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극 일기 Antarctic Journal (2005) : 임필성
= 백주의 유령들, 밤을 두려워하다.
본편에 대한 기존의 악평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도대체 그 많은 예산은 어디로 갔나? 위대한 작가주의 실패작이라고, 헛소리 마"
이에 대한 선한 대답은 또한 이렇게 갈무리할 수 있다.
"한국영화에서 쉬이 볼 수 없었던 설원 공포물과 세세히 들을만한 음향 등은 값비싼 소득"
나로서도 기존의 평가에 동의하기에 그다지 길게 느릴 말이 부족하다.
본편의 장르성은 1년 먼저 만들어진 <알 포인트>와 견주어볼만하다.
막대한 예산과 긴 준비기간이라는 점을 가만한다면 단순한 개봉일로 선후를 따지기는 어렵다.
<알 포인트>가 역사의 알레고리를 비스듬하게나마 차용했다면
본편 <남극일기>는 거추장스러운 듯 거의 모든 외피를 벗어던진다.
등반대장 송강호가 아들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는 측면과
그들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땅에 가야한다는 명제에 사로잡힐 때
베르너 헤어조그의 <아귀레, 신의 분노>와 <위대한 휫츠카랄도> 걸작들과 음영이 겹쳐진다.
즉, 이미 전대에 선보인 바 있는 주제의식 너머의 어떤 것을 고찰하고 보여주는가에
본편의 작품적 생명력이 달려있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영화는 착한 과실을 맺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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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에 이르려는 인간의 욕망은 내상적으로 결핍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이 경우 주인공인 등반대장의 광기가 출발부터 번득이지 않음으로서
나머지 대원들의 심리가 부차적으로 처리될 때
영화가 가져야할 추진력이 장르화의 한계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는 태생적인 결함을 지닐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의 주된 흐름이 대장의 트라우마와 막내 유지태의 내러티브로만 흘러가거나
다른 대원들 사이의 갈등은 그저 환경의 조임으로부터 오는 심리적 자극처럼 다루어지고
부대장의 사고 환영과 부대원들의 유령들이 설원을 이동하면서 섬뜻하게 등장하면
영화는 그저 극한 지대의 호러물이라는 장르의 규칙 바깥으로 나가서
그들이 왜 그 곳을 가야하는지에 대해서 어색한 결말부 대장 송강호의 입을 통해 해설되듯 청취되어지는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아무도 없었던 곳'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선취하지 못한다.
아들을 잃은 상처가 자신의 광기에서 비롯되었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전인미답의 땅을 향해가야할 논리적인 의미가 상통하지 않을 뿐더러
여정의 초반부터 동행하는 영국 원정대의 일지가 예언자적 위치로서 장르적인 흡입력을 위해 동원되었다고해도
그들이 왜 거기에 왔었는지는 차치하고 왜 동일한 여정이 반복되어야하는지 미흡하게 다루어진다.
거의 100년의 주기를 두고 반복된 여정에서 영국 탐험대는 한국 탐험대의 선험적인 위치에 서야했는가를 물을 때
돌아오는 거의 유일한 해답은 장르적인 공포 조성을 위한 장치라는 것 외에는 찾을 수 없다.
이같은 서사적 한계를 제외하고 본편을 작가적 위치로 격상시킬만한
값진 미장센이나 은유적인 대사, 인물의 형성 등과 같은 영화 문법의 능숙한 활용이 눈에 띄지 않는다.
설원 아래에서 조그맣게 뚫린 구멍에서 아래로부터 위로 올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그것이 유령의 것이든 자연의 것이든간에 그다지 영화의 장황한 결말부 설명에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정통 장르물로서 승부했더라면 관객의 긴장감을 한층더 숨가쁘게 조여올 수도 있었을텐데,
영화는 하얀 대지와 악천후만을 가지고 제대로 규정되지도 못하는 광기의 끝이 어디인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구출되지도 못한 채 무책임하게 흰구름 위로 솟아버린 채 종결된다.
<남극일기>는 한 남자의 트라우마 발병기를 중계함에 있어
설원의 매서움에 의존한 채 무엇을 찾아야했었는지를 상실한 부실한 광기의 고백극이다.
