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먹거리 ‘짜장면’에 얽힌 사연들
(작성 중 : 국시 시리즈 2)
필자가 중국음식을 최초로 먹어본 때는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인 1956년 가을쯤이었다. 지금의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 사거리에서 울산(蔚山) 쪽 100여 m에 위치한 버스정류소 쯤에 위치한 ‘중국집’에서였다.
비포장 자갈길 2차선 변에 나지막한 기와집 한쪽 벽을 헐고, 홀과 주방(廚房)을 만든 엉성한 식당이었다. 주인과 그 가족이 6.25 때 윗녘에서 피난 나온 피난민(避難民)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울쯤에서 중국집 주방장을 했거나, 견습공 정도를 했던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2학년 때인데, 누구와 함께 무슨 돈으로 사먹었는지는 몰라도 ‘우동’을 사먹은 일이 있었다. ‘우동’이라는 말도 그때 그 집에서 처음 들은 말이었다.
지금의 우동
그때의 그 집 ‘우동’은 노란 기름이 동동 뜨는 뽀얀 닭국에 굵은 국수를 뽑아 익힌 후 커다란 사기 주발(周鉢)에 그득하게 담아 줬는데, 맛이 얼마나 좋았는지 필설(筆舌)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물론 당시에는 돌멩이라도 씹어 먹을 정도로 식욕이 왕성(旺盛)했고, 연례적(年例的)으로 치러야 하는 ‘보릿고개’ 때문에 웬만한 음식은 그 자체로 꿀맛이었다.
그러나 이후 5년여에 걸쳐서는 이 ‘우동’을 한 번도 먹어본 일이 없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짜장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당시의 외동읍(外東邑) 촌로들은 ‘짜장면’을 ‘짜장면 국시’라고 일컬어 왔다. ‘짜장면’의 ‘면(麵)’자가 ‘국수’를 뜻하는 한자(漢字)라는 것을 모르셨기 때문에 뒤에 ‘국시’라는 말을 더 보탠 것이다.
필자가 ‘짜장면’을 맨 처음 먹어 본 때는 1961년, 무작정 상경에 의한 야간고등학교(夜間高等學校) 재학시절이었다. 공장일과 학과수업에 온몸이 지쳐 밥 짓기가 싫을 때는 가끔 ‘짜장면’을 사 먹었다.
짜장면
필자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실리(入室里) 중국집에서 사먹었던 ‘우동’ 값은 지금 돈으로 7원이나 1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돈으로는 700환이나 1,000환(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무작정(無酌定) 상경하여 서울에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 초에는 ‘우동’과 ‘짜장면’ 가격이 20원(중국집 기준), 1970년대 초에는 60원, 1980년대 초에는 400원, 지금은 4천여 원까지 값이 변천해 왔다.
여기에서 먼저 몇 가지 중국음식의 개요(槪要)와 변천과정(變遷課程), 그리고 중국 음식명의 음운학적(音韻學的) 분석을 곁들여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울면’을 알아본다. ‘울면’은 면발이 가는 ‘면’을 묽은 녹말가루 국물에 말아 내는데, 어디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는지 정확한 근거가 없다.
‘온로면(溫滷麵)’으로 표기되는 ‘울면’은 그 한자음 ‘온로면’과도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이 말의 북경음(北京音)인 ‘원루미앤(wēnlŭmiàn)’의 ‘원루’와도 음운(音韻) 대응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울 면
우선 음절수(音節數 ; 소리마디 수)에 있어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는 또 언뜻 보아 권설음화(捲舌音化 ; 혀끝을 경구개를 향해 뒤로 구부려 내는 자음)의 흔적을 의심해 볼 수도 있으나, 역시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첫 음절(音節)에 ‘-ㄹ’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울’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일부 학자들은 중국음(中國音) ‘원루’가 ‘울’로 축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루’에 먼저 자음동화(子音同化) 현상이 일어나 ‘월루’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신라’가 ‘실라’로, ‘논란’이 ‘놀란’으로 발음(發音)되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어느 것이 먼저인지 정확히는 알 수는 없으나, ‘월’이 단모음화(單母音化) 하면서 둘째 음절 ‘루’가 탈락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현대 중국어(中國語)에서는 이러한 동화현상(同化現象)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말의 영향을 필연적(必然的)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화교(華僑)들 언어에서 이런 현상의 발생은 전혀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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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기스면’을 알아본다. ‘기스면’은 가늘게 뽑은 밀국수를 닭고기 삶은 국물에 말아 먹는 중국식(中國式) 국수를 말하는데, 이는 ‘계사면(鷄絲麵)’이라는 명칭에서 나온 말이다.
기스면
실(絲)처럼 가는 소면(素麪)을 닭고기, 대파, 생강, 국간장, 청주, 소금, 물, 조미료 등을 재료로 한 닭고기 육수에 말아내는 국수를 ‘기스면’이라고 한다.
만드는 방법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국수는 삶아서 찬 물에 헹구어 놓고, 끓는 물에 대파 흰 부분과 생강을 넣은 후 닭고기를 1시간 정도 삶아 고기는 건져내고, 국물은 체에 받쳐 육수(肉水)를 만든다.
육수를 국간장, 소금, 조미료로 간을 하여 끓인 후 ‘소면(素麪)’을 국물에 토렴하여 뜨겁게 해서 그릇에 담고 끓는 국물을 부어 내면, 맛있는 ‘기스면’이 된다.
기스면
여기에서 말하는 ‘토렴한다’는 말은 밥이나, 국수 따위에 더운 국물을 여러 번 부었다 따랐다 하여 덥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앞서 말한 대로 ‘기스면’의 한자어는 ‘계사면(鷄絲麵)’이며, 중국식 발음은 ‘지쓰미엔’이다. 그러면 ‘기스면’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어떻게 나온 말일까.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지방 방언에서 찾으면 해답이 나온다.
중국식(中國式) 표준어 발음 ‘지쓰’는 산동방언(山東方言) 발음으로 ‘기스’가 된다. 예로부터 중국의 산동인(山東人)들은 헤어질 때 인사인 표준음 ‘짜이지엔(再見)’을 ‘짜이기엔’으로 발음하는 것처럼 ‘지’를 ‘기’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기스면의 주재료 소면
그리고 ‘면’은 중국(中國)에서 우리나라에 맨 먼저 이주(移住)한 산동성 사람들이 우리나라식으로 발음(發音)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기스면’은 ‘지쓰미엔’ 또는 아예 우리나라식 발음으로 ‘계사면’으로 하는 것이 옳은 사용법이라 할 수 있다. 산동방언(山東方言)과 우리식 한자어(漢字語)가 결합된 ‘기스면’이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제대로 된 모양새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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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소면(素麵)’과 ‘소바’, 그리고 이들 두 가지 국수의 차이점을 알아보기로 한다. 회원님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소면(素麵)’은 일반적으로 고기 등의 ‘고명’을 얹지 않은 밀가루 국수를 뜻한다.
소복(素服)이 아무 색깔도 무늬도 없는 흰옷인 것처럼, 소면(素麪) 역시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은 그냥 삶은 ‘국수사리’를 말한다.
그리고 ‘소바(蕎麥 ; 교맥)’는 메밀가루로 만든 일본의 ‘면(麵)’요리를 말하는데, 메밀국수를 뜨거운 국물이나 차가운 간장에 무·파·고추냉이를 썰어 넣고 찍어 먹는다. ‘소바(蕎麥)’는 메밀을 뜻하며, 메밀국수는 ‘소바키리(蕎麥切り)’라 한다.
