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감, 타협, 스스로를 파괴하고 싶은 충동 그리고 본능적 의지 같은 것들만 사람들을 사로잡고, 이런 무관심과 노예들이나 보일 만한 절망감들이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것을 누군들 믿을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 생경한 리투아니아 작가 알비다스 슐레피카스의 2011년 작품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양철북) 49쪽을 넘기다 무릎을 탁 쳤다. 기자 말년을 이런 황망한 일들을 기록하며 보내고 싶지 않다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매일 심연 속으로 끌려가듯 사망자와 피란민 숫자, 풀려난 인질 숫자를 헤아리며 보내고 있다.
‘무력감’은 걷잡을 수 없다. 70년 전 홀로코스트를 당한 이들의 후손이 저지르는 이 끔찍한 만행을 모두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다. 개중에 이스라엘과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극우 장관들을 비판하며 한도를 넘지 말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따지면 남 일 대하듯 위선을 떨고 있을 뿐이다.
‘타협’은 사람들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에 손쉽게 손을 내미는 심리 요법이다. 궁극적으로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잖아, 어찌 됐든 둘 중 어느 쪽이 문제를 깡그리 해결했으면 좋겠네, 그편이 낫겠네, 라고 책임을 떠넘긴다. 이것이 근본 처방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를 파괴하고 싶은 충동’, 어차피 인류는 절멸의 길을 가고 있다. 2만두 가까운 핵폭탄 탄두를 머리 위에 이고 있으며, 1년 9개월을 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강 건너 불구경이 됐고, 이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전쟁은 50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그래도 지구는 돌아가네, 뭐 우리는 아무 일 없잖아, 한다. 유엔이나 미국, 국제사회는 이미 지도력 따위는 잃어버린 지 오래고, 사람들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하여 인류는 스스로를 망치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해서 사람들은 ‘무관심과 노예들이나 보일 만한 절망‘을 묵묵히 견뎌낼 따름이다. 앞의 작품에서 사람들은 ‘검붉게 휘몰아치는 강물 속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그냥 자신만 생각하면서’ 그랬다.
슐레피카스의 서사는 독특하기 그지 없다. 영화 같고, 시와 소설의 중간쯤이다. 작품 배경은 2차 세계대전 말기 동프로이센, 지금은 사라진 나라다. 발트 3국을 건너 뛰어 러시아에 복속된 칼리닌그라드다. 먹을 것을 찾아 리투아니아 국경을 넘나드는 ‘늑대의 아이들’(wolfskinder)을 다룬다. 칸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가 중심 도시였는데 가자지구를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다. 공교롭게도 이번 전쟁에 이스라엘군이 썼던 것으로 알려진 백린탄이 처음 퍼부어진 곳이 쾨니히스베르크였다.
나흘의 휴전이 끝나가는 가자지구 전쟁은 지난 23일 기준 1만 4854명이 희생됐는데 여성이 4000여명, 아동이 6150명이다. 총을 들지 않은 이들에게 21세기 들어 가장 잔혹한 형벌이 내려졌다. 고성능 위성 유도 폭탄을 밀집도가 높은 지역에 거리낌 없이 퍼부었다. 이스라엘 정부의 의도는 가자를,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임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암울하고 위태로운 책의 결말은, 당연하게도 친절하지 않다. 이 전쟁의 끝 역시 지금보다 훨씬 지독할지 모르겠다. 그 상황에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할 일이 있기는 한 건가 자꾸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번역자 서진석 말마따나 “전쟁의 비극과 인간의 과오와 역사의 잔혹함과 인권유린과 인류의 무관심을 다양한 시어를 통해 곱씹는 수”밖에 없다. 늑대가 돌아다니는데도….
지난해 11월 28일 마지막 기명 칼럼 내용이다. 책의 절반을 미처 읽지 못한 상태에서 썼다. 백두대간 6회차 덕산재~우두령 구간을 소화하기 위해 내려가는 차편과 숙소에서, 그리고 서울 돌아와 오늘 새벽에야 책장을 덮었다.
소설 원제는 'Mano vardas-Maryte', 리투아니아어로 '내 이름은, 마리테'인데 조금 더 소설의 음울한 분위기를 살리는 쪽을 선택했다. 책의 100~101쪽에 고모가 여조카 둘과 남자 조카에게 교육을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누구에게 심문을 받기라도 하면 리투아니아의 흔한 여자아이 이름을 대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해서 독일 소녀 레나테는 리투아니아어로 생일 날짜를 대고 마리테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연습을 하며 나중에 친소련 민병대원들에게 취조당할 때도 이렇게 한다. 그러면서도 고모는 "독일 사람이라고 어디 가서 자랑하면 안돼, 하지만 기억하고 있어야 해"라고 강조한다.
