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 평남 성천군 출신 기생, (1805~1854 추정)
이북도민작가 이동현 ・ 2022. 2. 6. 21:26
운초(雲楚)
생애 및 활동사항
성천의 명기로서 가무와 시문에 뛰어났다. 김이양(金履陽)의 인정을 받아 종유하다가 1831년(순조 31)에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소실이 되었다. 그 뒤 시와 거문고로 여생을 보냈다.
우아한 천품과 재예를 지니고 있어 당시 명사들과 교유, 수창(酬唱)하였고, 특히 김이양과 동거하면서 그와 수창한 많은 시를 남겼다.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으로서 같은 동인인 경산(瓊山)과 많은 시를 주고받았다.
문학적인 자부심이 대단하여 자신은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였다고 한다. 발랄하고 다채로운 작품을 지어 남자를 무색하게 한다는 평을 들었다.
작품집인 『운초집』에 실려 있는 시는 규수문학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억가형(憶家兄)」·「오강루소집(五江樓小集)」·「대황강노인(待黃岡老人)」 등이 있고, 시문집으로는 『운초당시고』(일명 부용집(芙蓉集))이 있다.
참고문헌
『조선역대여류문집』(민병도,을유문화사,1950)
「삼호정시단의 특성과 작품: 최초의 여류시단」(김지용,『아세아여성연구』16,숙명여자대학교,1977)
집필자
집필 (1995년)
고경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운초(雲楚))]
[한국여성인물사전] 179. 김부용(金芙蓉)
[출처 이데일리 2017-08-21]
문희순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opinion@etoday.co.kr
19세기 문화 예술 향유한 기녀 출신 양반의 첩
▲김운초 시집 ‘운초기완’.
김부용(金芙蓉)의 호는 운초(雲楚),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예술인이다. 평안남도 성천(成川)에서 태어나 성천의 관기(官妓)가 되었다가,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1755~1845)을 만나 첩실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기녀가 되어 소실(小室)로 생애를 마감한 탓인지 생몰년조차 정확하지 않다.
기녀 김운초가 관료 김이양의 첩실이 된 것은 신묘년(1831)이다. 이때 운초는 20대였고, 김이양은 77세였다. 김부용의 시집 ‘운초기완(雲楚奇玩)’ 말미에 “지난 신묘년에, 나는 칠십칠세이셨던 연천노인의 소실이 되었다”라고 회고하였다. 김이양의 졸년이 1845년임을 감안할 때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으로 산 기간은 14년 정도 되고, 부실(副室)이 되기 전 성천의 기녀 신분일 때부터의 기간까지 감안하면 대략 20년의 인연이다.
운초는 성천의 관기였을 때, 김이양을 대면하였다. 김이양은 57세 때인 1811년 12월, 홍경래 난의 진압을 위해 함경감사에 부임하였다가 1815년까지 서북지방에 머물렀는데, 이때 운초를 알게 되었다.
김이양은 홍성 사람으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후손이다.
김상용→광현(光炫)→수빈(壽賓)→성익(盛益)→시술(時述)→헌행(憲行)→이양(履陽)으로 이어지는 가계이다.
김이양이 1843년 과거에 급제한 지 예순 돌이 되는 회방년(回榜年)을 맞아 충청도 홍성·결성·천안 일대를 성묘할 때 부인의 예로써 행차에 함께하였다.
1832년 2월. 운초는 김이양을 따라 성천에서 한양으로 이주해 왔다. 남편과 함께 한강 가의 별장 일벽정에 머물며 승경(勝景)을 유람하고, 남편 벗들의 각종 연희에 참여하여 시·그림·음악·춤 등의 예술가로 활동하였다. 한양 최고의 경화사족(京華士族)들과 여유와 자적의 문화 활동을 유감없이 만끽하였다.
이때 함께한 여성 예술인이 경혜(景蕙)·경산(瓊山)·금원(錦園)인데, 운초처럼 기녀에서 소실이 된 예술인들이다. 운초는 이 소실 그룹의 친구들과 19세기 여성 예술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운초·경산·금원·경춘·죽서 등 다섯 명은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라는 시 동아리를 결성하여 문학의 창작과 감상, 향유 활동을 주도하고 예술 문화계의 선두그룹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시대 여성문화에서 볼 수 없었던 ‘여성 동료와 그룹’이라는 면에서 주목된다. 현재 알려진 김운초의 시는 300여 수로, 시집 ‘운초기완’, ‘운초당시고’, ‘운초시’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
19세기 최고의 여성 예술가로 활동했던 김운초. 그녀의 삶은 화려한 듯 쓸쓸하였다. 운초는 죽어서도 남편의 곁에 묻히길 소원하였다. 그녀의 뜻대로 천안 광덕산 기슭 김이양의 무덤 가까운 곳에 운초의 무덤이 허허롭게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기획,천안잃어바린 역사를 찾아서]
평양감사 김이양과"불꽃 같은 사랑을 나눈"운초 김부용
[출처 : 모닝포스트 2019.6.26.]
