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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자: 2012년 12월 30일
☞산행날씨: 맑은날씨, 엄청나게 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16.8km(어프로치 2km포함) / 5시간40분 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축석령-287.3봉(왕방지맥 분기점)-암봉-378.1봉-어하고개-석문령
343.5봉-공원묘지-회암고개-투바위휴게소-천보산-장림고개 삼거리
시멘트 임도-헬기장-해룡산-군사도로-오지재
☞소 재 재: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 포천시 소흘읍, 가산면
양주시, 만숭동, 회천면,삼송동, 율정동, 봉양동 / 동두천시 탑동
희망차게 맞이했던 임진년(壬辰年)도 벌써 서산으로 기울고 있구나.
범여 개인으로는 참으로 힘들게 보냈던 한 해였다.
이제 새로운 계사년(癸巳年) 에는 모든 걸 잊어버리고 새로운 모습,
새로운 각오로 새해를 맞아서 힘차게 웅비를 하고 싶다.
올해 마지막 산행으로 금남기맥 5구간을 갈 계획이었으나 동료산꾼
젠틀맨님이 가족모임이 있다고 하여 부득히 신년 둘째주로 미루는 바람에
나홀로 서울근교에서 접근성이 가장좋은 왕방지맥 1구간을 나선다.
새벽 05시 30분에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데 매서운 칼바람에 금방
온 몸이 굳어버리는 느낌이다. 그래도 가야하기에...
아파트 정문을 나오는데 경비원 아저씨가 이 추운데 어딜가냐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본다... 그래도 안미덥던지 다시 집으로 가라고 성화다.
버스를 타고 강남구청역에서 내려 지하철 7호선을 타고 도봉산역에서
다시 지하철 1호선을 갈아타고 의정부역에 내리니 06시 40분...
아직도 역전에는 어둠에 휩싸여 있다. 의정부에서 평소 자주 들리던
김밥집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축석고개가는 버스를 달랑 2명만 타고 간다.
왕방지맥의 개요
한북왕방지맥이란
한북정맥이 운악산과 죽엽산을 지나 축석령에서 천보산 주릉으로 올라가다가
헬기장인 287.3봉 직전에서 분기하여 북동진으로 올라가면서
378.1봉~어하고개~회암령~천보산~해룡산~왕방산을 거쳐 국사봉에서 북동진하여
개미산을 거쳐 한탄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산줄기를 한북왕방지맥이라고 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도봉산역에서 의정부가는 전철을 기다리는데 몸이 금방 굳어 버리는 느낌이다.
이곳은 지하가 아닌 지상철이라 얼마나 추운지 가늠이 안된다.
오늘 아침 기온이 서울 영하 11도라고 하는데 세차게 불어되는 바람때문에
체감온도는 아마 영하 -15도는 되는 느낌이다.
나홀로 한북정맥과 수락지맥, 오두지맥을 타면서 자주 들렸던 김밥집에서
돌솥비빔밥 한그릇을 시켜먹고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신다음 정류장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축석령가는 버스를 탄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축석고개까지는 나를 포함하여 달랑 2명만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가 왜이리 추운지 덜덜 떨면서 간다.
의정부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25분만에 나를 내려주고 포천으로 향한다.
날씨가 춥기는 추운 모양이다. 손이 금방 굳어버릴 정도이다.
장비를 점검하고 도로를 건너서 다시 의정부쪽 고개로 향한다.
