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 96 얼음 절벽,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다 13일 금요일에 열세 번째로 정복된 다울라기리(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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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04. 02:17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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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탐험사 100장면
얼음 절벽,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다
13일 금요일에 열세 번째로 정복된 다울라기리(1960년)
요약 다울라기리는 8,000m급 봉우리 중 열세 번째로 정상을 허락했다. 봉우리가 얼음 절벽으로 이루어져 네팔 히말라야 중에서도 가장 높고 험하다. 스위스 세 번째 등산대가 짐과 사람을 5,877m까지 비행기로 수송해 힘을 저축했고 산소 없이 4시간을 사투한 끝에 1960년 5월 13일, 열세 번째로 정상을 허락했다.
산꾼, 산으로 돌아가다
1959년 오스트리아대는 대원 한 사람을 크레바스에서 잃었다. 장례식을 셰르파 파상이 주관하고 있다.
다울라기리(8,172m)는 열세 번째로 인간의 발길을 허용한 8,000m급 봉우리이다. 다섯 나라가 번갈아 가며 여덟 번이나 도전한 끝에 10년 만에 성공했다.
여덟 번 도전이라는 기록은 초모룽마(열한 번) 다음으로 많은 횟수다. 높이로는 여섯 번째인 다울라기리가 두 번째로 많은 도전 횟수에다 열세 번째로 늦게 정복되었다. 게다가 다른 산들이 첫 번째 등반이 성공한 뒤로는 비교적 자주 정복된 데 비해, 다울라기리는 처음 오른 뒤로 두 번재 오르기까지 또 10년이 걸렸다. 다울라기리가 얼마나 험한 산인지 말해주는 기록이다.
다울라기리란 인도말로 '하얀 산'이라는 뜻이다. 프랑스가 알프스 최고봉을 몽블랑이라 부르듯 세계 어느 나라나 눈덮인 봉우리를 다 '흰산'이라고 하지만, 특히 네팔에서는 어디를 가나 높이 솟은 흰 봉우리의 이름을 물으면 다울라기리라고 대답했다. 처음 이곳 지형을 조사하던 학자나 측량기사들은 그 때문에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이렇듯 모두가 눈덮인 산인데도 유독 이 산에 다울라기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봉우리가 얼음 절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울라기리는 네팔 히말라야 한가운데에 안나푸르나 · 마나슬루와 함께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높고 험하다.
유독 이 산만이 '흰 산'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봉우리 전체가 거의 얼음 벼랑으로 이루어진 때문이다.
다울라기라 산군(山群)은 동쪽 투쿠체 피크(6,920m)에서 서쪽의 푸타히운출리(7,246m)에 이르기까지 40km에 걸쳐 뻗어 있다. 이 안에서 다울라기리 Ⅰ봉에서 Ⅳ봉까지를 비롯해 추렌 히말(7,371m) · 구르자 히말(7,193m)따위 쟁쟁한 봉우리가 즐비하다.
이 산이 처음으로 자세히 밝혀진 때는 1950년이다. 안나푸르나를 정복한 프랑스 원정대가 애초에 오르려고 했던 산은 안나푸르나가 아니라 다울라기리였다. 그들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두 산 가운데 먼저 다울라기리로 갔다. 북동쪽과 남동쪽 산등성이를 정찰했지만 모두 너무 험해서 오를 성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북쪽으로 올라 보려고 했지만 그쪽 역시 무서운 낭떠러지와 빙하에 가로막혀 있었다.
다른 한 팀이 동쪽을 살폈지만 5,500m 높이에서 엄청난 크레바스에 맞닥뜨려 돌아서고 말았다. 에르조그 대장은 마지막으로 남쪽을 정찰시켰다. 정찰대원은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당산가 가스통 레뷔파였다. 그는 5,000m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와 이렇게 보고했다.
"남쪽은 높이가 몇 천m인지 모를 정도로 지독한 낭떠러지였소. 알프스 마터호른 북벽의 세 배나 될 듯한 그 어마어마함에 우리들은 너무 놀라 얼굴만 쳐다보았지요. 그쪽은 아예 생각지도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걸국 프랑스대는 발길을 돌려 안나푸르나로 갔고, 거기서 8,000m 봉우리 최초 등정의 영예를 안았다.
