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의 행복은 사실상 1921년에 사실상 끝나 있었다. 사실 좌파와 우파의 결합은 처음부터
완전하지도 않았고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동의 한것도 아니었다.
좌파든 우파든 독자조직을 가진 단체가 더 많았고 극좌 극우들은 아예 처음 부터 서로를 인정하
지 않았다.
그렇다고 표면적으론 서로를 적대하지도 않았고 적대해서도 않되었다.
서로 비난은 할지라도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 대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주 충격적인 일들이 일어나며 서로에게 총부릴 들이댈 가능성 아니 이미 들이댄일이
일어난것이다.
청산리전투는 다 아실일이니 더이상 설명드리지 않겠다.
문제는 그다음 문제인 자유시 참변이다.
1921년 겨울 만주 독립군 연합은 자유시로 이동했다.
이 만주독립군 연합에는 김좌진 서일 홍범도 지청천등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등 최고의 독립군 부대와 독립군 수뇌들이 모인 부대였다.
그들은 일제의 삼광작전을 피해 스탈린의 "약소민족의 독립을 소련이 지원한다!" 는 약속을 믿
고 블라디보스톡으로 행해 자유시에 다다랐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소련은 이상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조선 독립군이 볼세비키 혁명을 위해 백군과 싸워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적군은 동서 양쪽에서 백군 잔당을 포위한 상태로 잔당 게릴라들을 소탕해가는 상황이었다.
독립군 수뇌부는 당연히 " 조선독립군이 남의 나라 분쟁에 끼어들 수는 없다!" 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소련군은 이중으로 조선 독립군을 포위하고 무장해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협상이 이어졌고 결국 새벽 발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더 무서운 일이 발생했다.
독립군 부대내에서 동료들을 쏘는 자들이 발생한것이다.
이른바 고려 공산당파의 인원들이었다.
홍범도 지청천등은 포로가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은 탈출했다.
홍범도는 결국 사회주의로 전향하고 소련의 지원하에 고려 혁명 군관학교를 세웠고 1943년 소련
에서 죽는다.
지청천도 같이 활동했으나 나중에 만주로 탈출하여 뒷날 임정산하 광복군 총수가 된다.
김좌진은 신민부를 만들었는데 이는 군대를 가진 독자 정부였다.
그러나 1927년 일경과 중국군의 습격으로 신민부는 해체 되었고 1930년 김좌진은 사회주의자에게 암살된다.
자유시 참변은 엄청난 충격을 주어 이후 김좌진은 사회주의자들과 무력으로 대결하였고 양 진영
간에 각종 테러가 빈번하였다.
이미 1921년에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원수가 되어있었으나 그래도 서로간에 희망을 버
리지 못하고 계속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김두봉은 1925년도 까지 상해 임정에서 일했으나
결국 중국 공산당으로 넘어갔다. 1930년도 까지 사회주의자들과 민족 자본주의자들은 서로 같
이 일해야 한다는 어느정도의 공감과 노력을 보였다.
그러나 자유시로 이미 피를 본 그들이 서로를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증오는 와있었다. 1921년도에 이미 행복은 끝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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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행복의 산물과 붕괴조짐들 - 청산리 전투와 자유시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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