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요리사는 자기 눈앞에 있는 신선한 재료를 먼저 본다고 한다. 한 광고전문가가 어느 날 저녁 만찬에 초대됐는데, 요리사가 프랑스인이라 메뉴는 프랑스식 코스 요리였다. 메인요리는 리조또였는데, 특이한 점은 리조또 위에 구운 제주 은갈치가 올려져 있는 것. 뜻밖의 배합이라고 생각하며 먹었는데 맛이 기막혔단다. 알고보니 요리사가 메뉴를 구상하기 전에 “요즘 한국의 제철 식재료가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만일 그 요리사가 ‘나는 완벽한 프랑스요리를 하는 사람이니 프랑스의 식재료를 구해 요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만찬에 초대된 이들은 냉동 푸아그라나 에스카르고를 맛봐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명한 요리사는 이 계절, 이 땅에서 구할 수 있는 최적의 재료를 선택했던 것.
와인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 땅에서 나는 포도로 만든 와인이 프랑스산 와인이나 칠레산 와인에 비해 낯설게 느껴지는 건 모순 아닐까? 전문가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기 위해 차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큰 언덕 같은 섬, 대부도에서 맛보는 토종와인 -그랑꼬또-
배 아닌 차로 바다를 건너, 헤아릴 수 없는 조개요리 간판의 늪을 건너 드디어 목적지인 그린영농조합에 도착했다. 대부도 특산물인 캠벨포도로 토종 와인 ‘그랑꼬또’를 만드는 곳이다. 살짝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건물은 ‘그랑꼬또(Grand Coteau; ‘큰 언덕’을 뜻하는 프랑스어)’라는 브랜드와 잘 어울린다. 대부도(大阜島)라는 이곳 지명 자체가 ‘큰 언덕’이라는 뜻으로, 멀리서 보면 큰 언덕처럼 보인다고 하여 대부도라 이름 붙여졌다.
즉, ‘그랑꼬또’는 ‘대부도’의 프랑스식 명칭이다. 대부도는 서해의 열기와 습기, 높은 일교차,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 등 포도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지닌 곳이다. 이런 천혜의 환경에서 재배된 캠벨포도는 높은 당도와 강한 풍미를 지녀 ‘꿀포도’라 불리는데, 이런 포도로 빚은 그랑꼬또 와인의 맛, 능히 짐작할 만하지 않을까.
인사와 함께 커피 한 잔을 부탁하니, 김지원 대표(48)가 “와인집에 오셨으니 와인을 드셔야죠”하며 각양각색의 와인으로 뭍에서 온 손님을 반겨준다. 식전에, 그것도 근무 중에 낮술이라니! 와이너리 취재라는 특별한 미션을 부여 받았기에 누리는 감미로운 특권이다. 햇귤을 닮은 시큼한 와인부터 진중함이 살짝 묻어나는 레드와인, 그리고 우아한 달콤함으로 “조금 더 안 될까요”를 외치게 한 아이스와인까지 고루 음미하며 대화를 나눴다.
반 발짝 앞선 시도, 힘들었지만 잘했다 생각
김 대표는 올해 우리 나이로 마흔 아홉. 원래 대부도가 고향이다. 3대째 대부도에서 캠벨 포도를 재배해왔다. 동업자이자 부인인 박영화 씨(45)와는 첫 직장인 농협에서 만난 사내커플이다. 인천이 고향인 부인 박영화씨는 농협 대부도 지점에 발령을 받아 ‘물 건너’왔고, 이곳에서 김지원 대표를 만나 스물 두 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현재 대학원생인 딸과 농대입학을 준비 중인 고3 아들이 있다. 음악을 전공했지만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대학원에서 소믈리에 과정을 공부하는 딸, 초등학생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자랑스럽게 여겨온 아들. 김 대표 부부에게는 참으로 든든한 존재다.
김 대표가 농협을 그만두고 와인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뛰어든 것은 2000년. 충북 영동대학에서 ‘샤토마니’를 출시한 지 2~3년이 지났지만, 아직 와인이 강남의 부유층이나 마시는 특별한 술로 인식되던 때였다. 김 대표가 4-H활동을 한참 열심히 하던 때, 안산시 시범와인사업 공모에 사업계획서 작성을 돕던 것이 계기가 되어 그린영농조합의 대표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농협처럼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그것도 가정이 있는 사람이, 그냥 포도농사도 아니고 와인이라는 미지의 분야에 도전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을 듯하다. 가족의, 특히 부인의 반대가 거세지 않았을까? 출산직후 퇴사한 농협에 계약직으로 재입사하면서까지 내조해온 부인 박영화 씨가 웃으며 대답한다.
