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덕★ 흥남부두의 기적
6.25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1950년 겨울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바탕으로 반격을 개시했고
막강한 공군의 지원을 등에 업고 눈부신속도로 평양을 점령하고 통일을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진격하였지만 그순간 중국이 개입을 하고 소규모개입으로 그칠꺼라던 정보판단 미스로 인해
대규모 짱개의 돌격에 유엔군은 다시 후퇴를 할 수밖에~~
그게 바로 눈물의 1.4 후퇴
짱개의 대규모 기습에 포위당해 박살날 위기를 각 부대들이 영웅적인 전투로 막아내고
유엔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한다. 특히 짱개가 너무 빨리 진격해서 육로가 막혀버린 동부전선의
유엔군은 흥남부두에 집결해서 배를 이용해서 해상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고
미주리를 포함한 무식폭발 전함들의 막강한 지원사격으로 중공군을 도시 밖에 멈추게한뒤
유엔군은 193척의 배에 병력 10만 5천명과 차량, 탄약, 연료 등을 태우고 후방으로 퇴각한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지요
엄청난 수의 피난민이 흥남부두에 발이 묶여버렸는데
어차피 이들은 북한군이 들어오면 반역으로 찍혀서 죽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리고 마지막 배한척 밖에 없었지요
정원 47명의 미국의 유조선 메레디스 호가 흥남부두 앞바다에 남는다.
그곳엔 현봉학이라는 한국군 군의관이 있었고, 그는 미 10군 군단장 알몬드 장군을 설득했고 또다시 메레디스 호의 선장인 레너드 라루 역시 설득한다.
마침내 마음은 통했고 유조선은 가지고 있던 장비와 탄약을 모두 버리고 부두로 갔고
피난민을 태웠어. 정원 47명의 유조선엔 피난민들이 손에 손을 잡고 올라타기 시작했어
한사람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려서 사람이 탈수있게 공간을 만들었고
그렇게 만 사천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사람이 메레디스호를 타고 흥남부두를 탈출한다.
영하 30도의 한겨울에 정원을 3백배가 넘게 초과한 혹독한 상황에서 거제도까지의 3일간의 항해에도 단 한사람도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메레디스 호가 떠난직후 미군은 흥남부두를 폭파했어.
메레디스 호는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해낸 배로 기네스북에 올라있고
1950년 12월 23일에 일어난 흥남부두의 철수작전은 흥남부두의 기적으로 불리며
많은 생명을 살려냈고 이 배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거제도에 피난민을 안전하게
내려주고 다시 떠난다.
당시 선장이었던 레너드 라루의 회고(1960년)
10년전 지구반대편에서 한 놀랍고 경이로운 항해를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사흘동안 신이 우리와 함께 했다고 나는 믿는다.
흥남부두 철수작전
인천 상륙작전 선봉에 섰던 미해병 1사단은 전선을 미 8군에 인계하고 1950. 10월 말 원산 상륙작전에 참전한다.
원산은 상륙 이전에 대대적인 원산폭격(元山爆擊)이 있었다.
B-29 12대가 평양다음으로 원산은 아침 해장꺼리로 초토화시컸다.
소이탄으로 불바다를 만들었고 앞바다는 기뢰부설로 항구 출입을 막았다.
맥아더 사령부는 미 해병 1사단, 미육군 3사단, 7사단, 한국군 1군단이 함흥에 합류했다.
맥아더 장군은 김일성에게 "즉시 항복"을 요구했다.
정보참모 찰스 월러비 소장과 알몬드 10군단장은 계속 전진을 강요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중국의 세탁 청소부 몇몇때문에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다.
황초령과 부전고원을 넘어 장진호를 통과해 낭림산맥을 넘는 190km 행군이다.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은 함흥에서 수동계곡(수동면)을 따라 북진했다.
작전사령부는 일본군이 써놓은 지명에 초진(Chosim)을 장진(長津)으로 잘못알고 작전을 수행했다.
미 해병 1사단 선봉대가 장진호에 도착하였을때 전선은
서부전선: 평양을 떠난 1사단 주력부대는 압록강이 가로놓인 초산까지 진격했다.
중부전선: 미 해병 1사단은 함흥을 출발하여 장진호를 좌로 돌고 있었다.
동부전선: 이원에서 국군 1군단은 북으로 백두산 아래 해산진까지 갔다.
미 10군단 상황실은 중공군 3만 여명이 북한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중공군 9병단 12만명에 완전히 포위된 사실을 알았다.
미 해병 1사단 7연대는 매복해있던 중공군으로 부터 처음으로 수류탄 집중공격을 받았다.
첫 교전에 미 해병 연대 3.000명 중 50명 사망에 200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중공군 제9병단장 송시륜은 15만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송시륜은 농민 유격대 출신으로 산악전투에는 유능했다.