축석령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300여년전 포천 어룡리에 오백주라는 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가 귀성도호사
(龜城都護使)로 있을 때 고향에 계신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친의 병간호를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약도 차도가 없어서 하늘을 탓하며
탄식만 하고 있는데 꿈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크게 꾸짖으며 “네 아비의 병은 석밀을 먹으면
낫는데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냐” 하고 호령을 하자 그는 석밀을 구하기 위해 정과 망치를 들고
온 산을 헤매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내가 죽으면 부친을 누가 돌본단 말인가” 하며 통곡을 하자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바위만 남아 바위 틈에서 석밀이 흘러 나왔다. 이에 부친의 병이 나으니 사람들이 오백주의
효성에 산신령이 가호를 베풀어 바위를 호랑이로 변신시켰다하여 그 바위를 범바위라 불렀으며
그 후 오백주가 매년 이 바위에 와서 고사를 지내고 무수무강을 축원하였다고 하여
축석령(祝石嶺)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출처: 의정부 지명 유래집에서 발췌
축석령은 천보산 기슭에 있는 고개로 의정부 자일동과 포천시 소흘읍의 경계를 이루는
의정부의 북쪽 관문이 된다. 일명 2백리 고개라고도 하는데 이 고개를 분수령으로 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포천천을 거쳐 한탄강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중랑천을 거쳐서
한강에 이르므로 철원과 서울까지의 거리가 2백리가 된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북정맥길에 걸었던 길이기에 낮이 익은 건물이다.
교회앞 도로를 지나서 조금 더가니 의정부와 포천의 경계에 해태상이 있다.
해태상 우측으로 올라가면 축석교회 주차장이 있고 이 길은 한북정맥길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하얀 눈길을 내가 처음밟는 이 짜릿함...
많이 온 느낌이다. 스패치를 착용하긴 했지만 등산화가 푹푹 빠진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발걸음을 내딛디면서 왕방지맥길을 시작한다.
이곳은 시작부터 이정표가 상당히 잘되어 있다. 심지어 정맥길보다 완벽하게...
발자국을 따라서 급히 따라간다. 해는 떳지만 추위는 여전하다.
앞서가던 발자국의 정체를 만났다. 의정부에서 왔다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 4명이 겁이 없는건지
무지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베낭도 안메고 아이젠도 없이 나무 막대기
하나만 달랑들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가다가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나 역시 인사를 하고 가야할 길이 멀기에 추월하여 서둘러 길을 떠난다.
양주지역에 최초의 국가가 형성된 것은 삼한시대 마한의 모수국 이었으며
'양주"라는 지명은 후삼국시대에 최초로 나타난다.
이때의 양주는 지금의 서울로 추정되며 오늘날의 양주는 조선왕조 개국후,
1395년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한양주민을 그 당시 견주로 옮기고
견주를 양주군으로 개칭하여 현재의 위치와 지명이 일치하게 된다.
양주는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군사적으로 충돌이 잦았던 곳으로
고려말에는 회암사를 중심으로 조선왕조를 개창 하는데 산실 역할을 하였다.
경기도 동북내륙권에 위치하며 동은 포천, 남은 의정부, 북은 동두천과 연천군,
서는 고양, 파주시와 접하고 있으며 서울과 인접한 지역에 속한다.
공간적으로는 서울에서 28km, 수원에서 64km, 인천에서 93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남부는 장흥면의 만장봉(740m), 도봉산(716m)을 중심으로 산간지대로 형성되어 있으며
북부는 구릉지로 형성되어 있고 동측은 천보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도락산(441m)과 불곡산(361m)을 중심으로 환형의 대규모 평탄지가 형성되어 있다.
표고별 현황을 보면 100m이내가 119.7㎢로 전체의 39%, 100∼200m 이하가 113.01㎢로
전체의 36%를 차지해 200m이하의 가용지가 75%를 차지하고 있으며, 경사도 15% 미만의
개발 적지가 군 전체면적의 60%인 184㎢에 달한다.
양주는 경기북부지역의 분수령으로 주요하천의 발원지이며 주요수계는 중심하천인 신천과
서쪽의 곡릉천, 남측의 중랑천 수계로 분리할 수 있다. 신천은 동두천시를 통해 임진강으로
유입되며 중랑천은 의정부시와 서울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가며 곡릉천은 고양시를 통해 한강하류로 유입된다.
이정표를 너무 잘 설치해놔서 참으로 편하게 지맥길을 걷는다.
눈에 쌓인 멋진 암봉이 나타난다. 우회를 하여 돌아오니 군 벙커가 나오고...
