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8일 (화) 촬영
금촌역 1번 출구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으로 가면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900번, 33번, 6번 버스를 타거나,
합정역1번 출구에서 2200번 버스를 타고 '인삼사우나'앞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파주 장릉으로 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버스가 자주 없습니다.
인삼사우나가 버스정류장이 있는 삼거리입니다.
삼거리에는 유명한 복두부집이 있습니다. 평일 점심특선으로 파는 청국장백반(10,000원)이 먹을만 합니다.
파주 장릉으로 가는 도로입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900m를 걸어가야 합니다.
논에 벼는 이제 다 베었습니다.
텅 빈 논에는 벌써 찾아온 기러기들의 쉼터가 되었네요.
수백마리의 기러기들이 나르는 모습을 보고싶어 소리를 질러도 꿈쩍도 않네요. ㅋㅋㅋ
파주 장릉의 입구입니다. 파주 장릉은 조선의 16대왕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능입니다.
능역으로 입장하면 바로 길이 두갈래로 나뉘어 지는데 우측은 능으로, 좌측은 재실로 가는 길입니다.
재실로 갑니다.
재실로 가는 길에는 고목이 된 느티나무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재실입니다.
재실,齋室.
이 건물은 인조(仁祖)와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의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이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陵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례를 할 때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그 외 부속 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문헌인 춘관통고(春官通考)에 의하면 장릉의 재실은
전사청 8칸, 제기고 2칸, 안향청 6칸, 재실 5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재실의 정문입니다. 우측에 말에서 내릴 때 발판이 되는 하마석이 있습니다. 다른 곳의 재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석물입니다.
정문으로 들어 가면
2단의 석축을 쌓아 높힌 마당이 있고, 마당 위에 또 석축의 기단을 쌓아 집을 지었습니다.
마당의 우측에서 본 전체적인 모습입니다. 재실은 행랑채를 포함 모두 네 동의 건물로 구성되었습니다.
좌측 건물이 전사청 건물, 가운데 건물이 퇴칸까지 6칸의 건물이지만 재실 건물 같습니다.우측 세칸의 건물은 제기고 같네요.
우측에 있는 세칸짜리 건물의 뒷모습.
정문 바로 앞에 있는 6칸의 재실 건물의 뒷모습입니다. 뒤의 네번째 칸부터는 반칸의 건물이 더 붙어 있어 지붕을 늘렸습니다.
앞에서 보면 좌측면에도 반칸을 더 달아낸 퇴칸을 만들어 아궁이와 다락을 만들었습니다.
우측의 건물은 8칸의 전사청 건물 같습니다. 제사 때 음식으 마련하던 부억이 있습니다.
마당앞에 쌓은 석축.
파주 장릉(坡州 長陵)은 조선16대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1594~1635)의 능이다.
인조는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아들로 1623년에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이괄의 난(1624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을 겪었으며,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과 수어청을 새로
만들었다. 인열왕후는 한준겸의 넷째 딸로 1623년에 왕비가 되었으며, 6남(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그 외 2남 조졸)
1녀(조졸)을 낳았다. 장릉은 처음1635년(인조 14)에 인열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파주 운천리에 능을 조성하였고,
1649년(인조 27)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뱀의 피해가 있자, 1731년(영조 7)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옮겨지면서 합장릉으로 조성되었다. - 현지 설명문 -
재실을 나와 능으로 가는 길입니다. 가운데 길이 능으로 올라 가는 길이고 좌우의 길은 숲길로 가는 길입니다.
왼쪽길은 숲길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이 능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가운데 억새가 있는 곳은 습지입니다.
금천교 뒤로 홍살문이 보이네요.
금천교 위에는 야자매트를 깔아 놓아 돌로 만든 다리의 상판은 보이지 않고 기둥 돌만 보입니다.
홍살문, 수라간(오른쪽), 수복방(왼쪽) 정자각, 비각(정자각 오른쪽) 능상까지 한 눈에 보이는 장릉(長陵) 풍경.
파주 장릉,坡州 長陵
파주 장릉(坡州 長陵)은 조선16대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1594~1635)의 능이다.