-육조판서 두루 지낸 대표 선비 운초와 50년 나이차 넘은 교감
김헌규
-김이양 대감과 운초 김부용, 나이를 초월 ‘운명적 사랑’ -묘 돌보는 이 없어 잡초만 무성 문인석·비석도 사라진 지 오래 천안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천안흥타령의 태생지이자 능수버들이 휘영청 늘어진 천안삼거리공원, 유관순, 석오 이동녕, 유석 조병옥박사등 애국열사들과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끈 충무공 김시민장군, 실학자이자 천체문리학의 대가인 담헌 홍대용선생과 같은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곳 이기도하다. 이렇게 훌륭한 인물 뒤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잊혀진 인물과 역사가 있다. 본지에서는 기획연재를 통해 이를 재 조명코자한다. 천재 여류시인 운초 김부용을 이야기하려면 봉조하 김이양 대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김이양은 (1755∼1845, 영조 31∼헌종 11) 천안 광덕에서 태어나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명여(命汝), 할아버지는 시술(時述)이고 아버지는 한성판윤을 지낸 헌행(憲行)이다. 어머니는 헌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윤지술(尹志述)의 딸이다. 초명은 이영(履永)이었으나 예종과 이름이 비슷해 피휘(避諱: 임금의 이름을 피함)하기 위해 이양이라 개명할 것을 청해 왕의 허락을 받았다. 김이양의 부인은 이명상의 딸인 완산(完山)이씨며 아들을 두지 못해 이고(履枯 김이양의 동생)의 아들인 한순(漢淳)을 양자로 들였다. 한순은 대근과 현근의 두 아들을 두었고, 현근은 순조의 딸인 명온공주(明溫公主)와 혼인해 동녕위에 봉해졌다고 김이양문집에 전해져온다. 이제 본격적으로 운초 김부용에 대해 재 조명해 본다. 그동안 야사엔 김이양이 평안감사로 있을 때 기생이었던 운초를 만났다고 전해온다. 하지만, 천안문화연구실 김성열 실장은 “김이양은 1826년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강호를 유람하다 운초 김부용을 만난 것으로 성천시기에 정사로 전해져온다.”고 밝혔다. #강호 유람 운초 김부용 만나 김이양은 40세 때인 1795년(정조 19년)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1812년(순조 12) 함경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그 지방의 기강확립에 힘쓰는 한편 고장주민들의 민생고 해결에 노력했다. 또한, 이듬해에는 계문(啓文: 왕에게 드리는 형식을 갖춘 글)를 올려 변경지방 군사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해 시정토록 건의하는 한편 어염선세(漁鹽船稅)와 둔전세(屯田稅) 및 마필(馬匹)의 헌납을 감면해 주도록 주청해 허락을 받았다. 이어 함경도의 진환곡(賑還穀)을 확보키 위해 영남 포항창(嶺南浦項倉)의 곡식 3만석을 이급(移給: 옮겨서 지급함)토록 주청해 2만 3000석을 얻는 데 성공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1815년 차대(次對: 임금의 요청에 의한 임금과의 대좌)에서는 함경감사 때의 경험을 들어 국경지방 군사제도 개선을 주장하고 허락을 받았다. 같은 해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호조판서가 돼 토지측량의 실시와 세제 및 군제의 개혁, 화폐제도의 개선을 강력히 주장했다. 1819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이 됐고, 이듬해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 1844년(헌종 10)에는 만 90세가 되어 궤장이 하사됐으며, 그 이듬해 봉조하(奉朝賀)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후 중추부영사에 추증됐다. 옛날 서울 남산 아래 수석이 아름답고 경관이 빼어난 곳에 녹천정(綠泉亭)이 자리잡고 있었다.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이 순조가 하사한 땅에 거대한 저택을 짓고 그 뒤에 정자를 세웠는데, 초록 이끼가 낀 맑은 샘을 바라본다 하여 녹천정이라 이름하였다. 연천은 평양감사로 부임하던 시절에 성천(成川) 기생으로 가무와 시문에 뛰어난 부용(芙蓉)의 재능을 인정해 운초(雲楚)라는 별호를 내리고 가까이했다. 이후 연천은 운초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와 소실로 맞이하고 남산 아래 녹천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시문을 짓는 등 즐거운 생을 함께한다. 