'송우(松隅)' 의 순수한 한글뜻은 '솔모루' (소나무가 많은 모퉁이 마을) 이다.
송우리는 하늘의 보물이 묻혔다는 천보산 줄기의 배꼽 부분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칠봉산, 왕방산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와
죽엽산이 있어 옛부터 천혜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30년전까지만 해도
이 곳에는 소나무(松林)가 무성하여, 마을이름을 '솔모루'라 불리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초동교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우리'라 하고 소흘읍에 편입시켰다.
좌측으로는 수락산이 보인다
정상에는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설치한 지적삼각점이 있고
삼각점 아래에는군부대 벙커가 자리를 잡고있다.
경기도 양주 주내면, 회천면, 포천의 소홀면과 경계에 있는 고개로 350번 지방도가 지난다.
양주 삼가대(三佳垈)에서 동쪽으로, 포천 소홀면 이동교리에서 서쪽에 위치해 있다.
이 고개의 남북으로는 의정부 천보산에서 동두천 소요산까지 지맥으로 연결되는 천보산맥이 뻗어있다.
태조가 봉양리의 칠봉산(당시 '어등산'이라 했슴))을 올라 능선을 타고 계속
남하하다가 이 고개로 내려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회암사를 찾을 때,
산세를 보기위해 어등산에 올랐다가 천보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20리(8Km)쯤 되는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으악고개'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어하고개란 발음이 잘못 된 것으로 보아진다.
또는 '원바위고개'라고도하나, 이는 미군이 전략상 필요에 의하여 표시한
‘1Y’를 그대로 읽으면서 변한 이름에 불과하다. 회암고개를 '투바위고개'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하고개 아래 양주쪽으로 삼가대(三佳垈)라는 지명이 있다.
주내에서 으뜸이었던 마을로, 권(權), 김(金), 임(林) 삼대 성씨가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삼가를 송(宋), 임(林), 당(唐)씨라고도 하는데, 당답보(唐沓洑)를
당씨와 연결시켜서 그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일제초기 문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는 고주내면
삼가대리(三佳垈里)로 소개되었으나 현재는 행정지명이 다르다.
계속해서 뒤로 미끄러진다. 힘들게 능선으로 오른다.
지맥꾼을 만난다. 이분 역시 나홀로 산꾼인 모양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다음에 서로의 반대편을 향해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포천지역이 최초로 고유지명을 갖게된 시기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의하여
한강유역이 고구려의 판도에 들어간 장수왕(長壽王) 63년(475) 마홀군
일명 명지군(命旨郡)이란 이름이며 다음으로 신라가 영토확장으로 인하여
신라(新羅)에 속하였을 당시인 진흥왕(540∼576)때에는 견성군(堅城郡)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16년(757)에 청성군(靑城郡)으로 다시 고려 태조(太祖) 23년(940) 포주(抱州)에서
6대 성종(成宗) 14년(995) 현재의 포천(抱川)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포천을 고구려 시대에는 마홀(馬忽)이라 하였는데 마홀에 대하여 「삼지연(三地硏」에서는
물골(水域) 즉 ‘물이 많은 골(谷)’이란 뜻의 ‘물골’을 음차한 것이라고 한다.
골 마(馬)는 물의 옛말 ‘물’ 또 이것의 옛말 ‘매’ 를 음차한 것이고, 홀(忽)은 ‘골’을 음차하여
썼다는 것이고, 견성(堅城)은 통일신라시대에 성을 튼튼하게 수축하고 공수(攻守)의 거점으로
삼았다는 연유로 명명되었으며, 청화(淸化)라는 것은 고려 성종이 정한 별호라고 한다.
포천이라는 명칭은 물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없고, 외부로 흘러나기만 한다고
하여 안을 포(抱), 내(川)으로 지명을 지었다고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술인 막걸리는 쌀과 누룩으로 빚어
"그대로 막 걸러내어 만들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전통적인 고유한 술의 하나로
빛깔이 희고 탁하며, 6~7도로 알코올 성분이 적은 술이다.