메밀을 ‘면’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메밀국수는 최초로 일본의 나가노현(長野縣)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승려(僧侶)들이 먹던 ‘쇼진요리’였다가 일반가정에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소 바
처음에는 메밀가루만으로 만든 ‘기소바’나 ‘쥬와리소바’가 일반적(一般的)이었는데,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러 메밀과 밀가루를 섞어 만든 쫄깃한 ‘소바’가 보급(補給)되었다고 한다.
그 후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10:1로 섞은 ‘소토이치(外一)’, 9:1로 섞은 ‘잇큐(一九)’, 5:5로 섞은 ‘도와리(同割)’ 등 다양한 ‘면’이 개발되었다. 이중에서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2:8로 배합한 ‘니하치(二八)’를 이상적(理想的)인 ‘소바’로 본다.
‘소바’의 종류에는 채반에 건진 ‘면(麵)’을 ‘츠유’에 찍어 먹는 ‘모리소바’, 김을 뿌린 ‘면’을 ‘츠유’에 찍어 먹는 ‘자루소바’, ‘자루소바’에 ‘덴푸라’를 얹은 ‘텐자루소바’ 등이 있다. 곁들여 먹는 음식에 따라 유부소바·튀김소바·치킨소바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츠 유
또 철판(鐵板)에 야채와 고기와 함께 볶아서 요리하는 ‘야키소바’도 있다. 한편, 일본(日本)에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도시코시소바’를 먹는 풍습(風習)이 있고, 이사를 하면 ‘힛코시소바’를 만들어 이웃에게 돌리기도 한다.
위에서 말한 ‘츠유’란 메밀국수, 즉 ‘소바’를 찍어 먹는 간장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 사람들은 이 ‘츠유’에 물을 타서 ‘소바(메밀국수)’나 ‘우동’ 등을 찍어 먹는다. 국수와 우동을 찍어먹는 ‘소스’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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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가 나온 김에 우리가 즐겨 먹는 ‘라면’의 유래와 어원(語源)에 대해서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라면’의 원조(元祖)는 중국으로서 1700여 년 전에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면’의 한자어 어원은 ‘랍면(拉麵)’이다. 즉 ‘면’을 반죽한 후 길게 늘어뜨려(拉) 탕에 넣어 만든 국수라는 뜻으로 중국식(中國式) 발음으로는 ‘라미엔’이라 한다.
후에 일본(日本)이 1833년 메이지유신 기간 중에 만들기 시작하여, 2차 대전 후 꼬불꼬불한 ‘인스턴트 라면’으로 개발하여 대중화(大衆化) 시켰다고도 한다. 일본식 발음은 ‘라멘’이다.
라 면
우리나라에는 1960년대에 들어와 ‘라면’이라는 이름으로 대중화(大衆化)되었다. 우리가 먹는 ‘라면’은 일본(日本)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그 근본 유래는 중국(中國)이고, 발음은 ‘랍면(拉麵)’이라는 ‘랍(拉)’의 중국어 발음인 ‘라’와 우리나라식 발음인 ‘면’이 결합되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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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과 다른 ‘면(麵)’에 대한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이제 본격적(本格的)인 ‘짜장면’ 얘기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말한 ‘짜장면’은 표준어(標準語)인 ‘자장면’을 말하는데, 중국 어원(語源)으로 해석하여 ‘짜장면’은 잘못이고 ‘자장면’이 맞다고 주장되어 왔다.
짜장면
그러나 두 가지 말 모두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제물포(濟物浦) 지역에 이주한 중국인(中國人)들이 쓰기 시작한 말이라는 점과 이 두 음식의 탄생과 쓰임이 모두 같은 곳에서 일어난 만큼 다른 근원(根源)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짜장면’을 우리나라 음식이라고도 한다. 개화기 때 인천(仁川)에 와서 살던 산동성(山東省) 출신의 중국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기 시작한 음식이 ‘짜장면’이라는 근거에서다.
중국 산동(山東) 지방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음식이 있기는 하나, 이 음식이 화교(華僑)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탄생한 음식이 ‘짜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짬뽕’처럼 중국인에 의해 일본(日本)에서 개발되어 일본말로 ‘짬뽕’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우리나라 고유의 ‘짜장면’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固有)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짜장면 곱배기
‘자장면’은 한자로 ‘炸醬麪’으로 쓰고, 국수를 ‘중국 된장’에 비빈 중국 음식이라는 것이 그 해석이다. 그러나 방송인 정도만 ‘자장면’이라 발음하는 ‘짜장면’이 마침내 표준어가 되었다.
국립국어원은 2011년 8월 31일 국민 실생활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표준어(標準語) 대접을 받지 못한 ‘짜장면’과 먹거리를 비롯한 39개 단어를 표준어로 인정하고, 이를 인터넷 표준국어대사전(標準國語大辭典)에 반영했다고 말했다.
이하에서는 이 말과 정부 당국의 조치(措置)에 상관없이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짜장면’으로 통일한다.
짜장면 집
필자가 향리(鄕里)에 거주하던 1950년대 말에는 너무나 돈이 귀한 시절이기도 했었고, 시골의 경우 보리밥이든 콩밥이든 먹을 게 있었기 때문에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외식(外食) 자체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짜장면’을 사먹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 경주(慶州) 지방에서는 읍내(邑內)를 제외하고는 ‘중국집’도 없었고, 중국음식을 먹어본 사람도 드물어 관심(關心)을 가질 겨를조차도 없었던 시절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국집’이란 사전(辭典)에도 없는 말로 별 뜻이 없이 이르는 말이고, 정확하게는 ‘반점(飯店)’이라고 한다. 그리고 ‘반점(飯店)’은 ‘중국 음식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필자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우동’이든 ‘짜장면’이든 싫도록 먹기도 했었고, 또 어느 시기(時期)에 이르러서는 ‘국수 꼬랭이’ 자르듯 중국(中國) 음식을 잘라버리기도 했었다.
군복무(軍服務) 때의 일이다.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에 소재하는 ‘중국집’에서 거의 1년 반 동안 1주일에 세 끼씩 ‘짜장면’이나, ‘짬뽕’을 포식(飽食)한 일이 있었다.
수요일(水曜日) 날이나, 주일(主日 ; 일요일)날 교회(敎會)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외출을 나가면, 교회신도인 ‘중국집’ 내외분이 언제나 자기 집 안방으로 필자들을 초청(招請)하여 ‘짜장면’파티를 벌여주었기 때문이다.
짜장면 파티
처음에는 교회(敎會) 측에서 식대(食代)를 부담해 줬지만, 교회 측에서 부담이 되자 ‘중국집’을 경영하는 내외분이 자청하여 무상(無償)으로 제공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자(信者)다운 박애정신이기도 했었다.
여기에서 ‘필자들’이라 함은 그 당시 필자가 근무하던 부대(部隊) 안에 필자를 비롯한 기독교(基督敎) 신도출신 병사들의 모임인 ‘신우회(信友會)’ 모임의 구성원(構成員)들을 말한다. 필자는 그 당시 일등병(一等兵)에 불과했지만, 이 모임을 만들어 그 리더역을 맡았다.
다소 상급부대라 할 수 있는 참모부(參謀部)에 근무한 탓으로 계급보다는 주요 직책(職責)을 맡았던 탓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기독교(基督敎) 병사들은 거의가 하급부대의 소총병(小銃兵)들이어서 자연스레 리더역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총병
그리고 이때 그 중국집에서 ‘신우회(信友會)’ 병사들에게 중국음식을 무시로 대접해 주는 또 한사람의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서울에서 화천(華川) 지방을 무대로 피복상(被服商)을 하는 부인이었다.
