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쉬는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떻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로 운동하러 갔지요. 평소에 잘 하기 힘든 곳들이라던지, 유튜브 선생님들이 가르쳐 준 이른바 꿀팁들을 실천한답시고 몸을 움직였더니 뭔가 몸에 붙은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그리고 나서 오전 9시에 있는 아침 미사 참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잔디를 깎고 트리머라고 부르는 기계를 돌려 잔디 가장자리를 치고 하면서 오전을 보냈습니다.
냉장고를 뒤져보니 치워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엇보다 산 지 반년은 된 듯한 닭가슴살과, 구이를 하겠다고 레몬 올리고 버터를 올려 놓은 채로 냉동고에 가둬 놓았던 연어살 같은 것이 눈에 띄더군요. 저런 걸 갖고 뭘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모처럼 사 놓은 페투치니를 꺼내어 삶기 시작했습니다. 스파게티 면과 달리 넓적한 페투치니는 비슷한 모양의 링귀니보다는 범용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소스가 많이 묻어나기 때문에 알프레도 소스와 많이 쓰이곤 하지요.
찬장을 열어보니 지난번에 마시다 남은 ABBE의 피노느와, 그리고 샤도네가 있더군요. 어떻게 살면 도대체 와인도 남는거야? 이것도 치워 버려야지... 하며 음식을 만드는 데 조금 넣기도 하고, 또 낮술의 즐거움이란 게 원래 음식을 준비하며 홀짝거리는 것인지라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샤도네와 피노느와를 번갈아가며 맛을 봤습니다. 며칠 전엔 발포성을 보여 깜짝 놀랐던 그 샤도네는 어느새 차분하게 스틸 와인이 되어 있었고, 피노 역시 오히려 맛이 들었더군요. 코르크 마개가 아니라 스텔빈 캡으로 마감한 와인들의 목숨이 조금 더 길긴 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븐을 예열하고, 여기에 연어를 넣어 굽는 동안에 넓은 팬에 양파와 마늘, 이탈리안 허브, 그리고 다량의 미니 포타벨라 버섯을 올리브유에 볶습니다. 올리브기름은 발연점이 낮아 볶고 지지는 데는 안 좋다고 어떤 사람들은 말하는데, 저는 그거 별로 안 믿습니다. 올리브 유의 단점은 가격이 비싸다는 것 뿐이지, 볶고 지지는데는 아무런 지장 없습니다. 그래도 올리브유로 튀김은 안 해 봤습니다. 진짜 가성비 안 나오는 짓인지라.
아무튼, 남은 와인들과 제가 만든 음식으로 점심을 먹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아아, 점심 먹고 나서 졸음이 오는데 미치겠더군요. 비번날 새벽부터 엄청 움직이고, 그리고 잘 먹었고... 식곤증이 온다 싶었는데 잠깐 눈 감았다 뜨니 오후 7시가 다 됐습니다. 엉망됐네. 그렇다고 이 저녁에 커피를 마실 수는 없고, 탄산수 한 잔 마시고 일단 정신 차린 참입니다. 아마 몸이 피곤하긴 했을 겁니다. 누적되는 오버타임으로 인한 피로에다가, 이 나이에도 빡세게 하는 운동이 몸에 피로를 쌓긴 했겠지요. 그러나 비번 날의 오후를 통으로 날린 듯한 이 기분은 좀.
발 가죽이 얇아진건지 걸을 때 통증이 올 때가 있었는데, 웬걸, 그래도 이렇게 자고 났더니 그 통증도 좀 가신 듯 합니다. 점심 때 이렇게 엄청 먹었으니 저녁이 먹힐 리가 없고, 탄산수 한 병 마시고 나서도 물을 찾게 되네요. 그래도 어떻게 마당 꼴이 좀 정리된 것 같긴 합니다. 미국에서 집을 갖고 산다는 건 아무튼 내가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들이 넘쳐난다는 걸 뜻합니다.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저처럼 취미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튼 억지로라도 해 놓으면 기분 좋은 일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일들이 사람을 엄청 피곤하게 만든다는 거겠지만.
민주주의도 그런 식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해 봤습니다. 싫어도 내가 직접 해야 하는 일. 귀찮지만 내가 직접 하지 않으면 결국 엉망이 되어 버리는 그런 일. 우리가 잠깐 민주주의의 정원 가꾸는 일을 안 했더니 독초가 자라나 내 정원을 뒤덮어 버린다면, 일이 그만큼 더 커질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런 생각 잠깐 하는 동안에 시간은 벌써 오후 8시, 그렇지만 하늘은 아직 환합니다. 6월, 조금 있으면 다가올 하지 때까진 낮은 더욱 길어지고 밤은 계속 짧아지겠지요. 오후 10시나 되어야 어두워지는 요즘, 지금 술을 마셔도 기분은 낮술같긴 하겠네요.
시애틀에서...
첫댓글 쉬는날 몰아서 집안일하기 / 냉장고 파먹기
정말 부지런하네요~^^
글을 읽다보니 하루 24시간이 참 길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역시 시간은 쓰기 나름인것 같아요~^^
대신에 늘어질 때는 확실하게 늘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