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문경시청에서 2월초 발간 예정인 <사진으로 보는 근대 문경 100년사> 본문입니다. 글을 급히 요청해와 자료와 시간 부족 등으로 다소 내용이 미흡한 부분이 있습니다. 재미로 읽어주시길.... (권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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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촌에서 사계절 문화관광 웰빙 휴양도시로
- 근대 문경 100년사
권갑하(시인)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관문이자 지리적 요충지로 남다른 지역 문화를 축적해온 우리 문경은 그 만큼의 역사적 아픔과 선인들의 애환 또한 곳곳에 서려 있다. 그런 역사적 난관 속에서도 경제와 산업을 일구고 마침내 국내 최고의 관광 휴양도지로 거듭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100년의 문경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어려움 속에서도 늘 ‘기쁜 소식’을 만들어온 문경인들의 의지와 저력, 희망을 확인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일제의 침략과 문경의 의병 활동
1905년 을사5조약을 체결, 우리 국권의 일부를 빼앗은 일본은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해 반식민지 상태로 만들었다. 이어 1907년에는 고종황제를 무력으로 양위시키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총 궐기하였다. 민종식이 홍주에서, 최익현이 전라도에서, 충청도에서는 신돌석이, 경상도에서는 유인석이 의병을 모아 일본의 침략에 항거했다.
1907년 3월 문경에서는 운강 이강년이 의병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1895년 황후 민비가 일인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농암과 고모산성 등지에서 의기를 높이 세워 일본군에 맞섰던 이강년이 다시 봉기한 것이다. 진위대 해산으로 원주진위대가 봉기하자 운강은 원주로 가서 해산 군인과 무기, 탄약을 획득하여 배양산에 은닉시키고 각지의 의병을 모았다. 이 때 고종황제는 판서 심상훈을 보내 운강 이강년을 도체찰사를 삼는다는 칙령을 전하고 국권회복을 당부하였다. 7월 5일 운강은 제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8월 3일에는 문경 갈평에서 적의 중대병력을 대파하였고, 9월 27일에는 죽령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양양, 강릉, 삼척, 봉화서벽, 봉화재산전투 등 4개도 53개 군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1908년 6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부상으로 적에게 잡혀 순국했다. 운강 이강년 선생이 서울로 압송될 때에는 장안이 모두 철시했을 정도로 선생의 의병활동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운강 이강년 외에도 가은 민지 출신 도암 신태식 대장도 이강년 부대와 합동작전을 하다가 독립부대를 이끌고 경기도 영평(포천), 황해도 곡산, 신계, 평안도 회천, 강계 등지를 돌며 왜적을 토벌하였고, 1908년 3월에는 경기도 광릉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부상을 입어 적에게 잡히고 말았다. 가은 갈전의 이인영도 관동창의대장으로 이강년 부대와 연합 작전을 펴다가 경기도 가평 등지로 진출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이렇게 우리 문경 의병들의 목숨을 다한 의병활동에도 끝내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지 못하고 1910년 나라를 잃는 망국의 설움을 맛보아야만 했다.
문경은 1892년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경상우도의 유일한 독진(獨鎭)이었던 조령진의 관성장을 도호부사가 겸임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군(郡)제가 도입될 당시 문경은 안동부(府)에 속했는데, 이웃 군에 모두 할양되어 문경군이란 명칭이 1년 3개월 정도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이듬해 부활되었지만, 인구와 전답 규모가 너무 적어 1906년 지방구역 정비시 예천군의 동로소면과 화장면이 문경군에 편입되고, 상주군의 산서, 산남, 산동, 영순, 산북면이 편입되게 되어 오늘날 문경군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문경과 독립운동
1910년 한일 합방조약 체결한 일제는 총독부를 설치하고 무단적 식민정치를 자행했다. 애국지사는 투옥되고 신문은 폐간되었으며 각종 단체는 해산 당하고 집회는 금지 당했다. 이와 함께 각종 제도의 개편으로 우리 나라는 대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속히 해체되었다. 경제적 착취를 위한 기초적 건설사업이 진행되었고 화폐와 금융제도 및 도량형도 일본의 표준으로 바뀌었다. 대규모 토지와 임야조사가 이뤄졌고, 식량수탈 목적의 산미 산견 산우증산계획이 추진되었다. 교육과 종교 면에서도 탄압 통제와 아울러 회유정책을 써서 민족 의식의 성장과 민족운동을 근본적으로 막았다. 이에 국민들은 통분 격노하여 자결하거나 비밀결사 국민운동 형태로 전환되고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망명하는 지사가 적지 않았다.
식민통치의 편리를 위해 읍면 조직이 신설되고, 1914년 3월에는 도-부-군제에서 부의 구역을 축소시키고, 면-리의 폐치 분합도 단행되었다. 당시 문경군에서는 용궁군 서면과 함창군 동면의 율리, 전촌, 말응이 영순면에 합쳐지고, 함창군 북면 다방, 해곡이 호서남면 모전리에 편입되었다. 영순면 하차리 일부가 상주군 함창면 덕통리, 영순면 달산리, 호서남면 모전리 각 일부가 상주군 함창면 윤직리에 편입되어 11면 129리가 형성되었다. 그 뒤 1933년 신북면이 문경면에 통합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휴전으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어 세계는 평화무드가 조성되었다. 이에 힘입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민족의 분노는 3.1 독립운동으로 폭발하였다. 3.1 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2개월 동안 그 참가자 수가 50만 명을 넘었으며, 해외동포들도 크게 호응하였다. 문경의 3.1 만세운동은 4월 중순경 김룡사 학생과 갈평리 부역에 동원된 인부들에 의해 일어났다. 산북면 의거는 4월 13일 김룡사 지방학림학생 18명이 태극기를 들고 대하 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우곡리까지 내려왔으나 경찰에 검거되어 좌절되었다. 4월 15일 김병수, 신태인, 전중연 등은 도로보수를 위해 동원된 인부 40여명과 갈평장터에서 군중들과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다 일본 경찰의 야만적인 탄압에 검거되었다.
