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9년 3월 14일 <대한민국 관보>는
한 '행려병자'의 사망을 실었다.
?
사망 석 달만이었다.
?
환자는 다른 사람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
나이 53세
본적 미상
주소 미상
?
가진 것이라곤 헌옷 한 벌이 전부였다.
남긴 거라곤 이름 석 자뿐이었다.
?
나.혜.석.
?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다.
대표적 신여성으로 수많은 '최초'를 남긴 여성.
?
나혜석, 그녀는?왜 길 위에서 홀로 죽어가야 했을까.
?
행려병자가 된 천재화가 나혜석.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숱한 화재를 뿌렸던 그녀.
그러나 정작 제대로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다.
?
그녀는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세상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나혜석은 무엇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질타를 받아야 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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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상 초유의 '이혼고백서' - "정조는 취미다"
?
?
1934년 8월 경성이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의 반감과 불쾌감은 극도에 달했다.
?
한 잡지에 실린 글 때문이었다.
분노한 이들은 잡지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
도대체 무슨 글인가?
?
고려대 중앙도서관에서 찾아봤다.
당대 대표적 월간지 <삼천리>?1934년 9월호에서 그 실체를 확인했다.
?
?
?
"흥미 위주, 대중?위주의 통속적 잡지입니다.
1934년 8월, 9월호에 ?나혜석이 '이혼고백서'를 실었습니다.
이 책이 세상을 발칵 뒤집히게 했습니다."
?
'이혼고백서'
이혼한 여자가 직접 적은 사상 초유의 이혼 경위서였다.
?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 - 1934. 8월, 9월호 '이혼고백서'중에서????
?
그것은 조선 사회에 대한 도전이었다.
?
사람들은
저자 나혜석이
추문때문에 이혼한 여성이라는 사실에 더 분노했다.
?
"여자가,
그야말로 외간 남자와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저렇게 이혼백서를 써내고 발표하고?그랬나,
사회적 반감이 막 끓어올랐던 것 같습니다."
????????????? ????????????????????????????????????????????????????????????? - 나영균(80살, 조카)
?
그녀는 파격적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 '신생활(新生活)에 대하여'
???????????????????????????????????????????????????1935년?2월호 <삼천리>
?
당시 여성의 목숨과도 같은 정조를
선택의 문제로 치부한 일대 사건.
?
나혜석은 문제적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소설이나 영화에 단골 소재가 되었다.
?
1979년 영화 '화조(火鳥)'
최고의 여배우 윤정희가 출연한 작품.
영화에서 나혜석은 바람끼 많은 여자로 파경을 맞이한다.
?
"당대 여성으로서 너무 자유로운 남녀 관계를 극대화했습니다.
'품행이 방정하지 못해서 돌을 맞아서 불행하게 갔다'라는 관점으로
흥미를 유발하여 사람들의 화재 거리로 다루었습니다.
?
욕망에 휘둘린 '모던 걸'은 결국 파멸한다는 전제로,
부도덕한 여자, 음탕한 여자의 불행한 최후,
이것이 반 세기 이상 계속된 나혜석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사람들은 '인간 나혜석'보다 '부도덕한 나혜석'이라는 평가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 ?????????????????????????????????????????????????????????????? - 유지나 교수(동국대 연극영화학과)
?
서울시 대방동 <여성부 여성사 전시관>?
?
?
각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근대 여성 선구자 15명을 선정해서 모시고 있다.
이곳에 나혜석이 있다.
?
참 이상한 일이다.
마녀 재판을 받는 듯 비난 받았던 그녀가 어떻게 명예의 전당에 올랐을까?
?
?
3. 여자유학생 - "여자라기보다 먼저 사람이다!?"
?
?
1914년. 4월. 9일.
<매일신보>는 한 여자유학생의 기사를 싣고 있다.
?
선망받던?남보다 출중한 재주를 가졌던 나혜석.
당시는 남자도 유학 가기 힘든 시절이었다.
?
일본 도쿄 남쪽 사가미하라시.
당시도쿄에 있었던 100년의 역사를 가진 명문대 <여자미술대학>
나혜석은 이곳을 다닌다.
?
근대 초기,
여성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곳은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이곳이 유일했다.
?
나혜석은
수원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곳에 진학한 것이다.
?
"이것이 1918년 3월 졸업생 앨범입니다.
있습니다. 이것이 나혜석씨입니다.
?
