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 100 - 여성이 설 자리는 정상이다 영광과 비운을 함께 맛본 미국 여성 등반대(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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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04. 04:37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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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탐험사 100장면
여성이 설 자리는 정상이다
영광과 비운을 함께 맛본 미국 여성 등반대(1978년)
요약 미국 여성 히말라야 등반대는 1978년 히말라야의 정상에 오르며 미국 국기와 네팔 국기 그리고 ‘여성의 자리는 정상’이라는 등반대 깃발을 꽂았다. 영광을 누린 것도 잠시, 두 번째 팀의 왓슨과 앨리슨 오니츠키예비츠가 숨진 채로 발견되어 비운을 맛보기도 했다.
"여성이 설 자리는 정상(頂上)입니다"
대장은 블럼(앞줄 맨 오른쪽), 정상을 정복한 사람은 밀러(뒷줄 왼쪽부터 다섯 번째)와 코마르코바(앞줄 왼쪽부터 세 번째), 정상에 오르다가 죽은 사람은 오니츠키예비츠(뒷줄 왼쪽부터 두 번째)와 왓슨(앞줄 왼쪽부터 두 번째)이다.
이 엄청난 일은 1972년 어느 날 아프가니스탄의 노샤크 산에서 싹텄다. 7,010m 지점을 오르던 미국 여성 아를렌 블럼을 한 여성이 덥썩 껴안더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노샤크는 7,000이에요. 이제 우리는 8,000에 올라야 해요. 바로 우리 여자들이 말이죠."
그녀는 정상을 정복하고 신바람이 나서 내려가던 폴란드 여성 반다 루트키에비츠1)였다. 이렇게 해서 여성만으로 8천m 봉에 도전한다는 사상초유2)의 계획이 발을 내디디게 되었다.
1977년 블럼은 '미국 여성 히말라야 등반대'를 조직했다. 1978년 네팔정부로부터 입산 허가를 따내자 그들 13명은 '여성의 자리는 정상입니다. 안나푸르나!'라는 글을 써넣은 티셔츠를 팔고, 국립지리학회로부터 도움을 받아 8만 달러를 마련했다. 1978년 8월 그들이 네팔에 도착한 뒤로 대장 아를렌 블럼(31 · 생화학자)은 등반 일지를 꼼꼼히 적었다.
8월 28일. 베이스 캠프는 4,328m이고, 정상은 그보다 3,750m 더 높이 솟아 있었다. 캠프 근처에는 안나 푸르나에서 목숨을 잃은 등산가 일곱 사람의 이름이 적힌 추모비가 서 있었다.
'나는 우리 대원이 이 비석에 이름을 더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9월 2일. 오전에 세 사람이 5,060m에 세운 제1 캠프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급경사를 오르는 데 필요한 장비들을 날랐다.
'20kg씩 짊어지고 5,000m가 넘는 산을 오르자니 여성에게는 꽤 벅찬일이었다.'
9월 13일. 여섯 사람이 며칠째 제2 캠프(5,640m)에서 제3 캠프까지 오를 길을 만드느라 얼음을 찍어 계단을 만들고, 베르그 자일을 설치했다.
9월 15일. 제3 캠프를 만들 선발대가 아침 일찍 제2 캠프를 떠났다. 다른 사람들은 제1 캠프에서 물건들을 제2 캠프로 개미처럼 날랐다. 그들이 지나는 길의 어떤 곳은, 10m 두께의 칼날 같은 얼음 양쪽으로 30m가 넘는 '얼음 깔때기'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우리 모두의 몸무게가 줄고 있었다. 높이 오를수록 식욕도 줄었다. 나는 때때로 끼니를 잊곤 했다.'
9월 26일. 대원들이 짐을 지고 제3 캠프 A에 가보니 텐트가 눈사태에 휩쓸려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젠 열두 켤레와 다른 보급품이 있던 곳에서 너비와 깊이가 15cm쯤 되는 크레바스가 생겨났다. 바로 그 때 또 눈사태가 일어났다. 그들은 구르고 자빠지며 그곳에서 도망쳤다. 흘러내리던 눈 더미가 그들 머리 바로 위에서 멈추었다.
"세상에! 저길 좀 봐!"