2. 페어 러브 Fair Love (2009) : 신연식
= 전원과 동작을 같이 누르고 다시 시작해봐
이 정도라면, 이 감독 신연식을 주목해도 좋지 않을까.
별다를 것 없는 중년남의 로맨스 장르를 때로는 리얼리즘으로 감싸안을 줄 알고
윤기어린 대사들로 인물들을 위로하거나 장르적인 관습 과잉을 피해 직선의 솔직함으로 이동하는 것도 여유롭다.
과도하겠지만, 본편을 영화만들기에 대한 영화
즉 감독의 연출에 대한 자기 고백으로 본다고 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첫사랑의 열병에 당혹하거나 갈등에 스스로를 담그고 괴로워하는 것처럼
자신 또한 영화 만들기에 나설 때 그같은 굴레를 벗어던졌다는 것을 넌지시 말한다.
안성기-형만이라는 50대 사내가 친구의 유언에 따라(?)
그의 딸인 이하나-남은을 매일 만나야하는 설정에서 비롯된 첫사랑의 시간은
뚜렷한 작위성을 은근슬쩍 피해가면서 두 사람 간의 인연을 빚어내는 데 즐겁게 효과적이다.
영화 속에서 가장 빛나는 대사를 찾는다면
안성기가 이하나의 집 세탁기를 고치고 난 이후
"전원과 동작을 동시에 눌러야한다, 끌 때도 마찬가지다"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적어도 감독이 생활적인 대사 안에서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은유할 수 있을 정도의 재기를 갖추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안성기의 직업이 고급 카메라 수리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구름 사진을 곧잘 찍고, 아마추어 작가정도는 비웃을 정도의 사진 촬영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자신의 인생을 좁은 수리방 안에 제한하고도 그것을 인생으로 받아들인다.
이같은 맥락에서 본편이 50대 중년남의 성장 동화라는 것에는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여타의 성장영화라면 당연히 성급하게 도달하려했을 결과에의 환희를
본편은 로맨스의 열병과 갈등이라는 일반적인 공식에 담았음에도
밀당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쑥쓰러울 정도로 뻔뻔스럽고 솔직한 태도로 관객의 폐부를 찌른다.
본편에서 가장 통열한 시퀀스는
이하나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한 안성기가 사무실 식구들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미안하다 ..."라고 하면서 식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울먹이는 장면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멀게만 느끼던 이들로부터 위로를 받음으로서 생성됨을 영화는 체득하고 있다.
홀로된 성장이 아니라 혐오하는 타인을 명명함으로서 생성되는 서로된 성장의 순간이 주는 쾌감은
그것이 스스로를 성장이라 말하는 것보다 더욱 진하게 프레임 안에 메아리친다.
제목에서 우러나오는 공정한 사랑의 다의성이 주는 질문에 영화가 곳곳에서 대답하려할 때의 속도감은
서두르지도 않고 느릿하지도 않으면서, 관성화된 사회의 시선에 뻔뻔하거나 당차게 대면하지 않고서
우리가 사랑일까를 묻고 동시에 내가 성숙할 수 있을까를 붉은 낯으로 안성기가 연기할 때
사랑이 공정할 수 있는가 혹은 공정하게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둘러서 도달하고자하는 얼굴이 보인다.
흔들리면서도 크지 않으면서 은은한 소리의 방향을 만들어내는 방울 장식이 상징하듯이
영화는 스스로를 중년 로맨스물 안에 두면서도 굉음내지 않고 두런두런 성장을 꿈꾸고싶어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결말부 안성기가 입원한 병실에서의 몽환적인 해후는 그것이 꿈이든 아니든간에
자연과 소리의 편집 이미지의 단아함과 어울려 "다시 시작하고싶은" 간절함을
한쪽으로는 미소로 다른 한쪽에서는 반복되는 대사로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페어 러브>는 공정해야만한다는 사랑에 대한 윤리적 주문을 거부하고 사랑을 통한 성장을
영화를 통한 자기 성장과 은밀하게 등식화하면서 로맨스물의 솔직담백을 동시에 성취한 고해성사극이다.
