가 촉촉히 젖어 드는 모습을 보이던 ‘시모닌’교장.
“장인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던‘혼이 담긴 시계’가 점점 사라져가고, 이제는 기계가 대량으로 찍어내는‘기계시계’가 그 자리를 차갑게 메워가고 있다.”
진정한 스위스인 시계 장인으로써의 실력과 열정을 가졌던‘시모닌’교장에 대한 존경과, 그가 운영하는‘보스텝(Wostep) 시계학교’의 첫 한국인 졸업생으로 4개의 자격증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저는 그룹에서 오매불망하던‘명품 무브먼트’를 개발하기 위해, ‘한국인 워치 메이커’로써 삼성시계 상품개발팀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보스텝(Wostep) 시계학교’의 명성은 세계적이어서, 졸업시점에 저는‘미국 롤렉스’에서 연봉 9만 달러(96년 말 기준)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되었는데, 얼마 전 국내 복귀를 시도했던, 전 축구 국가대표 모 선수처럼 옵션이 걸려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판단에 따라 이직을 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가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보낸 터라 회사에서도 옵션을 걸 겨를도 없었고, 저로써는 당연히 회사로 돌아와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당시는, 정밀기계 기술인 시계기술로 인공위성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던 시기여서 무브먼트 및 정밀기계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회사가 공격적인 투자를 하던 그 시점에서 얼마 후, 한국에 IMF가 터지게 됩니다. 정부차원에서 삼성에게 계열사 중 다섯 개를 퇴출하라고 요청하게 되고, 삼성시계는 그 중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 결국 저는 본의 아니게 삼성시계와 작별을 고하게 되고, ‘까르띠에 테크니컬 매니저’로 이직을 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 중국으로 이주, ‘휴대폰 부품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초기에 만들어진 휴대폰은 대부분 플라스틱 재질로 제작되었으나, 이후 카메라/프레임 등 다양한 부분에 금속부품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여러 가지 정밀부품들이 금속으로 제작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밀금속 부품 제조기술이 사실상 시계 제조기술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앞서 언급했던 500여개의 국내 시계 메이커들이 이런 휴대폰 부품 조달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저도 중국 칭다오 소재 한국 핸드폰 공장에 부품을 납품하는 1차 벤더회사의 총경리로 새로운 경력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중국에서 10년, 베트남에서 3년을 하다가, 가족들과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의‘라쇼드퐁’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스위스‘보스텝(Wostep) 시계학교’에 다니던 시기부터, 항상 가슴 속에는‘환갑이 되면 한국에서 다시 시계사업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시모닌’교장을 흠모하는 마음과, 제가 시계를 사랑하는 마음이 일찍부터 이런 형태로 자리를 잡았던 모양입니다. 저는‘혼을 담은 시계’의 가치에 걸맞는 이론과 장비와 기술을 가지고, 이를 다루는 교육을 받아온‘워치 메이커’로써, 제 앞에 놓여지는 시계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엔진오일은 여느 카센터에서도 교체할 수 있지만, 명품 자동차의 미세한 고장과 수리를 함부로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이치와 같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혼을 담은 시계’가 주인의 관리 소홀로 인해 오일교환의 시기를 놓치고, 내부가 마모되고 부식되어서는 그 본래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운명을 다 합니다. 자동차보다 더 정교하고 값진 정밀기계도 당연히 관리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그 관리의 필요성이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기에,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혼을 담은 시계’는 그저 한낱‘비쌌던 시계’로 치부되곤 합니다. 남자가 몸에 지니는 시계는 그 미적이나 경제적 가치로 주인을 빛나게 합니다. 그리고 주인과 함께 이야기를 쌓아왔죠. 추억이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 추억을 꺼내어, ‘워치 메이커’와‘주인’은 또 다른 소통을 하게 됩니다. ‘워치 메이커’의 소통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