일제하 문경 출신 열사들은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은영, 류시하, 황옥을 비롯해 황목연, 신철균, 노한구, 이종필, 김락문, 이식재, 이동하, 김병우, 박열 등의 활동이 빛났다. 특히 박열은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 지하운동을 벌이다가 일황 저격음모사건으로 체포되었고,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한인경부로 있던 황옥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의열단과 손잡고 대규모 파괴 암살용 폭탄 반입 거사를 펼치다 일경에게 탐지 체포돼 중형을 구형 받았다. 신철균이 참여한 광복회는 국내외서 독립운동을 전개, 1917년 12월 13일 농암면 지동리의 자산가 조시영에게서 군자금 70원을 모금하는 등 활약을 하였다. 또 동로 명전 출신으로 이강년의 참모였던 이동하와 가은 갈전 출신으로 의병장 이인영의 실형인 이은영, 이강년의 조카로 운강 진영의 군자장을 맡았던 이식재 등은 1915년 비밀결사단체인 민단조합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1920년 9월 가은 민지리 신태식은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비밀결사단체인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아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문경 출신으로 한량이, 신현식 등도 참여하였는데, 1922년 체포되기까지 만주 군정서 재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제는 민족문화 말살정책도 강하게 펼쳤다. 이에 우리 민족은 사립학교와 서당 등에서 강습회와 야학을 열어 민족교육을 전개하였고, 동아일보 등 민족신문은 검열과 삭제, 정간 등의 탄압 속에서도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우리 문자를 지키려는 많은 지식인이 순국하였고, 일제의 한국사 왜곡 날조에 대응하여 민족사학운동이 일어났으며, 윤동주, 이육사 등 항일 저항문학도 활발하게 펼쳐져 민족의 정기를 이어나갔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9년 국민징용령을 내려 수많은 노동자를 끌고 갔으며, 한글폐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민족말살정책을 자행하였다. 1944년에는 학도근로령, 여자정신대령까지 공포하여 병력 외에 150만 명의 노동력이 강제로 끌려갔다.
조선시대 교육 기능은 향교가 담당해왔는데, 일제가 1911년 향교의 재산을 학교비라는 명목으로 박탈하는 조치를 취해 문경향교도 활동 기반을 잃고 말았다. 일제의 조선교육령에 의해 세워진 문경 최초의 신제학교는 1912년 4월 설립된 문경공립보통학교였다. 이어 1921년에 농암과 산북, 1922년에 호서남, 1925년에 마성, 1929년 동로, 1930년 산양과 가은, 1934년 영순, 1935년에 호계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보통학교 명칭은 1938년 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96년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일제하 사설 초등기관인 서당이 민족정신 유지함양에 큰 역할을 하자 일제는 서당개명을 이유로 간이학교를 세웠는데, 1934년 신북(용흥), 1935년 화산(청화), 1940년 말응(영창), 1943년 유곡(유곡), 1943년 상괴(희양), 1944년 동로부설(수평) 등이 설립되었다.
종교 활동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유서 깊은 사찰이 많이 전해오는 문경의 불교는 일제하에서도 민간 신앙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31본산의 하나인 김룡사는 불자들의 신앙의 요람지였으며, 1918년 건립된 중등과정에 해당하는 김룡사의 경흥강원은 인재 육성의 보고이자 민족정신의 성지였다. 또 봉암사는 조선시대와 일제에 의해 짓밟히고 망가진 한국 불교의 제모습을 되찾자는 20여명의 젊은 수좌들의 ‘결사’가 있었던 곳으로 1982년 서암스님이 직접 조실을 맡아 선풍을 이끌었으며, 현재에도 결제의 기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곳이다.
우리 지역에 천주교 전파는 충청지방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들어온 것이 시작이었다. 백화산 아래 마성면 상내리 한실 신자촌을 비롯해 건학, 부덕, 여우목, 사실 등지에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이곳의 많은 신자들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를 당했는데, 현재 마원리와 여우목고개 등지에 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천주교 첫본당은 1922년 9월 24일 공평리에 설립되었고, 1900년 이전부터 공소를 시작한 가은본당이 1941년 활동을 시작했으며, 1948년 함창본당이, 1953년에는 점촌본당이 세워졌다.
개신교 교회활동은 1903년 5월 마성면 동성교회(전 늘목교회)가 최초로 파악되며, 그 후 1909년 점촌 침례교회가 문을 열었다. 1912년 하괴교회, 1918년 가은 성저교회, 1920년 문경교회 등이 속속 문을 열었다. 개신교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저항해 많은 교인들이 순교를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마성동성교회 창립자는 교회 창설 후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실종되었으며, 점촌침례교회는 1913년 일경이 십자가들 달지 못하게 할 때 이에 불응한 신자들이 투옥되기도 하였다.
