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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에 잠긴 도장안을 유령처럼 부유하는 인영이 있었다. 2.5미터의 천장에 닿을듯 허공에 뜬 채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신형의 주인공은 한이었다. 그는 전신에 검은 색의 도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느릿하게 허공을 밟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유령의 형상이다. 한걸음이 내딛어질 때마다 40여평의 체육관 끝에서 끝으로 그의 신형이 천천히 미
끄러졌다. 이름그대로 어둠속에 흐르는 향기, 암향부동신법이 시전되고 있는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몇 배는 더 내공을 소모시킨다.
더군다나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의 움직임은 충분히 눈으로 따라갈 정도로 느렸다. 암향부동신법은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더불어 그 은밀성에서 여타의 어떤 신법도 따라올 수 없는 묘용이 있다. 그런 신법을 저렇게 느리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대단한 집중력과 내공의 소모를 감수해야한다.
이제는 많이 빛이 바랜 도장의 푸른색 매트리스에 소리 없이 내려앉은 그의 콧등에 한방울의 땀이 맺혀 있었다. 암향부동신법의 위력은 불가일세이지만 천단무상진기가 뒤를 받쳐주지 않는다면 무용지물과 같다. 현재 그가 이룩한 암향부동신법의 성취는 칠성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천단무상진기가 육성의 성취인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것도 대단한 성취였다.
매트리스위에 서자마자 그의 신형이 도장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40평, 132평방미터의 도장 안에 그의 신형이 가득 차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제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도 지금 한의 움직임을 쫒을 수는 없다. 그는 현재 공간과 공간사이의 틈을 건너뛰는 듯한 몸놀림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인간의 동체시력이 갖는 한계로는 그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일정한 공간 안에서의 움직임은 암향부동보다도 오히려 나은 점이
있다고 무명산인조차 극찬했던 소유유운의 보법이 운용되고 있었다.
한이 무상진결 세권(卷)을 은행의 개인금고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경찰에 입문하고 나서 삼개월 정도가 흐른 뒤였다.
경찰업무를 배우면서 그는 공격수법이 아닌 신법과 안법 등 신체의 각 기관을 극대화하는 공부들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현실의 법제상 도청과
미행 등은 사생활과 개인정보를 침해하기 때문에 불법일 뿐 아니라 합법적으로 그러한 수단을 사용하기 위한 절차도 대단히 복잡하였고, 무엇보다도 보급된 장비가 거의 없었다.
파출소 단위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장비는 구경조차 할 수도 없었고, 형사계와 과학수사반이나 다른 수사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의 고참들에게 물어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았다. 너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았구나라는 것이 주된 반응이었다. 그들도 그런 장비들은 구경해 본 적도 없다고들 했다.
그는 무상진결의 모든 내용을 일단 암기한 후 소각했다. 보관하고 있기에는위험부담이 너무 컷기 때문이다. 그는 두 번째권의 실전실용수법 중 무명산인이 수집한 절기들에 먼저 주목했다. 그가 먼저 수습한 것들은 좁은 공간내에서는 귀신도 잡을 수 없다는 소요유운보와 천룡구전, 능공천상제, 부신수영등 신법 7가지와 천리지청술, 사용을 극히 자제하라는 무명산인의 신신당부가 시선을 끌었던 마도의 섭혼대법, 보이지 않는 혼이라도 제압할 수 있다는 최고의 점혈법 제혼수, 허공을 격하여 혈도를 점할 수 있는 일선지력 등이었다.
제 삼권의 창궁무상검도는 전칠십이초와 후구초등 총 팔십일초로 구성된 검법이었다. 하지만 한은 그 내용을 차근차근 음미하면서 그가 가까운 시일내에 이것을 익힐 가능성은 거의 전무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초부터 검강으로 시작되는 이 검도는 말 그대로 검의 도(道)라고 할 수 있었다. 필요한 내공의 막대함은 물론이거니와 무도에 대
한 일정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않고는 보아도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 난해한
절기였다. 앞의 두권은 이제 내용을 해석하는데 무리를 느끼지 않게 된 그도 삼권의 내용은 일단 뒤로 미룰 수밖에 없을 정도였으니까.