막걸리의 이름도 굉장히 다양해서
탁주, 탁료, 곡주, 재주, 회주, 백주, 합주, 탁배기, 가주, 농주, 이화주, 부의주 등으로도 부른다고 한다.
막걸리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기록은 김부식이 고려시대에 편찬한 <삼국사기>입니다.
삼국사기가 1145년에 편찬되었으니, 최소한 800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막걸리를 먹어왔다는 얘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6대 왕이 어느 날 지방에 내려갔다가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진 술상을 받고는 무척이나 흥겨워하면서,
왕은 그곳의 지명이 무엇인지 물어봤는데, 그곳이 바로 '대포'라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대포는 조롱박을 뜻하는데, 흔히 막걸리를 대포라고 하는 것이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막걸리나 단술을 가리키는 요례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삼국시대에도 이미 탁주 등의 술을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막걸리용 누룩을 배꽃이 필 때에 만든다고 하여 "이화주"란 이름이 붙었으며,
맑지 않고 탁하기 때문에 "탁주"라고 부르기도 하고,농부들의 식량대용 또는
갈증해소로 애용해왔기에 "농주"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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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갈비"는 1960년도 이동면 소재지에 작은 식당에서 5군단의 3개 사단 군인들 상대로
돼지갈비로 시작을 했으며 넉넉하고 푸짐하게 공급을하여 인기를 얻다보니
하나 둘씩 주변에 늘어나면서부터 입소문을 타면서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동네 이름을 붙여서
이동갈비라 칭하였고 30여년전부터 한우갈비로 바꾸게 되었고 한우의 수요가 늘어 공급이
부족하면서 미국산 갈비로 서서히 바꾸게 되었습니다.미국산갈비는 호주산이나
뉴질랜드산보다 맛으로 평가를하자면 으뜸다고 한다. 지금은 99% 미국산으로 공급을 하고
있고 딱 한군데 갈비집에서만 한우를 사용하고 있는데 값이 비싸서
서민들은 이용을 못하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경기도 양주시 율정동에서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옛날에
이곳에 돌문이 있었다고하여 석문령이라고 불렀고 송우리 5일장이면 장사꾼들이
넘나드는 고개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천보 약수터가 있는 곳이다.
약수터에는 누군가 스텐그릇을 갖다놨고 거기에 물을받아
한대접을 마시고나니 속까지 후련하다... 물맛은 참으로 좋다.
여기서부터는 포천쪽에서 올라오는 등산객을 많이 만난다.
.이동교리란 포천군의 남북으로 흐르는 한내(포천천)의 다리 중
두 번째 동교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동교리는 ‘동다리’라고 하였으며
큰비가 오면 동동 또는 다리라는 뜻으로 전한다.
이곳은 이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한양으로 가던길에 이곳에서 주무셨 다고해서
이 마을을 "임금님의 침상"이란 뜻으로 "용상동"이 있고, 이 태조가 용상동에서 주무시게
되었을 때 왕비도 이곳에서 주무시게 되었다고 해서 "부인터(婦人攄)"라고 한다
경기도 양주시 율정동과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국립지리정보원에서 설치한 지적 삼각점과 天寶亭이란
육각정이 있고 각종 운동기구들과 천보산맥 안내판이 있다.
이곳은 바로 아래에 있는 소흘읍에서 올라온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이윽고 공원묘지가 나오고 묘지안 도로를 걷다가 좌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망자들의 천년주택에도 온통 눈으로 뒤덮혀 있다.
상당히 규모도 크고 관리도 잘되어 있다.
다시 능선을 조금 진행하니 차량소리가 들리고 우측 내리막길이 나온다.
경기도 양주시 율정동과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를 잇는 고개로 56번 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투바위고개라고도 부르면 고개에는 투바위 휴게소가 있으며, 양주시 회천면 회암리
뒤에 있는 고개라고하여 회암령이라고 부른다.