“일단 쿨하게 승낙했어요. 그리고선 ‘아차!’싶었어요. 제가 서른 셋, 남편이 서른 여섯이었는데 도전이라는 걸 지금 안 해보면 평생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말 하고 싶으면 해보라고 했던 건데...처음 몇 년은 힘들 때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싶었죠. 하지만 지금은 너무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린영농조합원의 32개 농가가 경작하는 포도밭은 총 600헥타르로 대부도 전체면적의 30%에 속한다. 조합원들이 첫 와인을 탄생시킨 건 2001년. 아직 이름없는 와인이었지만 조합원들의 기쁨은 컸다. 그리고 2년 후인 2003년, 드디어 ‘그랑꼬또’ 라벨을 단 브랜드와인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2009년 7월, 그린 영농조합은 또 하나의 기념일을 갖게 된다. 7~8년에 걸쳐 준비해온 새 공장과 와이너리 준공식이 그것이다. 현재 그린영농조합은 1~6차 산업을 아우르고 있다. 1차 산업인 포도생산부터 2차 산업인 양조업, 와인바와 와인캠프를 통한 교육과 문화까지. 김 대표는 와인투어를 오는 이들을 대상으로 2층 강연장에서 주 1~2회‘와인학개론’강연을 하고, 외부 강의는 월 1~2회 정도 하고 있다.
프랑스인과 한국인, 와인을 마시는 이유부터 달라
“프랑스인들은 일상적으로 식사에 와인을 곁들이는데, 이유가 뭘까요?” 프랑스에 일 년 넘게 머무른 적이 있었지만, 김 대표의 질문에 그리 자신있게 답하지 못했다. “소화제 내지는 식욕촉진제가 아니냐”는 대답에 김대표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을 지으며 나름의 주장을 펼쳤다.“음식이 다르면, 곁들이는 와인도 다릅니다. 한국인에겐 한식에 맞는 와인이 필요합니다.”
김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 요리를 비롯해 육류나 어류가 메인인 서양식 요리에 곁들이는 와인은 우리 밥상의 김치 같은 존재라는 것. 우리가 밥상에 김치를 올리듯 프랑스인들은 식사에 와인을 곁들이고, 우리가 느끼한 음식을 먹을 때 특히 맵고 신 김치를 찾듯, 프랑스인들은 기름진 스테이크를 먹을 때 떫은 맛이 강한 와인을 곁들인다.
즉, 상대적으로 기름진 서양인들의 식탁에는 떨떠름하거나 시큼한 와인이 필요하지만, 농산물이 중심이 되는 우리 식탁에는 부드러운 와인, 우리 입맛에 익숙한 캠벨포도로 만든 와인이 잘 어울린다는 것.
그러나, 우리 농산물에 대한 신뢰도와 선호도가 부쩍 높아진 요즘에도 유독 와인에 대해서만큼은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법칙이 잘 통용되지 않는다. ‘와인하면 프랑스’라는 인식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프랑스 와인을 폄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프랑스 와인은 프랑스 사람들의 입맛과 음식에 가장 잘 맞는 와인이다. 그렇다면 우리 입맛과 음식에 가장 잘 맞는 와인은 우리 땅에서 난 포도로 만든 와인 아니겠느냐”는 것이 김 대표의 지론이다. 아직 토종와인에 대한 편견의 벽은 높다. 하지만 김 대표 부부처럼 근거 있는 믿음을 가지고 지속적인 노력을 펼치는 이들이 있는 이상, 토종와인이 국내 와인시장의 중심을 차지할 날이 멀지 않으리라 기대해본다.
“우리 입맛과 음식에 가장 잘 맞는 와인은 우리 땅에서 난 포도로 만든 토종와인입니다.”
[그린영농조합]
- 주소 경기 안산시 대부북동 1011-3 그랑꼬또
- 홈페이지 www.grandcoteau.co.kr
-그린매거진 11월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