(당시 서양화 전공은) 보기 드문 경우였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아주 적은, 겨우 몇 사람밖에 안 되는?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대부분 자수, 조화... 그런 전공을 했습니다."
???? ??????? ?????????????????????????????????? ? ?- 나이토 사치에(여자미술대학 역사자료 담당)?
서양화과 고등사범과 나혜석.
수백 명의 졸업생중 유일한 조선 여성이었던 나혜석.
그녀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
비록 미술대학이었지만
당시 대학생의 90%는 재봉과 자수 등
여성과 친숙한 전공을 선택했다.
?
서양화를 전공한 학생은 전체의 2~3%에 불과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혜석은 남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
"이것이 학적부입니다.
실기 성적도 매우 좋은 점수를 받았고
학과 성적도 상당히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3학년 때 평균이 90점이라고 쓰여 있으니까 상당히 좋은 성적입니다."
???????????????????????????????????????????? -나이토 사치에(여자미술대학 역사자료 담당)
?
동경여자유학생 모임.
나혜석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녀는 선각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
대학 2학년이 되던 해,
나혜석은 조선 유학생들의 잡지인 <학지광>에 글을 발표한다.
?
'이상적 부인(理想的 婦人)상'을 그린 '현모양처'의 실체를 비판한 글이었다.
나혜석은 현모양처의 이상형이 여성을 노예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
?
?
"현모양처가 가지는 허위의식을 만천하에 드러낸 겁니다.
?
그것은 오직 여성에게만 요구하는 교육주의다,
'현모양처를 여성에게만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여성도 말하자면 주체적인 존재,
사람으로 똑바로 서야 되겠다는 글이었습니다."
?????????????????????????????????????????????????????????????????? ?- 서정자 교수(초당대 부총장, 국문학)
?
그녀는 여성이 시대의 선각자가 되어
스스로 실력을 키우고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여성의 권리를 운운하는 딸이 아버지는 못마땅했다.
?
"저는 혼자 살아요."
"이년아. 혼자 어떻게 사니."
"제가 벌어서 저 혼자 살지요."
?????????????????????????????????????????? ? - 1935년 7월 <삼천리>, '나의 여교원시대'중에서
?
당시 나이 19살.
나혜석은 어떻게 그 나이에 여성의 권리를 의식했을까?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에 나혜석의 생가터가 있다.
그녀는 수원에 이름난 가문 출신이었다.
?
"나혜석의 아버님 되시는 나기정(1863~1915)씨는
구한말에 사법관을 지내시고
그 다음 시흥군수를 거쳐 용인군수를 역임했습니다."
?????????????????????????????????????????????????????????????? - 유동준 회장(나혜석 기념사업회)
?
수원의 유지로 지방 행정관을 하며 부유한 생활을 하던
나혜석의 아버지에겐 다른 여자가 있었다.
?
딸인 나혜석보다 불과 한 살 많았다.
나혜석은 딸벌 되는 첩때문에 평생 눈물짓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살았다.
?
그 첩은 아버지의 호적에도 버젓이 올랐다.
어지간한 조선 남자중에 첩을 한둘 두지 않는 남자가 없던 시절이었다.
?
축첩은 나혜석의 어머니의 고통이자,
모든 조선 여자들의 고통이었다.
?
그녀는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담아 세상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나 알지만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는 축첩에 대해 말한다.
?
?
?
"첩이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을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 - 나혜석의 첫소설, <경희>.
?
"춘원 이광수도 단편소설로 등단했고
김동인, 염상섭, 현진건, 전영택,
전부 여성 문제를 소설로 썼어요.
?
그런데 그들은 다 무얼 가지고 썼느냐
전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가지고 시작을 합니다.
?
그러나 나혜석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남녀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 - 서정자 교수
?
나혜석은 지식인으로서 조선 여성의 입장과 지위 대변에 앞장섰다.???
?
?
?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예요."????
????????????????????????????????????? - 소설 <경희>중에서
?
여주공립보통학교.
그녀는 아버지가 학비를 주지 않고 결혼을 강요하자
1년간 교사를 하면서 직접 학비를 낸다.
한 인간으로서 당당히 서기 위해 결코 배움을 포기치 않는다.
?
?
?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오냐, 사람이다."
???????????????????? - 소설 <경희>중에서????
?
1918년 3월. 대학을 졸업하고 난 22세의 그녀에겐 할 일이 많았다.