제2 캠프로 내려온 대원들이 놀라서 텐트 밖을 내다보니, 눈사태가 제1 캠프를 덮쳤다. 얼마 뒤 멀리서 작은 점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집이 무너져 우왕좌왕하는 개미떼 같았다. 무전으로 알아보니 강풍이 다이애나 테일러를 크레바스 쪽으로 6m나 날려버렸지만 다행히 크레바스 바로 앞에 떨어졌다고 했다.
9월 27일. 제3 캠프 A를 출발한 리즈 클로버시키(33 · 대학 교수)와 마기러스모어(20 · 대학생)가 얼음 절벽에 베르그 자일을 설치하느라 죽을힘을 다하고 있었다. 얼음이 자꾸 부서져 하켄을 박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콩알만한 거점(발 디딜 곳) 위에서 아이젠의 앞쪽 끄트머리에 온몸을 의지한 채 70도 경사에 매달려 일했다. 그들은 끝내 절벽 꼭대기에 바람개비형 얼음 말뚝 하나와 하켄 4개를 박고 나서야 몸을 눕힐 수 있었다.
10월 13일. 세 사람이 제4 캠프로 올라갔다. 제3 캠프 위의 비탈은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그들은 고정 로프에 매달린 채 슈타이그 아이젠을 얼음 속으로 차넣으며 몸을 끌어올렸다. 내려올 때는 슈타이그 아이젠에 달라붙은 눈이 대리석처럼 단단히 얼어붙었다. 블럼은 손도끼를 얼음에 박아넣고 두 발짝마다 손도끼를 찍으며 내려왔다.
10월 13일. '간밤에 나는 내 옷 전부를 입고 모자를 2개 쓰고 얼굴에 스카프를 두른 채 슬리핑백을 뒤집어쓴 뒤 더 두꺼운 슬리핑백에 들어가 잤다. 두 슬리핑백 사이에 넣어둔 물병이 돌덩이처럼 단단히 얼었다. 텐트안은 영하 12도, 밖은 영하 30도였다.'
10월 14일. 대원 3명과 셰르파 3명이 7,376m에 제5 캠프를 세웠다.
10월 15일. 첫째 팀이 700m 떨어진 정상을 향해 떠났다. 이렌 밀러(41 · 물리학자)와 베라 코마르코바(35 · 고산식물 생태학자), 셰르파 두 사람이었다. 한동안 비탈을 올랐다. 비수 같은 얼음 위를 걷다 보니 밀러의 신발이 찢어졌다. 그녀가 절망해서 주저앉으려 하자 셰르와 체왕이 서툰 영어로 힘을 북돋았다.
"천천히 전진, 중단 안돼. 성공."
그들은 한 발짝 뗄 때마다 여섯 번 숨을 쉬었다. 3시간 30분쯤 지나자 그들의 걸음은 기다시피 느려졌다. 산소를 6시간 분량밖에 가져가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한 발짝에 네 번씩 숨쉬기로 했다. 피라미드 모양을 한 정상 바로 밑에서 그들은 무릎까지 눈속에 빠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곧 걷기가 쉬워졌다. 툭 튀어나온 바위에 하켄을 박아 베르그 자일을 맨 뒤, 정상 둘레를 빙 두른 얼음띠를 넘었다. 그러자 '그곳'에 다다랐다. 오후 3시 30분. 미국 국기, 네팔 국기 그리고 '여성의 자리는 정상'이라는 등반대 깃발이 꽂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0월 18일. 전날 정상으로 떠난 두 번째 팀 베라 왓슨과 앨리슨 오니츠키예비츠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들은 망원경에도 잡히지 않았다.
10월 20일. 셰르파들이 450m 벼랑에서 베르그 자일에 매달린 채 숨진 왓슨과 오니츠키예비츠를 발견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제5 캠프 바로 밑에서 미끄러진 것 같았다.
10월 23일. 베이스 캠프 근처 추모비 앞에 대원들이 모였다. 그들은 왓슨과 오니츠키예비츠의 이름을 안나푸르나 정상이 바라보이는 쪽에 새겨넣었다. '거기서 앨리슨과 베라는 언제나 정상을 바라보며 눈과 얼음을 친구 삼아 안나푸르나와 함께 영원히 머무를 것이다.'
▼ 우리나라의 기록은 * 1984년 / 은벽산악회 김영자가 셰르파 4명과 등정(세계 최초 겨울 등반 · 미확인) [네이버 지식백과] 여성이 설 자리는 정상이다 - 영광과 비운을 함께 맛본 미국 여성 등반대(1978년) (세계 탐험사 100장면, 2002.7.18., 이병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