경제적(經濟的)으로 여유가 있어서였는지는 몰라도 가끔씩 필자들을 그 ‘중국집’으로 초청하여 ‘짜장면’파티를 베풀어 주곤 했었다.
그녀도 필자가 출석하던 교회와 같은 교단(敎團)의 기독교 신도(信徒)였는데, 화천(華川) 지방에 나오기만 하면, 필자들이 다니던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곤 했었다.
그 시절 ‘짜장면’ 포식(飽食)의 내력을 잠시 회고해 보기로 한다. 육군 이등병(二等兵) 당시 두 번째로 이 지역에 부대배치를 받은 필자는 군부대(軍部隊) 주둔지역의 한 교회(敎會)를 찾아갔다.
부대(部隊) 안에 군종교회(軍宗敎會)와 군목(軍牧)이 있기는 했지만, 하는 품이 별로일 것 같아 민간인(民間人) 지역 교회를 찾아간 것이다.
2년 정도면 제대하고 귀향(歸鄕)해 버리면, 그만인데도 교회에서는 ‘새신자’가 한 사람 나타났다면서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교회예배(敎會禮拜)를 파한 뒤, 앞서 말한 그 부부가 운영하는 ‘중국집’으로 가서 성대한 환영파티에 참석하였다.
중국집 내부
필자는 이 교회 인근부대(隣近部隊)로 전입되어 오기 전에는 춘천(春川)에 있던 고사포부대(高射砲部隊)에서 6개월 정도 근무하여 이곳에서 2년만 근무하면 제대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의 부대배치(部隊配置)도 두 번째가 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날 필자는 오랜만에 허리띠를 끌러놓고, 곱빼기 ‘짜장면’에 솥뚜껑만한 쟁반에 그득하게 담아낸 ‘군만두’를 포식하고, 사무실 상급자(上級者)들과 동료들을 생각해서 한 ‘봉다리’ 얻어 오기도 했었다.
메뉴는 ‘짜장면’에 ‘군만두’ 정도였지만, 1960년대 초에는 너무나 귀한 음식이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필자가 기독교 신도병사(信徒兵士)들을 인솔하여 데리고 가면, 교회에서는 예의 그 ‘중국집’에서 환영파티를 치러주었다.
이 때문에 부대(部隊) 안에서는 일요일(주일) 날 필자만 따라가면, ‘짜장면’을 ‘곱빼기’로 대접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병사(兵士)들이 참여하기도 했었다.
주방 내부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짜장면’이 문제가 아니고, 필자들에게 경쟁적(競爭的)으로 ‘짜장면’을 대접하는 중국집 부인과 피복상(被服商) 부인 간에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암투(暗鬪)였다.
‘짜장면’ 시절이 1년여 지나고부터였다. 필자가 교회에 부설(附設)한 교회학교 부장(部長)으로 있을 때인데, 그때부터 ‘중국집’ 부인과 피복상(被服商) 부인이 필자를 대하는 태도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필자들에 대한 ‘짜장면’ 대접을 점차적(漸次的)으로 줄이면서 필자에 대해서만 용돈을 제공하거나, 내의(內衣)나 양말로 바꾸다가 나중에는 군복(軍服)과 군화(軍靴) 선물로까지 이어졌다.
춘천이나 용산(龍山) 등지에서 미군 작업복(作業服 ; 그때는 지금의 ‘전투복’을 ‘작업복’이라 했고, ‘전투모’도 ‘작업모’라고 했다)을 구입하여 교회 옆 양복집에 맡겨 필자의 몸에 맞도록 고쳐 입도록 했고, 어떻게 알았는지 군화(軍靴)의 사이즈를 알아내어 새 군화를 사오기도 했었다.
미련한 필자는 이때서야 그녀들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그녀들은 필자를 자신들의 ‘딸내미’와 엮어주기 위한 사전공작(事前工作)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집 부부는 남편은 중국인(中國人)이고, 부인은 우리나라 여성이었는데, 춘천여고에 다니는 예쁜 ‘딸내미’가 있었고, 서울에서 왕래하며 피복상(被服商)을 하는 부인은 자기 ‘딸내미’가 당시의 한양대학교에 재학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눈치 첸 필자는 한동안 고뇌(苦惱)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그 교회에 출석할 수가 없었다.
그 시절 교회
이런 상황이 그대로 지속(持續) 되면, 필자의 무책임이 그만큼 가중(加重)되게 될 것이며, 어느 쪽이든 한쪽은 큰 상처(傷處)를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파장(波長)은 교회 전체에 그만큼 부정적(否定的)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며칠간에 걸친 무거운 고뇌(苦惱)와 간절한 기도생활(祈禱生活) 끝에 출석교회를 바꾸기로 했다. 그것도 민간인(民間人)들의 접근이 불가능한 부대 내의 군종교회(軍宗敎會)를 선택했다.
그녀들이 원천적(源泉的)으로 필자에게 접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출석교회의 목사님과도 상의(相議)하고, 군종교회의 군목 목사님과도 상의를 마쳤다.
군목(군종장교)
출석교회 목사님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자의 제의(提議)에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승낙을 하셨고, 군종교회 군목(軍牧 ; 육군 소령)도 언제라도 오면 환영(歡迎)하겠다고 하셨다.
2주 동안 운영하던 ‘여름성경학교’가 끝나던 어느 여름 주일날, 교회학교(敎會學校) 학생들을 모아 놓고, “선생님이 사정이 있어 다른 부대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엉성한 변명(辨明)을 하고 교회를 떠나려는데, 중학생(中學生)과 초등학교 학생들인 아이들이 울며불며, 팔과 다리에 매달려 놓아 주지를 않는다.
조금은 감성적(感性的)인 필자도 눈시울을 적셨다. 문제는 성인(成人)들의 예배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교회(敎會)를 떠나야 하는데, 아이들이 자지러지듯 울고 매달리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목사님이 나서서 아이들을 달래고 얼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중국집’ 부인과 피복상(被服商) 부인이 교회에 도착하기 전에 교회를 떠나야 하는데, 아이들이 벌떼 같이 달라붙어 놓아 주질 않으니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그 시절 교회 여름성경학교
그런데 예상치 않았던 구원(救援?)의 손길이 나타났다. 지나가던 헌병(憲兵) 순찰차가 교회 앞에 멈추어 이 모양을 유심히 관찰(觀察)하더니 헌병중사와 병장이 교회 마당 안으로 다가온다.
필자의 복장(服裝)이 아무래도 군인(軍人) 같은데, 윗옷은 민간인 반팔 와이셔츠를 입고, 바지는 군복(軍服) 바지에 신발은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교회 안에서 입고 신는 복장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길러 기름을 번쩍번쩍하게 바르고 있었던 터라 장교(將校)냐고 물어 보길래 거짓말은 할 수 없고, 사병(士兵)이라고 했더니 외출증을 보잔다. 마이가리 육군병장 외출증을 보여주니 복장위반(服裝違反)이라며, 헌병대(憲兵隊)로 가야 된단다.
당시의 필자
교회 방에 가서 군복(軍服)을 입고 가겠다니 그러면 복장위반이 안되니 그냥 가잔다. 이번에는 수십 명의 교회학교 아이들이 방성대곡(放聲大哭)을 하면서 헌병(憲兵)들의 팔과 다리까지 붙들고 늘어진다.