글과 그림으로 자기 생각을 널리 알리기로 했다.
?
?
1921년 7월 개벽에 '개척자'
그녀는 자신을 척박한 조선 여성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개척자라 생각했다.
?
"나혜석은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아요.
누군가 걸어가야 길이 생긴다.
처음에 걷는 사람은 참 힘들고 가시밭길을 가게 되니까 힘들고 어렵지만
누군가 걸어가면 또 따라오면 길이 생긴다."
??????????????????????????????????????????????????????????????????? ?- 윤범모 교수(경원대 미술대)
?
그녀는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 변화와 개혁의 물꼬를 트려 했다.
여자도 하나의 사람으로 존중받는 세상.
그것이 나혜석의 꿈이었다.
?
"여자도 사람이다." -수원시 인계동 '나혜석 거리'
?
나혜석은 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깨달은 선각자이자
그것을 직접 찾기 위해 나섰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 멀고 험했다.
?
?
4. 결혼, 그리고 어머니가 된다는 것!~
?
?
서울시 중구 정동제일교회.
1885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로
고딕풍으로 꾸며진 근대 초기 가장 인기있는 서양식 결혼식장이다.
?
1920년 4월 10일. 24세의 나혜석은 이곳에서 결혼을 한다.
신랑은 변호사 김우중이다.
?
?
?
나혜석은 결혼후에 더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결혼 5개월만에 임신을 하게 되고
나혜석은 그 생소한 몸의 변화에 당황하고?두려워한다.
?
그녀는 잡지 <동명>에 그때의 심경을 고백한다.
'母된 감상기'
그녀는?엄마가 되는 여자의 고통과 감성을 나누고자 하였다.??
?
?????
?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오싹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소리가
완연히 탕 하는 것 같이 들리었다."
?
"나는 할 일이 많았다.
게다가? 내 눈이 겨우 좀 뜨이려고 하는 때였다.
예술이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인생인지,
조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는 이리 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결코 타인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 '모(母)된 감상기', 1923. 1???
?
1921년 4월 28일. 25세.
열 달후 혹독한 신고식이 시작되었다.
?
"어머님 나 죽겠소,
여보 그대 나 살려주오,
내 심히 애걸하니
옆에 팔짱끼고 섰던 부군 "참으시오" 하는 말에
"이놈아 듣기 싫다" 내 악 쓰고 통곡하니
이 내 몸 어이타가 이다지 되었던고."??????????????
???????????????????????????????????????????????????? - '모(母)된 감상기'?
?
나혜석은 아이 낳는 고통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제껏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생생한 기록이었다.
어머니가 되는 길은 이제 시작이었다.
?
곧 젖먹이 키우는 괴로움이 시작되었다.?
잠을 못자는 고통이 가장 컸다.
?
"이러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기(幾) 개월간 계속 되더니
심신의 피곤은 인제 극도에 달하여
정신은 광증이 발하고
몸에는 종기가 끊일 새가 없었다."
????????????????????????????????????????????????- '모(母)된 감상기'?
?
?
극심한 고통속에서 나혜석은 모성은 본능이란 생각에 회의한다.
결국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까지 표현한다.
?
"'엄마가 자식을 악마로 느낀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
여성이라면 언젠가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가 된 여성은 당연히 자식에게 모성애를 느낀다'고 말해오던 것에 대해서,
?
전혀 그것이 아니라고,
모성애의 신화를 깨뜨린 것이,?
나혜석의 '모된 감상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 ??????????????????? - 이상경 교수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
남성들은 반발했다.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
"물론 임신이란 것은 두려운 사실이요, 그리 편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결혼 그 자체부터 부인하고 회피하기 전에는 임신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존귀가 여기 있고
여성이 인류에게 향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의 한 가지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 백결생, <동명> 1923. 2. 4??
?
나혜석도 맞섰다.
?
"과연 마치 구름 속에 있는 양반에게서
'너희는 왜 흙을 밟고 다니느냐' 하는 비방을 받는 격이 되었다.
?
씨의 '임신이란 것은 그리 편한 일이 아니다'라는 일구를 보면
씨가 능히 알지 못할 사실을 아는 체하려는 것이 용서치 못할 점이다."
??????????????????????????????????????????????????????? - '백선생에게 고함', <동명> 1923.?3. 18?