미 해병 1사단과 미 7사단, 영국 해병 특공대 3만명은 커다란 자루에 넣듯이 포위가 되었다.
장진호는 해발 1.000m 개마고원 지대로 낮에는 영화 20도에 이르고 밤이면 영화32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지역이다.
중공군은 솜을 넣은 무명코트를 입고 운동화, 귀마게, 털모자가 전부이다.
식량은 쌀과 옥수수, 콩을 개인이 휴대하고 있었다.
무기는 실탄 100여 발과 수류탄 몇개가 전부이다.
송시륜은 " 뱀을 잡으려면 토막을 치고 잡으라"는 명령에 매복전투는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1950. 12. 1-5일 장진호 아랫마을 하갈리에 임시 비행장을 만들어 C-47 수송기로 보급품과 보충병을 보급받고 부상병과 전사자는 후송시켰다.
1950. 12. 6일 미 해병 1사단은 1.000여대의 차량으로 23km 매복지역을 빠저 나가는 작전으로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장진호 주변 개마고원은 산은 높고 골은 깊은데 견디기 어려운 것은 추위다.
아무리 추워도 병기는 기름칠을 해야 하고 식량은 공중투하로 얼어붙어 녹일수도 없었다.
전투는 매복작전에 걸려 간헐적인 전투에도 미군은 치명상을 입어야 했다.
1950. 11. 26- 12. 13일 까지 전투 17일 동안에
미 해병 1사단 병력 1만 2.000명중에
전사...................................................700명
실종...................................................200명
부상.................................................3.500명
동상자..............................................6.200명
미 해병 1사단 병력은 전사에서 동상자까지 전원이 피해를 입었다.
장진호 전투 참가자중에
미군 전사자와 부상자 .......................3.600여명
미군 동사자와 혹한으로 사망자..............300여명
중공군 사망.......................................25,000명
중공군 부상자....................................12.500명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적도 없는 國民을 지키라는
祖國의 부름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을 기린다
워싱턴 DC 한국전쟁(6.25사변) 참전 기념공원 비문
함흥은 원산에서 북에 인접한 도시로 원산만에서 성천강을 끼고 내륙에 있다.
흥남은 성천강 하구 원산만에 붙은 함흥시의 2개면 부두의 명칭이다.
1950. 12. 15일 흥남항에 도착한 미 제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흥남 철수작전"에 돌입한다.
미군과 국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흥남항 3- 4km까지 포탄이 떨어지는데도 부두와 백사장에는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당초 군병력과 장비만을 철수하려던 계획에 국군이 피난민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강력한 요청을 했다.
미 10군단장 아몬드장군은 처음 난색을 표했으나 정찰기를 타고 몰려던 피난민을 보고 마음을 세로가젔다.
"흥남철수작전"에 197척의 배중에는 LST를 비롯하여 민간인 선박 10척도 있었다.
1950. 12 12- 24일까지 12일간 철수작전이 강행된다.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는 7.600ton으로 2.000여명을 실어갈수 있는 배에 7배에 해당하는 14.000명이 승선했다.
빅트리아호 선장 레너드 라루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선원생활 22년째 흥남철수작전에 끼어 들게 되었다.
선장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이들 선량한 사람들이 죄많은 자들의 행위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라고 기도 했다고 한다.
빅토리아호는 사흘만에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했다.
흥남철수에
미 제10군단과 국군 1군단 병력 ................105,000여명
각종 차량..............................................1만 7,500대
물자후송 .................................................35만 ton
피난민..................................................9만 1.000명
1950. 12. 24일 미해군은 흥남 철수와 동시에 5인지 함포 1만 8.637발 사격에 흥남항은 불타고 있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
"後記"
원산폭격(元山爆擊)은 옛날 병영생활에 얼차례로는 가장 힘든 얼차례다.
머리는 철모위에 대고 손은 엉등이에 깍지를 끼고 허리를 굽혀 엎드리는 자세다.
6.25 전쟁에 평양과 원산폭격은 건물, 주민을 비롯하여 나무나 풀 한포기도 살아 남을수 없는 폭격을 맞았다.
김정일이 전쟁을 다시금 도발한다면 승패를 떠나서 원산 폭격으로 초토화된 도시를 살아 생전에 2번 볼것이다.
일반적으로 겨울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것이 병법이다.
장진호 전투는 2차대전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비교한다.
1942. 여름- 43. 2월까지 6개월간 독일군 33만 명은 볼가강과 스탈린그라드에 대치한다.
소련군 사령관 쥬코프와 정치국원 흐루시초프는 전사한 병력을 무제한 보충하였다.