천안문화역사연구실 김성열 실장은 “운초는 비록 김이양의 정부인은 아니었고, 나이차이 또한 많았지만 강호자연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겼던 사람이었다.”며 “운초는 나이를 떠나 김이양을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호자연, 풍류를 즐겼던 사람 운초가 김이양을 만난 것은 생애에 중요한 전기가 됐으며, 기녀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것도 그렇지만 50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초월한 한 남자와의 사랑은 운초의 시(詩) 세계에도 큰 영향과 변화를 주었다. 1843년 2월 김이양은 사마회갑(司馬回甲 과거급제 후 60년이 되는 해에 조상들의 성묘를 위해 고향인 천안 광덕사 경내에 있는 자신의 장원(莊園)에 부용과 함께 순행한다. 김이양은 고향 광덕을 다녀온 이듬해인 1884년 10월에 감기로 향년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김이양은 광덕사 뒷산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위치하고 있으나 자손들이 돌보지 않아 수풀이 무성하고 문인석과 비문은 사라진지 오래며, 제단엔 누구인지는 몰라도 ‘김이양 봉조하묘’라고 흰색 페인트 글씨로 써놓았다. 이에, 김종식연구사는 “한 시대를 주름잡던 세도가의 묘역은 찾는 이 없어 잡초만 무성한데 한 여류시인인 김부용의 묘는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며 “권세보다는 문학이 더 긴 세월을 이어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봉조하 김이양대감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을 나눈 운초 김부용(1800-1857)은 평안도 성천 출신의 기녀로 호는 부용(芙蓉), 또는 추수(秋水) 추낭이다. 양반인 선고(先考)는 당호가 추당(秋堂)인데 일찍 죽었다. 중부(仲父)밑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태어나고 죽은 연대는 정확히 알수없으며. 초당마마라고도 불렸다. 작품으로는 억가형(憶家兄) 오강루소집(五江樓小集) 대황강노인(待黃岡老人) 등이 전해지고 있다.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부안의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시대 3대 詩妓(시기)로 불리 운다. 평양감사 김이양과 시(詩)로 서로를 사모하다 소실이 되어 남산자락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낭군을 사모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후 1970년대에 작가 정비석선생이 조선일보에 명기열전을 연재하면서 밝혀진 인물이다. 유언에 의해 남편이 묻힌 광덕산 오름 한곳 외진 곳에 묻혀있다. 정작 연인이던 봉조하 김이양 대감의 추상 갖던 권력과 명예는 잊혀져 아는 이가 없으나, 시를 좋아 하던 기생의 묘소는 지역 문인들에 의해 진달래가 만발한 계절이면 발길이 이어지고, 매년 5월경이면 추모제를 열어 그녀의 시상을 흠모하고 있다. 하지만, 운초 김부용 묘는 확실한 고증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이에 김종식 연구사는 “그동안 부용을 추모하며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며 “조속히 묘역이 문화재로 지정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
[사람사람] '시인 기생' 김부용 알리기 30년 [중앙일보 2004.12.22.]
"김부용은 황진이.이매창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시기(시에 능한 기생)였지만 요즘 사람이 읽기 어려운 한시만을 남겨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래서 30년간 그를 알리는데 매달렸죠."
충남 천안향토사연구소 김성열(64)소장은 최근 부용의 시와 관련 논문.소설 등을 모아 '조선조 여류시인-운초 김부용의 생애와 문학'(천안향토사연구소.비매품)을 펴냈다.
김 소장은 1974년 '명기열전-김부용전'을 신문에 연재하던 소설가 고 정비석씨가 천안 광덕사 인근에서 부용의 묘를 찾아낸 것을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서점을 경영하던 그는 문인협회 천안지부와 함께 묘비를 세우고 무너진 봉분을 수습했다. 그 뒤 해마다 4월이면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93년엔 부용의 시 360수 가운데 75수를 골라 번역 시집(허경진 옮김.평민사)도 냈다.
