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 좋은 시 수상자 함기석 시인 대담
□ 함기석 시인
1966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국어선생은 달팽이』(세계사, 1998)와 『착란의 돌』(천년의시작, 2002), 『뽈랑공원』(랜덤하우스, 2008), 『오렌지기하학』(문학동네, 2012),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민음사, 2015) 그리고 동화 『상상력 학교』(대교출판, 2007) 등이 있음. 2006년 눈높이아동문학상, 2009년 제10회 박인환문학상과 2013년 제8회 이형기문학상, 2020년 제13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수상.
■ 이재연 시인
전남 장흥에서 출생 200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12년 제1회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 시집으로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실천문학사, 2017)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2×2=4에서 탈출한 언어들의 세계
수상자: 함기석 시인
대 담: 이재연(시인,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 이재연: 웹진 시인광장은 매년 올해의 좋은 시상을 선정하고 있습니다. 제1회 수상시인을 김선우 시인을 선정하는 것으로 시작해 제2회 박형준 시인이, 제3회 이장욱 시인이 수상하였습니다. 2019년에는 최금진 시인이 선정되었습니다. 최금진 시인을 이어 제13회 수상자로 함기석 시인의 시 「음시」를 심사위원들의 전원일치로 올해의 좋은 시로 선정되었습니다. 현재 문단의 안팎에서 적지 않은 수의 문학상이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인광장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좋은 시상은 민주적 가치에 가장 가까운 절차와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다시금 그 의미를 새겨볼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최종 10편의 후보 시로 선정되기까지 다른 문학상에 비해 동료시인들의 의사 반영이 가장 폭넓게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상이 앞으로 더욱 더 아름다운 상으로 발전해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진심으로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번 수상이 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독자들을 위해서 요즈음의 근황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 함기석: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수상소식이라 다소 놀랐습니다. 참 기분 좋습니다. 뿌옇게 뒤덮인 미세먼지 일상에서 간만에 맑은 바람을 쐬는 기분입니다. 최근 천착하고 있는 시 작업에 대한 긍정적 평가이자 따듯한 격려라는 점에서 큰 힘이 됩니다. 2019년부터 시 창작 동시창작과 병행해서 청소년 시도 쓰고 있습니다. 8~9년 전부터 아이들 동시창작 수업과 어린이 독서모임을 지도하고 있는데, 편견과 아집에 싸인 저를 발견할 때가 있어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많습니다. 일흔 넘으신 어르신들과 시 수업도 하고 가끔 문학 특강이나 초청강연도 다녀오곤 합니다. 충북권역 소외지역 초등학교 12곳을 돌며 수학과 동시 병행수업을 해왔는데 2019년도 사업은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지난 가을과 여름은 하루하루가 월미도 바이킹처럼 정신없이 어지럽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최근의 기쁜 소식을 계기로 시 작업에 더욱 매진하도록 힘쓰겠습니다.
■ 이재연: 어떤 시도 현실을 토대로 하지 않는 시는 없을 것입니다 현실을 초과하여 쓰여진 시일지라도 현실에서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기법과 방법으로 쓰여진 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개성적인 시인들이 출현하지만 선생님만큼 시대의 트렌드와 상관없이 개성적인 시의 세계를 구축한 예도 드물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가이자 화가인 폴 호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묘사하고 있는 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 필요한 조건 중의 하나가 상상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도 상상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상상력은 환상이나 몽상을 기반으로 하기 보다는 이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사고력에서 발생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선생님 시에서 나타나는 상상력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주로 직관에서 오는 것인지 이성에서 오는 것인지. 물론 이 두 개의 세계가 같이 상승 작용하겠지만 선생님의 경우 현실을 뛰어넘는 혹은 현실을 비트는 상상력은 어떻게 발생하는지 궁금합니다.
