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 88 - 초오유, 소수 정예에 무릎 꿇다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한 헤르베르트 티히(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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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01. 05:02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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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탐험사 100장면
초오유, 소수 정예에 무릎 꿇다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한 헤르베르트 티히(1954년)
요약 초오유는 8,153m로 히말라야에서 여덟 번째로 높은 산이다. 1954년 오스트리아 산악인 단 세 사람에게 정복되었는데, 주인공은 헤르베르트 티히와 그의 친구들 두 명이었다. 자급자족하는 알파인 스타일로 등산하던 세 사람은 빠르고 용감한 등산을 통해 오스트리아 국기를 꽂았다.
상처뿐인 영광
초오유 정상에 올라선 헤르베르트 티히(왼쪽)와 셰르파 파상. 티히는 바람에 날리는 텐트 자락을 맨손으로 잡다가 2~3분 사이에 동상에 걸려 손이 퉁퉁 붓는 바람에 아주 큰 장갑을 꼈다. 그는 나중에 두 팔을 잘랐다.
초오유(Cho Oyu)는 8,153m 히말라야에서 여덟 번째로 높은 산이다. 초모룽마 서쪽에 우뚝 솟은 까닭으로 일찍부터 알려졌다. 초오유라는 이름이 밝혀진 것도 1921년 영국대가 초모룽마에 처음 도전할 때부터였다.
티베트 말로 '초'는 신성하다는 뜻이고, '유'는 터키 옥(玉)을 말한다. '초오유'란 아마도 '초모유'라는 말이 잘못 전해진 듯하다. 초모유라면 '보석같이 고귀한 여신이 사는 산'이라는 뜻이 된다.
초오유가 인간으로부터 첫 도전을 받은 때는 1952년이다. 에릭 십턴이 이끄는 영국대가 다음 해에 있을 초모룽마 10차 도전을 준비하면서 훈련과 새 장비 실험을 겸해 이 산을 찾았다. 그들은 6,800m까지 올랐다가 단념했다.
1954년 초오유는 뜻밖에도 쉽게 인간에게 정상을 허락했다. 초오유라는 이름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 않는 까닭은, 여러 번 실패한 끝에 성공했다거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거나 하는 얘깃거리가 없는 탓일 것이다. 초오유는 오스트리아 산악인 단 세 사람에게 정복되었다.
행운의 주인공은 그 때 마흔두 살이던 헤르베르트 티히였다. 그는 많은 인원과 장비를 갖추지 않더라도 산을 잘 알고 산 사정에 따르겠다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얼마든지 산을 오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신념대로 뜻맞는 친구 두 사람(제프 외힐러, H. 호이베르거)과 단촐하게 이 거봉에 도전했다.
1954년 9얼 2일 티히 · 외힐러 · 호이베르거 세 사람이 초오유로 향했을 때 그들의 짐은 겨우 1톤이었다. 물론 산소통도 없었고, 먹을 것도 될 수 있으면 히말라야에서 네팔 사람들이 먹는 것을 구하기로 했다. 그들은 철저히 히말라야 사람이 되어 산에 올랐다.
9월 20일, 티히 일행은 네팔의 한 마을에 가져간 짐의 절반을 풀어놓았다. 만약 초오유 등반에 실패하면 다른 봉우리에 도전하기 위함이었다. 9월 23일부터 산에 오르기 시작한 세 사람은 5,550m 높이에 베이스 캠프를 세웠다.
9월 29일 제1 캠프(5,800m)를 시작으로 하여 잇달아 제2 캠프(6,200m) 제3 캠프(6,600m)가 세워졌다. 제3 캠프는 2년 전 영국대가 돌아선 얼음 폭포 근처였다. 10월 5일, 그들은 등반을 시작한 지 보름 만에 벌써 7,000m에 제4 캠프를 세웠다. 모든 일이 이상하리만큼 척척 들어맞고 빠르게 진전되었다.