검에서 강기를 일으킨다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장풍이나 지풍 등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 강기다. 응축된 기의 기둥, 현대식으로 풀어서 말한다면 파괴적 에너지가 무한으로 집적되어 유형화된 것이 강기였다. 한의 천단무상진기는 성취도나 그의 무도에 대한 깨달음의 정도가 기를 유형화시킬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유형화된 강
기를 신체외부에 만든다는 것은 아직 요원해 보였다. 단시간내에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는 무상문의 진산절기 십삼종중에서 암향부동신법과 격벽투시의 공능이 있는 무상신안결 두 가지만을 수습했다. 그는 아직까지 무상문의 절기중 공격수법들을 익힐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수련한 천단무상진기의 수련정도가 무상문의 절기들을 받
쳐줄 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천단무상진기가 최소 육성이상, 제3단공에 접어드는 성취를 이룬 후에야 무상문의 절기들은 제 위력을 낸다. 아무리 무상문의 진산절기들이절대의 절학이라고 해도 시전자가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무명산인이 수집한제반 절기들만도 못한 것이다.
그는 크게 욕심을 내지 않고 있었다. 기와 관련된 무예는 조급증을 가장 경계해야한다. 늘 주화입마의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천고의 절기천단무상진기도 그런 위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닌 것이다.
시간이 모자랐다. 그는 직업이 있는 직장인이다. 더군다나 그 직업이 개인시간 없기로는 업종중에서 수위를 다투는 경찰, 그것도 강력반 형사였다. 무상진결을 어린시절과 같이 차분히 수습할 시간이 제대로 주어질 리 만무였다. 천단무상진기는 생활행공이 가능한 심법이지만 다른 여타의 절기들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동작을 수반하는 것들이었다.
따로이 홀로 수련해야할 것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그럴만한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무상문의 진산절기들은 짜투리시간을 활용해서 익힐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온전히 모든 것을 걸어도 한두 해 안에 수습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절학들을 형사생활을 하며 익히기는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도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상진결의 절기들을 완성하는 것을 일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지도 않았다. 무상문의 절기들이 탈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고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완성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여도 그는 산속에 틀어박히기에 아직 너무 젊은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업무상 즉시 사용가능하면서도 익히는 것이 용이한 무상진결 2권의 수집절기들이었다. 그 선택은 탁월했다. 물론 도(道)를 전업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이 사실을 알았다면 기꺼이 그를 미친놈이라고 부를 결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육신의 힘만으로 현대의 최첨단장비들도 하지 못할 일들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도 인간이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은 수련을 마친 후 도장을 나섰다. 주말에 청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또 조장인 이정민 형사의 가정내 평화를 위해서라도 잡아야하는 도둑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력반 형사생활을 시작하면서 야간에 집에서 자는 것을 거의 포기해야 했다. 자의반 타의반이었는데 밝은 대낮에 움직이는 나쁜 놈들은 원래 희귀한 법이다. 그래서 대명천지에 어쩌구 하는 사극의 대사도 있는 것이다. 서양 이야기에 나오는 뱀파이어도 빛을 받으면 죽는다.
그가 잡아야할 온갖 범죄자들도 낮에는 움직이는 자가 거의 없었다. 모두 어둠이 도시를 덮으면 기운찬 하루를 시작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들을 잡기위해서 그들과 활동시간대를 맞추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둠은 한의 활동시간대가 되었다.
새벽 1시의 공기는 어쨌든 깨끗하다. 차량들의 운행이 줄어들어서일 것이다. 이정민 형사에게는 이틀 동안 따로 수사를 한 후 수요일부터 합류하자고 했으니 반장님에게는 알아서 보고해 줄 것이다. 그동안 도둑놈 둘이 짱박혀 있는 장소를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들 중 한명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개인정보원인 영구와 선욱에게서 계속 듣고 있긴 했지만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둘을 한꺼번에 잡기 위해서는 조금 바쁘게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은 자신의 애마를 향해 걸었다.
그는 집 옆골목에 세워둔 구형 코란도로 걸어가다가 몸을 세웠다. 잠바의 상의에서 담배를 꺼내 한 대를 피워문 그의 눈이 자연스럽게 주변을 훓었다. 목표가 자신인 것은 명백했다.
한 떼의 사내들이 자신들은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으며 주차된 차량 뒤나 골목의 모서리 이곳저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벽을 격하고 그안의 모습까지 볼 수 있는 그의 안력에 어둠이 방해가 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모습은 어둠속에서도 적나라하게 한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담배 연기 한모금을 아무렇게나 허공중에 뿜어냈다. 바보들이었다. 저렇게 살기를 듬뿍 뿌리며 손에 손에 연장을 들고 있으면서 들키지 않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니.