□ 함기석: 잠시 창밖 감나무를 바라봅니다. 내가 나무를 볼 때 나는 나무였던 나무와 나무가 아니었던 나무와 나무가 아닐 나무를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감나무가 감나무 아니었던 언어 이전의 시간대를 상상합니다. 시선이 사물을 사물의 자리에 위치시켜 질서를 만들지만 사물을 가둡니다. 나의 관찰과 해석에 의해 나무는 소리도 뜻도 갇힙니다. 감나무라는 나의 명명에 의해 감나무는 감나무 감옥에 갇히는 수형자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대표적 감각기관인 눈과 혀는 폭력기관입니다. 국가에만 폭력기관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도 사물과 풍경을 억압하는 독재적 폭력제국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시선은 장미와 권총을 내장합니다. 시선은 도끼와 수갑을 내장합니다. 그러나 시선은 끝없이 눈동자를 베는 칼날을 꽃잎으로 은폐합니다. 나는 지금 감나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볼 때 나무도 나를 응시합니다. 나무는 나였던 나와 내가 아니었던 나와 내가 아닐 나를 동시에 응시합니다. 어떤 사물이나 풍경과의 대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감각으로 대상을 자기화합니다. 이런 이성적 관찰과 투사는 대상의 깊은 샘 밑바닥까지 드러내어 대상을 이 세계의 고유한 독립체로 자유화시킨다고 우리는 착각합니다. 이럴 때 반(反)시적 상상이 개입됩니다. 상상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광기(狂氣)의 새입니다. 어떤 날은 급격히 분출하는 용암이고, 어떤 날은 벼랑 끝에서 급속낙하 하는 구름이고, 어떤 날은 성난 야수의 파도입니다. 상상은 이성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에서 돌발적으로 날아와 내 시의 안정적 체제를 위반하고 규율을 폐기합니다. 논리와 합리의 울타리를 철거합니다. 첫눈에 사랑에 빠져드는 자들의 이해할 수 없는 심리와 이상한 행동처럼 내 시의 어떤 문장들은 나를 거부하고 격렬하게 일렁이고 요동칩니다.
■ 이재연: 제가 알기로 현재 선생님은 5권의 시집을 발간하셨고 시산문집까지 더하면 6권의 시집이 발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다수의 동시 동화집이 있는 것으로도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함기석 시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집은 『오랜지 기하학』입니다. 2012년에 출간된 시집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시집을 읽은 직후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2012년이면 새로운 시적 양상으로 인해 서정시의 영역이 많이 확장되고 있는 중이었으며 그로 인한 미적 통증 또한 지속되고 있는 시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선생님의 시집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항상 언제나 전위적인 시인들은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며 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시집 『오렌지 기하학』은 그 전위의 정점에 있는 시집이었으며 독보적인 세계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집의 여러 특성들 중에서도 수학자로서의 선생님의 이미지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앞 질문과도 연관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수학과 상상력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요. 있다면 그 상관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귀담아 듣겠습니다.
□ 함기석: 흔히 시인과 수학자는 대립되는 인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몸은 이 두 대립자가 동거하는 아름다운 신혼집입니다. 나는 대칭Symmetry을 양립개념이 아니라 공존개념 또는 공생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지배하는 패러다임도 대칭의 세계이며, 이 대칭구조를 기호로 형식화하는 것이 수학입니다. 내가 수학의 방정식에 매료되는 건 아름답고 우아한 대칭의 미감(美感) 때문이지만 이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미궁의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내 몸은 나의 영구 거주지가 아니라 대칭적 타자들의 집합 장소이자 밀회 공간입니다. 수학과 시는 대립 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육체에 사는 대칭적 동거자, 아름다운 동반자입니다. 이런 개방적 시각으로 보면 이 세계 또한 생물과 사물이 기이한 부호로 결합된 고차원 방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상적 해석은 수학을 이성과 논리의 산물로만 보는 눈의 편견을 회의하고 비판합니다. 수학은 때대로 논리를 초월하는 비논리적 상상력에 의존합니다. 비이성적 상상, 공상, 망상은 수학자의 육체 속에서 기생하며 이성을 빨아먹는 거머리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들은 논리의 정교함을 고양시키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고도 충분한 반대 조건들입니다.