?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임신에 대해서
'한 번도 애를 가져보지 않은 남자가 왈가불가 하는 것은 듣지 않겠다'라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 나혜석은 이 글을 임신을 해본 여자들에게 말하는 거니까
'남자인 너는 입 다물어라' 이렇게?답변한 것입니다."
?????? ?????????????????????????????????????????????????????????? - 김은실 교수 (이화여대 여성학과)
?
나혜석에게 자식은 무엇이었을까?
?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그녀의 손자 김성민씨는 집안의 오랜 앨범을 간직하고 있다.
80년이 넘은 사진, <나혜석의 사진첩>이었다.
?
신혼시절 사진부터 아이들 사진까지,
특히 공을 들인 건 아이들이었다.
나혜석은 아이들 성장과정을 일일히 사진으로 남기고 꼼꼼하게 메모를 적었다.
?
?
"이것이 가족 사진입니다.
이분이 미국에 계신 큰 고모님,
이분이 미국에 계신 큰 아버님,
이분이 저희 아버님,
3남 1녀인데,
한 분이 돌아가시고 세 분만 이렇게 남아 계시죠."
???????????????????????????????????????????????????????????????????????????????? - 손자 김성민(55세)
?
아이를 키우면서 나혜석은 비로소 모성애에 눈을 뜬다.
?
"모성애로 인하여 얼마나 만족을 느꼈으며 행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과연 하나 기르고 둘 기르는 동안에
지금까지 애인에게서나 친구에게서 맛보지 못하는 애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 ?????????????????????????????????????????????????????????????????????????????? - <삼천리>, 1934, 9.
?
그녀에게 모성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보살펴주고 챙겨주면서 생겨나는 자연스런 감정이었다.
이후 나혜석은 화가로서, 어머니로서 자신의 일상에 최선을 다한다.
?
"나는 결코 가사를 범연히 하고 그림을 그려온 일은 없습니다.
내 몸에 비단옷을 입어본 일이 없었고 1분이라도 놀아본 일이 없습니다."
?? ??????????????????????????????????????????????????????????????????????????????? ?- <삼천리>, 1934, 8.
?
그러나 가사와 작품 활동을 동시에 하는 것은 큰 고통이 따랐다.
?
"다다미 위에서 차게 군 까닭인지
자궁에 염증이 생(生)하여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고
또한 매일 병원에 다니기에
이럭저럭 겨울이 다 지나고 봄이 돌아오도록
두어 장 밖에 그리지 못하였다."
???????????????????????????????????????????? - <조선일보> 1926. 5. 20
?
생에 전부였던 그림이 어느덧 고역이 되었다.
그래도 나혜석은 붓을 놓지 않았다.
매해 조선미전에 작품을 선보였고 어김없이 상을 탔다.
?
1926년 제 5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천후궁(天后宮)'
마침내 특선의 영광을 안았다.
여류화가로선 최초였다.
?
그녀의 성공은 남편의 명예였다.
?
"남에게 존경받는 아내를 가진 자는 행복스럽다 했지."
"당신 한 턱 하오. 애는 내가 쓰고 좋기는 당신만 좋지."
"그러게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이지."
??????????????????????????????????????????????????????????????- '화가로 어머니로'중에서??
?
나혜석은 허탈했다.
능력이 있어도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계에 절망했다.
예술가로서의 한계에 더 고통이 밀려왔다.
?
"내게는 근일 고통이 되다시피 그림에 대한 번민이 생겨서
화필을 들고 우두커니 앉았다가 그만 두고 그만 두고 한 때가 많다.
나의 그림은 기교에만 조금씩 진보될 뿐이오
아무 정신적 진보가 없는 것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미워할 만치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것이다."
????????????????????????????????????????????????????????????????????????????????????? - <조선일보> 1926. 5. 20.
?
화가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혜석은 길을 잃었다.
결혼후 나혜석의 모습은 요즘 직장 여성과 다르지 않았다.
?
결혼과 직장 일 모두를 잘 하기 위해 애쓰는
이른바 '슈퍼우먼증후군'을 80년전 나혜석은 경험하고 있었다.
?
'슈퍼우먼증후군(Superwoman syndrome)'은
여성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려 할 때 겪는
신체적, 심리적 스트레스증후군이다.
?
하지만 철저한 가부장사회였던 식민지 조선에서
나혜석에게 돌파구가 필요했다.
?
?
5. 파리, 이브의 호기심 - 불륜 그리고 이혼..
?
?
1927년. 31세.