티히는 하룻밤 푹 쉬면 다음날 바로 정상을 밟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8,000m 봉우리가 이렇게 쉽다니'. 그는 벅찬 기대와 자신감에 몹시 들떴다. 그러나 히말라야는 역시 히말라야였다. 한밤중이 되자 느닷없이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람은 텐트 기둥을 부러뜨리고 텐트 줄까지 모두 끊었다.
그것은 저 무시무시한 '악마의 바람' 히말라야의 제트 기류(jet stream)였다. 제트 기류란, 너비 수백m에 길이 수백~수천 km인 바람의 세력으로 초속 30m나 되는 강풍이다. 이 바람은 빠르기가 자주 변해 종잡기조차 어렵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지만 하늘은 온통 바람으로 가득찼다. 별안간 텐트가 펄럭이며 바람에 날려갈 것 같았다. 티히가 깜짝 놀라 텐트를 덮쳤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는데,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어서 미처 장갑을 낄 틈도 없이 맨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 짧은 2~3분 동안에 벌써 티히의 손에서 피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
손끝이 점점 마비되어 가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물러서기로 했다. 제1 캠프까지 물러선 일행은 바람이 멎기를 기다렸다. 티히의 손은 점점 더 얼어들어 갔지만, 병원이 있는 카트만두까지는 석 주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였다. 병원에 가도 상처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 손을 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그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그곳에서는 최소한 상처가 곪을 염려는 없었다.
그들이 제1 캠프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을 때 뜻밖의 일이 생겼다. 프랑스 · 스위스 합동 탐험대가 초오유를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티히 일행에게 함께 등반하자고 권했다.
티히는 그 제의를 거절하고 서둘러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10월 15일 그들은 눈속에 굴을 파고 사흘간 바람을 피했다. 식량은 다 떨어져 가고 경쟁자들은 바짝 뒤를 쫓고 있다. 동상은 점점 심해져 두 팔을 잘라야만 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티히는 몹시 애가 탔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10월 18일 날이 밝았다. 티히는 죽음을 무릅쓰고 눈구덩이를 나섰다. 죽어도 정상에 올라 죽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 바로 그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먹을 것을 가질러 마을로 내려보낸 셰르파 파상이 죽기살기로 서둘러 예정보다 빨리 돌아온 것이다.
용기를 얻은 일행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숨가쁘게 제4 캠프까지 올라가 티히 일행은 하룻밤 그곳에서 묵은 뒤 바로 정상 공격에 나섰다.
1954년 10월 19일 오전 6시. 티히 · 외힐러 · 파상 세 사람이 제4 캠프를 나섰다. 티히는 동상에 걸린 손을 전혀 쓸 수 없었으므로, 바위 벽을 오를 때는 파상이 그를 베르그 자일로 묶어서 끌어올렸다.
그 날 오후 3시. 9시간 사투를 벌인 끝에 그들은 정상에 섰다. 겨우 사흘 만에 4,000m를 오른 것이다. 이렇게 빠르고 용감한 등산은 일찍이 없었다.
바람은 뜻밖에 약했다. 드높은 하늘 아래 피켈에 매달린 네팔 · 인도 · 오스트리아 국기들이 상쾌하게 펄럭였다. 티히와 파상이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사이 외힐러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작은 십자가를 눈 위에 놓았다. 그들은 거기서 30분쯤 머무르다 산을 내려왔다.
티히 일행은 정상을 정복했지만 그들을 뒤쫓던 스위스 · 프랑스대는 제트 기류에 휘말려 7,600m에서 물러서고 말았다. 그 뒤로 1959년 여자 여덟 사람이 초오유에 도전했다가 대원 두 사람과 셰르파 두 사람이 실종되었다. 1964년의 독일 원정대도 비록 성공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고산병으로 잃고 말았다.
▼ 우리나라의 기록은 * 1992년 / 남선우 · 김영태 초등 * 1996년 / 변미정(가정 주부) 무산소 등정 [네이버 지식백과] 초오유, 소수 정예에 무릎 꿇다 -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한 헤르베르트 티히(1954년) (세계 탐험사 100장면, 2002.7.18., 이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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