헌병(憲兵)들이 아이들을 달래다 겁을 주다 별짓을 다 하다가 겨우 필자를 아이들에게서 때어내어 찦차에 탔다. 그리고 어쨌든 이렇게 해서 교회(敎會)를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동안 목사님은 교회 신도인 사단(師團) 보인과장에게 전화로 연락을 했고, 보인과장은 헌병대 주번사관(週番士官)에게 즉시 연락하여 필자가 고무신 차림으로 헌병대(憲兵隊)에 도착하자 말자 주번사관실로 불려갔다.
교회학교 학생들
희한한 복장으로 주번사관실(週番士官室)에 들어서자 사단 보인과장에게서 연락을 받았다면서 빨리 돌아가서 제대로 복장을 하고 부대로 돌아가라고 일갈한다.
고맙기는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교회(敎會)로 돌아갈 수가 없으니 부하들을 시켜 군복(軍服)과 군화를 좀 가져다 줄 수 없느냐”고 부탁을 하자 “왜 그러느냐”고 되묻는다.
“교회에 돌아가면 아이들에게 잡혀 부대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된다”고 구구절절이 설명(說明)을 하고, 함께 곤욕을 치른 순찰헌병들이 보조설명을 하자 순찰차(巡察車)가 다시 가서 필자의 군복과 군화를 가져왔다.
물론 이때의 군복(軍服)은 피복상 부인이 서울에서 사온 것이고, 군화(軍靴)는 중국집 부인이 춘천(春川)에서 사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 부대로 돌아간 이후부터 필자는 제대하는 날까지 그 ‘중국집’ 부인과 피복상(被服商) 부인을 다시 만나 본 일이 없다.
이들에게는 목사님께서 적절한 말로 상처 받지 않도록 위안(慰安)해 줄 것을 부탁드렸고, 목사님도 그렇게 해주겠다고 다짐하셨다.
그리고 함께 다니던 기독교 병사들에게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얘기하고, 그들끼리라도 그 교회에 계속 다니라고 당부(當付)를 했다.
뉴욕 중국집
다만, ‘중국집’ 부인은 필자의 주소(住所)를 알고 있어서 제대 후에 필자의 집으로 두세 번 다녀가신 일이 있었다. 역시 ‘딸내미’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러나 앞쪽 어느 파일에서 소개한 대로 필자에게는 고교시절(高敎時節)부터 장래를 약속한 야간부 여고생(女高生)이 있었기 때문에 얘기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필자를 만나러 오셨을 때는 그 부인의 판단을 돕기 위해 그 야간부 여고생(그때는 24세의 여대생이었다)을 배석(陪席)시켜 약혼자라고 인사를 시키기도 했었다.
“약혼녀(約婚女)를 보니까 제 욕심이 너무 과했다고 생각됩니다”라면서 촘촘히 되돌아가신 그 중국집 부인은 지금껏 소식을 모른다. 피복상(被服商) 부인도 마찬가지다. 지금쯤 그녀들은 모두 천국(天國)에 계실 것이다.
짜장면 곱배기
너무나 마음 아픈 이별(離別)을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필자의 마음이 너무 여려 차마 매정(媒精)하게 거절하지 못한 우유부단(優柔不斷)함이 문제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필자와 함께 그 교회에 출석하던 기독교 병사들은 중국집이나, 피복상(被服商) 부인에게서 극진한 대접(待接)을 받았다. 당시의 전방 교육사단(敎育師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필자의 부대 옆에 위치한 수색중대(搜索中隊) 중대원들은 너무나 배가 고파 장교식당 주방(廚房) 옆 수체구멍에 엎드려 오물(汚物)과 함께 떠내려 오는 두부조각을 건져 먹다가 상급자(上級者)한테 들켜 죽도록 매를 맞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초라한 병사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당시의 ‘무지렁이’ 병사(兵士)들은 사실상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높은 놈들이 주부식(主副食)을 모조리 떼먹어버려 언제나 배를 곯았고, 영양실조(營養失調)에 시달려야 했었다.
무지렁이 소총병(小銃兵)들은 주린 배를 쓸어내리고 있는데, 권력부대(權力部隊)에서는 애완용으로 키우는 ‘개새끼’한테도 쇠갈비를 구워 먹이고 있었다.
게다가 ‘배때지’ 부른 ‘개새끼’는 갈비를 처먹지도 않고 장난감처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개지랄(개가 개같지 않게 '지랄'을 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필자가 자주 목격한 일이었다)’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불쌍한 그들 무지렁이 병사들은 평일에는 하루 8시간의 전투훈련(戰鬪訓練)을 받아야 했고, 휴일에는 소 대신 쟁기를 끌면서 이른바 ‘자급자족(自給自足)’이라는 ‘멍에’를 끌고 다녀야 했었다.
사람이 끄는 쟁기질
쌀(압맥을 절반 이상 섞은 보리쌀이기도 했다)은 줄테니 부식(副食)은 스스로 채소농사를 지어 자급자족(自給自足)하라는 방침에 따라 토요일 오후에서 일요일까지는 모든 병사들이 6.25 당시부터 ‘묵전’이 되어 있는 ‘비탈밭’을 쟁기로 뒤집어엎어 채소(菜蔬) 농사를 지었다.
낡아빠질 대로 낡아빠진 작업복(作業服)이 훈련 중에 찢어진 것은 농사일을 마친 후 희미한 남폿불 밑에서 꿰매 입었고, 내복 ‘깃’에 버글버글하는 ‘이’와 ‘새가리(서캐)’는 어두운 불빛에서 잘 식별(識別)되지 않아 ‘깃’을 이빨로 질겅질겅 씹어 대충 잡아 입곤 했었다.
그 시절 군인들
날만 세면 교육출동(敎育出動)이었고, 공휴일(公休日)만 되면 농사일을 하느라 소와 같이 쟁기를 끌어야 했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10여년 이상 묵혀둔 ‘묵전’이라 거름을 주지 않아도 채소농사(菜蔬農事)가 잘 되기도 했지만, 일요일(日曜日) 오후만 되면 모두들 ‘똥지게’나 '똥장군'을 지고 재래식(在來式) 변소에서 인분을 져 날랐다.
인분 운반
(지게에 진 것을 '똥장군'이라 한다)
해마다 농사철이면 농부(農夫)도 아닌 병사들이 일요일마다 ‘개 같은 날의 오후’를 맞이하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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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꿈결 같기도 했던 ‘짜장면’ 시절과 군종교회(軍宗敎會) 시절도 유수(流水)와 같이 흘러 2년이 되었다.
제대하던 날 사단(師團) 연병장에서 새벽같이 군용트럭을 타고 춘천역에서 경춘선(京春線) 열차를 타고 귀가한 이후, 중국집 부인이 몇 차례 다녀가기는 했지만, 추억의 ‘짜장면 시절’은 다시 되 오지 않았다.
그리고 필자는 그때 이후 ‘짜장면’은 입에도 대지 않고 있다. 어쩌다 무심코 중국집을 들어서다가도 그 때의 추억이 상기(想起)되면, 슬그머니 되돌아서서 나와 버리곤 한다.
중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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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일반적(一般的)인 ‘짜장면’ 얘기를 잠시 되새겨 본다. 가족들이 ‘짜장면’ 한 그릇씩 먹는 것도 큰 행사였던 그 시절에는 중국집도 주문(注文)이 들어오면 주인이 직접 배달을 했다.
그러다가 살림이 조금씩 좋아지고, 장사가 잘 되니까 이때부터 배달(配達)하는 꼬마가 나타났고, 무슨 요리(料理)든 집에서도 편히 앉아 시켜먹을 수 있게 되었다.
