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린시절의 기억은 아련히 잊을 수 없는 낡은 흑백영화의 씨리즈물처럼 가슴깊은 구석 한 켠에 밀봉상태로 자리 잡아 타임머신타고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듯 어느날 문뜩문뜩 내자신에게 추억여행의 티켓을 선물한다.
삼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난 필자는 오십년대의 기억은 별로없다. 단지 58년에 법원옆 영화유치원 다녔던 정도의 기억 뿐이고 생일이 늦어 일년을 쉬고 60년에서야 선화국교에 입학했다. 미군부대의 CIC라고 하는 기관에서 군속으로 일하셨던 일본에서 태어나 어눌한 한국어를 구사하셨던 부친의 직업은 당시에는 꽤 먹고 살만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린시절이었지만 미군PX를 통해 엄청나게 많은 미제생활용품이 부대밖 양키시장으로 흘러간것을 알고 있었고 그 운반책에는 부끄럽지만 부친이 직접 몰고 다녔던 군용찝차도 한 몫을 하였다. 그당시 왠만한 중류층들은 국산품보다는 미제를 더 선호하여 양키시장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구입해 사용했고, 아직도 시장의 한 켠에서 근근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육십년초 입학 할 당시 가죽냄새가 풀풀나는 네모난 모양의 책가방을 메고 다녔다. 오후 한시쯤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엄마들이 거의 매일 십여명씩 밖에서 기다렸다.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근처 빵집이나 만두집을 다녔다. 와이로,치마바람이란 단어를 이때 알게 되였다.. 그시절에는 유난히 제과점이 많았고 남의 집을 방문할 시 "나마가시(생과자)"라고 하는 것을 많이 사들고 방문했고 아이들 있는 집에는 카스테라나 소보로빵등이 인기 품목이었다. 역앞의 오복당, 태극당 도청앞의 승리당등이 유명했다.
"익을수록 공손한 벼이삭 처럼 우리들은 튼튼히 자라납니다"로 시작하는 교가를 아직도 잊지않고 있음은 운동경기 응원등을 다니며 꽤나 많이 부른 탓이다. "꽃과 같이 고웁게 나비같이 춤추며 아름답게 크는 우리~무럭무럭 자라서 이 동산을 꾸미면 웃음의꽃 피어나리~" 그당시 저녁시간만 되면 낭낭한 KBS여성어나운서의 목소리를 통해 '어린이시간입니다'라는 코멘트가 이 음악과 함께 전국으로 퍼지며 우리를 라디오 앞으로 끌어 모았다. 작은 라디오 앞에 온 가족이 모여 64동경올림픽 유도나 레슬링 메달 중계나,63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박신자중심의 여자농구경기등에 마음을 졸였고,오발탄'' 김삿갓북한방랑기' '재치문답' '전설의 고향'등의 프로그램에 즐거워했고, 라디오드라마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그시절이 그립다.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으로 시작하며 눈물섞인 음성으로 중계방송을 하던 이광재 어나운서의 감동적 멘트는 지금도 귀에 선하다. TV는 65년이 되어야 전파사 앞에서 처음 접한다. 서울은 65년부터 국내방송이 시작된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전지역이 그 다음해에야 AFKN이 아닌 국내방송을 볼 수 있었다.
TV시대는 66년 이후 김일의 프로레스링 중계가 폭발적인 인기의 기폭제가 되었다.
60년 학교입학 첫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생선생님이 오셨다. 대전사범학교에서 오셨단다. 모두 까까머리와 단발머리의 고등학생선생님이었다. 사범학교는 이 때를 끝으로 모두 이년제 교육대학으로 개편되었다. 62년에 담임선생이 주신 '새벗'이란 어린이 잡지를 접하면서 열렬한 애독자가 된다. 훗날 '새소년'이나'어깨동무'가 나올 때 까지 유일한 어린이잡지였다. 63년에는 '소년한국일보'라는 어린이신문을 최초로 접했고 '코주부의 세계일주'라는 연재만화와'조흔파'선생의 연재소설을 기억한다. 리라국민학교의 노랑교복, 65년도 경기중학교입시에서 '무우즙파동'사건도 신문을 통해 선명히 각인되었다. 어린이만화도 많았다. 시장에서 팔던 미제구호물품 오버코트 주머니에 강냉이틔긴것 땅콩등을 주머니에 가득 넣고 즐겁게 만화가게에 가서 본 "산호 박기당 박기정 김경언"의 작품을 아직도 기억한다. 특히 김경언화백은 진돗개를 의인화하여 진도 진남등으로 명명하여 순애보적인 스토리를 전개하여 어린 마음에도 눈물을 많이 흘렸다.
