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8/30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성 베네딕도회 한국 선교 100주년 기념 (신차식 교수님 자료 제공)
2009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새 성당과 수도원을 봉헌
"[종합]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새 성전 봉헌"
100주년 기념성당으로 우뚝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8월 30일 새 성당과 수도원을 봉헌했다. 2007년 4월 6일 새벽 화재로 수도생활의 터전을 잃고 슬픔에 젖은 지 2년 5개월 만이다.왜관수도원은 이날 신축 성전에서 이형우(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장 겸 덕원자치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 아빠스 주례로 최창무(광주대교구장) 대주교와 박정일(전 마산교구장) 주교 등 주교단과 사제단, 수도자, 평신도 등 1300여 명이 함께한 가운데 성전 봉헌식을 가졌다.이날 성전 봉헌식은 수도원 중앙정원 성전 입구에서 이 아빠스와 주교단, 사제단, 수도자 대표 등이 개관 테이프를 끊고 입당한 것을 시작으로 성수 예절과 말씀 전례, 봉헌 기도, 도유 예식, 성찬 전례, 축하식 차례로 진행됐다. 이 아빠스는 강론에서 "도저히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지던 수도원 및 성당 신축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은인들과 봉헌회원들의 희생과 봉헌 덕분"이라며 "새 성전은 성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주년을 맞아 지어졌기에 100주년 기념성당이라 할 만하다"고 말했다.왜관수도원은 축하식에서 성전 신축에 함께한 수도원 봉헌회원 500여 명과 베네딕도회 벗들 2000여 명에게 감사를 전하고, 봉헌회와 최호영(가톨릭대 교수, 서울대교구) 신부 등 단체와 개인에게 공로ㆍ감사패를 전했다. 특히 성전 건축에 함께한 봉헌회원들과 은인들의 명단은 제대 밑에 영구히 보관했다.신축 수도원 성당과 숙소동은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에 평면은 라틴 십자가 형태로 140억 원을 들여 지어졌으며, 건축연면적은 9280.93㎡(2822평)에 이른다. 철근 콘크리트 라멘조 구조이며, 외부는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마감 처리했다. 성전 내부는 1100.55㎡(333평)이며, 수도자석 96석과 신자석 400여 석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성전 안팎에는 △인류가 평화와 일치를 이루기를 기원하며 화재 당시 타고 남은 목재와 북한에서 가져온 주목으로 만든 '평화의 십자가(Crux Pacis, 제작 왜관수도원 금속공예실ㆍ목공예실)'△종탑부 '생명의 십자가' 및 제의방 지붕 위 닭 상징물(디자인 김형주 이멜다, 제작 황의균 스테파노) △연길 성십자가 수도원과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수도원, 서울ㆍ덕원 성 베네딕도수도원 등을 상징하는 3개의 종(독일 파사오 종 제작사) 등 제각각 깊은 신앙적 의미를 갖는 성물이 수도회 형제들의 노력으로 제작 봉헌됐다.박정일 주교는 이날 "1948년 9월 덕원신학교에 들어가 두 학기를 다닌 인연으로 성전 봉헌식에 함께하게 되니 감개무량하다"며 "이제 새롭게 성전과 수도원을 신축했으니 전례 진작이라는 베네딕도회만의 카리스마를 잘 살려 나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평화신문 2009. 09. 06발행 [1034호]http://web.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308024&path=200909
2007 - 사이클 영웅 '랜스 암스트롱' 방한‘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36·미국)이 ‘현대캐피탈 인비테이셔널 투르 드 코리아 2007’에 특별 초청돼 30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암스트롱은 1996년 고환암 판정을 받고 암세포가 전이된 뇌의 일부분을 잘라내는 대수술 끝에 재기한 사이클 영웅. 1999년부터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투르 드 프랑스’에서 7년 연속 정상에 오르며 세계 사이클 역사를 다시 썼다.암스트롱은 공항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의 암 환자에게 희망과 영감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3박4일 일정으로 방한한 암스트롱은 1일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대회 개막 선언을 한 뒤 시민들과 퍼레이드를 펼치는 등 대회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맡는다.
장민석기자 jordantic@chosun.com 2007.08.31 08:55
http://spn.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31/2007083100230.html
2005 - 국산 첫 초음속기 ‘T-50’ 양산 1호기 출고
최초의 국산 초음속 고등훈련기 겸 경공격기인 `T-50'이 30일 출고됐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이날 오전 경남 사천 본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기관 인사와 군 관계자 등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T-50 양산 1호기 출고 행사를 가졌다고 밝혔다.
이날 출고된 T-50에는 `검독수리'(Golden Eagle)라는 이름이 부여됐다.
T-50의 출고로 우리나라는 세계 12번째 초음속 항공기 개발 국가로 진입하는 쾌거를 이뤘다고 KAI는 설명했다.
T-50 고등훈련기는 1992년부터 5년간의 탐색개발을 거쳐 1997년부터 본격적인 체계개발에 착수, 공군의 사업관리하에 KAI와 미국 록히드 마틴이 공동으로 개발에 성공한 국내 최초의 초음속 항공기라고 KAI는 덧붙였다.
지금까지 사업비용만 총 6조4천118억원이 소요됐다.
2002년 8월 초도비행에 성공한 T-50은 엔진 공중 재시동, 저고도 초음속 비행, 공대지 무장 투하 등 1천140여회의 각종 고난이도 비행시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며 이날 양산 1호기 출고를 거쳐 10월에 공군에 인도될 예정이다.
KAI 관계자는 "T-50은 F-16, F-15, 라팔, F-22 등 차세대 전투기의 조종훈련을 위해 설계된 초음속 훈련기이자 공대공 미사일 등 각종 무장을 장착해 경공격기로 운용할 수 있는 기종"이라며 "T-50 양산 1호기 출고로 독자적인 항공무기체계 운용기반을 구축,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KAI는 유럽과 중동지역에 T-50의 수출을 적극 추진해 세계 6번째 초음속 비행기 수출국가로 도약할 계획이다.
