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 91 - 패전국 설움을 씻다 마나슬루에서 영화를 찍은 이마니시 고토, 가르첸 노르부(19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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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03. 05:19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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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탐험사 100장면
패전국 설움을 씻다
마나슬루에서 영화를 찍은 이마니시 고토, 가르첸 노르부(1956년)
요약 마나슬루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높은 산으로 최초로 정상을 밟은 나라는 일본이었다. 제3차 원정대는 1956년 5월 9일에 최초로 정상을 밟았다. 3차 원정대 중 이마니시 고토와 가르첸 노르부는 1시간을 머물렀다. 그러면서 마나슬루 정상에서 16mm 무비 카메라로 주변 풍경을 찍어 기록을 남겼다.
송곳?
한 사람이 겨우 올라설 정도로 뾰족한 마나슬루 정상
마나슬루(8,156m)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높은 산으로, 8,000m 봉우리 가운데 여덟 번째로 정복되었다. 마나슬루란 인도 말로 '영혼'이라는 뜻이다.
마나슬루는 1950년 영국의 틸맨 원정대가 처음으로 서쪽 능선을 정찰했다. 그러나 최초로 정상을 밟은 나라는 일본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먹고 살기조차 어렵던 일본이 어떻게 많은 돈을 들여 마나슬루에 오를 생각을 했을까. 그것은 교토 대학 교수 이마니시 긴지와 니시보리 에이사부로의 아이디어였다.
전쟁에 이긴 나라들이 잇따라 8,000m 봉우리에 올라 국력을 뽑내자, 자기네도 한 군데 정복하여 삶에 찌든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들은, 비록 미국에 패하여 미군의 통치를 받는 처지이지만 아직 8,000m 산을 한 곳도 오르지 못한 미국의 콧대를 꺾어 국민의 사기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디 일본은 등산 역사가 짧지 않은 나라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에 전해진 등산과 스키는, 1905년에 일본산악회가 조직될 정도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1921년에는 스물다섯 살 먹은 마키 유코가 알프스의 아이거봉우리를 동쪽 능선으로 처음 오르기도 했다. 그것은 유럽 사람들이 알프스 3봉을 정복하려는 꿈을 갖기 10여 년 전의 일이다.
1952년 1월 인도에서 열린 학술 회의에 참가한 니시보리는 마나슬루 입산 허가를 얻으려고 혼자 네팔의 카트만두로 갔다. 그때 네팔은 나라를 개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비행장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수도인 카트만두에는 묵을 만한 호텔이 하나도 없었다. 니시보리가 마나슬루 얘기를 꺼내자 그런 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어쨌든 그는 왕과 총리로부터 입산 허가를 얻어 냈다.
일본산악회는 마키 유코를 위원장으로 하는 '히말라야 위원회'를 만들고 1952년 가을 정찰대를 네팔로 보냈다. 정찰대는 고도 적응 훈련을 하면서 마나슬루에 이르렀으나, 한 대원이 크레바스에 빠져 크게 다치는 바람에 중도에 돌아오고 말았다.
1953년 정찰대의 자료를 바탕으로 빈틈없이 준비한 원정대가 일본을 떠났다. 대장은 미타 유키오. 대원들은 4월 20일 마나슬루 빙하 4,600m 지점에 제1 캠프를 세운 뒤 계속 전진하여, 6월 1일에는 제9 캠프(7,500m)를 떠나 정상 공격에 나설 수 있었다.
그들은 정오에 7,750m에까지 올랐다. 정상까지는 겨우 375m. 그러나 이미 지칠대로 지친 대원들이 정상에 오르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해가 진 뒤에야 하산할 수 있을 터인데, 그럴 경우 아무 사고 없이 내려간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일본대는 모험보다 안전을 택해 7,750m에서 돌아서고 말았다.
1954년 제2차 원정대가 일본을 떠났다. 호타 야이치를 대장으로 대원 13명 셰르파 23명 짐꾼 414명으로 이루어진 대부대였다. 이들이 마나슬루 어귀에 있는 로우 마을에 이르자 그곳 사람들이 모두 떨쳐나와 돌을 던져댔다.
일본대가 가까스로 그곳을 지나 사마 마을에 이르자, 이번에는 도끼를 든 사람 30여 명이 길을 가로막았다. 아무리 사정하고 타일러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일본대는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처럼 등산대를 막은 까닭은 그 전 해 겨울 300년 된 라마교 사원이 눈사태로 무너져 라마승 세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천연두가 퍼지고 흉년이 들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성스러운 산으로 섬기는 칸분겐(마나슬루)을 일본 사람들이 더럽힌 탓이라고 믿었다.
1956년 제3차 원정대가 다시 마나슬루에 도전했다. 이들을 돕기 위한 후원회가 생기고 나라에서 보조금도 나왔다. 또 1955년에 세 사람을 네팔로 보내 사마 마을에 별일이 없는지 살피고, 마나슬루 등산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처럼 준비를 철저히 한 데다, 마키 유코를 대장으로 한 대원 12명은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등산가들이었다.
대원 12명에 셰르파 20명, 짐꾼 396명으로 이루어진 일본 원정대는 1956년 3월 27일 사마 마을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마을 사람들이 길을 막았다. 등산대를 보호하려고 따라간 네팔 정부 관리가 마을 사람들과 싸움을 벌이자 짐꾼들은 모두 짐을 내팽개치고 달아나 버렸다. 일본대는 무너진 절을 다시 지을 돈을 내기로 하고서야 겨우 마을을 지날 수가 있었다. 일본대가 문 돈은 일본 돈으로 22만 엔이나 되었다.
그들은 25일 만에 제1 캠프(5,250m)를 세우고 잇달아 제2 캠프(5,600m), 제3 캠프(6,200m), 제4 캠프(6,550m)를 세웠다. 5월 4일 7,200m 지점에 제5 캠프를 세운 대원들은 바람에 발이 묶여 이틀을 그곳에서 지내고 5월 8일에야 제6 캠프를 7,800m 지점에 세웠다. 정상은 지척에 있었다.
1956년 5월 9일 8시. 이마니시 고토 대원과 사다(셰르파의 우두머리) 가르첸 노르부가 제6 캠프를 나섰다. 한 줄기 바람도, 한 점 구름도 없는 기막힌 날씨였다. 12시 30분, 그들의 발은 세모꼴 바위 꼭대기에 우뚝 섰다.
꼭대기는 깎아세운 듯이 날카로웠고, 한 사람이 겨우 설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1시간을 머무르며 16mm 무비 카메라로 주변 풍경을 찍었다. 이것은 8,000m가 넘는 곳에서 찍은 맨 처음 무비 필름이다. 다음날 두 번째로 오오쓰카 하쿠비 대원과 셰르파 1명이 정상에 올랐다. 그들이 제4 캠프까지 내려오자 온 산이 구름에 휩싸이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무서운 몬순이 왔음을 알렸다. 일본대는 이틀 차이로 몬순을 피해 등반에 성공한 행운을 잡았다.
정상(頂上)이란 한 점이다
마나슬루 꼭대기는 말 그대로 송곳처럼 뾰족해 한 사람이 겨우 올라설 만큼 위태롭다. 마나슬루 정상에서 몇 발짝 아래에 선 이마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