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겠지?”
“안 되겠죠?”
축제를 보러간 키토에선 비가 주르륵 내리고 있었다. 변덕이 심한 키토날씨다. 비가 자주 내리긴 하지만 보통 금세 그치곤 했다. 키토에 다시 온 이유는 열흘 이상 계속되는 키토 축제의 마지막 날을 찍기 위해서다.
자료화면은 멕시코 오하카에서 찍었던 축제사진 - 자료사진만으로도 약이 오른다
#24 - 장소 키토 중심광장
인디오 전통 복장을 한 이들이 활짝 웃으며 퍼레이드를 시작한다. 그 화려함에 넋이 나간 나는 그들을 쫓고, 워낙 친절한 남미인인지라 내가 행렬에 끼도록 허락한다. 나는 가능하면 머리에 꽃을 달고, 풀린 다리로 막춤을 춘다. 혹시 현지인들이 술을 권하면 단 한 방울도 사양하지 말고 다 퍼마시고, 자연스러운 술주정으로 축제의 대미를 장식한다. 깽판을 부리면 감독님이 알아서 편집해주실 것이다.
이런 장면을 원했다. 봄날 에버렌드 튤립 축제같은 장면을 기대했다. 추운 겨울 한파로 고생하는 불경기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미리 봄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보통때라면 길어야 2시간이면 그치는 비는 멈출줄 몰랐고, 하늘은 어두웠다. 우리는 홧김에 구두를 닦았고, 홧김에 푸마 점퍼를 찾았다.
점퍼
찾았다아아아
주인의 멍청함으로 생이별의 고통을 맛봐야했던 형광색 점퍼는 키토 숙소 카운터 비닐 봉지에 슬프게 쪼그라져 있었다. 인연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어있다. 우리의 사랑은 뜨가웠으므로, 이리 재회할 운명이었던 것이다(딱 오늘까지만 주접 떨겠다). - 점퍼가 내 손에 오기까지 싫은 소리 하나 없이 동행을 해주신 PD님과 카메라 감독님. 장롱에 있는 점퍼가 많이 사랑스러웠을텐데도 전혀 손대지 않은 호텔직원과 가정교육 잘 받았을 호텔 주인장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
"만타로 가자."
비가 그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우리는 만타로 진로를 수정했다. 에쿠아도르의 대표적인 휴양지, 만타. 전혀 다른 분위기(바다니까)에서 새출발을 해보자는 뜻도 조금은 있었지만 - 사실 우리는 고갈된 체력을 참치로 보충하고자 했다. 만타는 세계적인 참치 산지로 에쿠아도르 사람들은 대가리 부분은 통째로 버린다고 한다. 우리는 안다. 참치 대가리가 얼마나 귀하고 비싼지. 그 안에 숨겨진 두툼한 살점의 고소함도 우린 알고 있다. 돈은 없지만, 입은 갤러리아 명품관인 우리는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
참치
캔에서 푹 삶아진 김빠진 참치 말고
육질 튼튼, 바다에서 갓 올라온 후레시한 살점
송감독님은 참치 만찬을 위해 순창고추장까지 준비하셨다.
송감독님은 대단해
먹는 것에 대한 저 열정!
하지만
나는 샘표간장을 아름드리 플라스틱 통에 고이 담아 준비했다. 혹, 만타 바다가 꾀죄죄하고 날씨가 더럽게 칙칙해도 버려진 참치 대가리를 하이에나처럼 휘저으며 살점을 찾아내 난폭하게 뜯어먹을 것이다.
그러므로 참치만 있으면 된다.
사진설명: 혹 간장이 비행기 짐칸에서 터질까봐 뽁뽁이 비닐로 싼 후에, 수려한 스폰지로 또 한 번 감쌌다.
"뭐요? 4천 원이요?"