김 소장에 따르면 부용은 평남 성천 출신으로 1850년대 40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0대 후반에 자신보다 50세가량 많았던 전 예조판서 김이양(1755~1845)을 만난 부용은 시를 통해 사랑을 나누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 '부용 상사곡'도 이런 흠모의 정을 담고 있다. 김 소장은 "부용의 한시는 '한 글자 두 줄'로 시작해 한 자씩을 더해가며 사랑의 애절함을 조형물 쌓듯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평했다.
부용의 유골은 그의 유언대로 김이양의 묘 가까이 묻혔다고 김 소장은 주장한다. 그는 "동네 촌로들과 묘를 정비할 당시 상류층이나 쓰던 고급 옻칠 관을 봤고, 수습된 유골이 키 165cm정도의 여자인 것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충남도와 천안시는 "이 묘가 부용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며 지방기념물 지정을 미루고 있다.
김 소장은 "묘 옆에 아담한 시비를 세우고 안내판도 말끔하게 정비하는 게 가장 큰 바람"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조한필 기자
[우리 시조로 푼 한시] 戱題/ 운초 김부용 [매일신문 2013.8.29.]
사람들은 나보다 부용꽃을 예쁘다 하네 |
여자의 본능은 예뻐 보이려고 한다. 옷가게를 지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도 예사롭게 보지 않는다. 곁에 있는 여인이 우아하고 예쁘다고 하면 "그럼 나는?" 하고 시샘하는 반사적 응대를 보낸다. 나무랄 수 없는 여심(女心)이리라. 시인은 부용(芙蓉)이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들 말에 시샘하며 경쟁의식을 갖는다. 다음 날 아침 제방 둑을 걸었더니 부용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읊은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부용이 피어올라 연못 가득 붉어지니
사람들 부용꽃이 나보다 예쁘다 해서
아침에 제방 둑 걸었더니 부용꽃 보지도 않네.
芙蓉花發滿地紅 人道芙蓉勝妾容
부용화발만지홍 인도부용승첩용
朝日妾從堤上過 如何人不看芙蓉
조일첩종제상과 여하인불간부용
【한자와 어구】
芙蓉花: 부용꽃/ 發滿: 만발하게 피었다/ 地紅: 땅이 붉다/ 人道: 걷는 사람들/ 勝: 낫다고 한다/ 妾容: 내(자신의) 얼굴/ 朝日: 다음 날 아침/ 妾從堤上: 내가 제방을 따라서/ 過: 걷다/ 如: 같다/ 何人: 누구도/ 不看: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보다 부용꽃을 예쁘다 하네'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1805~1854 추정)이다. 19세에 50세나 차이가 나는 김이양(金履陽'1755~1845)의 소실(小室)이 되었다.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조선 3대 시기(詩妓)로 불린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부용이 피어 연못 가득 붉으니/ 사람들 부용꽃이 나보다 더 예쁘다네/ 아침에 제방 따라 걸었더니/ 사람들은 부용꽃을 보지 않네'라고 번역된다.
운초는 문학적인 자부심이 대단하여 자신을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했다. 발랄하고 다채로운 작품을 써서 남자를 무색하게 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의 작품집인 '운초집'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시는 규수문학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후 쓴 그녀의 시는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시인은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연꽃을 두고 시샘하고 있다. 부용이 연못 가득 붉게 피었는데 사람들이 부용이 예쁘다고 말한다. 다음 날 아침 제방 따라 걸어가 보니 많은 사람들이 부용은 보지도 않고 자기만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분명 내가 부용보다 더 예쁘지"라고 말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쁘게 보이려는 여심을 그대로 나타내 보인 작품이다. 화장을 예쁘게 하는 것도, 옷이며 장신구를 몸에 예쁘게 치장하는 것도 다 여성의 본능이자 반사적인 표현 방법이다. 종장 처리의 기막힌 기법을 만나게 된다. 다음 날 아침 왜 사람들은 부용을 쳐다보지도 않고 시인인 화자만을 쳐다보는 것일까라는 구절에서 유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부용은 조선시대의 여류 문인이다. 호는 운초(雲楚). 가무'시문(詩文)에 뛰어나 정조 때 평남 성천(成川)에서 이름 높은 기생이었으나 뒤에 김이양(金履陽)의 소실로 들어갔다. 운초가 남편을 애도하는 시에서 "15년 함께 지내오다 오늘 돌아가시니/ 백아가 이미 끊은 거문고 내 다시 끊노라"라고 한 시구를 보면 운초에게 김이양은 남편이기보다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던 '지기'(知己)였다.
