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역사관(3실 강력한 중앙집권 왕국)](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files.naver.net%2FMjAxOTAyMTNfNSAg%2FMDAxNTQ5OTk5MzcyNTEw.W-tr0mZX-pOsMrJS9Flxwrb39MSLjVopCpFriqT904kg.QNgWMWQyKbyub-B8H4BJ99KKZUFh-trAsszCppJ8xJAg.JPEG.cho-a47%2F20190126_122024-2.jpg)
한국사 이야기 537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경남 창녕군 창녕읍. 국보 제33호.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화강석제의 최대 높이 1.78m, 최대 폭 1.75m, 두께 약 0.3m이다. 비는 자연암석을 이용하여 대석(臺石)이나 개석(蓋石)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시대 비석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1면을 간 다음 외연(外緣)에 비석 형상을 따라 윤곽선을 돌렸는데, 우상부(右上部)는 암석이 사면(斜面)을 이루고 있으므로 1행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27행인데 1행의 자수는 일정하지 않으며 끝 행은 3자뿐이고 우반부(右半部)에서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씩 낮추어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른 3개의 진흥왕 순수비의 내용과 같이 순수의 사적(事蹟)과, 수가인물(隨駕人物)의 열기(列記) 등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인물의 열기는 속부(屬部) ·인명(人名) ·관직(官職) ·직위(職位)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통식을 따르고 있으며, 해서체로 자경(字徑)은 4cm이다.
비문 전반부는 마손되어 자획이 불분명한 점이 있으나 후반부는 선명하여 판독이 가능하다. 건립연대는 비문에 보이는 '辛巳年二月一日立'으로 미루어 561년(진흥왕 22)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척경비는 본시 창녕군 창녕면 화왕산록(火旺山麓)에 있던 것을 192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검색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