명백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생각처럼 저들의 목적이 자신이라면 그는 기꺼이 그들에게 자신을 무시한 댓가를 치루게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가 코란도를 세워놓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차량의 뒤에 서 있던 자가 불쑥 그의 앞으로 나섰다. 180센티미터 정도되는 키의 이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큰 눈이지만 각이 져 있었고, 입술이 꽉 다물려 있었다. 스포츠형의 머리와 단단해 보이는 어깨가 아래위 검은 양
복 차림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한은 천천히 자신의 앞에 말없이 서서 주먹을 말아쥐기 시작하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코란도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자가 일부러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자신에게 들으라는 듯 구둣발로 바닥을 박자에 맞춰 두드리는 자가 숨어있는 자일 수는 없다.
"임한! 맞나?"
낮은 저음이 가슴을 울리는 목소리다.
"나다."
한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났다. 자신이 무너뜨린 신흥폭력조직 석준파의 보스 김석준이다. 저자라면 그에게 원한을 가질만하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기로 김석준은 21세기 폭력배치고는 고전적인 면이 있어서 조직간 전쟁중일 때라도 자신이 직접 나설 때는 맨주먹 다이다 이(1대1을 말하는 은어)로 붙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했었다. 그런
데 지금 주변에 숨어있는 다섯 명의 숨소리는 구경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자의 그것이었다.
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김석준이 움직였다. 아무 말도 없었고, 한도 굳이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주먹을 나눈 후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김석준은 2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신출내기 형사와의 간격을 없애버리려는 듯 예고 없이 땅을 박찼다.
그는 공중에서 맹렬한 기세로 두 발을 번갈아차며 뛰어들었다. 한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그의 무릎이 부러지듯 꺾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동작이 너무 빨라 마치 그의 상체가 허공중에서 갑자기 사라진 듯 했다. 그의 오른 주먹이 채거두지지 않은 김석준의 사타구니와 항문사이 회음을 후려치는 듯 했다. 그 때 그의 눈에 미묘한 빛이 스쳐 지나
갔다. 그는 도중에 손을 거두었다. 그리곤 무릎을 구부리고 쪼그려 앉은 그
상태에서 바람처럼 바닥을 쓸어오는 김석준의 하단돌려차기를 피해 오른쪽으로 낮은 측면 공중제비를 돌아 전권에서 물러났다. 한의 움직임은 물이 흐르는 듯했다.
김석준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작하자마자 승부가 끝날 뻔했던 것이다.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은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의 움직임에는 여유가 넘쳐흐른다. 상대가 왜 도중에 주먹을 거둬들였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상대의 한 수만으로도 그는 이 싸움의 승패를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를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다.
김석준은 뒤로 물러나는 한을 따라붙었다.
김석준의 발질과 몸놀림은 충분히 정제되어 있었다. 한이 무상진결을 수습하지 않았다면 승부를 장담하지 못했을 솜씨였다. 그는 오랜만에 손속을 나누고 싶은 수준의 적을 만났다. 그는 이 드물게 오는 기회를 매너없이 단방으로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상대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일단은 놀아주기로 했다.
근접거리로 다가선 김석준의 오른 주먹이 한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았다. 한이가볍게 고개를 비틀어 그것을 피하자 머리 옆을 스쳐 지나가던 팔이 구부러지며 팔꿈치가 그의 인중을 찍어왔다. 한은 허리를 비틀어 김석준의 팔꿈치를 피했다. 그의 코와 종이한장 차이로 지나가는 상대의 팔꿈치에서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김석준은 무위로 끝난 팔꿈치 공격이 채 거두워지기도 전에 20센티미터 정도 뛰어오르며 왼쪽 무릎을 차올렸다. 한의 몸이 뒤에서 누가 잡아뜯기라도 하는 듯 뒤로 미끄러졌다. 빗나간 슬격을 진각으로 바꾸며 김석준은 한 발 전진했다. 앞선 공격들은 모두 이 일격을 상대에게 선사하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상대의 솜씨로 보아 초반의 방심상태일 때 승부를 짓지 못한다면 그가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그가 힘차게 내딪은 왼발이 땅을 울릴 때 그의 온 몸은 내뻗는 오른 손을 중심으로 나선형을 그렸다. 발과 허리, 어깨, 주먹의 전신이 하나로 합일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수련한 몸 안의 기운도 함께 나선을 그리며 비틀렸다. 발과 허리가 가속을 그리며 집중된 힘이 주먹에 전달되었다. 그의 주먹은 상대의 손바닥에 가로막혔지만 그 순간 응축된 기운이 폭발했다. 발경이었다.