고개나 령이나 같은 말이지만 지도에는 회암령으로 표기되어 있고, 안내판에는 회암고개라 적혀있다.
돌계단의 포장도로로 올라선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가려다가 좀 이른것 같아
오지재에서 먹기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베낭에는 먹을것이라고는 두유 하나, 육포, 밀감2개, 빵한개와
커피 타먹을 따뜻한 물밖에 없다. 추울때는 먹는게 가장 고역이다.
좌측으로는 양주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바로 앞에는 회암사지 박물관이 보인다.
회암사지 [檜巖寺址]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있는 회암사의 절터로 국가사적 128호이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1328)때 지공(指空)이 창건하여 조선 순조 때인 1800년대에 폐사된 사찰이다.
조선 전기 왕실의 보호를 받던 절로서 태조 이성계가 늙은 후에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절터의 북쪽 능선 위에 지공(指空), 나옹(懶翁)의 승탑과 함께 서있는 이 탑은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묘탑이다. 둘레에는 탑을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둘러져 있다.
회암사의 주지이기도 했던 무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와 한양천도와 관련된 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탑의 형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돌 위에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
놓이고 탑신(塔身)과 머리장식부분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윗돌은 연꽃모양의 돌이고 가운데돌은 배가 불룩한 8각의 북모양으로
각 면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꽃조각이 도드라져 있다. 탑신은 몸돌이 둥근 모양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시선을 모은다. 용의 머리와 몸,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있게 보이고 구름무늬가 한층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지붕돌은 8각으로 처마부분에는
목조건축을 흉내낸 모양들이 새겨져 있다. 경사는 급하며 추녀끝은 가볍게 들려있다.
숭불정책이 유지되었지만 태종이 정권을 잡은후 불교세력이 문벌귀족과 결탁 조선왕조를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정책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민중과 왕실은
비공식적으로로 불교를 계속 믿어왔으니 500년의 억압정치속에서도 산속에서나마
우리가 지금 사찰을 만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사찰이 바로경기도 양주에 있었던 회암사였다
조선최대의 사찰이었던 이곳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12세기 후반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추측되는데 태조와 정희왕후 시대의 전성기를 지나 명종때 문정왕후의 섭정시 보우가 회암사를
중심으로 불교중흥을 기도하다 실패 한 후, 사세가 기울기시작하여 지금의 회암사지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1800년대인 순조때 폐사된 것으로 알려진다.
남은것이라고는 당간지주와 부도, 건물의 규모를 알려주고있던 무너져버린 석축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당시 얼마나 큰 절이었는지를 실감할 수가 있었다.
기록에 위하면 당시의 회암사는 260여칸의 규모로 한참 번성기엔 3,000여명의 승려가 머물렀다 한다.
이전부터 있던 절자리에 고려말 지공대사가 본격적으로 절을 만들었으며 그의 제자인 나옹화상이
절을 맡으면서 많은 사람이 모였고 태조의 스승이요, 나옹의 제자였던 무학대사가 머무르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단다. 하지만 1800년대 폐사 후 땅에 묻혀버렸으니 1997년부터 경기도박물관과 경기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연차적으로 발굴하면서 그 규모가 이제 세상속으로 드러난 것이다.
장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것은 팔각원당형의 부도로 팔각의 지붕돌을 얹고 아래 몸돌에 조각을 새겨 놓은 모습이다.
지금도 선명한 구름 사이로 승천하는 용의 형상은 당장이라도 눈앞에 튀어나올 기세를 보이고 있다.
절터에는 중요문화재로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보물 제387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 회암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등이 남아 있다.
우측으로 눈을 돌리니 양주의 진산인 불곡산과 도락산도 보인다
이곳은 마사토에다 암릉이라 눈이 많이쌓여 상당히 미끄럽다보니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는 느낌이다. 꽤나 땀을 흘린 다음에야 정상에 도착한다.