3. 욕망 欲望 Desire(2002) : 김응수
= 뼈와 살이 불타지 못할 때까지
김응수의 데뷔를 지금 기억하는 것은 쓰라린 일이다.
생각해보면 기존의 서구 후일담 영화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은 어딘가에 모여들었고 과거를 회상하고 갈등하고 화해라고 할 것 없이 흩어진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시대의 불화이고, 작은 인간의 패배감이고, 당대에 대한 불통이다.
적어도 드니 아르깡의 후일담 3부작인
<미제국의 몰락> - <야만적 침략> - <무지의 시대>에서처럼 허무한 웃음으로 위장하지 않았고
로렌스 캐스단의 위선적으로 말랑말랑했던 <새로운 탄생>처럼 도망가면서 회피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허공에의 질주>나 <하프 넬슨>처럼 후예들의 갈등으로 넘어서지도 않았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분명 386세대들에 누군가는 바쳤어야할 지상만가임에는 분명했지만,
그것이 흑백필름 안에 담겨져 머나먼 모스크바의 설원 별장에서 도착했을 때
혁명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오밀조밀한 대안적 후일담을 기대하는 이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중 누군가는 후일담이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었다고 믿고싶었던 것이다.
8년이 지나, 김응수는 <욕망>을 들고 나왔다.
첫번째로 드는 생각, 그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길을 동일하게 걷는 것이 아닌가라는 기시감이 들었다.
젊은 천재라는 명성을 얻었던 <혁명 전야>-<거미의 계략>-<순응자>라는 혁명 3부작으로부터
전혀 연상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갑자기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가지고
도심의 외곽에서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울부짖을 때 그것을 무시하든 숭배하든간에
베르나르도 베르툴루치는 이미 도시는 "우리"가 아닌 "타인"으로 만연해있음을 진단하고자 했음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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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수의 길은 여전히 타협하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지만,
그의 두번째 연출작에 대해서 아쉽게도 실패작이라는 진단을 내릴 수 밖에 없음은
영화가 가지는 메마름의 주름들이 아무런 주체성도 없이 그저 던져졌다는 느낌으로 가득할 때
이른바 주제를 위한 동원, 이름도 없이 그저 정사만을 반복하는 서사의 반복은
기시감을 넘어서서 새로운 창작에 대한 욕망이 진정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다.
부르조아 부부 역할로 등장하는 안내상과 이수아, 양쪽 어느 편도 그들이 왜 형식적인지 모르는 것처럼
호스트바의 인기남이자 양성애자인 '레오' 역시도 그의 내면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이나 머리와 몸이 분리된 추상화 등의 그림이 서먹하게 드러내기는 하지만,
영화가 너무나도 빈번하게 가로 트랙킹 숏안에 건물과 거리와 인물을 가두어두고자 할수록
그들의 성적인 혹은 영혼적인 욕망이 어디에 있는지 무지함을 드러내는 기법은 관습적인 작가주의 안에 머문다.
필사적으로 핸드폰을 마다하고 구식 공중 전화 앞에서 전화를 받으면 끊어버리는 반복씬이 장난스러운 것처럼
레오의 옆집 여성인 소연과의 만남 역시 불모적이며, 등장 인물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들이
어색하게도 차라리 욕망이 아니라 원망 혹은 소원처럼 들리고 보이는 것은 나뿐일까.
영화가 스스로를 작가라고 말하고 도심은 어두우며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모두가 이미 죽어버린 유령같은 존재로 가장하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함으로서
영화는 가학적인 성교만큼이나 가학적인 자리에서 관객을 내려다보는 한계에 머문다.
이미 70년대에 도달했던 도시 불산 不産이자 불신 不信을 재탕함으로서
본편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21세기 서울에 대한 김응수의 진단이라면 그것은 너무 평범하다.
<욕망>은 도시 인간 군상들의 욕망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혼자서만 통찰한 것으로 오만하게 다가서고
모든 것을 메마르게 함으로서 아무 것도 감정적으로 다치지 하게 못하는 어리숙한 모더니즘의 복사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