짜장면 배달
그리고 지금은 제주도(濟州道) 마라도에까지 가서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고 외치는 광고(廣告) 멘트가 아이들 세계에까지 파고들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
갯가에서 낚시하다 ‘짜장면’을 시켜도, 그리고 경기가 열리는 운동장(運動場)에서 응원을 하다 ‘짜장면’을 시켜도 ‘철가방’을 든 ‘짜장면’ 배달원(配達員)이 잽싸게 달려온다. 그리고 그렇게 야외에서 먹는 ‘짜장면’ 맛은 별미 중의 별미가 된다.
철가방
학창시절(學窓時節),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중국집 방에 둘러앉아, 관심 있는 여고생(女高生)의 근황을 얘기하면서 먹는 ‘짜장면’ 맛도 환상적(幻想的)이었다.
얼마나 맛있었으면 손목시계를 사이좋게 며칠씩 돌려가며, 잡혀 놓고 외상 ‘짜장면’을 시켜 먹었을까. 그릇의 면(麵)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보면 먹기도 아까울 정도였다.
지금이니까 듣도 보도 못한 값비싼 ‘짜장면’들이 메뉴판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시절 학창시절(學窓時節)에는 ‘간짜장’이 얼마나 고급스럽고 맛있게 보였는지 모른다.
간 짜장면
내 돈을 주고 사먹든, 남이 사주든, 식대(食代)를 치르는 사람이 큰맘을 먹어야 시켜먹을 수 있었던 것이 ‘간짜장’이었다.
그런데 그냥 ‘짜장면’과 ‘간짜장면’을 제대로 구분하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간짜장면’이 그냥 ‘짜장면’보다 조금 고급(高級)으로 알거나, 값이 비싼 것으로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간짜장
때문에 옛적이나 지금이라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은 무턱대고 ‘간짜장면’을 시키곤 한다. 이왕이면 고급(高級)의 것을 먹거나, 고급스러워지고 싶은 충동(衝動)에서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 차이를 간단하게 일별해 본다.
우선 그냥 ‘짜장면’에는 녹말가루를 풀어 걸쭉하게 만드는데, 이건 ‘짜장면’이 빨리 식지 않게 하는 효과와 함께 ‘면(麵)’이 잘 비벼지도록 하는 역할(役割)을 한다.
녹말 죽
그러나 ‘짜장면’의 진한 맛을 원하는 사람들은 녹말가루를 풀지 않고, ‘짜장면’을 볶기만 해서 먹는데, 이 ‘짜장면’이 바로 ‘간짜장면’이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나라로 말로 하면 ‘건(乾)짜장면’이라는 뜻이다.
결국 녹말가루를 넣지 않은 ‘간짜장’은 비싸고, 녹말가루를 넣은 그냥 ‘짜장면’은 더 싸게 팔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재료(材料)가 더 들어가는 것이 싸고, 재료가 덜 들어가는 것이 비싸다는 얘기가 된다. 맛도 ‘그냥 짜장면’이 오히려 맛이 있는 편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잠시 당시의 ‘중국집’ 음식 메뉴와 지금의 가격(價格)을 비교해 보기로 한다. 일부 메뉴는 최근의 것이다. 당시에는 이렇듯 많은 메뉴가 있지도 않았고, 만들어도 가격이 너무 비싸 사먹지도 않았다.
메 뉴 |
가 격 |
메 뉴 |
가 격 |
짜 장 |
4,000 |
마파 두부밥 |
5,500 |
간 짜 장 |
4,500 |
잡 채 밥 |
6,000 |
삼선 간짜장 |
6,000 |
볶 음 밥 |
5,000 |
유 니 짜 장 |
5,500 |
삼선 볶음밥 |
6,000 |
유 슬 짜 장 |
5,500 |
새우 볶음밥 |
6,500 |
짬 뽕 |
4,500 |
짜 장 밥 |
5,000 |
삼 선 짬 뽕 |
6,000 |
볶 음 밥 |
5,000 |
굴 짬 뽕 |
6,000 |
삼선 짬뽕밥 |
6,500 |
울 면 |
4,500 |
짬 뽕 밥 |
5,000 |
삼 선 울 면 |
6,000 |
오므 라이스 |
5,500 |
우 동 |
4,500 |
탕 수 육 |
10,000 |
삼 선 우 동 |
6,000 |
오징어탕수육 |
13,000 |
기 스 면 |
6,000 |
사천 탕수육 |
13,000 |
군 만 두 |
4,000 |
덴 뿌 라 |
10,000 |
물 만 두 |
4,000 |
난 자 완 스 |
23,000 |
유 산 슬 밥 |
10,000 |
라 조 육 |
17,000 |
잡 탕 밥 |
10,000 |
깐 풍 육 |
17,000 |
고추 잡채밥 |
6,500 |
유 산 슬 |
28,000 |
양 송 이 밥 |
6,000 |
양 장 피 |
24,000 |
고 추 잡 채 |
18,000 |
탕 수 기 |
18,000 |
부 추 잡 채 |
18,000 |
팔 보 채 |
23,000 |
마 파 두 부 |
14,000 |
잡 탕 |
23,000 |
잡 채 |
14,000 |
새우 탕수육 |
19,000 |
라 조 기 |
22,000 |
깐 쇼 새 우 |
19,000 |
깐 풍 기 |
18,000 |
깐 풍 새 우 |
19,000 |
해파리 냉채 |
19,000 |
계 란 탕 |
12,000 |
지금은 비싼 ‘쟁반 짜장면’도 옛날 맛이 나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이들이 많다. 당연하다. 옛날 ‘짜장면’이 맛있는 가장 큰 이유는 고소한 돼지고기 기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용유(食用油)를 사용하는 지금과 맛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 시절에는 선조들의 제사상(祭祀床)에 오르는 ‘부침개’도 너무나 맛이 좋았다. 그리고 검은 철판(鐵板) 위에 돼지고기 비계로 기름을 낸 후 남은 찌꺼기가 고소한 과자 이상으로 맛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번철에 ‘부침개’를 부치는 할머니나 어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심부름도 하면서 튀김처럼 바싹 마른 돼지고기 비계를 얻어먹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식용유(食用油)가 없던 그 시절에는 중국집 주방장(廚房長)들도 한가할 때는 돼지고기 비계를 검은 철판(鐵板) 위에 올려놓고, 기름을 짜는 게 일이었다.
쟁반 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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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요리기구의 발달로 요리시간(料理時間)이 과거에 비하면, 수십 배나 빨라져 중국 음식 시켜먹기도 수월해 졌지만, 옛적에는 중국집에서 탕수육(糖水肉)을 시키면 빨라야 30분, 늦으면 1시간 넘게 기다리기도 했었다.
이유는 당시의 경우 거의 모든 식당에는 냉동실(冷凍室)은커녕 냉장고(冷藏庫)조차 갖춘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중국집 주인들이 하루 종일 자전거(自轉車)를 타고 정육점(精肉店)에 들락거렸다.
정육점
손님이 오거나 주문(注文)이 들어오면, 돼지고기를 한두 근씩 사다가 요리(料理)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조리시간(調理時間)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중국집’에 가서 “어이, 여기 ‘짜장면’ 하나씩 하고, 탕수육 하나에 ‘빼갈(고량주)’ 두 도꾸리!”라고 주문하면 계산대(計算臺)에 앉아있는 주인이나 주방의 주방장(廚房長)이 얼른 “예, 곧 갑니다!”라고 시원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이 대답은 ‘짜장면’이나 탕수육(糖水肉)이 곧 나온다는 게 아니라 ‘짜장면’과 ‘탕수육(糖水肉)’을 만들 고기를 사러 지금 정육점(精肉店)으로 출발한다’는 뜻이었다.