일제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관개와 수리시설이 확장되고 영농기술도 발달하였으나 식민지 정책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어서 농민들의 경작의욕은 낮았으며 농산물의 대부분은 공출로 착취당했다. 당시 전통 토산물로는 은어, 벌꿀, 석이버섯, 송이버섯, 흰뱀, 잣, 웅담, 인삼, 복령 등이었다. 문경에 최초의 금융기관은 1911년 10월 14일 문경면의 문경금융조합이었고, 1928년 산양면에 산양금융조합이 설립되었다. 1926년 6월에는 조합원 16명으로 문경농민조합이 설립되었는데, 당시 경북에는 34개 조합에 14,009명의 조합원이 있었다.
문경은 조선초 감무를 설치한 이래 문경군의 중심지였다. 그랬던 것이 1924년 12월 김천에서 점촌까지 철로가 놓이고, 1931년 안동까지 경북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점촌은 경북 북부지방의 농임산물 집산지로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신흥도시로 급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37년 문경에 있던 경찰서가 점촌으로 이전하였고, 1949년 1월에는 군청마저 점촌으로 옮겨져 명실공히 점촌이 문경 행정의 중심 소재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문경에 최초로 문경우편소가 문을 연 것은 1906년이었다. 1933년 점촌우편소가, 1939년 농암우편소가, 1944년 동로우편소가 개설되었고 광복후 각 읍면 지역에 우체국이 설치되었다.
광복 후 혼란과 6.25 전쟁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에 의해 민족이 양단되는 새로운 통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45년 9월8일 미군정이 시작되어 10월 15일경 문경에도 사무소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국내 정치상황은 임시정부가 정권을 이을 것을 희망하는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를 획책하는 여운영 계통의 건국준비위원회의 대립으로 날로 혼란이 깊어갔다. 문경에서도 신대식, 김동영 등이 건준 문경지부를 조직하였고, 임영학, 김은석 등 민족진영은 치안유지회를 조직하였다. 10월 16일 이승만 박사의 귀국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조직되자 문경에서도 문경군독립촉성회가 결성되어 좌익계의 인민위원회, 민족통일전선 등과 대치하였다. 12월 1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의 신탁통지를 결의하자 전국에서는 반탁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문경에서도 1946년 1월 12일 반탁위원회가 조직되고 1월 13일 점촌 장날을 기해 궐기대회를 가졌다. 민족진영의 반탁과 소련의 지시로 신탁을 지지하는 좌익계열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어 민족진영의 세력확대에 위기를 느낀 좌익계열은 과격한 파괴활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철도, 운수노조의 파업이 시작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대구 10.1폭동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우리 문경은 다행히 별 사고 없이 넘어갔지만, 살인과 방화, 약탈 등 좌익단체들은 남한 전체를 동족살륙의 현장으로 몰고 갔다.
1946년 최초의 민주선거인 입법위원 선거가 실시되어 문경에서는 군대표로 김원석을 선출하였다. 1948년 5월 10일에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해 제헌국회의원을 선출하고 8월 15일 단독정부를 수립하였다. 당시 문경에서는 무소속의 조병한이 당선되었는데, 산북 지내리에서 폭도들에 의한 선거 방해가 있었고, 12월 18일에는 대미산에 은거하던 공비들이 갈평지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총선 방해투쟁에 실패하자 공산계열은 더욱 극한적 무장반란을 획책하였다. 1948년 10월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대구에서는 국방경비대의 무기탈취사건이 발생하는 등 곳곳에서 공비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문경지역은 태백산과 지리산을 잇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공비들이 통과하는 지역이어서 특히 비극적인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1949년 4월 28일 마성지서 습격을 시작으로 문경지서 습격(4.31), 호계 부곡 공비 출현(7.15), 산북 노루목 고개 경찰 등 15명 순직(9.16), 점촌 불정리 문경탄광 습격(10.23), 농암지서 습격(10.23) 등 접전이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1949년 12월 24일에는 부대 미상의 무장 군인들에 의해 산북면 석달마을 주민 86명이 피살되고, 주택이 모두 전소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처럼 남한 전역에서 좌우 무장적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전면 남침을 감행하였다. 3년 간의 동족상잔으로 국토는 황폐화되고 막대한 인명의 희생이 생겨났다. 한국동란은 UN군 참전, 중공군 개입으로 확대되었으나,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경지역은 천연의 요새인 지세에다 영남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상황으로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950년 7월 13일 이화령 전투로부터 같은 해 7월 28일 영강방어선에서 철수하기까지 15일간의 문경 전투는 승승장구하던 적에게 최초로 심대한 타격을 가해 낙동강 교두보 구축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한 빛나는 전투였다. 특히 옥녀봉, 새봉, 오정산, 틀모산 전투에서는 하룻밤에도 고지의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뀌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북괴군이 문경을 강점하고 있던 3개월 여의 기간 중에 확인된 숫자만도 42명이 학살되었으며, 낙동강 전선이 불리해지자 구금 중이던 100여명을 철사줄로 묶어서 후퇴하다가 이화령 정상 못 미친 계곡에서 전원 학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동로 적성리 전투는 1951년 1월 13~16일까지 4일간의 격전에서 대승한 전투였다. 1.4후퇴로 제천 단양까지 진출한 적이 동로방면으로 진출할 때 아군은 1개 대대와 미10군단의 특별공격대만으로 적 사살 1,057명, 부상 900명 외에도 많은 무기를 노획하여 적을 후퇴시켰다. 이 전투에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한청 단원 24명이 용감히 싸워 전사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가장 큰 변혁은 1949년 단행된 농지개혁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더욱 심화된 지주 소작관계의 근본적 해소와 경자유전 원칙에 의한 토지소유제도의 개혁은 당시 모든 국민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현실인식 부족과 한국 지배전략 의도로 농지개혁은 기존 제도를 약간 개선하는 선에 머물러 한국 경제의 이중구조와 심각한 농업문제를 일으키는 근본 요인이 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농지개혁을 한지 20년도 안되어 전 농가의 약 34%가 다시금 소작농 형태로 전락하게 되었다.
