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6일 (수) 촬영
북한산우이역 2번 출구로 나와 삼양교통 앞에서 130번 등의 버스를 타고 2정거장만 가면 나오는 연산군 정의공주묘 정류장이다.
버스 정류장에 있는 이정표를 따라 골목길로 진입하면,
바로 연산군묘 출입구가 나온다.
연산군묘 앞은 원당샘공원으로 서울시 기념물인 은행나무가 있다.
연산군 묘역 전경이다. 제일 앞줄의 묘는 좌측이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의 묘이고 우측이 연산군 딸의 묘이다.
그리고 중간 가운데에 있는 묘는 의정궁주 조씨의 묘(태종의 후궁)이고, 제일 위의 좌측은 연산군의 묘, 우측은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이다.
연산군묘 묘역에는 조선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를 포함하여 태종의 후궁 의정군주 조씨,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사위 구문경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이 땅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는데, 임영대군은 세종의 명으로 자식이 없던 의정궁주를 모시다가 사후에는
자신의 땅에 의정궁주 묘를 조성하고 제사를 맡았다.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 신씨는 강화도에 있던 연산군의 묘를 자신의 외할아버지의 땅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달라고 중종에게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본래 있던 의정궁주묘의 위쪽에 연산군묘를 옮겨왔고, 1524년(중종 19)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사위 구문경의 묘가
의정궁주묘 아래쪽에 조성되었다. 이후 거창군부인이 1537년(중종 32) 세상을 떠나 연산군 옆에 묻히게 되었다. -리플릿에서 옮김-
좌측이 연산군 사위 구문경의 묘(燕山君壻具文暻墓), 우측이 연산군의 딸(휘순공주)묘(燕山君女墓)이다.
우측면에서 본 연산군의 사위와 딸 휘순공주의 묘.
묘역 가운데에 있는 네모난(방형) 묘는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의 묘(義貞宮主趙氏墓)이다.
의정궁주 조씨의 묘와 문인석.
의정궁주 조씨의 무덤은 방형(네모)으로 이 묘역에 제일 먼저 묻혔다.
연산군과 부인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이다. 묘역에는 문인석 2쌍과 망주석 한 쌍, 장명등 1기, 향로석 1기, 혼유석 2기, 비석 2기가 있다.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이다.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의 두 번째 왕비였던 윤씨는 1479년(성종 10)
폐위되었고 연산군은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성종의 능지문(왕과 왕후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글)을 읽다가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았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왕비의 자리로 복위하려 하였으나 선비와 대신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었다. 연산군은 재위 초반에 빈민을 구제하고
국경을 강화하며 무기 제조에 힘을 썼고 종묘에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는 등의 업적을 이루었으나 자신에게 반대
의견을 내는 신하들을 적대하고 1498년(연산 4) 무오사화와 1504년(연산 10) 갑자사화 때 많은 선비와 대신들을 죽였다.
사화 이후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치와 폭정을 계속하다가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고,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거창군부인 신씨(1476~1537)는 아버지가 거창부원군 신승선, 어머니가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딸인 중모현주 이씨이다.
1488년(성종 19)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군부인이 되었다.
1512년(중종 7)강화 교동에 있던 연산군 묘를 자신의 외할아버지 임영대군의 땅인 현재의 위치로 옮겨줄 것을 중종에게 요청하였다.
* 무오사화 - 훈구 세력이 <성종실록> 편찬 과정 중에 사관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명분으로 선비세력을 제거한 사건.
* 갑자사화 - 척신(왕실의 인척)세력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을 이용하여 훈구와 선비세력을 제거한 사건.
좌측이 연산군의 묘(燕山君墓), 우측이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居昌郡夫人 愼氏墓)
연산군 묘역의 우측에서 본 모습. 무인석은 없지만 문인석은 두 쌍을 세웠다.
2022년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두 달 동안 조선왕릉 중 10곳의 숲길을 개방한다.
10곳은 능은 서울지역에 태강릉, 의릉, 연산군묘 등 3곳이고, 경기도 지역에 동구릉, 광릉, 사릉,영릉, 파주 장릉, 파주 삼릉, 융건릉이다.
오늘 연산군묘에 온 이유도 사실은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는 숲길을 걸어 보기 위해서 였다.
연산군 묘의 숲길은 전면에서 봤을 때 연산군묘의 왼편으로 올라가야 된다.
연산군묘의 왼편 곡장 뒤로부터 숲길은 시자된다.
연산군 묘역 곡장 뒤에서 본 모습.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 후경.
곡장 뒤에서부터 시작되는 숲길이다. 연산군 묘의 숲길은 이번에 개방된 숲길 중에서 제일 짧은 거리인 500m이다.