■ 이재연: 선생님의 수상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저에게 있는 선생님의 시집을 다시 찾아봤습니다. 세 권의 시집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세권의 시집을 다시금 읽었습니다. 이 세권의 시집이 저에게 시킨 첫 번째 일은 제게 없는 선생님의 첫 시집을 읽으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시집은 어떤 것이었을까. 누구에게나 있는 ‘첫’이라는 단어를 저는 무척 좋아하거나 신뢰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첫’이라는 단어에는 설렘과 긴장과 그 시인을 읽을 수 있는 어떤 징후와 매혹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막연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시집 첫 장에 실린 「지붕 위의 염소」는 김승옥 소설의 「염소는 힘이 세다」 이후 가장 슬프고 환상적인 아름다운 염소였습니다. “밤마다 별과 달을 훔쳐와 아파하는 내 누이의 눈 속에 넣어주던 염소 내 시는 그 염소가 쓴다 염소가 달리는 언덕이 쓰고 언덕 위 버려진 무덤들이 쓴다 (중략) 달걀이 되어 공중으로 공중으로 올라가던 염소 겨울 내내 우리집 지붕에 누어 내 따분한 산수책을 씹고 씹어 파아란 깃털의 새로 만들어 주던,” 이 시에서의 염소는 현실 속의 염소이기도 하고 현실 밖의 염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염소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독자들을 벗어나게 하고 있었습니다. 언어에 침투해 있는 기존의 질서를 해체시키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선생님은 해체주의자가 아니었는가 싶습니다.(웃음) 첫시집 발간이 1998년이고 그 이전부터 쓰여진 시라고 가정하였을 때, 현실에 대한 인식과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특별해 보입니다. 선생님의 첫 시집을 읽으면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라는 말을 다시금 떠 올렸습니다. 새로운 시의 물결로 들썩였던 2000년대가 오기 전에 이미 전위적이었습니다. 첫 시집이 나오기까지 현실의 재현이나 반영으로서의 시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셨는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함기석: 1초, 1초, 1초 시간이 계속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의 펜은 지금 그것을 기록하면서 사라지는 시간의 컨베이어벨트 위에 놓여 있습니다. 1초, 1초, 1초 나도 세계도 동시에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의 펜은 내 눈이 관찰한 객관적 대상 자체, 대상들이 파생시키는 사실과 시간의 실종사건을 명료히 확정하여 표현할 수 없습니다. 표현 행위가 이루어지는 동안 시간이 계속 유동하고 증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펜은 펜이라는 자신의 실존조차도 명료히 파헤치지 못하는 불완전한 물체입니다. 나도 세계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이 증발 중인 세계 자체, 그 세계 속의 시인과 시인의 펜 모두가 비극적 에포케(epoche) 씨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선언합니다. “나는 잉(∼ing)이다!” 나는 문자화될 수 없고 발음될 수 없고 그 어떤 뜻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찰나적 존재 잉(∼ing)입니다. 이렇게 지금 나는 기록 중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서술되는 순간 증발합니다. 시간과 언어와 나는 모두 무(無)를 향해 굴러가는 서글픈 볼링 공(空)입니다. 주야(晝夜) 속에서 음양(陰陽) 속에서 너도 나도 계속 굴러갑니다. 너도 나도 본질적 상(相)으로서 실재 주어가 아닙니다. 제2의 제3의 헛것 가(假)주어, 제로(0) 주체들입니다. 주체는 흐를 뿐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있다’는 없는 것입니다. ‘있다’는 상(相)으로 잠시 존재하는 ‘없다’의 유령체입니다. 언어조차도 유령체라는 말입니다. ‘없다’가 없어야 비로소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견제상비상(見諸相非相) 즉 일체의 언어, 일체의 시간, 일체의 대상, 일체의 법상(法相)에 얽매이지 않는 무상(無相)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재현이나 모사 이전에 언어의 실존과 부재의 근원을 깊이 사유해야 합니다. 오래전 나는 세계의 존재 양식을 다음과 같이 약호화한 적이 있습니다. (–∞)……反物反物反物反物反物……(0)……物物物物物物物物……(∞). 이 기호의 나열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시각적으로 기호화된 부분이 아니라 비(非)시각화된 무수한 공백들입니다. 그곳에 멸절된 시간, 멸절된 하늘과 땅, 멸절된 사물들, 멸절된 인간들, 멸절된 음악과 춤, 멸절된 꿈과 비명이 빼곡히 들어차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틈에서 울려나오는 무수한 울음과 탄식을 보고 듣고 실감으로 느낍니다. 0은 플러스(+) 세계 내 존재의 물(物)인 내게 마이너스(–) 세계 내의 타자들과 끊임없이 연결하는 다리이자 터널입니다. 0은 내게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존재와 부재를 하나의 육체로 인식케 하는 무형(無形)의 시공간 터널입니다.