1960년대 문경의 석탄산업
6.25 동란으로 황폐해진 국토와 경제는 온 국민의 복구 의지와 자유우방의 원조로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러나 정치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전쟁 와중인 1951년 원내 교섭단체가 구성되어 1952년 5월 26일 피난 수도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불법으로 통과되었고, 8월 5일에는 정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실시되어 이승만 후보가 당선되었다. 1954년 5월에는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문경에서는 자유당의 윤만석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9월 27일 정부는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 국무총리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 사사오입이란 희한한 계산법으로 강제 통과시켜 국민적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1956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신익희 대통령 후보의 갑작스런 서거로 선거양상이 급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는 장면이 각각 당선되었다. 1958년 5.2 국회의원 선거는 선거운동이 엄격히 규제된 상황에서 치러졌는데, 문경에서는 자유당 소속 이동녕이 당선되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1년 반 동안은 정부수립 이후 가장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었다. 자유당이 장기집권을 노려 정치적 파행을 획책한 데 따른 것으로 1958년 12월 24일 무술 경관이 양당위원을 감금한 상태에서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는 파행을 저질렀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부통령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부정선거설로 이를 규탄하는 소요사태가 전국 각지에서는 일어났다. 문경에서도 3월 13일 문경고등학교(현 문경공고) 고영조 등 학생회 간부가 중심이 되어 점촌 장날을 기해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결정하였으나 시위 직전 경찰에 체포되었다. 마침내 4월 19일 전국 대학생들의 궐기가 발생, 4월 26일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12년 집권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 민주당이 정권을 잡아 윤보선 대통령, 장면 내각 시대를 열었으나 민주당 내 신구파벌 싸움으로 결국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갈라졌다. 민주당 정부는 이렇게 국민의 소망을 저버린 채 파쟁에만 골몰하여 사회를 더욱 큰 혼란 속으로 빠뜨렸고, 급기야 5.16 군사혁명을 촉발시켰다. 이로써 제2공화국은 9개월만에 무너지고, 1963년 대통령 중심제의 제3공화국이 탄생을 보게 되었다. 제3공화국은 사회불안의 척결과 경제발전이 국가 발전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사회 안정에 힘쓰는 한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연속적으로 추진시켜 경제자립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한편 이승만 정권의 몰락과 함께 도래한 민주화 분위기에 편성해 1960년에는 시읍면장을 비롯 도지사와 특별시장까지 주민의 직선제로 뽑는 지방자치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초기부터 심각한 대립상을 노정하였으며 인사권과 재정권 등 주요사항을 여전히 중앙정부가 장악하고 있어 실제에 있어서는 유명무실했다. 1963년에는 주민등록법이 제정되어 1968년 재정비작업을 거쳐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다.
휴전과 함께 교육도 정상궤도에 올라 1952년 6월 20일 문경교육청이 호서남국교 사무실을 빌려 문을 열었다. 각 읍면에 학교도 속속 설립되어 1952년 청암중과 문경고(현공고), 1953년 의산국교, 1954년 산북중, 1955년 점촌중, 1956년 문경여중(후에 이화학원여자중학교), 1957년 신기국교, 가은중, 1958년 문경여고 등이 설립되었다. 이후 1964년 영순중, 1965년 조령분교가 조령국교로, 점촌 중앙국교, 마성 남호분교가 봉명국교로 개교하였다.
석탄산업의 활황으로 1960년대 후반 문경의 광산촌은 석탄을 확보하려고 돈다발을 들고 찾아드는 석탄업자들로 붐볐다. 우리 나라에서 석탄이 본격 개발된 것은 1930년대였다. 북한에서는 평양 부근 사동탄광이, 남한에서는 문경탄전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1939년 대한석공 은성광업소가, 1943년 봉명광업소가 문을 열었다. 일제 때에는 무연탄 수송 목적의 협궤전용철도가 운영되었으나 1955년 가은선이 개통되었다. 1956년에는 동양 최대 규모의 대한양회 문경공장이 외국 자본으로 준공되어 전쟁 복구와 건설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외국과 같은 신도시 건설과 거대한 공장 규모로 한동안 내국인들의 관광명소가 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1958년 가은 석회광업소와 1960년 대성광업소를 중심으로 문을 열었다. 1961년 문경에는 석회석, 무연탄, 흑연 등 등록광구가 16개였고, 5개 공장과 광업소 종사가가 2,600여 명에 이르렀다. 1969년에는 불정에서 문경까지를 잇는 문경선이 개통되어 문경탄광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에너지 정책을 석유로 전환함에 따라 광산업계에 찬바람이 불어왔다. 탄광 경기가 절정에 달했던 1969년 문경에는 여섯 개의 광산에서 광부 3,400여명이 한해 110만톤의 무연탄을 생산했다. 문경의 인구도 1976년까지는 줄곧 늘어나 16만 명에 이르렀으나 1980년에 14만 여명으로 줄었다.