(서울=연합뉴스) /동아닷컴 2005-08-30 09:17
http://news.donga.com/fbin/output?f=totalk&code=k__&n=200508300222
1999 - 동티모르 독립 투표 17세기 이래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1976년 인도네시아에 강제로 합병된 동티모르! 인도네시아에 강점된 지 23년 만인 1999년 오늘 동티모르 주민들에게 독립 찬성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UN의 감시 아래 실시된다. 98%가 넘는 높은 투표율을 나타낸 이 선거에서 78.5%가 독립에 찬성했다. 하지만 독립을 반대하는 민병대가 동티모르 전역에서 학살과 방화를 자행한다. 이 때문에 인구의 3분의 1이 피난을 떠난다. 유엔 다국적군 수천 명이 동티모르에 파견돼 치안 회복 활동을 벌이고 인도네시아군이 철수하면서 평온을 되찾기 시작한다. 독립 투표 두 달 뒤인 같은 해 10월 20일 인도네시아 의회격인 국민협의회가 동티모르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동티모르는 마침내 2년 간에 걸친 인도네시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다. 2002년 4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구스마오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됨에 따라 동티모르는 21세기 첫 독립국가가 됐다. /YTN
1984 - 미국의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첫 비행
1984년 8월에 처음 발사된 미국의 세 번째 우주왕복선.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컬럼비아호·챌린저호에 이어 개발한 미국의 세 번째 유인 우주왕복선(스페이스 셔틀)이다. 1983년 11월 케네디우주센터에 인도된 뒤, 1984년 8월 30일 첫 비행을 하였다. 이름인 '디스커버리'는 하와이섬을 발견한 영국 탐험가 쿡(James Cook)이 사용하던 같은 이름의 배[船]에서 땄다.
궤도선 길이는 37.2m, 너비는 23.8m, 무게는 77.56t, 탑재무게는 27.5t이다. 최대 시속은 2만 8157㎞ 이상까지 낼 수 있다. 2005년 8월까지 총 31회 발사되었고, 발사 때마다 안전장치를 보완했다. 특히 2003년 2월 1일 컬럼비아호가 지구로 돌아오는 도중 폭발해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 뒤에는 안전장치 보완에 더욱 신경을 써서 보완에만 1조 4000억원이 들었다.
첫 발사 때 국제 우주정거장과 도킹에 성공해 우주정거장에 파견될 상주인력이 사용할 장비를 실어 나르는 한편, 우주유영을 하면서 각종 보수작업을 했다. 1990년 4월에는 허블우주망원경을 싣고 지구상공 610㎞ 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2005년 7월 26일 31번째 발사 때는 외부 연료탱크, 볼트 캐처, 바이포드 램프 히터, 날개 센서, 카메라와 추적기 등의 안전장치를 최첨단 장치로 바꿨다. 그럼에도 몇 차례 연료 센서 고장 등으로 발사가 연기된 끝에, 26일에야 발사되었다.
승무원 7명이 탑승하였는데, 국제우주정거장에 14일간 머무르면서 우주실험실의 조립을 위한 장비를 전달하고, 2008년 수명이 다하는 허블우주망원경의 성능을 점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원래는 12일 만에 지구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몸체의 단열 타일 사이를 메우는 '갭 필러'가 튀어나와 사상 처음으로 승무원들이 우주유영을 하면서 수리작업을 하느라 8월 9일에야 귀환하였다. 컬럼비아호 참사 후 처음으로 발사된 우주왕복선으로, 2011년 퇴역하였다. /네이버
디스커버리 우주왕복선(Space Shuttle Discovery)
최초비행일 : 1984년 8월 30일 ~ 1984년 9월 5일
최후비행일 : 2011년 2월 24일 ~ 2011년 3월 9일
/위키백과
1978 - 제24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부산서 개막
세계근로청소년들의 기량을 겨루는 제24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가 1978년 8월 30일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에 대회본부를 설치하고 17일간의 일정으로 개막했다. 참가선수들의 기량을 직접 겨루는 본 경기 대회는 9월 6일 개회식에 이어 3일간 열렸고 시상식은 14일에 열렸다. 한국대표선수팀은 금22, 은6, 동3개 등 전 종목에서 입상해 1977년 대회에 이어 종합우승을 차지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
임광희 동아닷컴 기자 oasis@donga.com /동아닷컴TV 2010-08-27 13:38:53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 남북적십자 본회담 기념, 1972.8.30
1972-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 평양서 개막
1972년 8월 30일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평양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남북의 이산가족찾기를 위한 쌍방간의 적십자회담은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총재 최두선이 제의하고 북한적십자사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성립되었다.9월 20일 판문점에서 개최한 제1차 예비회담에서는 상설회담 연락사무소 설치와 직통 전화 가설 등에 합의,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북측과 남측간에 상호접촉의 대상자 및 제약조건에 이견을 보임에 따라 회담은 난항에 빠지게 되었다.1973년 7월 13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7차 본회담을 끝으로 회담은 별 성과 없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다가 12년 만인 1985년 제8차 본회담을 서울에서 열고 남북한 이산가족 등의 교환방문 추진에 합의했다. 양측 실무대표는 3차례의 접촉끝에, 8월 22일 쌍방 각기 151명(단장1, 고향방문단50, 예술공연단50, 기자30, 지원인원20)의 교환방문에 합의함으로써 분단 40여년 만에 서울-평양 동시방문이 실현되었다. /조선
1968 - 수원 팔달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 건립
1968년 8월 30일 - 수원 八達 공원 내에 노래비를 건립하다.