남편 김우영이 뜻 밖의 제의를 한다.
미국과 유럽 일주여행을 하자는 것이었다.
?
칠순 노모와 네 아이가 있었지만 나혜숙은 결행한다.
예술로써 자신이 행복해져야 가족도 행복해진다는 생각이었다.
?
?
?
?
부부는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로 대륙을 건넜다.
그리고 모스크바, 바르사뱌를 거쳐
한 달 뒤 그토록 동경했던 파리에 도착한다.?
?
나혜숙에게 파리는 도시 전체가 교과서이자 캠퍼스였다.
도시 곳곳에 전시된 미술품들,
박물관에 대가들의 작품들은,
화가 나혜석을 눈뜨게 하고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
나혜석은 조셉 바라 7번지에 자주 들렀다.
당시 이곳엔 거장들이 운영하는 미술아카데미가 있었다.
?
"당시 이곳엔 페르낭 레제나 앙드레 로트 같은 거장들이
미술을 지도하는 아카데미들이 있었습니다.
규모가 큰 아카데미가 많았는데, 특히 '랑송아카데미'가 대표적입니다."
???????????????????????????????????????????????????? ??? - 알렉산드라 샤르비에(미술사연구가)
?
1908년 창설된 랑송아카데미에서
나혜석은 야수파 화가 뒤셀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녀는 이곳에서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났다.
?
"단발하고 양복 입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책상에서 프랑스말의 단자(단어)를 외우고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의 대가가 될 공상도 해 보았다."
??????????????????????????????????????????????????????????? - <삼천리>, 1932. 1?
?
???????? <무희> - 나혜석
?
?
????????????????????????? <작약> -나혜석
?
??????????????????????????????????????<파리풍경> -나혜석
?
나혜석은 파리에서 일본 유학 시절 배울 수 없었던
서구 미술의 진수를 배웠고 그것을 작품화했다.
?
파리에서의 6개월.
그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
뉴욕을 거쳐 시카고, 로스앤젤리스, 샌프란시스코 등
주요 도시를 두루 돌아 부산항에 도착했다.
?
1년 반이었다.
여행은 새로운 세계에 눈 뜨게 했다.
?
"이제야 정말 양화(洋畵)에 눈이 떠지는 듯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헛일을 한 듯 해요.
헛 그림을 그린 듯 후회납니다."
??????????????????????????????????????????? - <삼천리> 1930. 5
?
귀국후 나혜석이 돌아간 곳은 부산 시집이었다.
대가족에게 돌아온 그녀에게 남편은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
"나는 이혼을 하겠소이다!"
"애야, 그게 무슨 소리냐. 어린 것들을 어쩌고 이혼이라니!~"
"서방질하는 것하고 어찌 살아요!"
?
불륜은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
나혜석은 파리 유학생 모임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
최린(崔麟, 1878 ~1958).
3.1운동 33인 중에서 천도교 대표이자 선망받는 정치가였다.
?
최린은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취미와 감성이 비슷한 그에게서 나혜석은 지적 동반자 모습을 발견한다.
?
"과거지사(過去之事), 현 시사 (現 時事), 장래지사(將來之事)를 논하는 중에
공명되는 점이 많았고 서로 이해하게 되었사옵니다."
?????????????????????????????????????????????????????????????????????????????????????????? ?- '이혼고백서', 1934. 8
?
그것은 어느 순간 유혹이 되었다.
?
"결코 손을 대서는 아니된다고 한
과실에 손을 댄 것은 뱀의 유혹이었고
이브의 호기심이 아니었나...
?
"나는 확실히 유혹을 받았었고
나는 확실히 호기심을 가졌었다.
?
우리는 황무(荒蕪)한 형극의 길가에서
생각지 않은 장미화를 발견한 것이다.
방향과 밀봉(蜜蜂) 중에 황홀하였던 것이다."
?????????????????????????????????????????????????? ?- '신생활에 들면서' 1935. 2
?
추문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남편에게 알려졌다.
변호사로 당대 저명 인사였던 남편에게 그것은 모욕이었다.
?
나혜석은 남편에게 죄인이었다.
1934년 결혼 11년만에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다.
나혜석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
"어디로 갈까.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친구도 없고
이 홀로 된 몸 어디로 갈까..."
?????????????????????????????????????? - ' 이혼고백서' 193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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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로서, 또 화가로서 자신을 뛰어넘고자 했던 나혜석.