■ 이재연: 분위기 전환으로 가벼운 질문 드리겠습니다.(웃음) 사실 많이 궁금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어려서부터 수학을 아주 잘하셨을 것 같습니다. 수학천재라는 말을 들었을 것 같습니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물리학자 아르망 트루소는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며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라고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선생님은 시 쓰기에 가장 이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선생님이 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가 언제이며 최초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지요?
□ 함기석: 가벼운 질문이라니까 가볍게 답하겠습니다. 아마 엄마 배속에서부터 일겁니다. 고추가 막 생겨나고 몸을 뒤틀며 발로 엄마 배를 툭툭 찰 때 그 순간순간이 시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사로운 봄날이었습니다. 자긍 속에서 손가락을 빨며 낮잠에 빠져드는데 갑자기 어마무시 커다란 방귀소리가 났고 나는 깜작 놀라 눈을 번쩍 떴습니다. 그것이 내가 들은 최초의 천지개벽 천둥소리였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일화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랬다고 착각하고 싶습니다. 시는 일정 부분 감각의 착오고 착란이고 교란이니까요. 시에는 그런 놀람과 경이, 순백의 웃음이 내장되니까요. 그때 이후로 나는 늘 타자로서의 나입니다. 그 타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볼 때 미지의 세계, 자궁과 자궁 이전의 세계,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도 열릴 수 있습니다. 처음 시를 쌌던 게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단순히 종이 위에 글자들을 나열하는 게 시였다면 아주 오래되었겠지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시를 쓰지 않았고 일기와 편지는 엄청 많이 썼습니다. 같은 반 친구 연애편지 대필을 오랫동안 했고 펜팔 편지 전담이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치기어린 글쓰기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언어를 특정 메시지 전달을 위해 목적화하지 않았고 수단화하지 않았고 수사적 기교나 비유 또한 순수했으니까요. 아무튼 그때의 트릭 없는 감정 표출과 마음 전달은 이후 시 습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으로 시를 쓴 것은 1989년 여름, 군 제대 이후부터입니다.