(洪蘭坡 -그의 생애와 예술) (나운영기념사업회)
http://www.launyung.co.kr/data/jaryo_0.htm
1963 - 박정희 장군 전역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장군! 쿠데타 2년 3개월 만인 1963년 오늘 철원의 육군 제5군단 지포리 비행장에서 국내외 인사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역한다. 1946년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한 이래 17년 동안 이어온 군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군복을 벗게 된 것이다. 그의 전역식은 건군 사상 최대규모로 거행됐다. "다음의 한 구절을 남기고 전역 인사로 대신할까 합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그는 이튿날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당총재와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한다. 박정희 후보는 같은 해 10월 15일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다. /YTN
1958 - 프랑스의 항해가 에릭 드 비숍(de Bisschop, Eric) 사망
드 비숍 [de Bisschop, Eric, 1891.10.21~1958.8.30]
Eric de Bisschop (October 21, 1891-August 30, 1958) was a French seafarer, famous for his travel from Honolulu to France aboard the Polynesian sailboat Kaimiloa.
He spent most of his adult life in the Pacific Ocean, notably in Honolulu (1935-37 and 1941-47) and in French Polynesia (1947-56); he was not simply a sea adventurer but had a deep interest in the Pacific and its inhabitants, whose history he tried to study.
Bi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Eric_de_Bisschop
1945 - 장제스[蔣介石], 중경에서 마오쩌둥[毛澤東]과 회담
일본침략군이 항복한 1945년 8월 평화를 갈구하는 중국 국민의 여망을 배경으로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와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이 충칭[重慶]에서 화평교섭회담(和平交涉會談)을 개최하였다. 이 회담에서 쌍방은, ① 내전회피 ② 정치협상회의 개최 ③ 각 당파의 평등한 지위 승인 등에 관한 협정을 논의하고, 그 결과 10월 10일 ‘국공쌍방 대표회담 기록요강’, 즉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발표, ‘어떤 일이 있어도 내전을 피하고, 독립 ·자유 ·부강의 신중국을 건설한다’라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미국의 원조하에 끝내 중공(중국공산당)과의 제3차 국공합작을 거부하고 장제스는 4대 1이라는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협정을 파기하였다. 한편 마오쩌둥도 강경히 이에 맞서 응전태세로 나왔기 때문에 마침내 1946년 전면적인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국공내전) /naver
1941 - 작곡가 홍난파(洪蘭坡) 사망
홍난파 [洪蘭坡, 1898.4.10~1941.8.30]
한국 최초의 작곡가·한국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 이처럼 난파(蘭坡) 홍영후(洪永厚)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유난히 많다. 난파는 천상 음악인이었지만 한때는 문필가의 길을 걸었을 만큼 문재(文才)도 뛰어났다. 음악과 문학을 아우른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한 것도 난파였다. 그가 음악에만 전념하게 된 것은 “개천지 통만고(開天地 通萬古)에서 두 가지 예술로 대성한 천재가 누구냐?”는 변영로의 충고가 있은 뒤였다.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난파는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와 일본 우에노음악학교를 거치면서 개화기 우리 음악계의 선구자요 스타로 우뚝 올라섰다. 난파의 이름이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살아 있는 것은 ‘봉선화’ 때문이다. ‘봉선화’는 1920년에 난파가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애수’에 5년 뒤 김형준이 가사를 붙여 만든 곡으로, 한민족의 한과 설움을 고스란히 담아내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암울했던 식민지시대에 한민족의 대표곡이 됐다.
‘옛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등 지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많은 가곡을 작곡했다. 또 ‘나소운(羅素雲)’이라는 예명으로 21곡이 되는 대중가요까지 작곡한 팔망미인이었다. 그러던 그가 1941년 8월 30일 “내가 죽거든 연미복을 입혀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1940 - 영국의 물리학자 J. J. 톰슨(Thomson, J. J.) 사망
톰슨 [Thomson, J(oseph) J(ohn), 1856.12.18~1940.8.30]
영국의 실험물리학자. 맨체스터 출생. 오웬스 칼리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894년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05년 왕립연구소 교수, 1918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학장을 역임하였다. 근대 원자물리학 여명기의 캐번디시연구소의 중심인물이었다. 초기연구는 논문 〈소용돌이 고리에 대하여〉(1884, 애덤스상 受賞)에서 볼 수 있듯이 원자구조론에 관심을 보였으나 얼마 후 작용반작용의 등가성(等價性)에 기초를 둔 수학적 방법의 전개를 시도, 이를 이용하여 물리화학적 여러 현상, 특히 기체의 해리(解離)에 관심을 쏟아 1885년부터 기체방전의 실험연구를 시작하였다. 회전거울에 의한 음극선의 속도측정 연구도 하였는데, 이것은 음극선의 본성을 파동이라고 하는 H.R.헤르츠의 학설에 대하여 영국의 학자들이 주장한 입자설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1895년 X선과 그 기체의 해리현상 등이 발견되자 이것을 기체방전 연구에 이용, E.러더퍼드와 공동으로 연구를 추진, 전기장과 자기장을 이용하여 음극선 입자의 비전하(比電荷)를 측정하고 수소원자와 비교, 전자의 존재를 예상하였다. 열전기더미에 의한 에너지 측정으로 질량을 결정하고 광전효과와 열전자효과를 검토, 전자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증명하였다(1899). 전자의 발견은 원자보다 미소한 물질의 구성요소 발견으로서, 원자구조 연구에 중요한 한 걸음이었으며, 이 연구로부터 원자구조론, 물질구성, 원소의 주기율 등으로 연구를 진행시켜 나아갔다. 1903년 출판된 《기체 내의 전기전도》에는 전자에 관한 연구가 총괄되어 있다. 한편 양극선(陽極線)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여 전기장과 자기장을 작용시킴으로써 입자를 질량에 의해 분리시키는 방법을 창안하여 분석기를 제작, 1912년 네온의 동위원소 분리에 성공하였다. 1906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여러 요직에 근무하여 학계와 과학정책면에서도 공헌하였으며, 문하에서 E.러더퍼드, J.S.타운센드, P.랑주뱅, C.T.R.윌슨 등의 많은 원자물리학자가 배출되었다. 1908년 기사작위를, 1912년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사후에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안장되었다. /naver
영국의 실험물리학자.