파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댓가는 참으로 혹독했다.
그녀가 평생 일궈온 명예는 물론 자식과 가정까지 모두 잃게 된 나혜석.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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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재기할 기운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며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 ??????????????????????????????????????????????????????????????????????????????????? ? - '이혼고백서' 193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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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작품활동에 매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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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녀에게 빛이 된 건 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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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뤼니 중세 박물관.
고대 로마의 목욕탕을 개조해서 만든 이 미술관은
2만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한 중세 미술의 보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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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이 파리에 머물 때 박물관 정원에?
파리에서 가장 오랜 성당문이 전시되었다.
생 제르망 성당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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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이 문을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이 나혜석 대표작 <정원>이다.
? ???????????????????? ?나혜석 <정원>????????????????????????????????? 실제?퀼리니 성당문(출처 : 오마이뉴스) ?
1931년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1931년 제 12회 일본제국미술전람회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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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이 파리생활을 하면서 완성한 이 작품은
1931년 조선미전과 일본제전에 동시 입상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운다.
나혜석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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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하여 나는 면목이 섰고 내 일신의 생계가 생겼나이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힘을 의식하였나이다.
그때에 나는 퍽 행복스러웠사외다."
??? ????????????????????????????????????????????????? - '이혼고백서' 193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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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을 찾은 그녀는 이듬해 금강산에 머물며 서른 점이 넘는 작품을 그린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머물던 집에 불이 나 작품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만다.
나혜석은 다시 주저앉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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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후 그림은 그녀에게 자식이며 생명과도 같았다.
충격끝에 나혜석은 병을 얻는다.
붓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떨렸다.
점차 몸도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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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이 불편하고,
턱이 덜덜덜 떨리고,
그리고 뿔테안경을 썼는데 눈이, 개개풀린 눈이 확대되어 보였어요."
????? ???????????????????????????????????????????????????????????? - 나영균(조카, 8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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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씨병이었다.
그림 그리는 것은 물론 입까지 돌아가버렸다.
사회 생활이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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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은 연이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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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작약>??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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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미전에 입선한 작품에 대해 혹평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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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을 출품한 작자의 사상이 의문이요
출품을 하였더라도 그것을 진열하여 놓은 자의 심사를 모를 일이다.
우대를 한 것이냐? 모욕을 한 것이냐?
불미한 작품에 특선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될 것이다."
??????????????????????????????????????????????????????????????????????? - <매일신보> 1931.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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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등을 돌린 나부>?????????????????????????? <자화상(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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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조선의 남성들이 이혼녀에게 가한 따돌림이었다.
나혜석은 다시 펜을 들었다.
자신이 직접 이혼에 대해 밝히기로 한다.
나혜석은 이 글에서 결혼에서 이혼까지 낱낱이 기록하고
정조에 대한 남성들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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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막으려고 경성에 남편을 찾아간 날.
나혜석은 숙소에서 한 여자를 목격한다.
남편이 보란 듯이 기생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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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 1934. 8월, 9월호 '이혼고백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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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자기로 대표되는 여성이 처한 문제들을 드러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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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제에 대해서
여성인 나는,
여성인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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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열망을 담은 것입니다."
???????????????????????????????????? - 이상경 교수(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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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황은 그녀의 의도와 반대로 전개되었다.
<신가정> 1934년 10월호.
'이혼고백서'를 가장 격렬히 비난한 것은 바로 여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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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없는 폭로는 악취미요 병적입니다.
더우기나 당신은 사남매의 어머니로서
그 '노출증적 광태'를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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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여성들에게 나혜석은 정신병자로 비춰졌다.
'이혼고백서' 이후 사람들은 하나, 둘 그녀 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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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중한 재능으로 어려서부터 언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고
자라서는 신여성으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이혼녀 나혜석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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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신용을 잃고 모든 공분(公憤)과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의 버림을 받고 옛 좋은 친구들을 잃은 나는
황야를 헤매고 암야에 공막(空漠)을 바라고 자실(自실)하여 할 뿐입니다."
?????? ???????????????????????????????????????????????????????????????? - '이혼고백서' 193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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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에겐 단 한 명의 동료도, 지지자도 없었다.
평생 여성의 인간다운 삶을 주장하였지만
같은 여성에게조차 외면당하고 이해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혜석은 세상을 향한 말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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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9월. 34세.
경성에 희대의 소송 사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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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나혜석.
원고 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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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문의 두 당사자.