만타에서 첫날밤. 우리는 상처받았다. 휴양지라 물가가 조금은 비싸려니 했는데, 길거리 매대에서 파는 닭꼬치가 하나에 4천 원이라는 것이다. 저녁을 대충 떼우고, 일찍 잠자리에 들려던 우리는 길거리 음식의 무자비한 폭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싼 걸로 배나 가득 채우고 자려던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꼬치집에서 박차고 일어섰다. 그깟거 안 먹고 만다. 우리는 허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늦은 밤이라 문을 연 식당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아침 일찍 일어나 훌륭하게 버려진 참치 대가리로 '모닝 회한접시' 하면 된다.
새벽 어시장은 멋졌다.
참치 먹을 생각에 심장이 벌렁거려 결국 잠도 설쳤다.
저 어엿한 다랑어의 위용을 보라.
얼른얼른 끝내고 참치 만찬을 즐기세. 젊은 청춘 빨리 쉬니, 틈날 때마다 먹어 보세. 급한 맘 몰라주고, 촬영은 끝이 없네. - 4구체 만타가
"민우씨 이걸로 약해. 참치 원양어선을 찍어야할 것 같아."
"네에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나는 분부대로 움직였다. 물어물어 참치회사 사무실을 찾았다.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은 오전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밤 10시 정도면 사장님께 전화드릴 수 있어요. 그 때 다시 오세요."
아름다운 여비서는 활짝 웃으며 홍콩에 계신 사장님께 꼭 전화해 준다고 했다. 지금은 홍콩이 한밤중이라 주무신다고 했다. 아무래도 동원참치와 오뚜기 마일드참치를 생산하는 세계적인 참치 강국 대한민국에서 왔음을 경계하는 눈치다. 이미 아침 어시장 참치는 물건너 갔다. 햇빛은 뜨거웠고, 싱싱한 생선대가리에도 파리가 자욱할테지. 세상에 대한 증오와 허기로 나는 더욱 열심히 움직였다(난 짜증나면 더욱 비굴해진다).
우리가 접촉하는 회사들이 원래는 한달전부터 취재 허가 공문을 보내 허락을 따내야 하는 세계적인 규모의 회사들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사실은 참치회사 여직원이 귀띔을 해준 거지만) 하역을 관장하는 항만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곤란한 표정으로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 직원을 보면서도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오늘의 취재협조가 한국과 에쿠아도르, 양국의 발전과 상호교류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유창하게 설명했다.
인간에게 불가능은 없다.
특히 허기로 정신과 몸이 만신창이가 된 사람은 스스로 자폭하기 전까지 광기 어린 에너지로 물불을 안 가린다.
보이는가?
삼엄한 경비(입구에는 경찰과 경호원이 눈을 부릅뜨고 신분증과 짐을 검색한다.)와 취재허가 없이는 입장조차 안 된다는 참치 하역장에 나는 보란 듯이 입성했다. 세상에 먹기로 각오하고 달려들면 안될 것이 없다.
승리를 확신한 장수는 승리에 들뜨지 않는다. 나는 승리할 줄 알았고, 그래서 담담했다.
"민우씨 참치 좀 찍어서 옮겨봐."
인부들이 갈고리로 냉동된 참치를 찍어서 옮기는 걸 나도 한 번 해보라고 했다. 드디어 '체험 삶의 현장'까지 섭렵하는 건가? 이 장면만 어떻게 잘 찍으면 대충 오늘 오전 일과는 끝날 것 같다.
"이렇게요?"
나도 갈고리를 하나 잡고 참치의 뱃살을 찍었다.
"퉁"
힘없이 튕겨져 나왔다.
"아니 그걸 왜 못해?"
"..."
이건 지금의 내 광기로도 안되는 거였다. 조금이라도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야 어떻게든 해볼텐데 얌체볼처럼 산뜻하게 튕겨져 나오기만 했다. 내 배고픔, 내 수전증.
"아아아아"
B급 공포물에 나오는 싸이코 킬러처럼 벌개진 얼굴로 그렇게 참치 하나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해도해도 안되니까 나중에는 대충 손으로 집고 싸이코 킬러의 흉흉한 미소로 카메라를 쳐다봤다.