맨체스터 출생. 오웬스 칼리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894년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05년 왕립연구소 교수, 1918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학장을 역임하였다. 근대 원자물리학 여명기의 캐번디시연구소의 중심인물이었다.
초기연구는 논문 〈소용돌이 고리에 대하여〉(1884, 애덤스상 受賞)에서 볼 수 있듯이 원자구조론에 관심을 보였으나 얼마 후 작용반작용의 등가성(等價性)에 기초를 둔 수학적 방법의 전개를 시도, 이를 이용하여 물리화학적 여러 현상, 특히 기체의 해리(解離)에 관심을 쏟아 1885년부터 기체방전의 실험연구를 시작하였다.
회전거울에 의한 음극선의 속도측정 연구도 하였는데, 이것은 음극선의 본성을 파동이라고 하는 H.R.헤르츠의 학설에 대하여 영국의 학자들이 주장한 입자설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1895년 X선과 그 기체의 해리현상 등이 발견되자 이것을 기체방전 연구에 이용, E.러더퍼드와 공동으로 연구를 추진, 전기장과 자기장을 이용하여 음극선 입자의 비전하(比電荷)를 측정하고 수소원자와 비교, 전자의 존재를 예상하였다. 열전기더미에 의한 에너지 측정으로 질량을 결정하고 광전효과와 열전자효과를 검토, 전자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증명하였다(1899).
전자의 발견은 원자보다 미소한 물질의 구성요소 발견으로서, 원자구조 연구에 중요한 한 걸음이었으며, 이 연구로부터 원자구조론, 물질구성, 원소의 주기율 등으로 연구를 진행시켜 나아갔다.
1903년 출판된 《기체 내의 전기전도》에는 전자에 관한 연구가 총괄되어 있다.
한편 양극선(陽極線)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여 전기장과 자기장을 작용시킴으로써 입자를 질량에 의해 분리시키는 방법을 창안하여 분석기를 제작, 1912년 네온의 동위원소 분리에 성공하였다. 1906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여러 요직에 근무하여 학계와 과학정책면에서도 공헌하였으며, 문하에서 E.러더퍼드, J.S.타운센드, P.랑주뱅, C.T.R.윌슨 등의 많은 원자물리학자가 배출되었다. 1908년 기사작위를, 1912년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사후에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안장되었다. /naver
1918 - 블라디미르 레닌 피격 사건
[어제의 오늘]1918년 블라디미르 레닌 피격 사건
ㆍ볼셰비키 정부 ‘적색 테러’ 공표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이듬해인 1918년 8월30일 모스크바에 있는 한 공장을 찾았다. 그는 이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그가 연설을 무사히 마치고 공장 건물을 나서며 자신의 차에 오를 무렵이었다. 젊은 여성 한 명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다. 레닌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세 발의 총성이 연이어 울렸다. 레닌은 곧바로 고꾸라졌다. 두 발의 총알이 각각 왼쪽 어깨와 턱에 명중한 것이다. 한 발은 옷자락을 스치고 빗나갔다.
범인으로 지목된 파니 카플란(1890~1918)이라는 여성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비밀경찰에 넘겨진 카플란은 단독범행이라고 자백했다. 그는 레닌을 반역자로 여겼기 때문에 암살을 계획했다고 진술했다. 사건 발생 나흘 만에 카플란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정국 불안을 우려한 볼셰비키 정부의 속전속결 뒷수습이었다.카플란은 어린시절부터 농민 정당인 사회혁명당에 몸담았다. 사회혁명당은 러시아 혁명 이전 볼셰비키 지지파와 멘셰비키 지지세력으로 갈라졌는데, 카플란은 볼셰비키 반대파에 속했다. 총상을 입은 레닌은 병원이 아니라 크렘린궁으로 이송됐다. 추가 암살시도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총상은 심했지만 레닌은 구사일생했다. 하지만 후유증은 평생 레닌을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는 암살 미수사건 6년 뒤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공식 사인은 발작증세였다. 발작증세가 총상 후유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통설이다.암살 미수사건은 수개월 동안 러시아 사회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볼셰비키 정부가 대대적인 반대세력 숙청에 나선 것이다. 바로 ‘적색 테러’였다. 적색 테러는 암살 미수사건 사흘 뒤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공표됐다. 결국 암살 미수사건은 레닌은 물론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 큰 후유증을 안겼다. 카플란은 오랫동안 러시아와 구 소련 연방에서 체제 전복자의 화신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는 암살의 배후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카플란의 시력을 거론한다. 카플란은 한때 차르 관료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해 수년간 수감됐다. 이때 받은 고문 등으로 시력을 크게 훼손당해 눈앞도 잘 분간 못했다는 것이다. 시력이 나쁜 사람이 혼자서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서영찬 기자 /경향신문 2010-08-29 21:52:3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8292152395&code=100100&s_code=ap005
1918 -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테드 윌리엄스(Williams, Ted) 출생
윌리엄스[Williams, Ted, 1918.8.30~2002.7.5]