처권(妻權) 침해 위자료 청구 소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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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정조를 유린 당했다며
최린에게 위자료를 청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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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추문으로 이혼을 당했으니
막대한 보상을 하라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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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감히 바람 피우고 이제 와서 뻔뻔하게 돈까지 받아내려고 한다,
이렇게 생각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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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은 그건 외형적인 것이고,
나혜석이 정말 그 안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남성들에 의해 자행되고 공범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강요,
정조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
거기서 그걸 통해 잃게 되는 여성들의 정신적인 자유의 억압,?
이런 문제를 나혜석은 제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 - 김경일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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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의 투쟁은 원천 봉쇄되었다.
최린의 압력으로
그녀의 기사들은 조간에서부터 석간까지 모두 삭제되고 자취를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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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다시 펜을 들었다.
이번엔 정조에 관한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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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 ? - '신생활(新生活)에 대하여',?1935년?2월호 <삼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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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판단에 의해 가지고
'그것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고 '사랑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결정할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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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규범이 여성들에게
'정조는 지켜져야 한다' 혹은 '정조는 지키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는,
그런 사회적인 규범의 내용이 아니라는 그런 얘기입니다."
???????????????????????????????????????????????????????????????????????? - 김은실 교수(이화여대 여성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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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정조 문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냉대와 고립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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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진고개 조선관.
1935년 10월 24일 나혜석이 개인전을 열었지만 철저히 외면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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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는 물론
언론계 모두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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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우리가 비난을 받지 않으면
???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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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신교동.이제 그녀는 갈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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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돌던 나혜석에게 오빠의 집이 유일한 피난처였다.
나혜석의 조카 나영균씨는 당시 고모의 모습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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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나이보다 10년 더 되었으니 90년 된 집이예요.
여기가 집안에서 뚝 떨어진 방인데
고모가 오시면 어머니가 여기다가 숨겨 놓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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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세상에 눈을 피해
이 방에서 몇 일씩 머물다 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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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당시 45세였던 오빠 나경석(1890~1959)은
나혜석에게 일본 유학을 주선할 정도로
누구보다 동생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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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나혜석에게 간곡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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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만 숨어지내면
이 시끄러운 소문이 가라앉게 되고
그러면 세상에 제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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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혜석은 그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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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의 인간이고
내가 사는 그 방식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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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숨지 않았다.
계속 지인들을 만나며 전국의 사찰을 순례하며
승려도 일반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틈틈히 작품 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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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순탄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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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살아있다는 것이 괴롭고
때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란다.
살아 있기에
자살도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고
가끔 오욕스럽게 느껴지다가도
살아 있기에 다행스럽다는 기쁨을 맛보는 때도 있거든."
????????????????????????????????????????????????????????????????????????????????????? - '라훌라의 사모곡'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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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젊은 날을 뒤로 하고
나혜석은 때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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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51세.
그녀는 경기 안양 경성보육원에 머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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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학생으로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화가 박인경(80세)은
나혜석에게 한 가지 부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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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동안에 있으면서 글을 써 놓은 게 있는데
그것을 좀 정서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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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혜석은 글을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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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 힘이 없어요.
그래서 꼭꼭 눌러 쓰지도 못한 흐릿한 글씨였지요.
지나간 과거,
아주 화려했던 파리시절,
꿈 같은 이야기를 거기다가 써 놓으셨어요."
?????????????????????????????????????????????????????????????????? - 화가 박인경(8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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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가장 자유로웠던 날들을 추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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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 자손들은 무엇을 주어 살리잔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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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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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우리 조선 여자 중에 누구라도
가치 있는 욕을 먹는 자가 있다 하면 우리는 안심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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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아무려나 나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든지
진흙에 미끄러져 망신을 당하든지 나가볼 욕심이오."
???????????? ???????????????????????????????????????????????????? - <학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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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얼마후 나혜석은 사라졌다.
그녀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은 2년후
<대한민국 관보 1949. 3. 14> 부음을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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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53세
본적 미상
주소 미상
이름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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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자유를 찾아 헤매던 그녀는 결국 길 위에서 사망했다.
나혜석은 부자유의 시대에 한 인간으로 섰던 자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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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한 여성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길 원했다.
그리고 그 욕망때문에 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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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나혜석이 죽은 지 60년.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외쳤던 여성의 고민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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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국사 전(傳)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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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재화가의 파란 만장한 일대기를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