문경 탄전지대의 중심지는 마성면 외어리 일대였는데, 한달에 2만톤을 캐내는 봉명광업소의 한 갱도는 땅 속에 수직으로 70미터를 들어간 곳에서 광구의 서남쪽으로 3km이 걸쳐 탄맥이 뻗었다. 규모가 큰 광산일수록 갱도가 깊어 탄을 캐는 광부들의 사고와 직업병은 큰 사회적 문제였다. 1979년 한 해 동안에 전국의 광산에서 5,776건이 일어났다. 그 중 659건이 경북에서 일어나 52명이 죽고 373명이 다쳤는데 거의 문경의 광산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직업병도 심각해 당시 갱에서 작업하는 광부의 10% 정도가 규폐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외에도 캄캄한 갱 속에서 작업함에 따른 눈병, 중노동으로 생기는 근육과 관절의 질병, 착암기의 진동에서 오는 신경염 등 직업병도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새마을운동과 녹색혁명
1970년 7월 7일 서울 부산간 428km의 경부선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전국이 일일 생활권 시대를 맞았다. 1971년 8월 이산가족찾기운동 추진을 위한 역사적인 판문점 만남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외세 의존 없는 자주평화통일' 등 7개항의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어 민족 통일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러나 대학가는 통제불능의 학생데모가 이어졌고 정치 경제 사회는 불안이 증폭되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는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을 전격 단행하였다.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중지시키고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이 헌법으로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게 되어 전국적으로 2,359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문경에서는 점촌(장정석, 윤성길), 문경(정복영, 오재경), 가은(정승도, 김광연), 영순(홍응일), 산양(주도명), 호계(문경옥), 산북(장섭), 동로(하정국), 마성(김한영), 농암(조덕규) 등이 선출되었으며, 이를 통해 12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날로 거세지자 박대통령은 1975년 유신헌법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국민의 재신임을 얻는다. 그러나 야당 측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런 가운데 박대통령은 1978년 12월 제9대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다. 야당의 대정부 투쟁은 더욱 가격해졌고 급기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 당하는 사태로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부산마산 사태가 발생하였고, 1979년 10월 26일에는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이 피격 서거하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 제4공화국이 막을 내렸다.
우리 경제는 1960년대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그 핵심은 중화학 중심의 공업화였고, 공업화는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그 골간을 이루었다. 1970년 4월 ‘새마을 가꾸기 운동’으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이듬해 박정희 대통령이 모범부락으로 뽑힌 경북 영일군 문성동 마을을 시찰하는 자리에서 잘 살아보겠다는 정신을 전국적으로 확산토록 지시함으로써 범국민적 정신운동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새마을운동은 환경면에서 주택개량, 취락구조개선, 소도읍가꾸기, 공공이용시설 확충, 문화복지시설 향상 등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정신면에서는 근면 자조 협동정신과 안보, 경제 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근대화된 국민정신계발운동으로 확산되어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에서 선진문화의식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소득면에서는 생산기반이 확충되고 지역특화사업, 영농의 과학화로 농업소득이 증대되고, 새마을공장건설, 부엌개량, 노인소득사업 등으로 농외소득이 증대되었다.
문경에서도 새마을사업이 활발히 전개됐다. 산양면 현리는 금천을 건너는 교량 91m를 완공시켰고, 김종필 국무총리는 문경면 각서1리를 방문하여 새마을 완성부락으로 격려하였다. 주건환경개선을 위해 지붕개량을 적극 권장, 문경읍 당포2리는 1973년 가장 먼저 지붕개량 완성부락이 되었다. 점촌읍 공평2리는 달성새마을공장을 건설되어 1974년 근대화된 농촌으로 경북도지사 방문에 이어 다른 이동의 견학이 줄을 이었다. 1975년 점촌 창리에서는 폭 5m의 터널 40m를 뚫어 이웃 주평과 연결시킴으로써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높였다. 1976년 호계면 막곡리는 창리간 막곡교 224m를 지원금과 자부담으로 건설하였다. 산양 존도2리, 점촌 모전4리, 문경 마원리, 산양 반곡리 등에서 추진된 농촌주택개량사업과 취락구조개선사업은 마을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식량자급을 목표로 1972년부터 전국 농가에 통일벼가 보급되어 녹색혁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통일벼는 밥맛은 떨어지지만 수확이 월등하게 높으면서도 출수가 빠른 장점을 갖고 있었다. 1977년에는 4천만 섬을 수확, 사상 최대 대풍을 기록하여 1975년부터 4년 간 100% 이상 자급률을 기록했다.