1953년 3월 15일 스위스 원정대가 다울라기리에 도전했다. 그들은 프랑스대가 정찰하지 않은 서쪽 벽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5월 2일 그들은 마얀디 강 상류의 대숲을 벗어나 다울라기리 서쪽 능선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4,500m나 되는 소름 끼치는 벼랑이었다.
스위스대는 서쪽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갔다. 4,500m 높이에 제1 캠프를 세웠다. 겉보기에는 전혀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온갖 어려움을 뚫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 제2 캠프는 거대한 얼음탑을 넘어 5,100m 지점에 세웠고, 제3 캠프는 5,500m의 얼음 선반같이 생긴 곳에 세웠다. 제4 캠프는 얼음 폭포를 넘어 5,900m에, 제5 캠프는 아주 심한 비탈의 중턱인 6,500m 지점에 세웠다.
5월 29일 아침 마지막 공격대가 정상으로 이어지는 벼랑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쇠못 하나 박을 수 없는 깎아지는 벼랑에 벌레처럼 찰싹 달라 붙어 4시간 동안 기어올랐다. 그러나 벼랑 꼭대기까지 마지막 70m를 남겨두었을 때 더 이상 손으로 잡거나 발을 디딜 틈을 찾을 수 없었다.
운좋게 그 벼랑을 올라선다 해도 그 위에서 텐트나 산소통 없이 하룻밤을 지내야 할 터였다. 그것은 삶을 보장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두 사람은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7,700m 높이에서, 스위스대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다울라기리에 대한 정보가 처음으로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1954년 5월 세 번째로 도전한 아르헨티나 원정대는 산등성이 7,500m 지점에 폭약을 터뜨려 제6 캠프를 세웠으나 7,590m에까지 오르고는 대장을 동상으로 잃었다. 1955년과 1956년에도 독일 · 스위스 합동원정대와 아르헨티나가 도전했지만 소용없었다. 독일 · 스위스 팀은 심한 눈보라로 7,200m에서, 아르헨티나는 몬순에 밀려 7,600m에서 꺾였다.
등산대가 다울라기리에서 번번이 실패하는 원인은, 7,000m를 넘어서는 텐트 칠 곳이 없어 정상까지 가기에 너무 시간과 힘이 많이 드는 탓이다. 스위스대는 이에 대비하여 철저히 준비했지만 1958년 몬순을 만나 또 실패했다.
1959년에 도전한 오스트리아는 두 주일 만에 제4 캠프(6,500m)까지 전진했다. 대원 한 사람이 사고로 죽었지만 굴하지 않고 제6 캠프를 7,400m에 세웠다. 거기서 두 사람이 사흘간 머무르며 세 번이나 정상을 공격했으나 다 실패했다.
1960년 스위스의 세 번째 도전. 대장을 막스 아이셀린. 그들은 짐과 사람을 5,877m까지 비행기로 수송해 힘을 저축했다. 6,600m에 제1 캠프를 세우고 고지 적응과 체력 단련을 했다. 1957년 두 번째 도전 때의 대원이던 쿠르트 딤베르거도 끼어 있었다. 그는 1957년 브로드 피크에 처음 오른 뛰어난 등산가였다.
딤베르거와 대원 5명은 1960년 5월 11일 7,800m에 마지막 캠프를 세웠다. 그들은 2인용 텐트 안에서 거의 눈을 붙이지 못한 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5월 13일의 태양이 떠올랐다. 맑고 바람 없는 이 날 그들은 산소 없이 4시간을 사투한 끝에 다울라기리 정상에 올랐다. 서양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13일의 금요일에 열세 번째 도전에서.
열흘 뒤, 다른 길로 올라온 대원 두 사람이 또다시 정상을 밟았다.
▼ 우리나라의 기록은 * 1988년 / 최태식 초등 [네이버 지식백과] 얼음 절벽,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다 - 13일 금요일에 열세 번째로 정복된 다울라기리(1960년) (세계 탐험사 100장면, 2002.7.18., 이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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