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연휴 사흘 내내 비가 쏟아졌다.
수덕사.
예전에 왔을 때 절이 지나치게 호화롭다는 첫인상을 받았는데 이제 와 보니 꼭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얼마 전부터 사찰의 입장료가 폐지되었다. 입장료가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었지만 비로소 자유에의 원력이 이루어진 듯 마음이 가볍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대중가요로 인해 비구니사찰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수덕사는 비구니 절이 아니다.
돈도 싫고 사랑도 부질없소
모던걸(Modern girl)로 불리며 자유분방한 사고와 행각으로 많은 지탄을 받는 한편 일각에선 시대의 선각자라는 호의를 더불어 안았던 신여성.
타의에 의한 개화로 인한 이런 물결은 한때 큰 사회적 문화적 조류였다. 김활란 나혜석 김일엽 윤심덕 등은 그중에서도 우리가 잘 아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조류의 한 흐름을 탈 수 있었던 건 개화였다. 대개 고리타분한 조선을 부정하고 세련되고 고상해 보이는 일본을 동경했던. 친일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부류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불행한 세대였다고 일말의 동정을 보낼 수도 있다.
수덕사는 뜻하지 않게 이러한 신여성과 아울러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 듯한 느낌이다.
비구니선원인 견성암이 있었고 실제로 나혜석과 김일엽이 이곳과 깊은 인연을 맺고 일생을 마치기도 했다.
단지 새로운 마인드와 과거의 사고를 부정하는 것으로 개화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다. 일부 천박한 사람들이 마치 문란한 이성행각을 자유분방한 연애로 착각하고는 이혼을 훈장처럼 달고(이건 이문열의 표현이다) 버젓이 사회의 지도자인 줄로 아는 병폐를 낳기도 한다.
동경유학 중에 만나 결혼한 남편과 이혼하고 수덕사 견성암에 와서 출가를 한 김일엽이나 자자한 염문을 뿌리면서 세간의 화제를 몰고 다녔던 나혜석이 사랑에 상처받고 안식처로 찾아왔던 이야기. 또 이들과 교분을 맺은 화가 이응노와 그의 부인들 이야기까지.
우리나라 최고 고승인 경허와 만공 스님이 수도정진하고 입적한 도량인데다 그 외 유명인사들에 얽힌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수덕사, 그리고 수덕여관.
김일엽은 엄마를 찾아 바다를 건너온 아들을 한번도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글쎄다. 가장 원초적인 자식과의 사랑을 부정하면서 더 높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부처를 향한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혜석도 이곳에서 귀의를 하려 했다 한다. 그러나 만공 스님의 강렬한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중질을 하기엔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애정이 넘친다는 거였다. 에미에게 버림 받은 일엽의 아들을 대신 엄마처럼 보듬어 주며 날마다 젖가슴을 내주었다고 하니 만공 스님의 지감이 옳긴 옳았다.
비, 비
또
비...
단청 없는 대웅전.
그 소박함이 좋다.
옛 수덕여관.
나는 이곳에 얽힌 여인들 중에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이응노의 부인인 박귀희 여사라고 본다.
이응노가 인수한 수덕여관은 부인 박귀희 여사가 운영했다. 화가야 늘 그림에만 빠져 있으니 경제관념이란 게 있을 리 없다. 화가가 아주 어린 여제자를 사랑하고 더불어 프랑스로 가 버린 뒤에도 박귀희 여사는 묵묵히 인내하며 기약도 없는 남편을 기다렸다. 이응노가 동백림사건으로 투옥된 뒤에도 변함없는 애정으로 옥바라지를 했다. 혹자는 이런 순정적 여인을 비난할지 모르나 숭고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결국 세월이 흐르고 나면 강렬했던 열정은 사라지고 말며 지극하고 숭고한 사랑은 영원히 남는 것이다. 우리에게 박귀희 여사는 그렇게 고귀한 여인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그토록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남편의 사망 후에도 여사는 오랜 인고의 세월을 혼자 견디었다.
여사가 돌아가시고 난 후 수덕여관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방치되어 있다가 나중에야 수덕사에서 관리를 위임받아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환희대.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대중가요로 인해 비구니사찰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수덕사는 비구니 절이 아니다.