광복 후 숱한 논란을 거듭해온 농협법이 1961년 8월 15일 마침내 제정되어 이동조합과 군조합이 농촌경제 재건 업무를 수행하였다. 마을단위 이동조합은 1960년대 후반 읍면 단위로 통합되어 창립 당시 2만 1,042개에 달하던 전국 이동조합이 1972년에는 1,567개 읍면 단위조합으로 합병되었다. 문경지역도 1961년 131개 이동조합에서 1973년 14개 읍면조합으로 합병되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합병이 이뤄져 1988년에는 10개 읍면농협이 되었다. 1999년에는 산양, 산북, 동로농협이 산동농협으로 합병되었고, 2005년에는 마성, 가은, 농암농협의 합병이 추진 중에 있다.
1971년 3월 30일 문경문화원이 출범, 향토사의 재조명 등 각종 문화사업을 전개했다. 광복 40주년을 맞은 1985년에는 향토지 <문경대관>을 발간하였고, 기관지 <문경문화>를 발간해오면서 <향토항일의병사><유곡역도> 등 많은 향토 사료집을 출간해오고 있다.
1956년 호서남면이 점촌읍으로 승격한데 이어 1973년에는 문경면과 가은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농촌형 상공도시로 급성장을 해온 점촌은 1980년 인구가 5만을 넘어섰고 1983년 도민체전을 유치하는 등 발전을 거듭해 1986년에는 점촌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다. 그러나 시군 분리로 지역이기주의와 갈등이 증대하고 개발격차가 깊어지는 데다 석탄산업의 쇠퇴로 지역경제가 침체하게 되자 1993년 시군통합추진위가 구성되었고, 이듬해 통합시의 명칭을 문경시로 확정, 재출범하게 되었다. 1975년 7월 민방위기본법이 공포되어 문경지역에도 민방위대원이 편성되었으며, 광복과 함께 의용소방대로 시작된 소방업무는 1975년 시군이 맡아오다 1985년부터는 점촌소방서가 군내 전읍면의 소방업무를 해결해오고 있다.
농산물 파동과 광산산업의 쇠퇴
1960년대부터 시작된 석탄산업 활황의 영향으로 문경의 상업은 빠른 기간에 괄목할 정도로 번창하였다. 예로부터 문경지역은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문경새재로의 요충지여서 교역이 무척 활발했고, 그로 인해 문경장, 진남장, 유곡장 등 영남대로변에 시장이 자연스럽게 개설되었다. 일제 때 시장은 8개로 권역별 5일장이 정착되었는데, 주로 거래 상품은 농축수산물로 그중 가축류가 가장 큰 규모를 차지했다.
1970년대 5일 시장은 점촌, 산양, 주평, 산북, 동로, 마성, 문경, 가은, 농암 등 9개였으며, 1979년 도매업체는 54개에 172명이, 소매업체는 1,458개에 2,239명이 종사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들면서 가축시장5개와 농협연쇄점 9개가 생겨 시장이 23개로 늘었으며, 1981년에는 점촌시장과 남부시장이 처음 문을 열어 상설시장 시대가 열렸다. 1980년대 후반으로 들면서 도로의 확장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점촌 주변의 5일장부터 그 기능을 상실해 호계, 산양, 산북 등의 시장이 폐쇄되었고, 현재는 문경, 가은, 동로, 농암 등 4개의 정기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가축시장은 점촌과 문경, 가은, 동로, 농암에서 크게 형성되었는데, 그중 가장 넓은 시장은 점촌가축시장으로 1991년 연간거래두수는 2,400두에 달했다. 문경 상공의 진흥을 위해 설립된 영주상공회의소 문경지소는 1982년 7월 설립되어 1992년 현재 모두 275개의 회원업체를 두고 있다. 이러한 상업의 발전으로 1988년 관내 금융기관은 3개 농협중앙회 본지점과 13개 읍면농협, 16개 금고, 대한교육, 동방생명, 대한보증, 한국자동차, 고려화재 등 5개 보험회사와 국민, 대구, 조흥 3개 은행 등 모두 40개에 달했다.
1960~70년대 농업정책이 저임금과 관련된 저농산물가격에 있었다면 1980년대는 개방농정으로 특징지어졌다. 중화학공업화에 따른 대외의존적 경제성장이 불가피하게 농산물 수입개방을 불러온 것이다. 이로 인한 농산물 수입자유화는 국내 농산물 값의 하락을 불러와 농가소득의 감소, 도농간의 격차 심화 및 극심한 이농을 불러왔고, 농업생산기반의 파괴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문경의 농가인구도 1971년 96,036명에서 1981년 67,372명, 1991년 41,717명으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문경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임산물은 곡물류를 중심으로 사과 등 과채류와 특용약용작물 등 다양하다. 곡물류는 큰 변동이 적은 반면 과실 생산량은 1981년 4,403톤에서 1991년 12,670톤으로 크게 성장했다. 잠견의 경우 1972년 전국 공판량의 1.9%로 경북 24개군중 6위의 규모였으나 1985년경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196농가에 40ha 규모였던 담배는 1980년 1,852농가 1,029ha에 2,231톤을 생산해 39억원 규모로 늘어났다가 2000년대는 미미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문경 송이의 경우 우수한 품질로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는데, 1970년대 전국 연평균 생산량의 6.6%인 21톤을 생산했다. 축산의 경우 전반적인 감소 추세 속에서도 한우는 1970년 10,403마리에서 1989년 11,172마리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고, 양봉도 조금 확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1981년 8월 2일 산북면 내화리 노루목고개에 경찰 전공비가 세워졌고, 1983년에는 문경시민운동장이 준공되어 제21회 경북 도민체전을 읍단위로는 전국 처음으로 개최하게 되었는데, 경기장이 1만2천명을 수용하는 큰 규모인데다 전천후 우레탄으로 만든 현대식 시설이어서 도민들의 부러움을 샀다. 1993년에는 꼭 10년 만에 제31회 대회를 다시 개최하여 성공적으로 치렀다. 씨름과 궁술, 검술 등 전통 스포츠를 바탕으로 1930년대 배구, 축구, 정구 등이 보급되어 문경은 일찍부터 스포츠 활동이 활발했다. 광복 후 문경 체육회가 구성되어 1952년 제1회 문경군민 체육대회를 호서남국민학교에서 성대하게 치렀다. 1965년 대구에서 개최된 제3회 도민체전에서는 군부 종합2위의 실적을 올려 주목을 받기도 했다.