60년대의 극장가도 절대 빠트릴 수 없다. 학교에서 단체관람이나 영화팬이었던 부모님을 따라 다니며 본 영화가 넘 많았다. 아프리카정글씨리즈 타잔씨리즈 서부극 벤허 십계 율리씨즈 엘시드 소돔과고모라 로마제국의 멸망. 첩보영화 OSS117.태현실의 독립군의 항일투쟁영화, 황해 장동휘의 전쟁영화,신영균의 연산군, 빨간마후라, 박노식과 홍콩의 정페이페이 주연의 손오공, 특히 "달기"라는 영화는 신영균과 당대의 홍콩최고 미녀인 여배우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정확히는 몰라도 이 둘은 촬영 중 사랑에 빠진 후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홍콩여배우의 자살로 막을 내렸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었다
중학교의 치열한 입시를 뚫기 위해 열살정도의 그 어린나이에도 오직 일류중학을 염원하는 부모의 욕심때문에 과외전선으로 내몰렸다. 방과 후에 담임선생댁에서 여럿이 그룹과외를 했으며, 전직교사들이 차린 사설교습소도 많았다. 겨울에는 과외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귀가길이 너무 어두워 모두들 손전등을 하나 씩 들고 다녔다. 음악시간에도 입시를 대비하느라 노랫말보다는 계명 외우기에 치중했다. 담임이 풍금을 연주하면 우리는 열심히 계명을 불러대며 기억했다. 그래서 지금도 '옹달샘'이라는 동요를 접하면 '깊은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가 연상되는게 아니라 '미솔도미솔 파라라 솔시레파미레도'가 먼저 떠오르고, 애국가도 '솔도시라 도솔미솔 도레미파미레~'가 더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학교에서는 원조물품으로 가끔씩 놔누어 주는 강냉이빵을 교실까지 배달해 주던 대전우유와 함께 먹던 맛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맛이 되었다. 그외 뽀떼또라고 불리며 즉석에서 틔긴고구마에 조청과 깨를 버무린것, 단팥죽,오뎅,풀빵등이 가장 흔하게 접하던 먹거리 였다. 그당시에는 화교들이 많아 그들이 개업한 한자상호에 빨간 리본을 매달은 간판의 중국집과 만두집도 아주 많았다. 매년 추석이 다가오면 중국집 주인들이 단골고객들에게 월병을 돌렸다. 초록과 빨간색의 앙금이 들어간 월병의 맛을 이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생맥주마시는 모습을 처음본것은 동네 일식집 혜전식당에서였다, 미락이란 전문일식집에서 처음으로 돈까스를 맛본것도 이 때 였다. 동네주변에는 빵공장 과자공장도 있어서 가끔씩 싸
게 구입하여 포식을 하기도 했다. 가끔씩 집안에서 불고기 파티도 했다. 바퀴달린 연탄화덕을 부억에서 가져다가 불고기판을 얹어 구어 먹었다. 주전자를 들고 동동주 심부름도 자주 갔다. 근처에 통일옥이라는 술집이 있었는데 항시 사람이 많았다. 술사가지고 오면서 찔끔씩 마시는 달작지근한 술맛에 처음 매료(?)된 순간이었다. 동양극장 부근의 돼지수육이 유명했던 대선칼국수,인동시장의 스끼야기집, 중앙시장 먹자골목의 순대국밥 머리고기,한밭식당의 설렁탕등이 이 시기의 맛집이었던것 같으며 과거에 용산등지에 밀집되었던 부대스테이크집이나 지금의 부대찌개도 이 시기에 태동되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학교대항 운동경기도 많았지만 단연 압권은 야구경기였다. 우리학교 운동경기가 있는 날은 모두 형형색색 책받침을 들고 전교생이 큰북으로 무장한 교악대를 앞세우고 공설운동장으로 갔다. 대전의 국교야구는 이미 전국의 최강이 되어 있었다. 신흥국교시대가 저물자 김은종투수와 양찬희포수의 문창국교가 득세하더니 전국대회 결승전에서 인천서림에게 아깝게 패하여 준우승에 그쳤다. 윤몽롱과 정순명투수의 서대전국교 또한· 또 다른 강팀이었다. 이때의 겨울스포츠인 스케이팅의 추억도 새롭다. 펭귄표와 전승현 두 개의 국산브렌드가 각축을 벌였고, 대전의 목척교와 중교밑의 대전천에 뚝을 만들어 물을 가두어 스케이트장으로 사용했고 도빙상경기대회도 이 곳에서 열렸다. 추운고장인 평안도출신 월남민들이 스케이트날을 갈아주는 생업에 많이 종사했으며 특히 평양 출신의 스켸이팅 실력이 발꾼인 대동강이란 이름의 아저씨가 날 잘 갈아주는것으로 유명했다.
