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시 페이션트'(1996)가 올라와 정신 없이 봤다. 이듬해 국내 개봉했는데 스리랑카 출신 캐나다 작가 마이클 온다체(1943~ )의 원작 소설 ' 사자의 가죽에'(In the Skin of a Lion,1987) 줄거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잠에 빠져든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후일담이다. 서울에서만 32만명정도 들었고, 2001년 공중파에서도 더빙 방송했다. 2016년 11월 재개봉해 2만명 넘게 동원했다.
다 아는 얘기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흔해빠진 로맨스 영화는 아니고, 역사와 인간, 사랑과 그 비극적인 결말, 구원 등의 주제의식이 새롭게 다가왔다. 너무 재미있었다. 다시 보니 영화 줄거리는 더욱 명확해지고, 캐릭터들이 선명히 다가왔으며(원작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와 북아프리카 사하라를 무대로 삼은 점, 헤로도토스의 역사서 얘기 등 디테일한 구석들이 체감됐다.
특히 지난해 6월 가족과 함께 토스카나 피엔차를 다녀왔는데 이 영화에서 헝가리 백작 출신으로 도무지 국적을 알 수 없는 이름이라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라즐로 알마시 백작(랄프 파인스)이 보는 이마다 사랑에 빠져드는 헌신적인 캐나다군 간호 장교 해나(쥘리엣 비노슈), 독일군에게 고문으로 손가락을 잃게 만든 복수를 한답시고 찾아온 캐나다군 첩보 장교 무스(윌렘 대포), 인도(실은 시크교도) 출신 영국군 폭탄 전문가 킵(나빈 앤드루)이 얘기를 풀어가는 곳이 피엔차의 한 수도원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더욱 눈길이 갔다. 피엔차의 현재 모습이 각인된 상태에서 2차 세계대전 전과 후 모습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유심히 봤다. 우리 가족이 거닐었던, 발도르차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길에서 촬영된 것이 아닌가 싶어 반갑기도 했다.
‘구름과 하늘 미쳤다’ 발도르차 평원 품은 피엔차와 몬테풀치아노 (daum.net)
라즐로 알마시(László Ede Almásy de Zsadány et Törökszentmiklós, 1895-1951)는 실존 탐험가다. 영화에 나오는, 사하라 사막에 실존하는 동굴 벽화 '헤엄치는 사람들'을 발견한 인물이며, 항공기를 조종해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지도를 제작한 인물이다. 원작 작가 온다체는 실존 인물과 실제 동굴 얘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는데 영국의 권위있는 문학상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50년 동안 수상작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선정했다.
밍겔라 감독은 4년 가까이 원작을 매만져 대본을 완성했는데 촬영 원본이 무려 4시간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분량이었다. 영화 러닝타임은 162분으로 줄이다보니 상당한 얘기가 떨어져 나갔던 것 같다. 알마시 백작은 해나에게 안락사를 청해 죽음을 맞는데 실제로는 종전 한참 뒤인 1951년 세상을 떠났다.
영화에서는 해나가 전쟁으로 쓰러진 수도원의 장서들을 발견해 책들을 층계참으로 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30도 정도 기울어진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더니 소리가 나 바흐의 선율을 연주했더니 킵이 달려와 폭탄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 해나가 "그러면 바흐 곡만 연주하면 되겠다"고 말하는 장면도 '이게 뭐지' 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의 촬영지, 이탈리아 투스칸 앤 수도원(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
앤 수도원 내부, 르네상스 예술가 조반니 안토니오 바치의 프레스코화
킵이 해나의 몸에 로프를 감아 자신을 지렛대 삼아 해나를 끌어올려 수도원의 프레스코 벽화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홍염을 밝히며 벽화를 뜯어 보는 장면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세 번째 본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킵은 망실된 벽의 여백에 해나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사하라 사막 상공을 날아가는 복엽기(쌍엽기)가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알마시가 조종하고 앞에 캐서린 클리프턴(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이 죽은 듯 앉아 있다. 이게 영화를 끌어가는 장치가 된다. 영화는 리비아와 이집트 카이로에서 얼마시와 캐서린의 불륜과 비극적 결말을 그리는데 실제 촬영은 튀니지에서 이뤄졌다. 모두 한 번쯤 가볼 만한 곳인데 이 작품과 '스타워즈' 촬영지를 돌아보는 패키지 투어 프로그램도 있는 모양이다.