민선 자치시대 개막과 관광산업 추진
1991년 두 차례의 지방의회 선거가 실시돼 의회가 활동에 들어갔다. 1995년 6월에는 전국 동시 4대 지방선거가 실시되어 문경에서는 초대 민선시장에 김학문 시장이 취임했다. 1991년 8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이 이뤄졌고, 12월에는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어 남북이 새로운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맞았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8월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를 단행하였다. 1993년 12월 15일에는 1986년부터 진행돼온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타결되어 농민과 야당, 재야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질 높은 민원서비스 제공과 신속 정확한 민원처리를 위한 호적 전산화사업이 1999년 4월부터 추진되어 2002년 2월 완료되었다.
문경의 지역경제를 주도해오던 석탄산업은 1989년 시행된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일반적으로 광맥이 빈약한데다 깊으며 기계화가 어렵고 고임금 등으로 생산비가 높아 수입석탄과의 경쟁이 어려운데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폐광을 유도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퇴직근로자와 광업자에게 폐광대책비를 지원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1987년 단산광업소를 시작으로 1994년 대한석탄공사가 운영하던 가은읍의 은성광업소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전체 광물 생산량은 1981년 2,861천톤을 정점으로 1991년에는 1,875천톤 규모로 줄었으며, 고용자 수도 1979년 6,102명에서 1987년 7,205명으로 늘었다가 1991년에는 2,825명으로 급감하였다. 1975년 16만 명이 넘던 문경의 인구도 8만 여명으로 줄어들었다.
교통의 요충지인데다 광산경기 덕분에 소재지인 점촌은 1970~80년대 큰 상권을 형성 ‘작은 서울’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 탄광 호황기에는 지역 농민들도 농사일과 탄광 일을 병행해 농외소득 증대에 기여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가라앉기 시작해 침체된 지역경기를 되살릴 대체산업 육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제기되었다. 이에 문경시는 백두대간 중심에 자리한 천혜의 자연경관과 문화유적을 이용해 문경을 관광과 레저 및 웰빙 휴양도시로 개발한다는 구상을 수립, 적극 추진해나갔다.
관광문경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입증한 것은 1996년 개장한 문경온천으로 2년만에 관광객 100만명 시대를 불러왔다. 이와 함께 6개 읍면동이 개발촉진지구 및 폐광지역진흥지구로 지정 받아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기반조성을 해나갔다. 이와 함께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관광자원을 개발해나갔다. 1997년 새재 입구에 문경새재박물관을 개관하였고, 1998년 11월 24일에는 고급레포츠인 행패러글라이딩의 저변 확대를 위해 문경읍 고요리 폐광부지를 활용하여 활공랜드를 개장하였다. 우리나라 TV사상 처음으로 고려사를 재조명하는 KBS 사극 <태조왕건> 촬영장 유치에 성공하여 1999년 5월 착공에 들어가 2000년 4월부터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문경새재는 한순간에 전국 최대의 관광지로 급부상해 2001년도에는 연간 400만명 대의 관광객을 유치하는 관광지로 우뚝 섰다. 1999년 5월에는 석탄박물관이 문을 열어 2001년 한해동안 40만명에 가까운 관람객을 유치했다. 석탄박물관은 국유탄광으로 문경지역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은성광업소의 폐광부지에 실제 갱도를 비롯하여 그간의 석탄산업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 교육적으로 가치가 높은 박물관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2000년 4월에는 건전한 레포츠 문화를 위해 클레이사격장을 조성하였고, 11월에는 권총, 공기총 사격장을 증설, 종합사격장의 면모를 갖추어 전국사격대회 등을 유치해오고 있다.
2000년부터는 유교문화자원과 빼어난 자연환경을 연계 개발하는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이 본격 추진되었다. 문경새재 주변 정비, 새재과거길 복원, 토천 정비 등과 문경새재 상징문, 문경도자기전시관, 진안배수지조성사업, 야외공연장, 문경유교문화관, 문경관문 성곽보수, 전통삼문 설치, 선비공원 조성, 고모산성 복원 등 관광자원을 개발해오고 있다. 또 향토출신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기념사업도 단계적으로 추진되어 현재 생가지 복원과 기념관이 건립사업이 마무리되었고, 후백제 시조 견훤의 출생설화가 전해오는 가은읍 갈전리에 있는 금하굴 부근과 농암면 일대의 견훤유적지를 개발하여 문화유적 보존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문경지역이 짧은 기간에 전국적인 관광의 메카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문경시가 개발촉진지구 및 폐광진흥지구사업과 유교문화권사업 등 정부의 지원을 관광지 진입도로 등 기반시설에 신속히 투자하고 지역문화와 역사자원을 적극적으로 관광자원화 하는 시의 적절한 추진에 따른 것이었다.