■ 이재연: 사실 선생님의 시적 언어는 2×2=4라는 현실의 공고화된 질서에 반하는 언어이며 그 현실에서 탈출한, 혹은 탈출하고자 한 언어라라고 생각됩니다. 기존의 체제 속에 있는 언어들은 질문합니다. “새로운 세계 때문에 새로운 언어가 존재하는가? 새로운 언어 때문에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가? 탄생은 무엇이고 존재는 무엇인가? 왜 우주는 바보가 못되고 宇宙가 되버린 걸까?”(「천장에 누워 시를 써요」)라고 질문하는 동안 이미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는 굳이 “장미를 계속해서 장미라 불러야 하는 까닭” 이 없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관습과 고정화된 사회통념을 지워버린 언어야말로 자유를 얻을 것이고 자유를 얻은 언어야 말로 새로운 세계를 찾을 것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선생님의 시집들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의 다음 시집에 대한 계획이나 앞으로의 시작의 방향 등에 대해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또 선생님의 시집 출간 년도를 보면 상당히 꾸준하게 시작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시 쓰시는 기간 동안 흔히 말하는 슬럼프는 없었는지 말씀해 주시면 슬럼프 상태에 있는 시인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웃음)
□ 함기석: 「음시」에 나타났던 언술과 구조의 사고실험, 현실이 은폐한 마이너스 현실에 대한 철학적 재해석과 전위적 형식 탐구는 계속될 것입니다. 형식은 자유의지고 세계의식입니다. 모든 시의 형식은 시인 자신과 언어의 실존의 투사이자 현기증입니다. 그래서 시는 늘 슬럼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는 유희적입니다. 슬럼프를 언어놀이로 해석놀이로 즐기는 때가 있습니다. 오리 배를 타고 노는 아이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탄 배는 어떤 해안에도 닿지 못하고 영원히 표류할 것입니다. 시는 무한의 바다이니까요. 그래서 더더욱 물장난 유희와 파도타기 놀이를 즐기는 겁니다. 역설과 반어를 통해 웃음의 세계, 희롱의 세계로 빠져드는 겁니다. 이 유희와 놀이가 낳는 검은 유머가 이 경직된 세계에 새로운 피를 수혈할지도 모르니까요. 시 때문에 심각한 슬럼프에 빠진 후배가 있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너의 시가 고여 있는 물이라면, 흐르지도 증발하지도 못하는 애매한 물이라면, 차라리 썩어라!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악취를 진동시켜라! 몸의 환부에서 구더기들이 기어 나와 새로운 나비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패해라! 매우 무책임한 말임을 잘 압니다. 하지만 바닥으로의 처절한 추락경험은 차후 비상고도를 높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 이재연: 선생님의 시집을 읽는 동안 여러 시편 속에서 해저라는 단어를 몇 번 만난 것 같습니다. 이 해저라는 말이 가볍게 스쳐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수상작인 「음시」의 시편 속에서도 ‘해저’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2×2=4 라는 통념화 된 현실질서 속에서 탈출한 언어들은 대부분 자유를 얻어 무한의 세계나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듯합니다. “오늘밤 장미는 세계의 반(反) 기획이다/죽은 자들의 죽지 않는 발이 해저를 걷고 있다 그것이 내 몸이다.”라고 시작됩니다. “죽은 자들의 죽지 않는 발“ 이 제게는 ’발=언어‘로 읽히기도 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실상인 해저를 죽지 않는 발이 걷고 있는 거죠. 발은 곧 언어이기도 하고요. 그 언어가 곧 내 몸이고 나인 것이죠. 언어가 세계이며 세계가 곧 언어라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해저는 그야말로 궁극, 우주의 바닥, 보이지 않는 무한의 세계, 더 나아가 상상의 세계, 창의적 세계로도 받아들여집니다. 물론 오독일 수 있습니다. ’해저‘라는 단어에 특별한 시적 알레고리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 함기석: 현대의 문명세계는 인간의 로고스에 의해 기획된 곳으로 무수히 약자와 선인의 죽음을 양산하는 악(惡)의 폭력공간입니다. 장미는 그 문명세계의 악마성과 무자비함에 반항하여 싸우겠다는 나의 대항의식이 투영된 피의 기표이자 파괴해야할 미(美)의 상징체입니다. 