토주르, 셰비카, 미데스, 잉글리쉬 페이션트 ..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영화에는 명대사가 수두룩하다. 많이 손꼽히는 대사가 “The heart is an organ of fire.”
“심장은 뜨거운 기관이에요.”(‘심장은 욕망의 창고다.’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너무 나간 번역은 아닌지...)
“Every night I cut out my heart. But in the morning it was full again”
“매일 밤 심장을 도려내고 도려내도 아침이면 다시 차올라 있죠.” [출처] 다낭, 미트 플러스<44. 인생 영화③>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작성자 미트 플러스
그런데 이 두 대사보다 더 와닿는 대사가 있었다. 알마시 백작의 "나는 소유, 소유당하는 것이 가장 싫어요." 하지만 캐서린이 결별을 선언하자 집착하고 매달리는 것은 정작 본인이었다. "전쟁 중에 하는 배신은 평화 시에 하는 것보다 천진한 편이다." 알마시 백작이 헤르토도스의 책 중에 좋아하는 구절인데 자신이 영국군에서 탈출한 뒤 독일군에게 자신의 지도를 넘긴 뒤 비행기 연료를 얻어 많은 아랍인을 위험으로 몰아넣은 행위를 변명하기 위한 얼토당토 않는 구절이었다.
그리고 캐서린이 동굴 속에서 외로이 죽음을 맞이하며 쓴 편지 구절도 눈에 들어온다. 알마시 백작은 모르핀 병들을 해나 쪽으로 굴리며 캐서린의 편지를 읽어주면 깊은 잠에 들겠다고 얘기한다. “내 사랑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어둠 속에서 하루가 어찌나 긴지... 아니, 일주일인가? 이제 불도 꺼지고 몹시 춥네요. 기어서 밖으로 나간다면 해가 있을 텐데... 우린 죽어요, 부유하게 죽어갑니다. 우리가 맛본 쾌락들과 우리가 들어간 강물처럼 헤엄쳤던 육체들과 이 지독한 동굴처럼 우리가 숨었던 두려움과 함께 이 모든 흔적이 내 몸에 남길 바라요. 당신이 와서 날 바람의 궁전으로 데리고 가겠죠. 그것만 소망합니다. 그런 곳을 당신과 함께 친구들과 걷기를...”
[출처] 다낭, 미트 플러스<44. 인생 영화③>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작성자 미트 플러스
애틋한 감성을 전달하는 OST는 '탐엣더팜' '타인의 삶' '리플리' '베티블루 37.2' 등을 작업한 할리우드 음악 감독 가브리엘 야레가 참여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에 흘러나오며 감정을 최고조로 이끄는 메인 테마곡이자 비밀스러운 사랑과 운명을 결정짓는 클라이맥스에도 사용된 '리드 미 투 슬립(Read Me To Sleep)'은 영롱하다.
물과 정원을 사랑하는 캐서린이 사막 한가운데 어둡고 척박한 동굴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영화 첫 장면에서 사람이 헤엄을 치는 모습을 붓이 그려가는 장면을 보여준 이유를 설명한다. 그렇게 운명의 장난처럼 살다 가는 것이 인간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영화 초반 사막의 여흥 시간에 캐서린이 리디아 왕비 얘기를 들려주는데 여자가 남자를 선택하고 사랑을 주도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캐서린과 알마시의 사랑은 왕비와 달리 비극적이다. 수도원을 떠나는 해나가 트럭 짐칸에 올랐을 때 소녀-영화에서 처음 어린이가 나온다-와 시선을 교환하며 웃음 짓는데 토스카나의 태양이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비치며 영화가 끝난다.
세 번째로 이 영화를 보면서 조금 위안이 됐던 것은 '아라비아의 로렌스'나 '아웃 오브 아프리카'처럼 북아프리카를 식민주의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한는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스리랑카 출신 캐나다 작가의 원작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킵이 다른 곳으로 전역돼 떠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원작은 미국이 (백인의 나라가 아니라 아시아 국가인)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데 분노해 전출을 결심한 것으로 나온다고 한다. 물론 일본에 식민 지배를 당한 한국인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선이다.
또 알마시의 이집트인 조수가 '알라 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봉송하는 장면은 신기하기만 했다. 액센트와 인토네이션이 독특했다. 알마시 백작이 어릴 적 유모로부터 들었다는 아랍 자장가 선율 Szerelem, Szerelem이 인상적이었다. 요즘 얘기하는 다양성 존중의 전례를 일찍이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The English Patient - Soundtrack - 02 - A Retreat (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