본명은 Theodore Samuel Williams.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1939~60년 보스턴 레드 삭스의 좌투좌타(左投左打) 외야수로 활약하면서 통산 0.344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2차례 3관왕(타율·홈런·타점)을 차지했다. 5년 동안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비행사로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산 521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66년 야구 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1941년 0.406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20세기 마지막 0.400대 타자가 되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1969년 메이저 리그로 돌아와 워싱턴 세너터스의 감독을 맡았다. 감독 부임 첫해에 그해의 아메리칸 리그 감독에 선정되었다. 감독에서 은퇴한 후 간혹 타격 코치로 활동했고, 낚시장비회사의 고문이 되었다. 존 언더우드와 공동 집필한 그의 자서전 〈내가 타격할 차례 My Turn at Bat〉는 1969년에, 〈과학적 타격 The Science of Batting〉은 1971년에 출간되었다. /브리태니커
1915 - 러시아의 지질학자 루투긴(Lutugin, Leonid) 사망
루투긴 [Lutugin, Leonid Ivanovich, 1864.3.4(2.21)~1915.8.30(8.17)]
러시아 지질학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러시아 최초의 석탄퇴적분지 지질학 전문가의 한 사람이다. 1889년 페테르부르크광산학교를 졸업하고, 1897년 그곳 교수가 되었다. 1898∼1915년 지질학위원회가 20년 이상 실시해 오던 돈바스 분지연구사업을 지휘했으며, 돈바스 석탄지층단면도를 작성하고, 석탄층의 두께와 양을 정확히 측정했다. 세부적인 지질학적 측정방법을 개발하여, 1911년 제작한 축척 1/126000의 돈바스 종합지질학지도로 투린국제전람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쿠즈네츠크·첼랴빈스크 및 기타 석탄퇴적분지에서 일하면서 그 곳의 지질학적 구조에 관한 현대적 개념의 초석을 쌓았다. 또 석탄지층의 반복적인 변화를 지각진동운동의 결과로 보고, 석탄의 질과 변성도 사이의 관계를 입증하였으며, P.I. 스테파노프·V.I. 야보르스키·A.A. 가페예프 등 석탄지질학자를 규합하여 학파를 창시했다. 돈바스의 한 도시와 쿠즈네츠크 퇴적분지의 석탄층은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야후 백과
- Mauchly and Eckert in front of their
UNIVAC computer
1907 - 미국의 컴퓨터공학자 존 모클리(Mauchly, John) 출생
모클리 [Mauchly, John William, 1907.8.30~1980.1.8]
존 모클리
존 윌리엄 모클리(John William Mauchly, 1907년 8월 30일 ~ 1980년 1월 8일)는 J. 프레스퍼 에커트와 함께 최초의 전자 컴퓨터인 에니악(ENIAC)을 만든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나 메릴랜드 주 체비 체이스에서 자라와, 1932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물리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43년 미국 전쟁부는 당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공학 교수였던 모클리를 프로젝트 종사에 선출하였다. 또한 그 대학의 졸업생 J. 프레스퍼 에커트를 총지배 공학자로 뽑았다. 모클리와 에커트와 그들의 팀은 1945년 후순에 에니악을 완성하였다.
1946년 그들은 에니악을 광고하였고, 같은 해에 에커트와 모클리는 에커트-모클리 컴퓨터 주식회사의 전신인 ECC(Electronic Control Company)를 창립하였다.
1948년 미국 연방수사국은 고발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후에 모클리가 공산주의 연결을 가지고 있었다는 잘못이 증명되었다. 모클리의 군사적 안정은 1950년에 빼앗겼으나 1958년 완벽하게 복구되었다. 모클리가 안정을 부정한 시기 동안에 그의 회사는 확실한 군사적 계약들을 안정시키지 못한 이유로 비지니스를 잃고 말았다.
현재 유니시스 주식회사의 하나인 레밍턴 랜드 회사는 1950년에 에커트-모클리 컴퓨터를 구입하였다. 그 회사에서 에커트와 모클리는 처음으로 광고적 성공을 거둔 유니백(UNIversal Automatic Computer)의 건설을 완성하였다.
1980년 1월 8일 펜실베이니아 주 앰블러에서 사망하였다. /위키백과
1889 - 덴마크의 배우 보딜 입센(Ipsen, Bodil) 출생
입센 [Ipsen, Bodil, 1889.8.30~1964.11.26]
본명은 Bodil Louise Jensen. 덴마크의 배우.
무대에서 자주 상대역을 맡았던 성격배우 포울 레우메르트와 함께 헨리크 입센과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작품들을 재조명했다. 입센은 1909년 코펜하겐에 있는 왕립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섰다. 완숙기에 이르러서는 극적인 인물 묘사에 치중했지만, 〈뜻대로 하세요 As You Like It〉에서의 로잘린드 같은 희극적인 역, 〈인형의 집 Et dukkehjem〉에서의 노라 같은 심각한 역에서도 성공을 거둠으로써 광범위한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 맥베스 부인 역의 연기는 특히 탁월했고, 〈유령 Gengangere〉에 나오는 알빙 부인 같은 입센 연극의 주인공 역들은 찬사를 받았으며, 〈율리 양 Fröken Julie〉의 율리 역과 〈죽음의 무도 Döds-dansen〉의 알리세 역 같은 스트린드베리의 여주인공 역은 그녀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스트린드베리의 여주인공 역에서 입센은 당시 유명한 배우였으며 연극 경력도 그녀와 동등한 레우메르트와 함께 등장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1913년부터 덴마크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그녀의 연기가 가장 잘 알려진 무성영화로는 디킨스의 고전인 〈데이비드 카퍼필드 David Copperfield〉(1922)·〈어린 도릿 Little Dorrit〉(1924) 등이다. 후에 입센은 〈나와 함께 고향으로 Go Home With Me〉(1941)로 특별한 찬사를 받았다. 입센이 출연한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는 라우 라우리츤과 공동으로 감독한 〈아프스포레트 Afsporet〉(1942)·〈붉은 목장 Red Meadows〉(1945)도 있다. /브리태니커
1884 - 스웨덴의 화학자 테오도르 스베드베리(Svedberg, Theodor) 출생
스베드베리 [Svedberg, Theodor, 1884.8.30~1971.2.25]
스웨덴의 화학자.
