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학동에 대한 답사 해설을 진행하면서 이제 마지막으로 라포르트 저택에 대한 장소를 소개로 송학동 답사 내용을 마칠까 합니다. 제가 항상 인천개항의 특징을 설명하며 개항 시 개항장 지역이 일본사람이 아닌 서구 제국 사람들로 구성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른 개항장과 달리 인천 개항은 이러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세력이 커지면서 개항장 안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세력은 진입할 수 없게 되죠. 그래서 일본인 교회가 개항장 안에 들어서게 되는데 우리는 이 교회를 메도디스트 교회라 지칭했다는 이야기는 선교지 답사와 기독교 전파과정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어 오늘은 인천제일교회에 대하여 인천광역시사의 내용과 인성여고 역사관 기록에 대한 내용을 올려볼까 합니다.
라포르트(E. Laport 라보득 羅保得) 주택
헨켈 저택에서 각국 계단 건너편 쪽에 지금의 제일교회 자리에 1896~7년경에 건축된 붉은 함석 지붕 벽돌조의 조촐한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이 바로 세관장 라포르트(프랑스) 주택이다.
이 제일교회와 인성여고 부지에는 데쉴러집 위 에 토목공영소를 전 해관장 공관으로 1898년 1899년 당시 세관장 라포르트의 집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토목공영소는 해안동 1가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이 건물은 토목공영소의 관사였을 것이다.
현재 라포르트 주택은 제일교회 자리이다.
인천제일교회(대한예수교 장로회)
장로교의 인천 선교의 시작은 장로교단의 지원에 의한 첫걸음과 인천 자체의 자생적인 출발이 한데 어우러져 시작됐다. 장로교단의 지원에 의한 시작은 1946년 10월 19일 중구 전동 1번지 조남철 집사 집에 모인 월남교인 14명이 예배를 시작한 제일교회의 창립 예배였다. 이날 예배는 서울 영락교회에서 인천 선교를 위해 파송한 한병혁 목사에 의해 인도됐다. 예배처는 선린동의 중국인 교회를 임시로 쓰기로 하고 시작했는데 1946년 11월 2일 50여명의 교인이 모여 에배를 볼 수 있었다.
광복 이후 미소 군정에 의해 38도선으로 나누어진 남북의 분할점령과 남북한의 단독 정부 수립에 의하여 많은 북한 지역 거주자들이 공산 정권에 반대하여 남하하면서 실향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남하한 실향민들은 대부분 지식인, 기독교인, 유산자를 중심으로한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진취적 기상과 각고의 근면성, 투철한 기독교 신앙, 높은 교육열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경인 지방에 정착하면서 먼저 교회를 세워 자신들의 실향의 마음을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보듬고자 하는 보금자리로 삼고자 했다. 조남철, 주혜숙, 이화영, 이신복, 김윤호, 이성숙, 김태륜, 홍창목, 최영도, 윤관성, 조준영, 조옥희 등 14명이 제일교회를 세운 선구자들이다.
한편 인천의 자생적인 출발은 광복 직후 송학동에 있던 일본감리교회 건물을 접수한 유진우 장로를 중심으로 30~40명이 예배를 보고 있었던 데 기인한다. 유진우 장로는 1930년 3월 1일 송현기독교회를 세운 바 있으며 개성 출신으로 일본 도쿄에서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내리감리교회에서 봉사하다가 송현기독교회를 개척했다. 유진우 장로는 자신이 세운 송현기독교회가 성결교회로 교단 가입을 하자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 것이다. 서울 영락교회에서 파송한 한병혁 목사에 의해 장로교회가 시작되자 유진우 장로가 세운 교회와 무조건 합동하기로 하고 1946년 11월 16일 100여명의 교인이 모인 가운데 송학동 2가 18번지 오늘의 인성여고 자리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일교회를 창립했다. 예배 처소가 미처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양 교회의 합동으로 제일교회는 예배 처소를 마련할 수 있게 되어 인천에 용이하게 선교 거점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일장로교회 탄생의 역사적 배경이 오늘의 인천제일교회를 구현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1947년 부임하여 1966년 원로 목사가 된 이기혁 목사에 의하여 이러한 역사성은 교회의 모든 제 행사 조직은 물론 교회 구성원의 신앙 상태를 결정짓는 신앙의 원형이 됐다. 망향의 아픈 마음은 민족 복음화의 열정으로 승화되어 1946년 민족 복음화 운동을 전개하여 교회 부흥운동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됐으며 또한 바닷길로 이어진 고향을 떠난 선원들을 위해 인천의 특수성을 살려 외항선교회라는 선교운동으로 발전 하였고 높은 교육열은 인성국민학교와 인성여중고라는 여성교육 사업에 몰두하게 했고 진취적 기상은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한 교회 갱생과 교회 연합운동으로 확대됐다. 그리고 각고의 근면성은 사회에 대한 선교적 책임의식으로 굳건해졌다.
이기혁 목사는 1947년 인천무궁화유치원, 1949년 3월 무궁화공민학교(1962년 12월에 인성국민학교로 개편)를 설립하였고 1961년 2월에는 인성여자고등학교를 세웠다. 1971년 9월 19일에는 지금의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했는데 이 교회는 종탑의 높이 42m, 해발 70m 지점위에 세워진 이 종탑은 해발 112m 상공에 십자가를 올려놓고 인천항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들이 제일 먼저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제일교회를 통한 장로교회 확장은 교회 개척으로 구체화 됐는데 1947년 여름 송도교회를 개척한 것을 시작으로 1948년에는 주안교회, 1949년에는 제이교회, 1950년에는 제삼교회, 1951년에는 제사교회, 제오교회, 1952년에는 제육교회,제칠교회, 1955년에는 제팔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이 8개의 교회는 1959년 장로회 분열시 각가 나눠지게 됐는데 제일교회, 제삼교회, 제사교회, 제육교회, 제칠교회는 통합측으로 나머지 교회는 합동측으로 연대했다.
인천광역시사
교회가 창립된지 7개월이 지난 1947년 5월 16일 49세의 이기혁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부임하지 전부터 그 분이 확신하는 복음 선교의 방향은 세 갈래였다.
첫째는 교회를 통하여,
둘째는 교육기관을 통하여,
셋째는 자선기관을 통한 선교였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슴엔 교회 성장과 더불어 교육기관 설립에 대한 꿈(vision)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무하자 즉시 교회 주변을 살펴보았다.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를 새 선교방향의 선교 기지로 삼고 새벽마다 송학동 주변을 기도하며 몇 바퀴씩 순회하였으니 이는 곧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라는 말씀을 굳게 믿어서였다.
인성여고역사기록관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