담방구,도둑놈잡기,자치기,돼지xx,팔자가이상,비석치기,쥐불놀이등의 놀이도 즐거운 동년시절의 추억이다. 실팽이돌리기도 유행하여 누가 오래 버티나의 경기도 있었다. 도청옆 경찰학교의 유도경기대회도 큰 볼거리였고 이곳의 공터에서 축구와 야구글로브로 공받기하던 기억도 이 시절의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p><img src="http://cfile261.uf.daum.net/image/2719343F57419C1326ECF5" class="txc-image"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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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년의 기록... 바로 맞습니다.^^ 올리신 모든 것을 기억합니다. 추억의 책가방에 소중히 담아 둔 것들을 이리도 펼쳐 주시니 오랫만에 옛 생각에 젖어 즐거운 '멍 때리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그리고 쪽지 보냅니다...
저에게도 낯익은 기록들이 많군요
저는 그냥 다방구 다방구 하며 놀았는데 담방구인가 봅니다
겨울이면 쥐불놀이도 많이 하고 놀은 기억인데
그넘의 깡통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세째 동생녀석 벼락 맞아서 그 흉터가 아직도 있습니다...ㅋ
옛날 생각 많이 나네요...ㅎ
ㅎㅎ쥐불놀이를 빠트렸네요, 깡통에 구멍을 송송 뚫어 전깃줄로 묶어 나무를 태우며 빙빙 돌렸지요, 그시절에는 나무로 된 담장의 집도 적지 않아 연료(?)가 떨어지면 주인 몰래 담벼락의 나무를 뜯다가 들켜 혼나기도 하고~동심의 시절이 마냥 그립군요~보잘것 없는 글, 읽어주시고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아주 가까운곳에서 사셨군요,
하얀여우님의 글에 제 모교도,
어릴때는 손야구도 많이하고 놀았고요,
제 모교에는 연못이 둘씩이나 있어서요,
몰래 낚시하는 재미도 쏠쏠,
제 모교에는 아버지의 직업이 군인이거나,
군속이 많았어요.
제 형님께서도 CIC에서 일하시면서 야간학교를 다니셨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네요.
분도님은 서대전국교 출신이군요, 저보다 몇년 청년(?)이신것 같으신데, 서대전국교 출신으로 과거 고교야구전성기시 중앙고의 윤몽룡투수나 충암고의 정순명투수를 기억하실지요? 서대전 성보극장자리는 모두 재개발되어 고급아파트 단지로 변신했네요, 지금의 서대전공원과 문화마을 아파트자리는 서대전미군부대로 불리었고 미군들의 야구하는 모습도 종종 구경하곤 했지요,마음의 기억세포에 남아만 있는 어린시절의 편린들~그래서 잊히지 않나 봅니다. 건강하세요^^
@하얀여우 성보극장 바로 아래,
아이스케키공장이 있었지요,
지금의 비비빅,
1원에 2개,
그 아래 첫번째 골목길로 들어서서 내려오다보면 미나리깡이 있었고요,
거기서 충열탑으로 올라가는 길 중간쯤에,
국수공장이 있었지요,
미나리깡앞에는 두부공장과 콩나물공장,
지금의 용두2동은 전부 논이었고요.
지금도 대전에 사시나요?
특별한 일없으면 내년 3월중순~4월 중순사이
방문예정,
그때 만나서 옛날 얘기하지요.
@분도 환영합니다, 전 차이나에 거주하지만 살던 서울집은 진작에 월세주고 차이나해변집 구입해서 살면서 대전에 사시는 노모의 건강때문에 왔다갔다 하고 있네요~
저보다 약간은 빠른 시기에 태어나셨나 봅니다..그리고 기억력도 대단히 출중하십니다!! 제가 이미 잊고 있었던 모든 지난 추억들을 새록새록 기억이 나도록 만들어 주셨네요..덕분에, 읽어가면서 그때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던, 아주 좋은 시간이 되었답니다.. 감사드려요..^^
감사드립니다, 전 이 글을 쓰면서도 사실 모든게 정확하다는 자신은 없었네요~그래서 은근히 그 누군가가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라고 태클을 걸어 주길 바랬는데~ 줗은 시간 되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쪽지 보냅니다.