위에서 말한 ‘빼갈’은 ‘배갈’이라는 말로 ‘수수’를 원료(原料)로 하여 만든 중국 특산의 소주(燒酒)로 ‘고량주’ 또는 ‘백주(白酒)’라고도 한다.
고량주(빼갈, 배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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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켜먹고, 교묘(巧妙)한 연출(演出)을 하면서 돈을 내지 않고, 줄행랑을 치는 경우도 많았었다. 이른바 ‘먹고 튀기’였다.
친구 대여섯 명이 중국집에 가서 요리(料理)를 시키고 거나하게 마신다. 탕수육(糖水肉)이나 팔보채, 라조기, 그 다음 고량주(高粱酒) 몇 병에 자장면, 짬뽕 등 메뉴판에 있는 것은 모두 시켜 배가 터지도록 먹는다.
먹을 만큼 먹고 난 뒤에는 전부 일어나서 중국집 벽에 걸린 메뉴표나 그림을 훑어보면서 무슨 전문지식(專門知識)이라도 있는 양 서로 토론(討論)을 하면서 천천히 걸어 나간다.
탕수육
음식 값을 내지 않고 튀기 위한 전술적(戰術的) 너스레였다. 그러면서 가장 동작(動作)이 민첩한 친구 하나를 뒤에 남겨둔다.
최후까지 남을 친구는 음식(飮食)을 시키면서 자기가 한 턱 내는 것이라고 연막(煙幕)을 치면서 자기가 돈을 낼 장본인(張本人) 이라는 것을 카운터 뚱땡이 중국인(中國人)에게 인식시켜 놓기도 한다.
친구들 모두가 안전선(安全線) 밖으로 이동했다고 생각하면, “주인장 여기 모두 얼마요?”라면서 천천히 계산대(計算臺)로 다가가 ‘요지’로 이빨을 쑤시며, 돈을 내는 척하다가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튀어버린다.
팔보채
그러나 ‘뚱뗑이’ 주인은 배가 부르고 나이가 들어 “야야야야야 저놈 잡아라”라고 소리만 지르고 발을 구르기만 할 뿐 따라가지를 못한다. 이 경우는 중국집 아주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군대 식당의 취사병(炊事兵)이든, 민간인(民間人) 식당의 주인이든 그 가족이든 무언가를 계속 집어 먹기 때문에 대체적(大體的)으로 ‘빠꾸샤(버크샤 ; 영국 버크샤지방의 돼지)가 많았고, 그래서 동작이 굼뜨고 느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욕설(辱說)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말로 뭐라 뭐라 욕설(辱說)을 퍼붓는데, 중국 욕설이라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으면, 그 굵은 팔뚝으로 도망가는 꾸러기들의 등 뒤에 대고 몇 번이나 ‘쑥떡’을 먹이다가 그것으로 끝난다. 이때는 부인과 ‘딸내미’까지 나와서 함께 ‘쑥떡’을 먹이기도 한다.
이런 경우 그 ‘딸내미’는 ‘쑥떡’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경우였다. 아버지와 엄마가 하니까 따라서 하는 것이다.
‘쑥떡’ 먹이는 중국집 큰 ‘딸내미’
이런 때는 공짜 ‘청요리(淸料理)’에 공짜 ‘쑥떡’까지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청요리’는 중국에서 청(淸)나라 때 만들어진 말로 ‘중국요리(中國料理)’라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王朝)가 청(淸)나라였기에 중국요리를 ‘청요리(淸料理)’라고 불렀던 것이고, 중국요리는 지방에 따라 북경(北京)요리, 상해(上海)요리, 사천(四川)요리, 광동(廣東)요리, 동북(東北)요리로 구분된다고도 한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값비싼 ‘청요리(淸料理)’를 시켜 먹고 돈을 안내고 뺑소니를 친 무전취식자(無錢取食者)가 종적을 감출 때까지 중국집 주인은 중국말로 갖은 욕설(辱說)을 퍼붓는다.
중국말을 모르는 사람들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도록 ‘쏼라쏼라’를 연발한다. 대충 짐작으로 때려잡으면, “이 육시(戮屍)를 할 놈들아! 가다가 넘어져 제발 죽어 자빠져라! 뒤질 놈들아!” 뭐 그런 욕설이었을 것이다.
청요리
여기에서 잠시 위에서 말한 ‘청요리(淸料理)’와 ‘청요리집’의 기원, 그리고 당시의 정경(情景)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많이 생겨난 ‘청요리집’은 현대적 외식문화(外食文化)의 개념을 대중적 차원에서 최초로 도입한 산실(産室)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청요리집’은 고객층이 거의 일본인(日本人)이다 보니 가격대(價格代)가 높았고, 메뉴와 서비스에 왜색(倭色 ; 일본색)이 적잖이 스며들어 있었다.
단무지(다꾸앙)
찬으로 ‘단무지’를 제공하고 젓가락과 물수건 고기튀김을 ‘와리바시’ ‘시보리’ ‘고기뎀뿌라’ 식의 일본어(日本語)로 부르면서, ‘짬뽕’ ‘우동’ ‘야끼만두(군만두)’ 같은 일식(日食) 메뉴를 넣은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술을 ‘도꾸리’라는 일본식(日本式) 청주병에 담아 판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빼갈’ 한 도꾸리, 두 도꾸리 할 때의 ‘도꾸리’를 말한다.
도꾸리
해방을 맞으면서부터는 주 고객층(顧客層)이 주머니 두둑한 일본인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뀌고, 중국집에도 변화가 일었다.
그전까지의 고급 ‘청요리(淸料理)’에서 짜장면, 탕수육 등 우리나라 사람의 입맛에 맞는 저가요리(低價料理)를 주 종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변신(變身)은 일단 성공이었다. 1980년대 초·중반까지 나름의 안정기(安定期)를 구가하며, 메뉴와 맛도 상당 수준으로 한국화(韓國化) 되었다.
다다미방
그러나 형식에는 왜색(倭色)이 그대로 남아 오래된 업소들은 여전히 일식 ‘다다미방’ 구조였고, 요리가 들어간 뒤 문을 닫고 나면, 손님이 박수를 크게 쳐서 부르기 전까지는 종업원(從業員)이 들어와 보지 않는 게 불문율(不文律)이었다.
그러다 보니 불륜(不倫) 커플이나, 아베크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밀회 장소(密會場所)가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 가끔씩 ‘가십란’에 실리던 무작정 상경한 ‘이쁜이’와 ‘금순이’가 무슨 ‘기둥서방’에게 당했다던 장소도 모두가 중국집 2층 ‘다다미방’이었다.
이쁜이와 금순이
때로는 교복 입은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에게 음주(飮酒)와 흡연의 공간이 되었고, 저가(低價) 메뉴를 시켜놓고 들어앉은 커플의 방에는 종업원(從業員)들이 기척을 자주 보내서 추가주문(追加注文)의 압력을 넣기도 했었다.
중국집은 1980년대 도시재개발(都市再開發) 바람과 화교(華僑) 탄압정책으로 주인의 대부분이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뀌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든 ‘중국집’ 수가 폭발적(爆發的)으로 증가해 현재처럼 허접한 맛의 저가식당(低價食堂)이 되고 말았다.