1926년 콜로이드 화학에 대한 연구와 초원심분리기(超遠心分離機)를 발명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07년 웁살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곳의 교수가 되었다. 1949년 퇴임하면서 새로 설립된 구스타프 베르너 핵화학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되어 1967년까지 재직했다. 1924년에 완성한 최초의 초원심분리기는 중력보다 5,000배나 큰 원심력을 만들 수 있었으며, 그 뒤에 만든 것은 중력의 수십만 배까지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초원심분리기를 사용하여 헤모글로빈과 같은 매우 복잡한 단백질의 분자량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다. 만년에는 핵화학을 연구하고 사이클로트론을 개량하는 데 기여했으며, 제자인 아르네 티셀리우스가 전기영동(電氣泳動) 장치를 개발하는 것을 도왔다. /브리태니커
- Maison Particulaire
Contra Construction
1883 - 네덜란드의 화가, 시인, 건축가 판 두스부르흐(Van Doesburg, Theo) 출생
판 두스부르흐(두스뷔르흐) [Van Doesburg, Theo, 1883.8.30~1931.3.7]
네덜란드의 화가이자 시인이며 건축가.
본명은 크리스티앙 에밀 마리 퀴퍼(Christiaan Emil Marie Küpper)이다. 1883년 네덜란드의 유트레히트(Utrecht)에서 태어나 1931년 스위스다보스(Davos)에서 사망했다. 1908년 헤이그에서 인상주의 회화로 첫 전시회를 가졌으며 1913년에는 시집을 출판했다. 1914년에서 1916년 군복무 중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Concerning the Spiritual in Art>를 읽고 추상 미술로 전환하였으며 그 후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작품을 접하고 회화의 이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1917년 몬드리안을 비롯한 반통걸루(Georges Vantongerloo), 코크(Antonie Kok), 리히터(Hans Richter), 우드(J.J.P.Oud), 리트벨트(Gerrit Rietveld) 등과 데 스틸(De Stijl)을 결성하고 같은 이름의 잡지를 창간했다. 데 스틸은 ‘양식(the style)'을 의미하는 네덜란드 말로 이 운동에 참여했던 화가와 건축가들은 순수한 기하학에 입각한 추상 미술을 추구해 나갔다. 전쟁이 끝난 후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921년에서 1922년 바이마르에서 바우하우스에 반대하는 데 스틸 교과과정을 운영했다. 반 에스테렌(Cornelis van Eesteren)과 건축 디자인을 했으며 I. K. 본셋(Bonset)과 알도 카미니(Aldo Camini)라는 필명으로 다다(DADA)적인 글들을 쓰고 행위예술을 공연했다. 1922년 리시츠키(El Lissitzly) 등과 함께 뒤셀도르프 진보적 예술가 협회(Dusseldorf Progressive Artists Congress)에 참여했다. 이들은 불명확한 모더니스트적 관점을 배제하고 구축주의 이념을 옹호하였다. 1923년 파리에 정착했다. 1924년에서 1925년에는 수직-수평의 도식이 배제된 역동적인 요소를 도입한 역구성(Counter-Composition)을 제작했다. 이로 인해 몬드리안은 데 스틸 에서 탈퇴하였다. 1926년에서 1928년 아르프(Jean Arp), 소피 토이버 아르프(Sophie Taeuber-Arp)와 공동으로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카페 극장인 '오베트 Aubette'를 장식했다. 오베트의 인테리어는 대각선에 기초한 것이었다. 1930년 새로운 잡지인 <구체예술 L'Art Concret>을 간행했다. 주요 작품은 <구성 Composition> (1917), <역-구성 Counter-Composition> (1924), <부조화의 역구성 Counter-Composition of Dissonances XVI> (1925) 등이 있다. /naver
- New Zealand, 100 Dollars (Banknote)
1871 - 영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Rutherford, Ernest) 출생
러더퍼드 [Rutherford, Ernest, 1871.8.30~1937.10.19]
원자핵의 발견자 러더포드 출생 러더포드는 1871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영국 과학자다. 대학교에서 방사능 연구를 하다 1911년 원자 내부에 원자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러더포드의 발견은 원자핵이 가운데 있는 원자론으로 이어졌으며 사람들의 물질관에 큰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중성자의 존재를 예측하기도 했다.
(사이언스 시간여행 과거속으로)
김상연 기자 /동아사이언스 2007년 08월 15일 http://www.dongascience.com/kids/contents.asp?mode=
view&article_no=20070810131903
(러더퍼드는 1908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았습니다. *_@)
- 'Golden Autumn' - I. I. Levitan
- 'March' - 'On the Lake'
1860 - 러시아의 화가 이사크 레비탄(Levitan, Isaak) 출생
레비탄 [Levitan, Isaak Il'ich, 1860.8.30~1900.8.4]
러시아의 화가.
리투아니아 카팔타이 출생. 모스크바의 미술전문학교에서 수학하고 풍경화가인 A.K.사브라소프와 V.D.폴레노프 밑에서 지도를 받았다. 1889년 파리로 나와 1891년부터는 이동파(移動派) 회원이 되어 리얼리즘 회화의 발전에 주력하고, 1898년 이후는 모교에서 후진들의 지도에 힘쓰는 한편 볼가를 비롯하여 핀란드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독특한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특히 조국 러시아의 대자연을 사랑하여 이를 소재로 서정적인 풍경화를 많이 그렸는데, 대표작에는 《블라디미르에의 길》《가을날》《못가》 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과 함께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네이버
1852 - 네덜란드의 물리화학자 반트 호프(van't Hoff, Jacobus Henricus) 출생
반트호프 [van't Hoff, Jacobus Henricus, 1852.8.30~1911.3.1]
네덜란드의 화학자.
물리화학의 창시자이며 제1회 노벨화학상 수상자이다. 로테르담 출생. 소년시절부터 문학 ·미술을 좋아하고, 자연과학에 뛰어났으며, 콩트의 실증철학에 감화를 받았다. 위트레흐트대학과 본 및 파리의 대학에서 케쿨레 ·뷔르츠 등에게 배웠다. 최초의 업적은 22세 때 쓴 유기화합물의 구조식을 공간에 확장한 논문으로, 파스퇴르 ·케쿨레 등의 연구에 기반을 두고, 탄소원자를 중심으로 하는 입체적 사면체 구조를 제창하고, 부정탄소원자(不整炭素原子)의 개념을 도입, 광학활성과의 관계를 밝힌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입체화학의 시초였다.