유고집(遺稿集)에 '운초집'(雲楚集)이 있고, 일제강점기 때 김호신(金鎬信)이 편찬한 '부용집'(芙蓉集)이 전한다. 여기에 수록된 시 30여 수는 규수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작품에 '유회'(遺懷), '대황강노인'(待黃岡老人), '오강루소집'(五江樓小集), '억가형'(憶家兄), '증별금영'(贈別錦營), '삼호정만조'(三好亭晩眺), '증령남노기'(贈嶺南老妓) 등이 있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행여나 임이 오시지 않나 속은 것이 몇 번인고 : 春風 / 운초 김부용
[출처 : 홍천신문 2020.12.16.]
‘봄바람’났다고 말한다. 차가운 북풍이 몰아친 한 겨울이 지나고 나면, 훈풍이 불면서 마음을 설레게 한다. 봄은 따스한 공기뿐만 아니라 마음속에도 와 있다. 속설에 두툼한 겨울옷을 벗고 봄옷으로 갈아입은 이웃집 아가씨를 곁눈질해 보았던 노총각은 영문도 모르면서 ‘봄바람 났다’고 말했었다. 아주머니들도 그렇게 수군댔다. 수양버들 곱게 늘어진 창을 열고 기대서니, 임 없는 작은 뜰엔 푸른 이끼만 자란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春風(춘풍) / 운초 김부용
수양버들 늘어진 창을 열고 기대서니
임 없는 작은 뜰엔 푸른 이끼 자라고
주렴 밖 봄바람 일면 님 오시나 기다려.
垂楊深處依開窓 小院無人長綠苔
수양심처의개창 소원무인장록태
簾外時聞風自起 機回錯認故人來
렴외시문풍자기 기회착인고인래
행여나 임이 오시지 않나 속은 것이 몇 번인고(春風)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 ? ~ ?)으로 여류시인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수양버들 곱게 늘어진 창을 열고 기대서니 / 임 없는 작은 뜰엔 푸른 이끼만 자라고 있네 // 주렴 밖에 가끔씩 봄바람이 저절로 일면 / 행여나 임이 오시지 않나 속은 것이 몇 번인고]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봄바람에 취하면서]로 번역된다. 봄처녀, 봄바람, 봄의 속삭임, 강남 갔던 제비의 재회 등은 희망을 약속해 주었다. 움츠렸던 겨울은 답답하고, 찌는 듯한 여름은 땀 때문에 싫고, 가을은 소소하여 봄만 같지는 못하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사계절 중에서 시상을 일으키기에 이만큼 좋았던 계절은 없다.
시인은 수양버들과 푸른 이끼라는 봄소식 끌어안고 가만히 창을 열고 보니, 뜰에는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다는 작은 시심 속에 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는 시상이다. 수양버들 늘어진 창문을 열고 가만히 기대어 서보니, 임 없는 작은 뜰에는 푸른 이끼만 자라고 있다고 했다. 이따금 임과 함께 뜰을 거닐었던 추억 한 아름을 만들었던 모양이다.
화자는 봄바람이 먼저 임의 뺨에 앉았다가 온 것으로 간주하면서 우리임이 오시는 것은 아닌지 속았던 후정後情의 시상을 일으켰다. 그래서 화자는 주렴 밖에는 가끔 봄바람 절로 일면 행여나 우리임이 오시는지 속았던 것이 몇 번인가라고 자답을 유도해 본다.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한 화자는 임을 원망했을까? 봄바람을 원망했을까? 해답을 찾지 못한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창을 열고 기대서니 작은 뜰엔 푸른 이끼 주렴 밖에는 봄바람이 임 아니나 속았거늘’이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 ? ~ ?)으로 조선시대의 여류시인이다. 삼호정시단의 동인으로서 같은 동인인 경산과 많은 시를 주고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문학적인 자부심이 대단하여 자신은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다. 시상이 발랄하고 다채로운 작품이 많다.
【한자와 어구】
垂楊: 수양버들 늘어지다. 深處: 깊은 곳. 依開窓: 창을 열고 의지하다. 小院: 작은 뜰. 無人: 임이 없다. 長綠苔: 푸른 이끼 자란다. // 簾外: 주렴 밖. 時聞: 때때로 들린다. 風自起: 바람이 스스로 일다. 機回: 몇 번인가. 錯認: 속은 일. 故人來: 임이 오시지 않나.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출처]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 평남 성천군 출신 기생, (1805~1854 추정)|작성자 이북도민작가 이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