말사인 견성암이 비구니 암자였다. 지금은 환희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견성암은 지근거리로 옮겼다.
김일엽이 이곳에서 수행하며 수계를 받았다. 견성암 최초의 비구니라 한다.
김일엽은 목사의 딸이었다. <수덕사의 여승>을 부른 가수 송춘희도 원래는 기독교인이었다가 노래의 인연으로 개종했다 한다.
사람의 인생이란 ‘운명’이라는 단어 아니면 헤아릴 길이 없다.
송춘희의 법명은 백련화이고 지금껏 백련장학회를 이끌어오면서 회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수덕사의 여승> 노래에 한때 불교와 비구니를 왜곡하고 훼손했다고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여승이 법당에 촛불을 켜고 앉아 속세의 사랑에 홀로 운다는 내용의 통속적인 노랫말이다.
더구나 수덕사는 여승의 절도 아니므로.
이곳이 견성암
명색은 암자인데 이렇게 규모가 큰 암자라니. 암자라기 보다는 선원이다. 너무 호화롭다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다.
누구에게나 열린 곳이지만 비구니선원이라 해서 선뜻 들어가지지는 않는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연등을 걸 줄을 맨 듯한데 텅 비었다.
속된 말로 대목 장사는 망했다, 라고 하면 불경스러운가.신성훼손인가.
비 비
또
비...
유명 사찰지구에서 늘 보게 되는 풍경들 .
수덕사 앞도 역시 도심을 방불케 하는 번화가다.
늘 못마땅한 게 있다.
이런 데서 꼭 고기나 술장사를 해야 할까.
절 때문에 먹고 살면서 불도를 무시하는 건 경우가 아님을 넘어 신성모독이 아닌가.
베르디 : 운명의 힘 (영화 마농의 샘 중에서)
첫댓글 새벽에 읽으니 각별하네요
글이 참좋이요
새벽에 읽어서인지 그시절로 돌아간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18세 소녀였을 시절,
여름성경학교를 끝내고
주관했던 선생님 역할을 했던
10대후반,20대초 청년들이 연포해수욕장으로 수련회를
떠났답니다.
수박 까지 싸 짊어지고,ㅋ
청빈한 담임목사 와는 달리
부르조아 기질 많고
그림을 그려 매력 쩔던 젊은 목사
사모가 기획리딩을 한 여행였는데,
이곳 수덕사에 얽힌 사연들을
얘기해주며 절까지 안내 했지요. 아직도 견성암에 드리워졌던 묘한 기운,나의 감성을 깨워준 삶의 여러 의미가
되어줬던곳,소백산행을 앞두고
잠이 안 오던차 ,덕분에 추억여행속
그 많던 교회오빠는
다 어디가고 추억만 흩뿌린 밤을 지새웠답니다,ㅋ
참 예쁜 젊은 날의 추억여행
귀한글 늘 감사히 읽으며 못내 채우지 못하는 내면공부로도
대체를 합니다.ㅎ~^^
로페즈님 댓글을 읽고 미소가 지어집니다
예쁘고 천진했던 소녀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
지금은 다 할매 할배가 되었지만 모두에게 그런 시절들이 있었지요
교회오빠 대신 절오빠는 어때요?
@설리 지금은 절에 마음이 더 닿으니
절 오빠와의 인연을 기대해봅니다.ㅋ
그럼에도 소백산을 향해 달리는중 입니다.ㅎ~^^
@로페즈 공감합니다
주일은 교회 ㆍ
평일은 봉은사에서 널널하게
바라보는 절의 풍경
마음이 평온 ㆍ
1년전 찿았던 수덕사
모든 사연이 받아지는 마음
사진이 참 좋네요
수덕사의 여승,
제목좋고
노래좋고
좋아했는데
수덕사에
이리
많은
드라마틱한 스토리들이
있었다니
영화한편 본듯합니다.
읽고나니
함
가봐야겠다는,,
민송님뎃글이 내뎃글 ^^
비비 또비
비때문에 수덕사
더욱 운치 있는듯 ᆢ
설리님 글은 항상
추억소환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