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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창5:21-24
유유상종
열차 안에서 만난 두 남자가 서로 말을 주고받기 시작합니다.
“어디까지 가시죠?”
“저는 일산까지 가는데요.”
“저도 일산까지 갑니다.”
“댁이 일산이세요?”
“지금은 아니지만, 전에는 탄현동 sbs방송국 옆에 살았습니다.”
“그래요?”
“저는 일산동고를 나왔는데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맥주와 안주를 사겠다고 다툴 정도로 금세 친해졌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다면 상황은 완전히 반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디까지 가지죠?”
“춘천갑니다.”
“전에 군대 생활을 춘천해서 했는데, 혹시 춘천에서 사세요?”
“아닙니다. 처음 가는 길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닮은 사람은 좋아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당신을 닮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동행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과 수준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수준이 전혀 다르거나 방향이 다르면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면 믿을 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반대되는 사람, 곧 마귀의 종노릇 하는 사람을 하나님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다정한 부부는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동의 취미가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거나, 영화 감상을 좋아하거나,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거나, 여행을 좋아하거나 대화하기를 좋아하거나, 뭔가 즐거움을 나눌 공통의 분모가 있습니다. 법적으로 부부이고, 월급봉투 갖다 준다고 부부는 아닙니다. 친밀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함께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주제가 있습니다. “아빠는 너 만할 때 그렇지 않았는데, 너는 누굴 닮아서 그 모양이냐?” 이런 말 하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도, 부부 관계도 다 끊어집니다. 차라리 “아빠도 학교 다닐 때 공부하기 싫었단다. 충분히 이해한다.” 아이들은 이런 부모의 말을 더 잘 듣습니다. 좋은 관계를 원한다면 상대방과 공통분모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더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첫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죄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창5장)도 지금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이 죄가 많았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라멕의 칼의 노래가 나오고, 창세기 6장에는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라멕이 누구입니까? 그는 두 아내를 둘 뿐 아니라 사람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그런데도 회개할 줄 모르고, 일명 “칼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창4:23).” 노아 시대는 우리가 아는 대로 홍수 심판을 받을 만큼 죄가 넘쳤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창6:5-7).” 잡혼과 먹고 마시는 쾌락주의가 유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한 것도 죄 때문이었습니다. 무능하다고 추방당한 것 아니고, 못생겼다고 추방당한 것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인간의 죄입니다. 자기 기득권과 자기 의를 자랑하다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가 짓기 쉬운 죄가 무엇입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체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면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육체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면 짐승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됩니다. 게임, 도박, 술, 그리고 음란을 피해야 합니다. 뜻 없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면 하나님 반대편에 섭니다. 노아 시대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정신이 팔렸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고 넓은 길로 가다가 홍수 심판으로 멸망당했습니다. 물질, 외모, 이기주의를 따라 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입니다. 천국의 문화, 천국의 언어, 천국의 가치를 따라야 합니다. 사랑과 공의가 강같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자기를 자랑하거나 교만하면 안 됩니다. 교만은 멸망의 앞잡이고 패망의 선봉입니다. 인간의 바벨탑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반대편으로 가고 있습니다. 죄를 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합시다.
둘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경건합니다. 에녹은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아서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큰 업적도 없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우리와 같이 힘든 일도 있었고, 때로는 슬픈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경건한 삶을 위해 수도사처럼 집을 떠나 홀로 수도에 전념하지 않았습니다.
동행한다는 말은 걷다, 혹은 산책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인격적인 교제를 나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주일에 교회 가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집안일을 할 때나, 사무실에 출근할 때나, 친구를 만날 때나, 여행을 할 때나,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경건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평범한 의무들조차 주께 하듯 성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길에 버린 쓰레기 하나도 주님 앞에 행하는 마음으로 줍는 것입니다.
수도사 로렌스는 원래 농부의 자손으로서 수도원에서 접시를 닦고 허드렛일을 하던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접시를 닦다가, 하나님이 어디 계시지! 여기에도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이 점점 그를 강하게 붙잡아 마침내 로렌스는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십니까?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격려와 용기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진정한 행동은 예배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는 발걸음에서 시작됩니다. 첫날에 예배드리고,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십니까?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크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진정한 동행은 기도하는 무릎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낙심이 찾아옵니다. 의심이 찾아오고, 세상 유혹이 찾아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말로 기도했으면, 기도한대로 행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로 하고, 스스로 사자굴에 들어갔습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왕이 준 산해진미를 거절하고 채식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변함이 없습니다. 에녹은 65세부터 365세까지,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시작한 날부터 생애 마지막까지 날까지 300년간 동행하다가 천국으로 옮겼습니다. 300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은 기간입니다.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빨리 가도 안 되고 천천히 가도 안 됩니다. 꾸준히 가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엡6:24).” 시므온 선지자는 죽기 전에 예수의 탄생을 본다는 계시를 따라 평생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안나 여선지자는 과부 된지 84년 동안 주야로 금식하며 성전을 떠나지 않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이나 안나 선지자처럼 평생 변함없어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잠시 하는 것은 동행이 아닙니다. 커피숍에서 말없이 앉아 있으면 부부이고, 열심히 이야기 하는 사람은 사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말 많고 요란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평생에 함께 해야 할 것이 둘인데, 하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부부입니다. 잘 사는 부부는 일생동안 부부의 도리를 다합니다. 잠시 사귀는 사람은 잠깐 잘하다가 돌아섭니다.