숲 길에는 쉬어갈 수 있는 의자도 있다.
숲길이 거의 끝나는 곳에 있는 재실이다.
연산군묘 재실.
연산군묘 재실은 묘 관리자가 상주하던 곳으로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기본적인 재실의 구성은 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安香廳),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와 그 외 부속 공간인
행랑(行廊)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재실에서 발견된 치제현판(致祭懸板)에는 영조 51년(1775) 연산군의 외손에게 연산군 묘소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관아에서 제수(祭需)를 주고 군사를 배치하여 묘를 지키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광무 7년(1903)에 제작된 (묘각중건기,墓閣重建記)를 기록한 현판에는 이안눌(李安訥)의 자손이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 모셨으며,
홍태윤이 지나가다가 묘소가 허물어 진 것을 보고 안타까워 하며 고종에게 건의하여 묘의 주변을 정비하고 재실을 보수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연산군묘 재실이다. 마당의 왼편부터, 대문과 창고, 그리고 부엌과 안방에 이어, 대청마루와 건넌방이 있다.
대문과 창고가 있는 문간채 건물.
부엌과 안방, 그리고 대청마루와 건넌방이 있는 안채 건물. 재실은 이렇게 두 동의 건물뿐이다.
치제현판(致祭懸板)과 (묘각중건기,墓閣重建記)가 걸려 있는 대청.
연산군 치제 현판 (燕山君 致祭 懸板).
영조50~51(1774~1775) 연산군의 묘소를 외손으로 하여금 설, 단오, 추석, 동지(四名日)와 돌아가신 날(忌祭)에 제사를 받들게 하며
관에서 제수를 공급하고 묘를 지키는 군사(守墓軍)10명을 배치하여 묘역을 살핌에 있어서도 소홀함이 없이 하고, 매년 늦봄(季春:3월)에 날짜를
정하여 어김없이 시행하라는 영조께서 내린 전교가 적혀 있다. 발견된 진품은 현재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판에는 희릉(현 회묘,연산군의 생모), 광해군묘, 성릉(현 성묘,광해군의 생모)에 내린 전교와 함께 적혀 있음.
연산군 묘각 중건기 현판(燕山君 墓閣 重建記 懸板).
고종 40년(광무 7/1903년) 당시 양주 군수였던 홍태윤이 지나가다가 연산군묘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고종께 건의하여 황제의
칙명에 의해 묘역을 정비하고 묘사(墓舍)를 건립하여 지키는 자로 하여금 영구히 준행하게 하였다는 홍태윤의 공을 치하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발견된 진품은 현재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홍태윤 : 당시 품계는 정2품으로 고종 황제 때 두 번씩이나 팔괘장 훈장을 받음.
부엌의 환기창문
대청으로 올라가는 댓돌.
문간채에서 본 재실 안채의 전경. 우측에 있는 계단이 숲길로 오르는 계단이다. 재실도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는다.
건넌방.
부엌과 안채의 후면.
대청마루 뒷문에서 본 모습. 따뜻해 보인다.
내림마루의 막새기와인 수막새 기와의 무늬가 특별하다..
눈, 코, 입이 있는 사람의 얼굴 모양이다.
이 수막새 기와에는 수염까지 표현되어 있다.
밖에서 본 재실의 전면 모습. 문이 잠겨 있어 이문으로는 출입할 수 없다.
좌측이 연산군묘역이고 우측이 원당샘공원이다.
연산군 묘역에 있는 싸리나무.
원당샘공원에 있는 서울시 기념물인 방학동 은행나무.
서울 방학동 은행나무 / 서울시 기념물 제33호
나무 높이는 25m, 둘레는 10.7m이다. 1968년 나무 형태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서울시 보호수 제1호로 지정하였다.
2013년에는 문화재적 가치 등급을 상향 조정하여 기존의 보호수 지정을 해지하고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당시 조사 결과 나무 나이는 약 550살로 추정되었다. 예로부터 마을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긴 나무로 여러 일화가 전하고 있다.
경복궁 중축 당시 징목 대상이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흥선대원군에게 간청하여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감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지금도 방학동 주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나무로 1990년 대 말 이후 매년 정월대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지 설명문 내용-
원당샘.
원당샘.
이곳은 600여년 전 파평윤씨 일가가 자연부락인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었으며 마을 이름을 본떠 "원당샘"으로 명명되어
수백년 동안 생활용수로 공급되었다고 합니다. -현지 안내문-
쌍문역사산책길.