경기도 양주군 봉양동과 포천시 가산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양주시내와 회암사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등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천보산 유래를 보면
1,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난을 당하여 이산에 피신하였다가 난이 끝나자 목숨을 건진 이 산을
'금은보화로 치장하라'고 신하에게 명하였다. 신하가 난리 후라 금은보화를 구하기는 어렵고
이름을 하늘 밑에 보배로운 산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간청하여 천보산이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2. 옛날 전쟁 중에 천보라는 공주가 적장에게 납치되어 현재 천보산까지 끌려오기까지 고국의 부왕과
어마마마만을 생각하고 음식을 거절하다가 이산에서 죽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3. 전설에 따르면 이 산 어딘가에 하늘의 보물이 묻혔다고 하여 천보산이라고 전해진다.
이정표가 있는 Y자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들어서 가는 천보산 5보루가 나온다
소재지 : 양주시 회암동 산8-1
포천시 동교동 산94
유적성격 및 규모 : 삼국시대(고구려) 석축보루(해발420m), 둘레212m, 면적3,303㎡
천보산5보루는 천보산 회암령 북쪽 봉우리 정상부에 위치한다.
이곳은 천보산맥의 북단에 해당하는 칠봉산에서 남동쪽으로 약 2.2㎞ 떨어진 곳으로,
동쪽의 포천천로에서 양주분지 내부로 이어지는 회암령을 통제하기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보루는 북서-남동방향에 장축을 둔 긴타원형으로, 외관상 천보산보루군 중 규모가 큰 편이다.
산의 남쪽 능선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3~4단 높이의 석축 일부가 남아있다.
성벽은 대체로 3m 내외의 높이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장방형 석재를 옆줄을 맞추어가며 쌓아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비교적 평탄한 성 내부에서 소량의 고구려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안내판 인용)
* 보루(堡壘)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돌이나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쌓은 구축물을 말한다.
이곳에서부터 다시 아무도 걷지않은 눈길에 내 발자국을 남긴다.
등산객은 칠보산 방향인 장림고개에서 올라오고 해룡산쪽은 아무도 다니지 않았다.
ㅏ 갈림길이 나오고 이정표(←장림고개1.4km↓해룡산 2.3km ↗장림)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간다.
시멘트 도로가 나오는 안부 오거리가 나온다
해룡산 정상 군부대로 올라가는 도로가 있고 MTB 자전거 표지판도 보이고
동두천 6산 안내판이 있는데 안내판 뒷쪽 능선으로 오른다.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조금전 헤어졌던 군사도로를 다시 만난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이곳은 바람의 영향인지 등로에는 무릎이 빠질정도로
눈이 많아 러셀을 하면서 급경사의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길이 미끄러워 자꾸만 뒤로 밀린다.
경기도 양주시와 동두천시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가 일곱개라 하여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깍아지른 듯한 층암절벽 사이에 이름모를 꽃과 풀들이
봄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가을단풍은 한폭의 비단병풍에 비유되어 옛날에는
금병산(金屛山)이라 불렀다고 하며 또한 조선 초기에는 왕이 사냥을 위해 찾은
산이라 하여 “임금이 오른 산”이라 하여 어등산(御登山)이라고 불리웠다 전해지며
칠봉산이란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양주시지(楊州市誌)에 보면
① 임금이 처음 등산하기 위해 떠난 곳이라 하여 발리봉(發離峰)
② 임금이 수렵에 필요한 매를 날렸다는 곳이라 하여 응봉(鷹峰)
③ 임금이 수령하러 나가 수렵표시 깃대를 꽂았다 하여 깃대봉(旗臺峰)
④ 임금이 이곳에 쉬니 시위(侍衛)군사가 갑옷 투구를 벗었다하여 투구봉(鬪具峰)
⑤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떠날 준비를 하던 곳이라 하여 솔리봉(率離峰)
⑥ 임금이 떠나며 돌이 많으니 뜻하지 않은 일에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고 하여 돌봉(突峰)- 정상봉
⑦ 임금이 돌이 많다고 말한 곳이라하여 석봉(石峰) 등이 일곱 봉우리이다.