‘다꽝’, ‘다마네기’, ‘와리바시’ 등 일본어(日本語)나, ‘도꾸리병’이며 코끝을 쏘는 빙초산의 냄새는 사라져도 아쉬울 게 없지만, 고소한 라드(돼지지방 정제유지)에서 우러나오는 구수한 ‘짜장’ 맛과 ‘곱빼기’ 가격을 따로 받지 않던 후한 인심(人心)이 사라진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꾸앙과 양파, 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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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은 또 ‘수타(手打) 짜장면’, 즉 ‘수타면(手打麵)’이 가장 인기가 있다. 지금도 인기 있는 중국음식점 점심시간이면, 유리창 너머로 ‘왕서방’ 주방장(廚房長)의 현란한 팔놀림의 묘기(妙技)가 펼쳐진다. 그의 손에는 하얀 밀가루 반죽이 들려 있다.
반죽을 펼쳐 잡은 양손이 허공(虛空)을 가르는가 싶더니 “쿵” 소리와 함께 나무판에 반죽을 내려친다. 3~4분 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反復)하자 젓가락보다 가는 면발이 쏟아져 나온다. 지금은 아무데서나 보기 어려운 ‘짜장면’ 국수 뽑는 모습이다.
지금은 기계로 ‘면’을 뽑는 중국집이 많으나, 옛적에는 ‘수타면(手打麵)’이 국내 모든 중국음식점에서 내놓는 ‘면(麵)’ 음식의 기본이었다.
주방장의 묘기(수타면 뽑기)
그리고 전국 어느 중국집을 가도 ‘면(麵)’ 메뉴를 주문하면 “쿵 쿵”소리부터 났다. ‘수타면(手打麵)’을 만드는 작업광경이었다.
우리나라에 ‘수타면(手打麵)’이 등장한 역사는 19세기 말 인천으로 몰려든 중국 산동성 출신 화교(華僑)들이 ‘짜장면’을 만들어 먹으면서 비롯되었다.
수타식(手打式) ‘면(麵)’은 ‘밀대’로 밀어 칼로 썰어 ‘면(麵)’을 뽑던 우리나라식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였다.
화교(華僑)를 중심으로 ‘수타면’이 맥을 이어오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인들이 경영하던 주방(廚房)에서 기술을 배우고, 중국음식점을 개업함에 따라 전국으로 확산(擴散)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970년대 자동으로 ‘면(麵)’을 뽑는 기계가 도입되면서 이 소리는 우리 곁에서 조금씩 사라져갔다. 기계를 이용해 반죽의 밀도(密度)를 조절하고, ‘면’을 뽑아내는 시간을 절약(節約)할 수 있으니 굳이 땀을 흘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자동 면(麵) 기계
그러다가 ‘수타면(手打麵)’은 1990년대 말부터 ‘참살이 바람’을 타고 조금씩 옛 영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기계면(機械麵)’과의 차별화(差別化)에 성공한 덕이다.
유명 중국음식점에서는 기계의 등장으로 맥이 끊어져가는 ‘수타면(手打麵)’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아 손님들 눈앞으로 끌어내었다. 손님이 보는 앞에서 ‘면’을 뽑으면서 위생적(衛生的)인 신뢰도 덤으로 얻은 것이다.
위에서 말한 ‘참살이지역’이라는 말은 국립국어원과 한국방송공사(KBS)가 외래어(外來語)인 ‘슬로시티(slow city)’를 다듬은 말이다.
그리고 ‘참살이지역’이란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생태환경과 전통문화(傳統文化)를 지키는 지역민 중심의 공동체’를 이르는 뜻의 말이다.
최근 ‘참살이지역(슬로시티)’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확산(擴散)되고 있는데, ‘참살이지역’은 1999년 이탈리아의 ‘그레베 인 키안티’ 등 4개 소도시의 시장이 모여 ‘패스트푸드’의 확산 등 속도지향(速度指向)의 사회 분위기에 반대해 ‘느리게 살자’는 선언에서 비롯되었다.
참살이 지역
‘참살이지역’의 취지(趣旨)에 동참하는 국가(國家)와 도시는 현재 전 세계 20개국 132개 도시로 점차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07년 전남(全南) 담양, 신안, 완도, 장흥이 ‘아시아 최초로 참살이지역’으로 인증(認證) 받았으며, 2009년 2월 경남(慶南) 하동과 2009년 9월 충남(忠南) 예산이 추가돼 총 여섯 개의 ‘참살이지역’이 지정되어 있다.
전통(傳統)과 자연의 멋을 중시한 ‘느림의 미학’이 새로운 문화 경쟁력(競爭力)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참살이지역’에는 관광객(觀光客)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 소재하는 ‘치술령’ 기슭에도 ‘참살이 마을’이 있다. 비록 ‘치술령’ 서쪽 사면에 위치한 울산시(蔚山市) 울주군 두동면에 소재하기는 하나, 하절기(夏節期)에는 다양한 전통놀이와 무공해 음식을 만들어 먹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수타면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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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수타면(手打麵)’과 ‘기계면(機械麵)’의 차이는 반죽 단계부터 다르다. ‘수타면’ 반죽은 물을 많이 넣는 까닭에 손으로 쥐고 있으면 흘러내릴 정도로 무르다. 20㎏ 밀가루 한 포대 기준으로 약 10리터의 물이 사용된다.
반대로 ‘기계면(機械麵)’은 6~7리터의 물을 사용해 약간 된 편이다. 그리고 ‘수타면’은 ‘냉소다’를 물에 녹여 손으로 발라가며 면(麵)을 뽑지만, 기계면은 반죽 단계에서 ‘가루소다’를 섞는다.
이 같은 반죽 차이로 맛도 다르다. ‘수타면(手打麵)’은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느낌이 강하다. 반면 ‘기계면’은 강제로 압력(壓力)을 가한 탓에 탄력은 넘치지만, ‘수타면’에 비해 훨씬 질긴 편이다.
중국집 주방
이는 소화(消化)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부드럽게 반죽한 ‘수타면(手打麵)’이 ‘기계면’에 비해 소화흡수율(消化吸收率)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면(麵)’의 굵기는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는 게 수타고수(手打高手)들의 주장이다. ‘수타면(手打麵)’을 만드는 과정은 의외로 단순하다.
먼저 일정 양(量)의 반죽을 떼어내 양손으로 잡고 테이블에 내리치는 과정을 반복한다. 반죽 속의 기포(氣胞)를 제거하고, 밀도(密度)를 높이기 위해서다.
수타식 면(麵) 만들기
이어 밀가루를 뿌린 후 엿가락 늘이듯 늘이면 된다. 이 반복(反復)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면(麵)’의 굵기가 달라진다. 마치 전통다과(傳統茶菓)인 ‘꿀타래’를 만드는 방식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기술이 있는 주방장의 경우 ‘수타면(手打麵)’을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뽑을 수 있지만, 삶을 때 서로 엉켜버리는 등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현재 가장 가늘게 뽑는 ‘면(麵)’은 ‘기스면’에 쓰는 ‘소면(素麪)’ 굵기 정도다.
여기에서 잠시 한때 불리어 지듯 말 듯 하다가 사라져 버린 ‘홍콩반점(香港飯店)’의 가사를 잠시 음미하고 넘어간다.
홍콩반점
짜장은 간 짜장
돈 좀 있음 삼선 짜장
술 먹은 다음 날엔 고추짬뽕이죠
변덕스러운 짱개유져 때문에 나온 짬짜면,
볶짜면, 탕짜면, 볶짬면, 탕짬면,
탕볶밥 안 먹어봤고 앞으로 안 먹을 밥.
세트메뉴에는 만두가 오죠.
비 내리면 따끈한 우동이 땡기고
안 땡기는 건 마파두부덮밥.
아저씨 단무지 두 배로 줘요. 양파는 조금.
탕수육에 곱배기는 자만
특정식은 부르주아만
골목길~ 골목길의 홍콩반점
골목길~ 남 먹던 단무지가 반쪽
골목길~ 면의 반죽, 발로 한 반죽!