1876년 위트레흐트대학의 강사, 1877년 암스테르담대학 강사, 1878년 동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으며, 18년 동안 재직하면서 물리화학적 연구에 몰두하여 반응속도론, 화학평형의 문제, 친화력(親和力) 문제 등에 처음으로 학문적 체계를 부여하였다. 또한 삼투압의 연구에 의하여 용액론(溶液論)을 수립하였다.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물리화학의 고전적인 분야는 거의 그와 오스트발트, 아레니우스 세 사람이 이루어 놓았다고 할 정도이다. 이 세 사람 가운데서도 그의 독창성에 의한 것이 많았다. 이들 세 사람은 같이 협력하여 《물리화학 잡지 Zeitschrift fur physikalische Chemie》(1887)를 간행하였다. 1896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및 베를린대학 명예교수로서 독일에 초청되어, 슈타스푸르트 암염층(岩鹽層)을 상규칙적(常規則的)인 입장에서 연구하였다. /naver
1811 -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Gautier, Théophile) 출생
고티에 [Gautier, (Pierre Jules) Théophile, 1811.8.30~1872.10.23]
19세기 프랑스의 시인·소설가.
타르브 출생. 파리에 나와 처음에는 화가가 되려고 하였으나, 젊은 낭만파의 문인들과 사귀게 되면서 문학으로 방향을 바꾸고 낭만파의 작풍에서 벗어나 '예술을 위한 예술'을 제창하여 예술의 공리성을 배격하였다.또 회화나 조각의 조형미를 문학작품에 도입하여 형식을 존중하는 유미적(唯美的) 작풍을 수립함으로써 나중의 고답파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작품으로는 장시(長詩) 《죽음의 희극》(1838), 시집 《나전칠보집(螺鈿七寶集) Émaux et camées》(1852), 소설 《모팽양(孃) Mademoiselle de Maupin》(1835), 《아리아 마르셀라 Arria Marcella》(1852), 《대장(隊長) 프라카스 Le Capitaine Fracasse》(1863), 문예비평 《낭만주의의 역사》(1874) 등이 있다. /네이버
1797 - 영국의 소설가 메리 셸리(Shelley, Mary) 출생
셸리 [Shelley, Mary Wollstonecraft, 1797.8.30~1851.2.1]
[역사 속의 오늘]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셀리
1797년 오늘, 영국 런던에서 당시 유명 정치철학자인 윌리엄 골드윈과 여성 철학자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후 11일째 어머니를 여읜 그녀는 17살 대 아버지를 추종하던 유명한 낭만파 시인 퍼시 셀리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그가 꿈꾸던 '시를 감상할 줄 알고 철학을 이해하는 이상형의 여자'였다.
자유연애 풍조가 만연하던 당시, 22살 유부남이었던 그는 사이가 소원해진 임신한 아내를 버려두고 메리 셀리, 그녀의 배다른 자매 클레어 클레멘트, 친구인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과 함께 유럽 여행에 나섰다. 퍼시 셀리의 아내가 죽은 1816년, 둘은 결혼식을 올렸고 클레어 클레멘트는 바이런의 사생아를 낳았다.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지내던 이들은 밤에 독일의 유령 등을 이야기하며 지냈고 메리 셀리는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2년 뒤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발표했다.
1822년 남편이 보트 사고로 죽자 메리 셀리는 그의 시 등을 발표했고 '밸퍼가' '마지막 사나이' 등 자신의 작품도 내놓았다. 그녀는 다른 남자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다 1851년, 54세의 나이로 숨졌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8월 3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8995&yy=2011
1785 - 중국 청나라의 정치가 임칙서[林則徐] 출생
임칙서 [林則徐, 1785.8.30~1850.11.22]
중국 청나라 정치가.
자 소목(少穆). 호 사촌노인(假 村老人). 푸젠성[福建省] 출생. 1811년 진사(進士) ·지방관을 역임하며 수리사업(水利事業)에 힘쓰고, 승진을 거듭하여 장쑤순무[江蘇巡撫] ·양강(兩江)총독을 거쳐, 1837년 후광[湖廣]총독이 되었다. 이듬해 황제 도광제(道光帝)의 자문(諮問)에 응하여 아편(阿片)의 엄금책(嚴禁策)을 진언(進言)하고, 임지(任地)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1839년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발탁되어 광둥[廣東]의 아편무역의 단속을 명령받고, 영국상인들이 소유한 아편을 몰수하여 2만여 상자를 불태우고, 아편상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등 강경수단을 써서 아편밀수의 근절을 꾀하였다.
전부터 중국의 개항(開港)과 자유무역 실현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영국은 자국 상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임칙서는 해외사정을 연구하며 군비(軍備)를 강화하는 한편, 관민(官民)의 협력을 얻어 영국군에 저항하였으나, 오히려 타협파(妥協派) 관료들에 의하여 전쟁도발자로 몰리게 되었고, 1840년 청나라 조정이 강화(講和)로 기울자 그는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이듬해 이리[伊犁]로 유배되었다. 후에 복직이 허락되어 1845년 산간[陝甘]총독, 1847년 윈구이[雲貴]총독을 역임하였다. 1850년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흠차대신 광시순무[廣西巡撫]에 임명되어 부임 도중 병사하였다. 저서에 《임문충공정서(林文忠公政書)》 《임문충공유서(遺書)》 《신급록(信及錄)》 등이 있다. /naver
- 'Self-portrait' - 'Self-portrait'
- 'The Oath of the Tennis Court' - 'Preliminary Sketch of The Oath of the Tennis Court'
- 'The Coronation of Napoleon', detail - 'The Coronation of Napoleon I'
- 'Napoleon Crossing Great St. Bernard Pass' - 'General Bonaparte'
- 'The Death of Socrates'
- 'Rape of the Sabine Woman'
1748 - 프랑스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David, Jacque-Luis) 출생
다비드 [David, Jacque-Luis, 1748.8.30~1825.12.29]
프랑스의 화가.