정말 어릴적 기억이 글중에서 많이 납니다.
동년배를 산 사람들은 어릴때 추억이 주마등 처럼 지나가는 글을 올리셨습니다 감사 합니다
잘보았습니다.
60년대에 저는 배고프고 가난한 기억이 더 많군요
그래서 그런지 다시 그시절로 돌아가고 싶진 않더군요
올려주신 '동년의 기록들'속에서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초등시절의 추억거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네요.
한가지 저의 초등시절 '강냉이빵'은 가정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급식품이였지요.
각반 임원들이 양동이를 들고 교무실에 내려가서 타오곤 했는데,
가정환경이 어려운 친구들 몫으로 타오는 노란 강냉이빵이
그 당시에는 제 코끝을 간질거려서 속으로 얼마나 먹고 싶던지요?ㅎㅎㅎ
ㅎ정답을 말씀해 주셨네요, 옥수수빵 뿐만 아니라 우유가루를 타서 끓인 물을 교실의 큰 주전자가지고 가서 받아 온 기억도 있네요, 모든게 가난한 국가를 위한 해외원조식량이었겠죠, 지금의 아프리카처럼~우린 모두 공감의 시공이 같으니 긴말 필요 없겠죠~저역시 소수의 어려운 어린이에게 제공되던 옥수수죽이 넘 먹고 싶어 모친을 통해 담임선생님께 부탁하여 한 그릇 참 맛있게 먹은 소중한 기억이 있네요^^멋진 코멘트에 감사드립니다~
제때는 밀가루빵,
제가 빵당번였어요,
대나무 바구니에 빵을 타오는데요,
홀수날은 홀수번호,
짝수날은 짝수번호가 타갔지요,
빵당번에게 주는 특혜,
매일 제 몫으로 3개를 더 받어다가,
3명의 급우들에게 제 몫으로 받은빵을 줬네요,
저희는 서울에서 한시간 떨어진 당시는 "촌(?)"이라서 그랬는 지.. 반 인원 모두 다 나눠줬더랬습니다.. 저학년 시절엔 옥수수빵.. 몇년후에는 밀가루빵으로 바뀌었는데, 별 맛이 없었지요..그래서인 지.. 저는 지금도 옥수수빵을 굽는 빵집은 그냥 지나치지를 못한답니다..어린시절 그 추억의빵이 기억나서 말이지요.. 그땐 왜 그렇게도 맛이 있었는 지..차마 혼자 먹지 못하고 동생들 생각에 집으로 싸가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말린 우유도 기억나구요..^^
@tndud 저역시 같은 생각으로 살고 있네요^^ 옥수수기루가 들어간 빵은 많이 접해 받지만 그시절 아주 가끔씩 반개씩 놔누어준 그 빵맛 만한것 아직도 찾지 못혔네요^^ 오늘도 잠시 과거로의 타임머신을 타게되어 즐겁습니다~
많은 부분에 공감하지만, 저는 괴외인지 뭔지는 모르고 살았네요.
타임 머씬을 탄 기분입니다.
치매는 절대 안걸리실듯 하군요
어찌 ...???
허나 근래것은 기억 몾하고 예전것만 기억하는 치매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ㅎㅎ(농담 입니다)
뭐 이리보아도 저리보아도 너무 정정한 기억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전 몇아래인데도 가물거려요
성심당은 안가셨나봐요..^^
아님 당시 성심당은 별로였었나요.
60년전통 튀김소보로..
이거 먹으려면 지금은 줄서서 사먹어야 하는데요..^^
성심당은 고교 시절의 아지트(?)였네요, 특별한 곳은 아니 었구요, 팔십년대 부터는 부추빵 참치빵등의 타업소에서 없는게 나와 가끔 귀향 할 때 마다 사먹은 기억이 납니다. 튀김소보로라는 것이 언제부터 뜨기 시작했는지 아마도 팔십년대 이후가 아닐까 생각 되네요~
정말 대단한 기억력이십니다.
저도 오래전거는 잘 기억하는 편인데도 이정도는 아닌데.
저보다는 5-6년 윗 분이신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도 가죽 책가방을 메셨으면 부잣집이었나 봅니다.
우리 시골에서는 다 책보라는 거에 둘둘 말아 어깨에 메고 다녔는데.
이시절 한국의 10년은 무척 많이 달라요
초등학교 가셧을때 엄마 뱃속에 있었나?
역시 70년대후 기억밖에 거의없네요
사각형 란도셀은 초등가면서 메고 다녔던 기억이 나요.
과외는 필수였던것 같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