골목길~ 홍콩반점 만점의 반점!!
홍콩반점 짜장은 만점
자리가 있음 바닥이라도 앉어 군만두는 서비스
요새 이렇게 주는 데가 어딨음?
어디든 배달가요. 빛 보다 빠른 그 속도
짬뽕에 혀를 뎌 해산물 신선해 hurry up
빨리 안 먹으면 뺏어 먹히고 마는 법
그릇에 쳐 박힌 머리, 바닥까지 핥아먹지
빠삭 튀긴 탕수육, 뭔가 있어 마파두부
뺏어먹고 쌩까구 마는 인간관계 속에
배고픔은 2,500원이면 해결, 행복 느낀대도
면발은 너무 쫄깃해. 꼴뚜기들 팝핑해
고기완자는 어질어질하게 만들어
여기저기서 시켜 봐도 이 맛 못 내지
세트A 11,000이면 뽕 빼요
화재집중에도 on air
살찌는 걸 왜왜왜 겁내요?
올리브유만 따라 쓰던데요
골목길~ 골목길의 홍콩반점
골목길~ 남 먹던 단무지가 반쪽
골목길~ 면의 반죽, 발로 한 반죽!
골목길~ 홍콩반점 만점의 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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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타면(手打麵)’을 뽑아 영업을 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우선 면(麵) 메뉴가 많이 팔려야 한다. 주인이 직접 손으로 ‘면(麵)’을 뽑는다면 모를까 ‘수타면’ 기술자의 인건비(人件費)가 만만치 않아 수요가 없으면 손해를 볼 수 있어서다.
이들의 임금 수준은 기계로 ‘면(麵)’을 뽑는 직원의 2배 이상이다. 수요를 감당하려면 매장(買場) 규모도 커야 한다. ‘면(麵)’ 뽑는 공간을 확보하려면 주방도 일반 중국음식점보다 1.5배 이상이어야 한다.
현란한 수타 솜씨
‘수타면(手打麵)’ 반죽은 무척 예민하다. 그래서 반죽의 물 온도도 바짝 신경 써야 한다. 여름에는 찬물을, 겨울에는 따끈한 물을 쓴다. 그리고 봄․가을에는 미지근한 물을 사용한다.
여름에 뜨거운 물로 반죽하면 부풀어 오르고, 겨울에 찬물을 넣으면 딱딱하게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면(麵)’을 뽑는 것은 기술과 함께 체력이 요구된다. 숙련된 장인(丈人)이 한 번에 뽑아낼 수 있는 ‘수타면’은 최대 12인분이다. 1인분에 필요한 반죽의 양은 약 500g, 이중 ‘면(麵)’으로 변신(變身)하는 양은 절반 정도다.
4~5인분을 뽑더라도 최소 2㎏ 이상의 반죽을 자유자재(自由自在)로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주문(注文)이 밀리면 한번에 10인분 내외를 뽑아야 한다. 5㎏ 이상의 반죽을 들어 올려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 때문에 ‘수타면(手打麵)’ 전문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어린 시절 생업(生業)으로 반죽을 내리쳤던 50대 이상이 절대다수(絶對多數)를 차지하고 있다.
수타면
글이 계속 길어져 그만 쓰기로 한다. 그런데 ‘짜장면’이든 ‘중국집’이든 해당되는 노래가 있기는 있는데, 마음에 맞는 곡이 떠오르지 않는다.
노래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은 ‘홍콩반접(香港飯店)’ 등이 있으나,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제외하기로 하고, 그 시절 ‘청요리집’을 배경으로 벌어지던 애환(哀歡)을 풍자한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를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요리(料理)를 먹고 돈이 없어 뒷문으로 살금살금 도망치는 빈대떡 신사(紳士)나, 떼거지로 ‘청요리(淸料理)’를 시켜 먹고 ‘먹고 튀기’로 도망가는 청소년들의 경우나 모두 같은 통속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경음악으로 듣는다.
빈대떡 신사
노래 : 한복남
작사 : 한복남
작곡 : 한복남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리집 문 앞에서 매를 맞는데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원인은 한 가지 돈이 없어
들어갈 땐 폼을 내어 들어가더니
나올 적엔 돈이 없어 쩔쩔 내다가
뒷문으로 살금살금 도망치다가
매를 맞누나 매를 맞누나
으하하하 우습다 이히히히 우습다
하하하하 우습다 호호호호 우습다
으하하하 하하하하 우습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리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아버지가 모아준
아까운 전 재산을 다털어 먹고
마지막엔 마지막엔
차비도 없어서 덜렁 덜렁
겉으로는 의젓하신 신사 같지만
주머니엔 한 푼 없는 새빨간 건달
요리 먹고 술 마실 땐 기분 좋지만
매 맞는 꼴이야 매 맞는 꼴이야
으하하하 우습다 이히히히 우습다
하하하하 우습다 호호호호 우습다
으하하하 하하하하 우습다
돈 없으면 집에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푼 없는 건달이 요리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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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열댓편으로 나눠서 게시해도 될 것을 한꺼번에 통합해서 올리니...보는 것도 힘드는데..쓰시는 분은 얼마나 힘드실까.ㅎㅎㅎ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저도 그 입실 버쓰정유장 옆 중국집에서 우동을 처음 먹었는데...아마도 선배님하고 같은날 먹은거는 아닌지..ㅎㅎㅎ 선배님이 외중 2학년때라면 제가 초등학교 4학년쯤 되는데....저도 입실초등학교 다닐때 입실장에 오신 아버님따라 그 중국집에서 우동을 처음 먹었는데...그 붉은 조개쌀을 얹어 주던 그 우동맛이 하도 좋아서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선배님은 여복이 많으셨네요...초 중등의 풋사랑은 접어두고라도.....고등학교때부터 백년 가약을 한 야간 여고생이 있었는데...무슨 또 군대에서...중국집 딸내미만도 선망의 대상인데..피복상 여대생까지...ㅎㅎㅎㅎ 정말 보통 복이 아닙니다. 아마도 앞으로도 여복이 얼마나 더 이어지실지......행복하시겠습니다.
네..그때는 그렇게 배가 고프고....군인 병사들은 허기에 굶주리고 했지요..저도 그랬습니다. 훈련 받을때 돼지죽통의 꽁치대가리 먹으려고 건져 낸 적이 있는데....아무리 봐도 살점이 없고..뼈만 있는거 같아 차마 먹지는 못했지만..배가 고프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오직 먹는거 밖에는 안보이지요....그때 자장면을 배불리 얻어 먹었으니..그것도 다른 사람까지 배불리 먹게 했으니..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어제는 북한산 등산을 갔는데....산능선 널직한 바위위 소나무 깊은 그늘에...웬 여인들이 그렇게 많이 누워 있던지....바람을 쏘이기도 하지만...맨다리 나무에 걸쳐 놓고 눈을 감고 있는데....무슨 해수욕장 같기도 해서....제가 혼자말로.....ㅎㅎㅎ .참으로 팔자 좋은 분들 많은기라....남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고 있을낀데....했더니....자기도 땀 흘려 일하는데..오늘 모처럼 왔다고 하데요....그래서...입씨름이 되어서 즐거운 시간이 되기도 했지요..ㅎㅎ
우회장 말마따나 읽기도 어려울정도인데 이렇게 장문을 어떻게 작성했는지? 나는 이글 다음 읽어 볼려고 미뤘다가 오늘 보니 정말 옛적 웃지못할 사연입니다. 요즘사람들 배고픈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