일종의 양가적 존재 아니 다면적 존재로 이 세계에 맞서는 무기이면서 이 세계를 아름다움으로 위장하고 은폐하는 허구의 상징물로 설정한 것입니다. 흑(黑)이면서 백(白)인 사물, 아이이면서 노인인 언어생명체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매순간 숨으로 숨을 연장하는 죽음의 현장 체험지입니다. 주검이 되어 흙먼지로 돌아갈 물적 덩어리로 숨과 열, 감(感)과 정(情)이 흡착된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플러스 세계에 기생하는 마이너스 존재들입니다. 가시적 양의 세계에서 폭력의 형식을 살찌우는 무력한 비가시적 음의 존재들입니다. 음시는 음의 시(詩)고 시(屍)고 시(視)고 시(市)고 시(時)고 시(始)로 우리와 세계의 현재적 초상이 투영된 독립 언어구조물이자 다차원다면체입니다. 해석자의 눈과 의식, 기억과 상상에 따라 의미가 다층적으로 갈라질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개방시킨 입체적 조어(造語)건축물입니다. 플러스 세계가 우리의 배고 전방이고 상승이고 하늘이라면, 마이너스 세계는 우리의 등이고 후방이고 하강이고 해저입니다. 이 등과 후방의 세계, 이 하강과 해저의 세계에 우리가 망각하고 방치하고 매장한 꿈과 기억들, 죽은 역사와 시간과 목숨들, 죽은 아이들과 여자들이 진흙처럼 두껍게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은 자의 형상, 형체 잃은 무형(無形)으로 해저의 지층을 걷고 있는 또 다른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낳아 우리가 버린 사생아들, 불구자들, 기형아들, 이단아들, 반역아들입니다. 해저는 우리의 혼(魂)과 백(魄)이 떠도는 비극적 물의 우주이자 꿈과 죽음으로 채워진 어둡고 추운 타자들의 세계입니다. 현실의 무위식이 숨긴 초(超)현실이자 현실의 의식이 은폐 매장한 폐(蔽)현실입니다. 나는 그 암흑의 폐사지로 잠수 중인 다이버입니다.
■ 이재연: 서로 상호작용하는 작가, 텍스트, 독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작품을 쓰실 때 독자를 염두하고 쓰시는지요. 아니면 작품을 쓰시는 동안 독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유기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 이끄는 대로 쓰시는지 궁금합니다.
□ 함기석: 동시나 동화 작업을 할 때는 아이들의 시선과 감정을 겹쳐서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처리할 때가 많습니다. 나의 생각과 상상이 아이들 가슴에 깊이 스미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자주 나를 양보합니다. 나는 나를 접습니다. 나는 장남감이 되고 액체괴물도 됩니다. 방귀 뀌는 양배추도 되고 말하는 캐나다 호박도 됩니다. 하지만 어른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 작업에서는 나는 나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소통과 공감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탐험의식과 그 결과물의 수용프로세스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극한까지 밀고나아가 세계와 몸을 섞어 벌이는 사랑 혹은 전쟁에서 느끼거나 발견하는 것은 대부분 주관성이 매우 강합니다. 이것을 사회의 보편 문법체계나 관습적 언어로 담아내면 메시지 소통은 훨씬 편리해지지만 나머지 침전물들은 대부분 증발됩니다. 새로운 발견은 새로운 언어형식과 새로운 문법으로 발화될 때 발명의 차원으로 승격됩니다. 하지만 난해라는 불편한 낙인이 찍힙니다. 나의 시에서 낯선 언술과 형식은 시를 베일에 싸이게 하여 신비화하려는 얕은 포즈나 현학이 결코 아닙니다. 시의 형식은 시인의 간절한 몸이자 숨입니다. 어떤 새로운 시인이 출현할 때 나는 그 시인의 시의 내용과 함께 자기만의 고유한 언어스타일, 독창적 상상력과 개성적 시 문법, 독자적 언술과 발화 방식을 지녔는지 확인합니다. 또한 그 파격적 형식과 언술 이면에 철학적 사유가 탄탄히 뿌리내리고 있는지도 확인합니다. 시단이라는 숲은 누구나 다 알아듣는 노래만 따라하는 앵무새들의 정기공연무대가 아닙니다. 훌륭한 새는 다른 새의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다른 새의 발성을 흉내 내지 않고 자신의 본능대로 자기의 상처 난 몸으로 노래합니다. 그래서 고독합니다.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 이재연: 시인 공화국이란 말을 심심찮게 듣습니다. 시를 읽는 일반 독자는 많지 않은데 시를 쓰는 사람이 더 많은 것에서부터 기인한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효용성 없는 일을 들라고 하면 아마도 전업으로 시를 쓰고 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부에서 하는 말처럼 소비해야 할 사람들이 생산에 참여하고 있어서일까요. 