평생 동행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바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합니다. 죄인의 괴수인 나를 사도로 불러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서 로마를 보리라는 심정으로 믿음의 경주를 다 했습니다. 그 어떤 시련과 유혹도 바울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낙심하지도 말고, 과욕을 부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힘들고 피곤할 때마다 은혜로 재충전해야 합니다. 위기의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지혜롭게 잘 극복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부족하지만,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말씀을 증거합니다. 에녹은 죄가 넘치는 그 시대를 슬퍼했습니다. 뒤로 물러서거나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홍수 심판을 준비하라고 외친 것처럼, 에녹도 악한 세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에녹은 그 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히 않은 자의 경건히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히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유다서 1:14-15).” 에녹은 그 시대의 빛이고 소금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걸음이 아름답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 복음전파의 사명을 다합시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리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3-5).” 전도대상자인 오이코스를 잘 섬깁시다. 섬김과 사랑으로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시다. 오이코스를 감동주기 전에 벌써 우리의 감동이 식은 것 같습니다. 한 영혼을 위하여 기도와 시간과 물질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옮김
1889년 3월 31일 파리에는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열린 만국박람회의 기념 조형물로 에펠탑이 세워졌습니다. 이 탑의 건립 계획과 설계도가 발표되자 당시 파리의 문인, 화가 및 조각가들은 에펠탑의 천박한 이미지에 기겁을 했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탑 건립을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했습니다. 1만 5천여 개의 금속 조각을 250만대의 나사못으로 연결시킨 무게 7천 톤, 높이 320.75 미터의 철골 구조물이 고풍스러운 파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의 반발이 너무 거세 프랑스 정부는 20년 후에는 철저하기로 약속하고 건설을 강행했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 에펠탑은 파리의 상징이 되었으며 에펠탑 없는 파리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에펠탑은 더 이상 천박한 흉물이 아니며, 이제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파리의 귀부인이 되었습니다.
왜 파리 시민의 인식이 이렇게 달라졌습니까? 탑의 높이가 300미터가 넘기 때문에 그들은 좋은 싫든 눈만 뜨면 에펠탑을 봐야 했습니다. 그 탑에 차츰 정이 들었고 에펠탑을 찾는 시민들도 점점 늘어갔다. 에펠탑에 정이 들어가듯 단지 자주 보는 것만으로도 호감이 증가하는 현상을 단순 노출의 효과 또는 에펠탑의 효과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던 광고나 상표 이름도 여러 번 듣게 되면 어느새 그럴듯하게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별로였던 유행가도 자주 듣다 모면 어느새 좋아집니다. 연예인의 인기는 방송 출연 빈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단순노출의 효과는 선거에서도 나타납니다. 가장 친숙한 후보를 선택할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앵커나 아나운서들의 정계 진출이 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근접성의 효과를 적극 활용해 연애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학기 초 한 여학생에게 한눈에 반했는데, 그 뒤 강의 때마다 항상 그 여학생 부근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단지 부근에 앉아 가끔 눈인사를 나눌 뿐 말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학기 말쯤 우연히 마주친 자리에서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해 데이트 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승낙을 받았습니다. 학기 초에 만나자마자 데이트 신청을 했다면 십중팔구 실패했을 것입니다.
자주 보면 정이 들고 만나다 보면 좋아집니다. 하지만 만날수록 더 싫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노출이나 근접성의 효과는 초기 인상이 긍정적이거나 적어도 나쁘지 않은 경우에만 나타나며 기분 나쁜 사람은 자주 만날수록 오히려 더 싫어집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며 자주 만나고, 가까이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쾌한 기분을 유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다급할 때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하면 불청객입니다. 평소에는 안부 전화 한번도 안 하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만 친한 척 연락해서 도와 달라는 사람, 추천서나 소개가 필요할 때에만 선물이나 e-메일을 보내는 사람, 세상에 이런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나 상급을 받으려는 평소에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에게 좋은 모습으로 자주 노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으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데려간다는 말은 취하다,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엘리야가 승천 때 사용한 말입니다. 세상에 있지 않다는 말은 직역하면 “그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라져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 에녹에게 주신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상급이라고 하면 물질과 건강과 명예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상급 중의 상급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제자들에게 주신 상급입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1-2).”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상급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것도 상급이겠지만,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해서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 상급 중의 상급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은 둘입니다. 하나는 죽음을 통해 천국으로 옮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녹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는 죽음을 통해 천국으로 옮깁니다. 그것도 은혜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죽음을 통해 인간의 야망의 날개를 꺾고 하나님께 항복해서 하나님의 품 안으로 간다면 은혜입니다. 잘 죽는 것은 하나님께 항복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명당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안 아프게 죽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부름을 받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품에 부름을 받아도 세상에 없는 복을 받은 것인데,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의 품으로 부름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아낌없는 복을 주십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 없는 것까지도 주실 것입니다. 누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길 만큼 하나님과 동행하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어느 듯 천국의 영광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천군 천사들이 끄는 불 수레와 불 병거가 우리를 데리러 올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 동안 수고했다. 세상에 두기 아까워서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평생 우정을 나누며 친구와 함께 동행하십니까?
평생 사랑을 나누며 부부로 함께 동행하십니까?
평생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십니까?
친구나 부부는 원치 않게 이별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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