"민우씨 파는 물건을 그렇게 망쳐 놓으면 어떻게 해?"
- 참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내가 그날 무엇을 먹었는지는 테마기행 2부에 나옴 - 은근 티저 광고^^
이슬라 플라타 -미니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곳. 갈라파고스가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는데 반해, 이슬라 플라타는 만타에서 하루 코스로 다녀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민우씨 벗어야겠어"
사진설명: 허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엉거주춤 스노클링을 하는 나
"헉"
이슬라 플라타 섬은 동물이 주제니까 스노클링같은 건 안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수영복도 준비 못했는데
"그냥 팬티 입고 뛰어들면 안될까?"
"왜 안 되겠어요. 제 팬티 은근 수영복보다 멋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마켓에서 만 원에 5장 짜리 팬티다. 주황색에 흉하게 세로로 검정색 스트라이프가 다섯개 그려진 그냥 팬티다. 예쁜 수영복으로 폼잡으려 물로 뛰어드는 백인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흉측하게 뛰어들었다.
"풍덩!"
나는 그날 과식을 한 더부룩한 속에, 어쩐일인지 뭃속이 더욱 무서워져서 허우적대다가 호스를 분실했으며, 가이드는 무려 30분 이상을 바다를 헤매며 내가 빠뜨린 호스를 찾느라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물에서 나오질 못했다.
길 위에는 일명 배째라 짖어대는 미친개같은 파란 갈퀴의 새들을 만났으며, 빵조각만 주면 물위로 우아하게 떠오르는 거북이도 보았다. 그리고 내 평생 소원인 고래꼬리도 보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 오늘 몸살기가 좀 있어서 횡설수설 끝낼게요. 흑. 내일은 청승맞은 리오밤바 기차여행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첫댓글 1등이네요..ㅋ 몸살기가 있는 몸으로 이 늦은 시간에 글을 올려 주시다니 감사~!^^ 점퍼 찾은 거 축하드리고..ㅎㅎ 방송으로 확인할 거 많네요.. 참치회와 흉한 수영복?ㅋ 이번 감기 무지 독하니 하루만에 안 나으면 병원 가세요..^^
에콰돌이 참치생산국인건 또 첨 알았네요.해산물하면 남미에선 칠레정도로만 생각나는데..아 그리고 그 푸마 드디어 손에 들어갔군요..그래도 다행입니다.자기가 아주 아끼는물건 잃어버렸을때의 그기분이란..제가 하도 잘 잃어 버리고 댕겨서 압니다.ㅎㅎ//그리고 감기 빨리 나으세요`~
고생하신 거 눈에 보이는데 ㅎㅎ 읽는 저는 넘 웃기네요 ㅋ. 감기 걸리셨다니 꼭 약 드시구, 안 나으시면 병원 가 보세요. 전 비타민만 먹고 버티려다 결국 기관지염까지 갔었어요. 그 바람에 약을 무지 오래 먹어야 했어요 ㅠㅠ
하하하하..너무 재미있네요. 책내셔도 좋겠어요. 푸마잠바 찾은거 축하해요~
참치가 불쌍하네요 ㅋㅋ
푸마점퍼 찿으신것 축하드리고요.. 감기조심하세요.. 이번 감기가 엄청 독하데요..*^^*
오늘 심심해서 세계테마기행 봤는데...콜롬비아편..목소리 참 낭랑하시더군요..
푸마점퍼 찾을 줄 알았어여 ㅋㅋ 못찾았음 한국 안오셨을듯 ㅋㅋ 벌써 부터 방송이 기대되네여 ㅎㅎ 잼나게 읽고 갑니다 ^^
ㅎㅎㅎ 역시 기대에 어긋남이 없으시네요.^^
찾을줄알았어요..축하드려요..사랑스러운 퓨마점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