"쾅"
김석준의 귀에는 폭발하는 기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의 숨이 가빠졌다. 발경을 사용할 정도의 고수가 그런 공격을 했다고 눈을 감을 리도 없으니 자신이 발경을 사용한 후의 광경이 눈에서 벗어났을 리도 없다. 그는 더 이상의 공격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췄다. 그의 눈앞에 자신을 마치 기특하다는 듯이 보며 흰이빨을 보이고 있는 상대가 자신의 발경을 막은 손바닥을 털어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 있었던 것이다.
상대는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철들고 나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패배감이 김석준을 덮쳤다.
김석준의 폭발하는 발경을 천단무상진기의 해(解)자결로 풀어낸 한은 모처럼 흥겨운 기분이 났다. 경악에 가득찬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김석준은 자신이 알기로 올해 스물 여덞이었다. 저 나이에 이 정도의 발경력을 쌓은 사람은 아마 나라 안을 다 뒤져도 그리많지 않을 것이다. 자신도 무상진결을 얻지 못했다면 지금 김석준 정도의 경력을 쏟아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주변의 살기가 증폭되기 시작했다. 그 둘의 싸움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라면 외견상 한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한번도 김석준에게 공격을 하지 못하고 피하기만 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종하가 신뢰하는 화성파의 조직원 다섯 명은 자신감을 얻었다.
"나가자!"
그들 다섯 명의 첫째 윤형진은 골목길의 좁은 공간 안에서 벌어진 싸움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다른 네 명에게 명령했다. 싸움에 임하면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미친개 김석준이 상대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서 있는 것이 약간 의아했다. 하지만 그는 김석준이 상대의 허점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방적으로 김석준에게 밀리긴 했지만 신출내기 형사의 솜씨도 가볍게 볼 것은 아니었다. 김석준의 공격을 피하는 몸놀림이 바람처럼 가벼워 보였다. 하지만 밀린 것은 밀린 것이다. 자신들이 합세하면 승부는 단숨에 갈라질 것이고 오늘 자신은 맡겨진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윤형진은 다른 네 명과 함께 숨어있던 곳에서 뛰어나와 한의 주변을 포위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회칼이 골목에 설치된 가로등의 희미한 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살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김석준이 패배를 시인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상대를 처리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을 갖고 있는 만큼 상대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눈도 갖고 있었다.
"내가 소문을 잘못들었나? 김석준! 너는 떼거지로 린치하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들었었는데?"
한의 말투 속에서 자신에 대한 실망의 기색을 느낀 김석준의 얼굴이 수치심에 시뻘겋게 변했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들이다. 그는 물러나야할 때 물러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비참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김석준을 바라보는 한의 얼굴 어디에도 긴장은 없
었다. 자신을 포위한 다섯 명의 칼 든 남자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오만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라 그를 포위했던 사내들은 열이 받을대로 받았다.
"이런 씨벌놈을 봤나! 신분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새파란 형사 나부랭이 새끼가! 배때기에 칼이 들어가고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지 한 번 보자!"
그들 중 몸이 마르고 눈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자의 날카로운 쇳소리가 섞인 음성이 골목을 울렸다. 그 욕설과 함께 포위하고 있던 사내들이 손에 든 회칼을 일제히 움직였다.
좁은 골목안에 스산한 칼빛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한은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자들을 곱게 보내줄만큼 마음이 넓은 남자가 아니다. 그의 능력이 아무리 저들과 차원을 달리한다고 하여도 까딱하면 한순간 이승을 하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상대에 대한 동정은 우스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한은 자신의 왼쪽 어깨를 찔러오는 자의 손목과 팔꿈치를 동시에 단숨에 잡아 꺽었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뻐벅!"
"으악!"
팔꿈치와 손목이 반대방향으로 꺽이며 부러진 뼈가 근육을 뚫고 튀어나왔다. 손에 쥔 칼이 흘러내리는 사내의 가슴을 쳐서 밀어내며 한은 옆으로 반보 이동했다. 그의 등을 노리던 칼이 그의 몸 5센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바람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칼을 든 사내의 몸이 목표를 잃고 앞으로 숙여졌다. 한은 그 자의 옆구리를 무릎으로 올려차며 그 충격에 고통으로 숙여진 그자의 등위로 올라탔다. 순간적으로 한의 옆에서 그의 허리를 노리고 휘두르던 칼의 궤적이 한에게 무릎으로 걷어차여 갈비뼈가 부러진 채 숨을 쉬지 못하고 땅으로 속절없이 쓰러져가는 동료의 목덜미를 파고들 듯 다가들었다. 한은 쓰러지는 자의 등을 밟고 허공으로 50센티 정도 뛰어오르며, 자신의 동료에게 칼질을 하려다가 놀라서 칼을 거두고 있는 자의 손목을 밟고 얼굴을 걷어찼다.