걸으면서 밀감2개와 빵과 두유를 마시고 나니 조금은 나은것 같다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느낌이다. 나홀로 산행은 눈이 많을때는
참이 힘이든다. 여럿이 산행땐 교대로 러셀을 하면 되지만 나홀로
산행은 모든걸 혼자 해결해야 하기에...
겨우 안부 능선에 도착하니 가산면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이
나오는 Y 형이 나오고 의자가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이어진다.
헬기장에는 오지재에서 올라온 등산객 4명이 눈을 치우고 라면을 끌여먹고 있다.
막 식사가 끝나고 치우고 있는 중인데 괜스레 나한테 따뜻한 국물을 드리지 못해
미안스레 한다. 괜찮다고 하니 존 산행을 하란다... 참으로 산꾼들은 순수하다.
경기도 포천시와 동두천시 사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다.
고려시대에 어느 대사가 이 산형이 비룡산천형이라 하여 해룡산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해룡산에 감지(鑑池)가 있었는데 가뭄에 비를빌면 가끔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산 중턱에 해룡사가 있었으니 산의 명칭은 해룡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얘기로 군마(群馬)가 있어 산 위를 짓밟고 다니면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더라도
날씨가 음침해진다고 했다. 북쪽에 있는 왕방산과 함께 강무장(講武場)을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군 부대 정문이 나오고 이곳에서 부터는 급경사의 군부대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그 아래에 오지재가 나오는데 이 넓은 공터가 영화 각시탈의 촬영장이었단다.
이곳에는 오프로드 동호인들이 년말을 보내기 위해 텐트를 쳐놓고 있다.
경기도 동두천시 탑동에서 포천시 가산면을 잇는 고개로 334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거기 재벽동(滓洞)에 태조가 잠저시(潛邸時)에 전장(田莊:밭이
딸린 별장)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오지는 벽돌과 같은 옹기를 뜻하고 재(滓)는
옹기를 굽고난 찌꺼기를 말하는데 예전에 이곳에 옹기를 굽는 가마터가 있었던 모양이다.
오지재에서 점심을 먹고 왕방산, 국사봉으로 가야 하는데 이곳에서 먹기로 점심을
해결할 수가 없다. 이곳 포장마차같은 식당이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런지 영업을 안한다.
참으로 난감하다. 베낭에 먹을 것이라고는 달랑 육포하나와 초콜렛 하나뿐...
그리고 눈이 너무많아 고민을 하고 있는데 불알친구 넘이 전화가 온다.
그래서 산행을 포기하고 귀가를 하기로 결심하고 버스를 기다린다.
추워서 죽을 맛이다. 지나가는 차량을 대상으로 히치를 시도한다.
5분정도에 아무도 태워주질 않는다... 그런데 이곳에 캠핑을 하는 갤로퍼 지프가
동두천 방향으로 시장을 보러가는 모양이다. 버스타는데 까지 태워 달라고 하니
쾌히 승락을 하여 광암동 버스정류소까지 타고 내려온다.
휭하니 가버리고...
이곳은 전철이 30분만에 한대씩 다닌단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대충
닦은 다음에 20분을 전철역에서 개떨듯이 떨다가 1시간 50분만에 집에
도착하여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분당으로 가서 불알친구들과
이스리 각 2병씩 마시고 가는 해를 아쉬워하면서 집에와서 깊은잠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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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범여님의 의지와 투지가 넘 존경 스럽습니다. 2013년 한해도 건강하시고 안전산행 하세요.
복도 마니 받으시고요..^^*
렌 총무님도 복마니마니 받으셔요
범여님,, 쨍하게 추운 날씨에,, 것도 홀로,,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개 그런 날씨에 나홀로 같음,, 그냥 주저앉기 쉬운데운데여..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후기도 다음에 갈 후배들을 위해 잘 정리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
계사년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즐산 안산 하시기 바랍니다~~
못말리는 썽님 2013년에는 같이좀 다니자구요...
대간 남진이나 함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