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은 허락해주지 않았다(2022년 제10회 평택 생태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유춘상
전봇대 밑, 목이 꽉 묶인 채색 봉투가 옆구리에 숨구멍을 내 겨우 속삭일 때, 나는
몸이 동그르르 말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묶는 선입니다, 검은 개 한 마리
샐쭉 돌아봅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비루먹은 짐승처럼 봉투는 짓눌려 있습니다.
뱃속엔 찢어진 지문, 잘린 식탐, 뱉어진 체액, 떨어져 내린 주소, 색색의 머리카락,
깨진 생활비, 마른 청춘, 부러진 상다리와 터진 수박껍질이 잘못 맞물린 채 숨 참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어젯밤의 혈투와,
눈 부은 질투로 팽창한 그를 묶어 갖다버려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버려진 것들은 이렇게 다 한 곳에 모여 이웃으로 포개집니다
쓰러지고 버려져 바람이 불 때마다 가늘게 신음까지 내고 있습니다
버리는 것은 막다른 곳에 다다르는 일
버리는 사람은 버린 사람에 이르는 길
자신을 내다 버릴 때, 목은 힘껏 조여오지요
나의 목
숨의 목
행성의 푸른 목
한 번도, 마음대로 살아라, 허락받은 적 없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 풀빛 행성에서
우리는 서로를 조이고 가득가득 버리며 홍수처럼 떠밀려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흘러가 어디에 쌓이는지
그 바다에는 어떤 것들이 썩으며 자라고 있는지
어떤 것들이 헤엄치며 숨 헐떡이고 있는지
행성은 어느 반짝이는 별의 슬픈 그늘을 가득가득 태우고 있는지
나는 토마토처럼 내장이 무르고 진물이 터져 싹 나지 않을 내일을 보듯, 몸이 동그르르 말려버리는 버릇으로 오싹해집니다
우월한 손들이 무심코 던지고 간 채색된 봉투가 텅빈 하늘을 마주 보고 있는 아침
마다
팔랑이는 나비를 보는 일, 쥐며느리 발걸음 따라 살금살금 걸어보는 일처럼
하늘은 우리가 잃어버린 간절한 곳,
그 너머 빛으로 반짝이는 곳이어서
딱지 없이 버려진 냉장고의 열린 냉동 칸을 보며 경배의 마음이 서늘하게 비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한 번도 허락해 주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내어준 이 행성에서 나는
그가 내민 청구서, 내일을 주섬주섬 찾고 있습니다.
*심사위원: 성백원. 우대식. 김영자. 진춘석. 배두순. 김복순
유춘상
경북 영천 출생. 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2022년 강원문학교육 신인문학상 공모 최우수상 수상. 경주 예일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