253쪽 '이야기를 마치며' 작가는 1996년쯤 영화감독 요나스 마르친케비츄스가 늑대의 아이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보자고 제안했으며, 2009년 프랑크푸르트 젊은이들과 책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나누다 '타잔 같은 얘기냐'는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듣고 잊힌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고 털어놓는다.
다큐 제작 얘기가 시들해지던 어느날, 영화제작자이며 친구인 롤란다스 스카이스기리스가 늑대의 아이들 얘기를 아느냐고 물어와 깜짝 놀랐다. 사업가 친구 리차르다스의 어머니가 늑대의 아이로 자랐는데, 그녀 이름이 레나테 마르케비츠 사비스키녜라고 해 아들이 들려준 어머니 사연을 이 소설의 기둥으로 삼았다고 덧붙였다.
그 뒤 영화를 제작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많은 이들의 제보가 쏟아졌는데 그 중 리차드의 부인 이름과 글자 하나만 다를 뿐 아주 비슷했고, 이름이 역시 레나테였던 여성을 만나 그녀가 겪은 일과 자기를 보듬어줬던 사람들 얘기를 들려줬다고 했다. 그녀가 느꼈던 공포와날카로운 감정들을 생생하게 느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고 들려준다.
슐레피카스는 두 번째 여인 레나테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모든 것은 이미 죽어버렸다"며 전화를 끊더라고 했다. 소나무 숲과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독일 아이, 리투아니아 아이, 폴란드 아이는 무수히 많았으며 살아남기 위해 이름을 바꾼 아이들은 무수하며그 진위를 따지는 일은 부질 없다는 체념인 셈이다.
레나테 가족이 행복했던 시간을 표현하는 것이 어머니가 연주하는 피아노 연주로 표현된다. 모차르트와 라흐마니노프, 베토벤의 '월광'. 그리고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느 시리즈다. 특히 처음 이 땅에 왔던 러시아군 장교 안드레이가 어머니의 그노시엔느 3번 연주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으며, 레나테는 어머니 연주에 맞춰 춤을 췄다는 대목이 나온다.
나중에 레나테는 노인이 짠 바구니를 파는 앞에서 호객 행위로 춤을 춘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전쟁이 끝났다. 레나테는 누군가 그노시엔느 5번을 연주하는 것에 이끌려 꼬마 발레리나들이 춤을 추는 장면을 지켜보다 쓰러지곤 만다. 발레 선생님이 죽었느냐고 묻는 꼬마 발레리나들의 질문에 아니라고 답하며 레나테를 안고 음악 소리가 들리는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노시엔느는 에릭 사티(1866~1925) 의 초기 피아노 작품으로, 1893년 '세 개의 그노시엔느(Trois Gnossiennes)' 라는 제목으로 세 곡이 먼저 출판됐고, 사후에 발견된 작품들은 4, 5, 6번으로 1968년에 출판됐다. '짐노페디'와 유사하게 왼손이 연주하는 화음 위로 부유하는 오른손의 선율로 구성된다.
그노시엔느 1번을 작곡할 즈음 사티가 영지(靈知, gnosis)주의에 경도돼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크레타 섬의 문명의 중심지였던 크노소스(knossos)와의 관련성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영지주의란 신의 피조물인 영혼이 악마의 창조물인 물질(육체)에 갇혀 고통받고 있으므로, 구원에 대한 영적인 앎을 통해 탈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상현실 감옥우주 음모론 같지만 플라톤의 '파이돈'에도 나온다.
이 곡의 악보에 표기된 지시어(멀리서부터, 자신의 내면에게 집요하게 질문하며, 통찰력으로 스스로를 무장하여 등)도 상당히 재미있고, 괴상한데 슐레피카스가 늑대의 아이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음악을 장치로 활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명 칼럼을 작성한 지 반년이 다 돼가는데 우크라이나나 가자 지구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전쟁에 무감각해지고 아이들의 불행과 비극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그저 전쟁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소망에 머물러 있다. 슐레피카스의 호소는 제대로 먹히지 않을 것 같아 오늘도 숱한 레나테가 양산되고 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나 러시아인들은 여전히 적들을 나치의 후예들이라고 공격하며 조롱하는데 동프로이센 아이들도 비슷한 꼴을 당한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자리잡았던 동프로이센은 사라지고 절반은 폴란드에, 절반은 칼리닌그라드로 소련 땅이 돼 지금도 러시아령이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본 우리로선 전쟁의 참화, 숱한 전쟁고아들, 북한의 꽃제비 등 공감할 대목이 적지 않다. 시 같고 영화 같은 이 소설의 일독을 권한다. 그노시엔느 시리즈를 들으며, 3번과 5번의 차이를 음미하면서,
Erik Satie - Gnossiennes 1-6 (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