쌍문역사산책길에는 다양한 문화재와 역사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10대 임금인 연산군묘, 세종대왕의 둘째 딸 정의공주묘, 사천목씨 재실, 수백년 동안 이용된 원당샘, 그리고 수령이 600년이나 된
서울시 지정보호수 1호 방학동은행나무 등 다양한 문화재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
원당샘공원
원당샘공원에는 한옥도서관도 있다.
원당샘공원의 정자.
연산군묘 건너편에 있는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이곳은 양효공 안맹담(1415~1462)과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1477)의 무덤으로, 서측이 안맹담, 동측이 정의공주 무덤이다.
이들은 1428년에 결혼해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안맹담(본관 죽산)은 초서를 잘 써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출중했다.
정의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책력과 산술을 잘 이해했다.
세종대왕은 특별히 정의공주를 아껴 저자도(옥수동 동쪽 한강에 있었던 섬)와 낙천정(광진구 자양동에 있던 정자)을 내려주기도했다.
안맹담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양효공(良孝公)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양(良)'은 온화하고 선량하다는 의미이며, '효(孝)'는 어질고 은혜롭게 어버이를 섬겼다는 의미이다.
불심이 깊었던 정의공주는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 <지장보살본원경,보물 제966호>이라는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무덤 앞에는 안맹담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 석등, 문관의 형상을 한 문인석, 묘 앞에 세우는 비석인 묘갈 등이 세워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를 만들어 세웠다.
1466년에 세워진 안맹담의 신도비는 조선 초기의 신도비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신도비의 윗부분에는 양효안공묘비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몸돌에는 안맹담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부부와 사돈이기도 한 하동부원군 정인지(1396~1478)가 지었으며, 글씨는 부부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145~1478)가 썼다.
효공 안맹담의 신도비.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바로 뒤에 있는 충정공 목서흠 묘역의 입구.
신도비.
사천목씨 재실.
사천목씨 재실 정문. 잠겨 있다.
김수영문학관 입구에 걸린 현수막.
김수영문학관.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 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 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 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전시실.
시인의 서재.
남들이 귀중히 여기는, 그래서 갖춰놓기를 원하는 것들을 그는 모두 못마땅해 했다. 김수영 씨는 부인이 사들이는 책장, 책상, 식탁, 의자 등을
지겨워했다. 술이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에는 그렇지도 않았지만 취하는 때면 밖에서 돌을 메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중략>
커다란 테이블은 김수영씨에게 시와 에세이와 번역을 자리를 바꿔가면서 쓸 수 있게 했다.
시를 쓸 때는 동편으로 향해 앉았고 에세이를 쓸 땐 북쪽으로, 번역인 경우에는 남으로 향해 앉았다고 한다. -소설가 최정희-
한 편의 시나 산문이 완성되면 김수영 시인은 항상 아내 김현경을 찾았다. 그러면 집안 살림을 하든 다른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간에 하던 일손을
멈추고 달려가야만 했다고 한다.
서재에 들어서면 김수영 시인은 빽빽하게 쓴 시의 초고를 건넸고 , 그 시를 정리해서 원고지에 깨끗하게 정서하는 것이 김현경의 몫이었다고 한다.
김수영 시인은 시를 쓰는 작업을 마치면 '산고(産苦)'를 겪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벽에 걸린 "상주사심(常住死心)"이라는 글은 김수영 시인의 생전 좌우명이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한다는 의미이다.
창밖의 풍경.
박일영 씨가 김수영 시인에게 준 초상과 메모.
도서관
김수영문학관 옥상정원에서 본 북한산.
회산군 이염의 묘로가는 길에 본 북한산.
자은정사와 북한산.
회산군 묘역.
초당초등학교 앞에 있다.
회산군(1482~1512) 이염은 연산군의 이복 동생으로 성종과 숙의 홍씨 사이에서 5남으로 태어났다.
회산군의 묘는 단출하다. 묘에는 묘갈과 상석과 향로석과 동자석 한 쌍과 문인석 한 쌍 뿐이다.
묘갈.
회산군 모역 바로 아래에는 초당초등학교가 있다. 회산군묘를 찾아보려면 초당초등학교를 찾으면 된다.
신도비와 사당.
사당.
첫댓글 좋은정보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요
회산군 이염(1482~1512, 성종의 서자)묘는 처음 봅니다. 감사합니다.
서울둘레길 두 차례에 걸쳐 걸을 때
걸었던 코스입니다
몇 달전 김수영 시집을 구입하고나니
곳간이 찬거처럼 부자가 된 느낌입니다.
정성으로 올리신 역사 탐방기 잘 배우고
즐감합니다
은행나무 앞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