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교회로
2024.03.31.(부활절)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29/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갈릴리 바닷가에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으셨다. 30/ 많은 무리가, 걷지 못하는 사람과 지체를 잃은 사람과 눈 먼 사람과 말 못하는 사람과 그 밖에 아픈 사람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로 다가와서, 그 발 앞에 놓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31/ 그래서 무리는,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지체 장애인이 성한 몸이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걸어다니고, 눈 먼 사람이 보게 된 것을 보고 놀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태복음 15:29-31)
들어가는 말
사회복지기관에게 그 대상자는 분명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2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동보호기관들은 학대나 방임된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삼으며, 청소년 시설들은 설립 조건과 규정에 맞는 청소년들만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한편 대상의 선정은 기관들의 몫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학대가 의심되어 경찰에 신고 되면 경찰은 ‘기관’에 학대 여부를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기관은 가정을 방문하고, 부모와 아이의 말을 듣고 학대 여부를 결정합니다. 학대 받는 아이들은 몸으로, 눈빛으로 구해줄 것을 호소합니다.
아이는 예수님 ‘앞에 나선’ 여인과는 달리 상담자 앞에 나서지 못합니다. 첫째는 부모에 대한 미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시설과 복지사는 어떤 경우라도 폭력적인 가정보다 낫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처음 마주하는 상담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상담자의 부드러운 말은 바늘을 숨긴 미끼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대하는 부모에게 유리한 진술을 합니다. 아이에게 분명한 것은 상담자가 아니라 학대하는 부모가 보호자라는 인식입니다. 아이는 먼저 상담자를 자기 보호자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상담자는 아이를 대리 보호자에게 인계하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예수가 사라진 현실
기관의 개입은 부모에게 아무런 경각심도 주지 않으며, 아이의 환경을 개선하지도 못합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와서 이것저것 묻고 가는 상담사나 복지사를 도대체 어느 부모가 두려워하겠습니까? 기관들은, 더 나아지는 것이 없으므로,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매달리면서 늘 바쁘기만 합니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일은 얼마든지 많이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바쁩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에서 아이의 비극은 쌓여가다 때로는 죽음으로 드러납니다. 우리사회에서 비극으로 드러난 아동학대의 사례 중에 ‘경찰’이나 ‘지자체’나 ‘아동보호기관’들이 모르고 있었던 사건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알고 있었음에도 막지 않았을 뿐입니다.
공동체는 기관과는 달라야 합니다. 아이들은 우리 공동체가 그들에게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며, 단지 보호자가 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신뢰를 보여줍니다. 기관은 정반대입니다. 기관이 도와주어야 할 만한 조건을 말하라고 요구하지만 보호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어떤 조건을 제시한다면, 아이들은 그 조건에 자신을 맞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가나안 여인이 ‘실은 내가 유대인’이라고 속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의 시작이며, 서로를 속고 속이는 전쟁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부모가 되려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느끼기 시작할 때, 그들은 마음을 열고 다가옵니다.
연대의 정과 신뢰 위에서 공동체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갈릴리 바닷가에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으셨다.”(29) 이방 땅, 두로와 시돈으로 물러났던 예수님이 다시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를 따라 걷다가 산으로 올라가 앉습니다. 산은 하나님이 머무는 장소이며,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소통하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을 만나러 산으로 갔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창시자인 모세 역시 산 위에서 불타는 떨기나무로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만났었습니다.
예수가 돌아오다
이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산 위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혼자 오지 않았습니다. “많은 무리가, 걷지 못하는 사람과 지체를 잃은 사람과 눈 먼 사람과 말 못하는 사람과 그 밖에 아픈 사람을 많이 데리고”(30) 왔습니다. 하지만 치유의 현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귀신들린 사람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태는 왜 이들을 빼놓았을까요? 산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피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귀신들린 사람들은 도시의 어두운 골목이나 음습한 골짜기가 그들의 장소인 것입니다.
이로써 마태는 산에 오른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30) 예수님은 무리가 데려온 이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고쳐주십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권능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지체 장애인이 성한 몸이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눈 먼 사람이 보게 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놀라운 일을 한 예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본 것은 산에서 자신의 권능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원형입니다. 교회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체험되고 목격되는 곳입니다. 나아가 건물로서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무리들이 모여든 하나님이 임재하신 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성직자는 산에 앉으신 예수를 대신해 단의 높은 곳에 자리하는데, 하나님이 계신 산에 올라가 회중을 향해 돌아 서 있는 것입니다. 회중은 모두 성직자를 보게 되지만 성직자를 넘어 교회의 가장 높은 곳에 모습을 드러낸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진정한 교회
그래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상징인 십자가가 단상의 중앙 높은 곳에 자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은 로마의 원형극장을 모델로 하는 듯합니다. 무대는 가장 낮은 곳에 배치됩니다. 회중들은 귀를 즐겁게 해줄 쇼를 기대합니다. 이곳에서는 탤런트인 목사가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앉을 자리가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등장할 수 없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산 위에 앉은 예수님 앞에 주변에 있는 아픈 이웃들을 기꺼이 데리고 왔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업고 왔을 것이며, 지체를 잃은 사람은 부축해가며 산길을 힘겹게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눈 먼 사람들의 눈이 되어 주었으며,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귀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아픈 사람들의 약함을 대신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웃의 아픔에 기꺼이 동참하면서 산으로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보여준 연대의 정(compassion)은 제자들을 넘어 사람들에게서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에게 온 사람들은 놀라움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지체 장애인이 성한 몸이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걸어다니고, 눈 먼 사람이 보게 된 것을 보고 놀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31)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은 타인의 아픔에 동참하면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만 데려올 수 있는 이웃들을 데려오지 않습니다. 교인들은 편안 자세로 그들에게 만족을 주는 쇼를 즐기고 싶을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들리는 찬양은 멋집니다. 그러나 놀라움은 없습니다. 연대의 정이 없어진 교인들은 누구도 수고해서 데려오지 않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교회에서 전혀 놀라운 것을 보지는 못합니다. 한편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벅찹니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와 예수님과 협상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최소한의 비용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정말 놀랍고도 위험한 일은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산(교회)에서 그들은 사탄과도 스스럼없이 거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있는 곳은 산이 아니며, 교회도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 장애를 지닌 아이, 학대받은 아이는 공연장이 되어버린 교회에 온다고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동행하는 누군가가 있을 때,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상처받은 아이들과 함께 할 때, 치유는 이미 시작됩니다. 반대로 동행하지는 않으면서, 누군가에게 아이들을 떠맡길 때, 그들의 상처는 더 깊어갑니다. 오늘날 상처받은 아이들은 ‘기관’에 맡겨지면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돌봄을 받기는커녕 마음 속 상처를 키워갈 뿐입니다. 반대로 아이들이 상처를 짊어질수록 그들은 각종 기관에 속한 종사자들을 돌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이들의 상처를 키울 뿐이지만, 그 아이들 때문에 먹고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들을 떠넘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바로 이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상처받은 아이들과 함께 머무는 그곳에 예수님은 오십니다. 우리가 함께 머물 때 그들은 치유되며, 상처가 아물어가는 것을 보며 놀랍니다. 우리는 바로 그곳에서 능력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