그 또한 좋은 것인지 좋지 않은 것인지 답을 내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시에 몰입하는 사람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 AI, 빅데이터 등의 기계사회에 대한 시대적 반응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글쓰기가 대중화 되고 다변화된 시대에 시인들은 시끄럽거나 쓸쓸해지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다행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시보다도 시인이라는 이름의 효용성은 아직 이 사회에 유효한 것 같습니다. 엉뚱한 질문입니다. 시는 무엇일까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시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 함기석: 시는 예고 없는 습격입니다. 내 피를 모조리 흡수하는 마른 수건이고 냉혈의 자객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시는 금세 담을 넘어 달아납니다. 시는 끝없이 달아나는 말입니다. 달아나는 파도입니다. 달아나는 애인입니다. 아주 오래전 어느 술자리에서 누가 시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침묵했습니다. 자정 지나 술집을 나와 나는 담배를 피우며 내가 대답한 몇 초간의 침묵을 그는 이해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담배 한 개비의 길이와 그것이 타들어가는 시간 그것이 우리의 삶이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하얀 연기 그것이 시일지도 모릅니다. 내게 시는 존재와 무 사이에 놓인 아름다운 다리일 뿐 존재를 위한 구원(救援)의 길도 무를 향한 열반(涅槃)의 길도 아닙니다. 그 다리에서 죽음의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고 싶던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나는 매번 침대에서 시와 몸을 섞지만 한 번도 시의 알몸을 보지 못했습니다. 시도 나도 거울 앞에 서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불안한 존재입니다. 우린 고정된 실체 없이 찰나적 현상으로 존재하는 불길한 생물들입니다. 그러니 시는 시속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이것이 자신의 몸으로 쓰는 문자 없는 시고 단 한 권의 진정한 시집입니다. 나는 미래의 그 유고시집으로 기억되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 내 눈엔 내가 존경하는 밤하늘이 보입니다. 반짝거리는 저 무수한 별들이 글자가 되어 거대하고 장엄한 시를 엮고 있습니다. 우주는 문자 없는 시를 쓰는 궁극의 시인입니다.
■ 이재연: 가벼운 질문입니다. 선생님은 주로 시작을 밤에 하시는지 낮에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소한 질문입니다. 잠은 보통 몇 시간 주무시는지요? 저는 이게 조금 궁금합니다.(웃음)
□ 함기석: 특정 시간대에 묶여 작업하지는 않습니다. 밤이건 낮이건 몰입 에너지를 느끼면 무언가에 홀린 듯 시의 지장 속으로 빨려듭니다. 이 에너지 고양상태가 지속되면 단숨에 많은 분량의 시가 쏟아지기도 합니다. 술에 취한 어느 밤, 집에 돌아와 단숨에 A4 12장을 써내려간 적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내가 이성적 설계와 계획 속에서 시를 쓸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성과 논리를 통한 시 구조의 확장 배치는 주로 즉흥적이고 즉발적인 창작이 이루어지고 난 후 객관적 평자의 시선으로 시 전체를 관망할 때 나타납니다. 이럴 때 시는 혼돈과 질서의 팽팽한 줄다리기 싸움이 됩니다. 누가 이기든 지든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광기와 이성, 우울과 분노, 본능적 충동과 냉철한 논리에 휩싸여 갈팡질팡하는 소년, 그것이 나의 초상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근원적 번민에 휩싸입니다. 도대체 방금 태어난 이 핏덩어리 태아의 시는 어디서 온 걸까. 도대체 나는 왜 이 순간 이 공간에서 이런 불가사의한 불구의 문장들과 마주하며 고통을 느끼는 걸까. 이런 의문들은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면서도 문장들이 문장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문장들은 그 문장들은 낳은 나라는 시인보다 훨씬 더 자기 존재가 혼란스러울 겁니다. 이런 문장의 존재와 불안을 사물의 관점에서 상상하기도 합니다.