1748년 8월 30일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에 군림하였던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자이다. 1774년 당시의 화가 지망생들이 동경하던 로마대상을 획득하고, 이듬해부터 1780년까지 로마에 머무르면서 고전미술을 연구하였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Oath of the Horatii》(1784)의 스타일은 그의 고전연구의 성과를 나타내는 명작으로, 당시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 애국사상의 뛰어난 표현으로서 일약 유명해졌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 당원으로서 혁신측에 가담하여,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투옥되었다.
그렇지만 후에 나폴레옹에게 중용되어, 예술적·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앵그르, 그로, 제라르를 비롯하여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고전파 화가들은 모두 그의 밑에서 나왔다. 역사적 주제를 그린 작품은,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우아·섬려한 것에 비해, 고대조각이 지니는 조화와 질서를 존중하고 장대한 구도 속에서 세련된 선에 의하여 고대조각 그대로와 같은 형태미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형식적으로는 잘 다듬어진 대구상화(大構想畵)이긴 하지만, 다소 생동감이 결핍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초상화에서는 고전적인 형식미 속에서 사실적인 묘사력을 충분히 살려 참신한 느낌이 약동하고 있다. 나폴레옹 실각 후 추방되어 1816년 브뤼셀로 망명하였고,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밖에도 《마라의 죽음》(1793) 《사비니의 여인들》(1799) 《나폴레옹의 대관》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등의 대표작이 있다. 또 《라부아지에 부처상(夫妻像)》(1788)과 같은 초상화도 있다. /naver
1727 - 이탈리아의 화가 티에폴로(Tiepolo, Giovanni Domenico) 출생
티에폴로 [Tiepolo, Giovanni Domenico, 1727.8.30~1804.3.3]
Giandomenico Tiepolo라고도 함. 이탈리아의 화가.
베네치아의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아들로 뛰어난 풍속화가였는데, 특히 당시의 생활과 통속적인 연극에서 따온 장면들(이탈리아의 치아니고에 있었던 그의 별장의 장식들로 지금은 베네치아의 코레르 시립박물관에 있음)을 잘 그렸다. 그의 초기 작품들 중 중요한 것으로는 베네치아의 산폴로 교회에 그린 십자가의 성로(聖路)에 관한 그림들(1747~49)과 비첸차에 있는 발마라나 저택의 영빈관을 꾸며놓은 중국풍의 장식들(1757)이 있다. 그는 1762~70년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마드리드에서 활동했다. 베네치아로 돌아와서 여러 점의 프레스코와 유화, 특히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따온 장면들을 그렸다. 그는 자신과 아버지의 디자인을 따라 만든 약 200점의 에칭을 비롯해 수집가들을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묘들을 그렸다. 그의 동생인 로렌초 티에폴로(1736~76)는 주로 파스텔을 이용한 풍속화들을 전문으로 그렸던 것 같다. /브리태니커
1483 -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Louis XI) 사망
루이 11세 [Louis XI, 1423.7.3~1483.8.30]
프랑스 발루아왕조의 왕(재위 1461~1483).
부르주 출생. 샤를 7세의 아들이다. 15세 때 남프랑스 귀족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1440년 부왕 샤를 7세에 반대하는 제후의 반란에 가담하였으나 실패, 도피네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사부아공의 딸 샤를로트와 결혼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부왕의 총희 아녜스 소렐과의 불화로 음모에 가담함으로써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1456년 부르고뉴공에게로 도망하여 부왕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지냈다. 1461년 부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부왕의 측근을 일소하고 제후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부르고뉴공 샤를 호담공(豪膽公)이 영도하는 불평귀족들의 ‘공익동맹(公益同盟)’의 반란이 일어나 1465년 콩플랑 및 상모르양 조약으로 왕제(王弟) 샤를 드 프랑스에게 노르망디 양도 등 갖가지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교묘한 공작과 과단성 있는 조치에 행운까지 겹쳐 주요 적대세력을 제압하게 되었다. 1477년 샤를 호담공이 사망하자 그 영지를 획득하고, 그 밖에 앙주 ·프로방스 ·루시용 ·세르다뉴 등을 얻었으며, 브르타뉴 병합을 위한 준비를 하는 등 프랑스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권력의지의 화신처럼 냉혹하였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정치감각은 기민하고 현실주의적이어서 국토개발에 진력하였다. /네이버
1448 - 숭례문(崇禮門) 신축
1448년 8월 30일 서울 도성 남쪽정문인 숭례문이 세워졌다. 숭례문은 남쪽을 가리키는 예(禮)를 숭상한다는 뜻으로 정궁인 경복궁의 방향으로 정문이 되었다. 숭례문은 국보 제1호로 원래는 태조5년인 1396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이날 개축되어진 것이다.
이 문은 화강석의 무지개문을 중앙에 둔 거대한 석축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세워져 있으며,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상하층 모두가 겹처마로 되어 있다. 또, 숭례문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성문중에서 가장 크고, 다포계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됐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재로 지정했으나 1996년 문화재 재평가 작업으로 다시 숭례문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서울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숭례문(남대문) 연혁]
2008.04.25 - 숭례문 방화범, 징역 10년형 선고
2008.02.10 -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 화재로 전소
2006.03.03 - 숭례문 중앙통로 99년 만에 개방
1963.05.14 - 숭례문 중수공사 중공
1962.12.20 - 서울 숭례문(남대문)을 국보 제1호로 지정
1962.02.03 - 숭례문 해체작업 과정에서 남대문상량문(南大門上樑文) 발견
1961.07.00 - 숭례문 중수공사 착공 1448.08.30 - 숭례문 신축
(화상 정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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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