전선으로 투입되면 죽는 것으로 알고있는 병사들에게 1개분대(9명)에 1명씩 비겁자를 뽑아 전선에 투입하기 전에 처형하는 극단의 조처를 취했다.
그해 겨울에 독일군은 보급품은 떨어지고 추위를 견디지 못해 사령관 파울루스는 병력 9만 1.000명을 데리고 투항했다.
소련군 사망자.....................................100여만 명으로 추산
독일군 사망자..........................................22만 명
독일군 포로...............................................9만 1.0000명(이들은 모두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2차대전이 끝난 후에 5.000여 명이 살아 귀환했다)
"장진호 후퇴" 명령과 "흥남 철수작전"
미 해병 기초교육에 "후퇴"란 단어는 없다.
미 해병은 진주만 기습이래 처음으로 "후퇴"명령을 받은 것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과 중공군의 대리전쟁으로 17일간 23km에서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했다.
너무많은 병력과 장비를 장진호까지 가저와 매복에 걸렸다는 것은 작전에 무리가 있었다.
"흥남철수작전"에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동시에 철수한다는 것도 전대미문의 철수작전이다.
빅토리아호는 철수작전에 가장 큰배이고 가장 많은 피난민을 실었다.
중공군의 야포소리는 점점 가까워 오는데 상선에 오르려면 찬 겨울 바닷물로 걸어 들어가 거물망을 잡고 난간까지 올라서야 한다.
갑판위는 겨울 칼바람이 부는데도 춥지 않았고 사흘간 물이나 음식물이 없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목숨이 사느냐 죽느냐는 극한상황에 다른생각은 사치에 속했다.
피난민들은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한 후에 아이를 찾고 아내와 남편을 찾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맥아더 사령부는 38선까지가 최후의 전선이다.
38선을 돌파한 국군은 북진을 강행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미군은 전선을 38선에 멈추지 못하고 북진에 가세했다.
필자의 견해로 전선은 평양과 함흥선에서 멈추어야 했었다.
평양과 함흥전선이면 북한은 독안에 든 쥐고 쥐도 도망갈 구멍을 보고 쫓아야 한다.
북한이 동부해안선과 서부 평양 이북만으로는 동서간에 소통이 되지 않고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날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는 개마고원에서의 전투다.
인적도 드문 개마고원으로 진격한 것은 맥아더 사령부가 독도법을 잘못읽은 것으로 사료된다.
물론 이것은 결과를 놓고 하는 이야기다.
첫댓글 굉장한 사연이 있는 노래였군요~
덕분에 다시한번 전쟁에 대해 생각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초롱불님^^
백선엽장군 연재보다 더실감납니다
사연이 깊은 음악이군요,,,제가 50녕 1월생인데 우리 나이또래가 전쟁중에 50년 이쪽저쪽이 많이 죽었지요..
참으로 숨막히는 전쟁이라 얼마나 떨리고 무서웠을까요....전, 그 폭탄터지는곳에서 얼마나 울었을까요....
다시는 이런 전쟁은 없어야 겠지요? 초롱불님! 고맙습니다..잠시동안 멍청이가 되었답니다요....
아놀드님 그 시절에 누구나 할것없이 굶었고요 힘들게 고생을 하였지요 저는 전쟁이 지나고 57년도에 태어났어요 그러나 시골(촌에서)에서 농삿군집에서 태어나 엄마 뱃속에서 나와 바로 6개월간 엄마의 젖을 못먹고 자랐다고 해요 누구나 다 같이 힘들었지요 그 당시에요
참 자상하세요 덕택에 모르는 사회공부 잘했어요 다시 함경도 사나이 들어봐야겠어요
초롱불님 참으로 아픈 사연이 있네요 자세한 자료에 감사 합니다 고귀한 희생이 있었네요
어디서 이같은 상세한 자료를 구하셨는지요 ... 넘 좋은 자료네요.. 발은 다나셨는지요 ..낼 상록수 아코 단양 벚꽃놀이 가시는지요 ?
6.25의 포화속에서 방금 벗너난 기분입니다.
이제는 이런 참혹한 동족간의 대립을 끝내고
하루라도 빨리 평화 통일이 되는 그 날을 염원해 봄니다.
초롱불님 노래에 따른 사연(6.25전쟁사)을 연상 하게 되는 아주 귀중한 자료 이라 봅니다 저는 전후 세대라서 이리도 자세한 전쟁사를 보니 마음이 ...... 이러한 전쟁사를 자세히 기억을 하였네요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없어야 지요 초롱불님 대단 하십니다
초롱불님 오늘 참 좋은 자료 잘 봤습니다. 전사도 배웠고 관심은 있었는데 .... 월남전에 참전한 저로서 참 감명깊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