■ 이재연: 이 대담을 기회로 선생님의 시를 읽는 키를 찾은 것 같기도 해서 저에게도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수의 생각일 수 있지만 저는 제 시를 읽는 독자들이 많고 적은 것에 개의치 않고 시를 쓰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많이 읽히는 시를 쓰고 싶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많은 독자들이 읽는다고 제게 꼭 좋은 시일 수 없고 많은 독자들이 읽지 않는다고 해서 제게 좋지 않는 시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제 고집이기도 합니다. 어떤 시들은 매우 높고 고독하고 존귀한 자리에 있습니다. 쉽게 손에 만질 수는 없지만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인식의 세계나 영적인 세계에서 태어나는 시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시를 신뢰하는 취향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피카소는 상상이 사실보다 진실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상상력이나 환상이 합리적인 세계를 뛰어넘어 실재계에 가 닿을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의 시들을 일독하면서 느낀 것은 현실을 치열하게 바라본 자만이 현실을 뛰어넘어 실재계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선생님의 시의 세계를 독자로서 무한 응원합니다. 미처 질문 드리지 못했지만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나 보충 하시고 싶은 말씀 독자들을 위해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함기석: 대지에서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이카로스 말을 상상합니다. 날아가는 말은 날아가면서 날개부터 녹아 없어집니다. 눈이 녹고 귀가 녹고 얼굴이 녹고 육체 전체가 촛농처럼 녹아 흘러내립니다. 말이 태양을 향해 날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 존재의 자궁이었던 부재의 진공(眞空)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고통을 통해 환희와 열락의 세계로 귀소(歸巢)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없어진 말 이후에 비로소 시의 말을 시작하기 위해 말은 자기의 전존재인 육체와 영혼을 자신이 태어난 대지에서 죽음 쪽으로 내던지는 것입니다. 시의 말은 시를 살리기 위해 뼈아픈 죽음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의 말의 가혹한 운명입니다. 우리 시의 말은 이 무자비한 폭력세계처럼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 속에서 극도로 견고하고 완고합니다. 미(美)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시의 미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미친 미(美), 미친 말이 필요합니다. 이런 순수의 말을 통해 시인들은 이 악의 세계로부터 탈옥하려는 야심에 휩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말은 문명의 산물로 악의 구축을 더욱더 견고히 하는 독성물질입니다. 그래서 독성의 말을 붕괴시킬 더 강력한 말의 낯선 체계와 문법을 모색해야 하는 겁니다. 이런 참혹과 비극의 세기로 우리는 이미 진입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나는 세계는 계속 불탑니다. 현재가 불타며 사라지는 것을 응시하며 현재는 불탑니다. 어쩌면 나와 말과 사물의 주검의 재, 그 형체 없는 환영(幻影)이 헛것의 몸을 빌려 잠시 현현하는 것, 그것이 현대시인지 모릅니다. 시인이 언어로 불멸을 꿈꿀 때, 시간은 침묵 속에서 전율할 소멸놀이와 가학적 유머놀이를 지속합니다. 시인이 말로써 말의 사원을 세우고 권력의 우상들을 지울 때 시간은 녹아 사라질 말의 운명을 보고 인간의 역사와 문명을 허뭅니다. 예정된 패배라 할지라도 우리는 기존의 살가죽을 벗은 생살의 말로서 다시 이 시간의 가학적 폭력에 맞서야 합니다. 그것이 21세기 우리 시의 나아갈 방향이라 생각합니다.
■ 이재연: 긴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이카로스는 죽음에 이르고 존재의 자궁이었던 부재의 진공으로 회귀하는 열락과 환희를 동반하는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찾아온다는 시의 말. 시인들이야말로 이카로스의 후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으로 독자들을 만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건강과 문운을 빕니다.
눈 내리는 겨울 아침, 너의 방 창가로
두 개의 하얀 해골이 배달되거든 놀라지 마라
그것은 너에게로 보내는 나의 사랑이니
하나는 구름이고 하나는 태양이니
- 함기석 「사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