한의 창안절기 난엽세와 폭풍세의 초식들이줄에 꿰인 듯 연이어 펼쳐졌다.
"퍽!"
"크억!"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는 사내의 코는 얼굴에 파묻힐 정도로 주저앉아 있었고, 핏물로 얼룩진 입에서 이빨이 옥수수처럼 쏟아졌다. 가슴 앞에 칼을 모은 채 한에게 뛰어들던 자가 그 광경을 보고 주춤했다. 하지만 한이 같이 주춤해야할 이유는 없다.
한은 그 자의 측면으로 돌아나가며 그 자의 손목을 틀어쥐고 발면으로 상대의 무릎을 걷어찼다.
난엽세중의 회선보와 제영금나, 삼단연환퇴의 일식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하지만 일면 우아하고 섬세하기까지한 그 몸놀림이 만들어낸 장면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빠각!"
"끄아악~~"
부러진 무릎뼈가 바지를 뚫고 나오며 섬찟한 핏물을 뿌렷다. 일행인 배정규의욕설이 끝나고 상대를 덮친 지 5초도 되지않아 4명이 병신이 되어 이리저리 쓰러지는 것을 본 윤형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는 전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김석준을 돌아보았다.
다급함과 두려움이 어우러진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개새끼야! 넌 왜 안 덤벼?"
찢어지는 고성에도 김석준의 몸은 미동도 없이 한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전혀 끼어들 의사가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윤형진에게 다가섰다.
"으어어어... 임형사님! 이제 그만 합시다. 우리 애들도 많이 다쳤으니 이 정도에서 그만둡시다."
윤형진은 필사적인 표정으로 칼을 땅에 던지고 양손을 내저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별명이 철대인, 포커페이스라더니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이런 실력을 가진 놈을 덮치라고 하다니! 도대체 사장님은 어디서 이놈에 대한정보를 얻으셨길래 이렇게나 실력이 차이가 나는 거야, 도대체...'
그 와중에도 윤형진은 무사히 돌아가게 된다면 이종하에게 정보를 전달한 자를 족칠 궁리를 하며 이를 악물었다.
"손을 내밀어라!"
한의 무심한 음성이 골목안에 깔렸다. 김석준을 만나며 모처럼 흥이 나던 기분이 이자들 때문에 잡쳤다.
"왜?"
윤형진은 한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주저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는 빨리 이 상황을 정리해야했다. 비명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신고라도 해서 경찰이 출동하기라도하면 낭패였다.
자신들은 현직 형사를 테러하려한 것이다. 자신들의 상처가 심하긴 하지만
자신들이 먼저 칼을 들었으니 상대를 물고 들어갈 여지도 없었다. 잡히면 최소한 5년은 학교(교도소)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빠직!"
"끄으윽~~"
윤형진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멀쩡했던 오른손 중지가 부러진 채 손등에 붙어서 덜렁거리는데 맨정신으로 생각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한이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통으로 몸서리를 치고 있는 윤형진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김석준이 한에게 다
가왔다. 한은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도냐?"
김석준은 간단하게 고개를 저어 자신에게 싸울 뜻이 없음을 나타냈다.
"아니다. 내가 졌다. 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게 해다오. 이들은 너를 친 것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받았다. 이렇게 까지 된 이들을 교도소에 보낼 생각인가?"
한은 침울한 표정이었지만 세불리함을 알고도 아직 당당함을 잃지 않은 김석준에 대해서 호감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해서 뒷골목 세계로 빠지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저 나이에 발경을 할 정도면 재질이나 노력이 범상한 자는 아니었다.
"데리고 가라."
한은 잠시 말을 끊고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김석준을 보았다.
"이종하에게 조만간 내가 찾아간다고 전해라. 그 자리에서 너를 보지 않기를 바라마."
"어떻게?"
"윤형진은 이종하의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오른팔이지."
한의 낮으면서도 굵은 목소리에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김석준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상대는 이미 상황파악이 끝나 있는 것이다.
"알겠다."
"삐요 삐요 삐요~~~"
불과 2분뒤 순찰차 세 대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바닥에 점점이 뿌려진 핏자국을 보고 끔찍한 비명소리가 몇 번 들렸다는 신고내용처럼 이곳에서 무슨 일인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도 없는 빈 골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추측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에 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보고를 받고 형사기동대차량이 도착하여 주변을 수색하였으나 핏자국외의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