인조는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아들로 1623년에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이괄의 난(1624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을 겪었으며,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과 수어청을 새로
만들었다.인열왕후는 한준겸의 넷째 딸로 1623년에 왕비가 되었으며, 6남(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그 외 2남 조졸)
1녀(조졸)을 낳았다. 장릉은 처음1635년(인조 14)에 인열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파주 운천리에 능을 조성하였고,
1649년(인조 27)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뱀의 피해가 있자, 1731년(영조 7)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옮겨지면서 합장릉으로 조성되었다. 복습 ㅋㅋㅋ
모든 왕릉의 정자각 오른쪽에 있는 작은 건물은 수라간(제에 올릴 음식을 잠시 보관하는 곳)이고,
왼쪽의 건물은 수복방(지킴이) 입니다.
수라간.
수복방.
지형이 고르지 않아 중간에 계단을 두었습니다.
정자각의 내부입니다. 제향은 이곳에서...
정자각은 하늘 위에 있는 건물입니다. 따라서 기둥 아래를 칠한 하얀색은 구름을 뜻합니다. 구름위에 있는 정자각입니다.
정자각 앞에 두 칸의 퇴칸이 있습니다. 배례청입니다.
보통은 이렇게 기둥이 두 개 뿐인 두 칸의 배례청이지만 드물지만 기둥이 세 개 있는 세 칸의 배례청도 있습니다.
배례청은 단 위에 사진처럼 또 한단을 더 높였습니다.
정자각 뒤에 있는 축문을 태우는 예감과 비각입니다.
비각앞에 있는 방형(네모)의 돌은 산신석입니다.
일반인들의 묘에는 산신석이 묘 위에 있지만 왕은 산신보다 높아서, 능 아래에 산신석을 놓았습니다.
내가 이 산에 왔으니 이 산의 산신은 와서 놀다 가라고...ㅎㅎ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두 개 입니다. 소맷돌(난간)이 있는 계단이 향로입니다. 소맷돌에는 보통 구름 문양이 있습니다.
신도비 대신에 세운 비입니다. 묻힌 사람의 이름과 행적이 새겨 있습니다.
장릉은 여기까지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가까이 볼 수 없어 다른 능과 비슷해 보이지만 장릉은 태조의 건원릉 버금가게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몄는지는 곧 보여드리겠습니다.
장릉에서 숲길로 들어가는 길도 있습니다. 능의 오른편에 길이 있는데,
특별 개방인 줄 알았는데, 이 길은 상시 개방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조심 강조기간인 겨울철에는 막을 수도 있겠습니다.
올라 가는 길은 계단이 정말 가파릅니다.
뒤 돌아 본 계단 길.
헉, 소리가 절로 납니다. 뻥이라고 하시는 분들은 젊어서 그런거예요. ㅋㅋㅋ
능선까지만 오르면 괜찮습니다.
걸을만해요.
하늘에서 소리가 나길래 올려다 보니 기러기들이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아 ! 곧 겨울이 오겠네.
왕릉 숲길입니다.
습지까지 내려 왔습니다.
조선왕릉 습지.
조선왕릉 습지는 배산임수 지형을 갖추고 있는 조선왕릉의 좌청룡, 우백호 물길이 모여 낮은 능역 진입공간의 수계를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생물서식공간 역할을 하고있다.
<파주장릉> 습지의 면적은 22,800 입방미터 이며, 습지 주변 식생으로 오리나무, 버드나무, 갈참나무, 때죽나무 등이
분포하고 있다. <일성록>에는 정조 2년(1799) 장릉 홍살문 밖,어로 좌우변 저습한 곳을 준설하고 오리나무, 버드나무 및
노송나무를 옮겨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습지.
금천교.
금천교와 홍살문이 보이는 곳.
무슨 열매인지,
좀작살나무.
자생 관목류들의 열매를 보면 보통 검은 색이나 빨간 색이며 종종 흰색도 있지만 좀작살나무처럼 보라색을 띠는 것들은 매우
드물다. 보라색은 신비롭고 독특한 느낌을 주는 색으로 향기가 나는 허브 식물 중 라벤더 하면 이 보라색이 떠 오른다.
작살나무는 줄기가 뻗은 모양이 작살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파주 장릉 앞 버스정류장입니다. 벌판에 있는 마른 버스정류장이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네요.
첫댓글 조선 왕릉
파주 장릉 덕분에 감사히 배우며 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