문경의 중요한 관광자원 중 하나가 전통도자기다. 문경 도자기의 역사는 조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현재 확인되는 문경백자의 요지만도 220개소에 이른다. 동로 인곡에서 시작된 도기 생산은 종곡과 소야, 생달, 적성을 거쳐 갈평, 관음으로 전파되었는데, 특히 관음요는 조선 후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에도 맥을 이어 오늘날 문경도자기의 맥을 이어주고 있다. 이러한 문경 전통 도자기 생산기술은 초기 장인으로부터 1840년 김교수, 김순경 등에 전수되었고, 1920년대 강성규를 거쳐 천한봉, 신정희, 김정옥 등으로 전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경 관음리에는 지금도 1800년대초 개창 당시의 요(窯)가 전해오고 있다. 이렇게 이어진 문경 전통 도자기는 도자기 분야 최초의 중요무형문화재인 백산 김정옥을 비롯해 천한봉, 이학천 등 훌륭한 명장을 많이 배출했으며 지금도 많은 후계 도예가들이 전통 예술적 가치가 높은 도자기를 생산해오고 있다.
농외소득증대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농공단지 조성이 추진되어 1989년 산양을 비롯해 마성(1993), 가은(1997), 영순(2000) 농공단지가 조성되었다. 1990년 12월에는 문경과 예천지역 한해 해소를 위한 농업용 경천댐이 동로 수평에 건설되었다. 1993년에는 시민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시민문화회관이 개관하여 뮤지컬,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해오고 있으며, 1996년 3월에는 군민의 숙원사업이었던 문경대학이 호계면 별암리에 세워져 8개 학과에 960명의 학생이 입학했다. 1997년에는 폐광지역 지원책으로 신기공단이 조성되었고, 농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문경농업현대화사업이 조례 제정에 맞춰 추진되었다. 1997년에는 중앙공원 내에 시립중앙도서관을 개관했고, 1998년에는 문경읍 주민들을 위해 시립문희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2000년 1월 농지개량조합과 농어촌기반공사 및 농지개량조합연합회가 통합돼 농업기반공사 문경지부가 발족하였다. 2002년 신기에 문을 연 경북지역 운전면허시험장도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21세기 사계절 웰빙 문화관광의 메카로
2004년 12월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으로 문경은 21세기 국내 최대 관광지로 발돋움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다. 건설될 예정인 문경~충주간 철도가 완공되면 문경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경북 북부 내륙 관광의 핵이 될 전망이다. 문경은 예로부터 새재와 하늘재를 통해 기호지방과 잇는 영남대로 주교통로의 관문 역할을 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현대로 들어 추풍령을 이용한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교통이 이동되었다가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으로 다시 옛날 영남대로 교통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사통팔달의 문경 교통의 발달에는 교량의 건설이 큰 역할을 했다. 1935년 점촌과 산양을 잇는 영강교가 놓인 이래 1957년 산양과 용궁을 잇는 산양교가 개통되었다. 1963년 농암 갈동리의 농암교가, 1979년 마성 신현의 진남교가 놓여졌으며, 1979년 마성 외어의 소야교가 개통되었다. 1991년에는 영순면 말응리와 예천군 풍양면을 잇는 낙동강 위의 길이 306.5m 영풍교가 준공되어 명실공히 사통팔달의 교통망 완성을 보게 되었다. 통신도 크게 발달하여 1959년 1개 밖에 없던 전화국이 1970년에는 4개, 1979년에는 11개로 늘어났다. 1982년에는 각 전화국의 전화업무 일체를 한국통신공사 점촌전화국에서 취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1959년 131대에 불과하던 전화는 1999년에는 36,907대로 증가했다.
문경지역은 정신문화를 일궈가는 문화예술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1967년 문화원 설립에 이어 1976년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가 조직되었고, 1966년 창회한 <나래시조>와 1977년 <백화문학>, 그리고 글사냥문학회 등 문학단체가 문경문학의 텃밭을 일구고 있다. 그 결과 김시종, 신후식, 권갑하 등 많은 문인들이 신춘문예 등으로 문단에 나와 활발한 문학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981년 결성된 조령한시회는 고유의 전통문화 육성에 힘써오고 있으며, 미술분야에는 1988년 점촌미술협회 창립 후 1996년 한국미협 문경지부가 출범하여 신상국, 지태섭, 박한 등이 창작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서예분야는 1978년 창립된 관산서예회와 1988년 발족된 조령연서회, 점촌서예회를 중심으로 권오택, 황규욱, 김호식 등이 문경 서예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와 함께 문경도예의 거장 천한봉과 김정옥 등 도예가들의 활동도 문경문화의 폭과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내재된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문경은 21세기 웰빙 관광휴양도시로 새롭게 도약하고 있다. 테마관광 전략을 통해 문경은 새재 옛길과 전통도자기 등을 활용한 답사 체험 관광지로, 천년고찰과 탄광촌, 생태공원, 박물관 등을 둘러보는 테마 문화관광지로, 국내 유일의 두 가지 온천수를 체험하는 사계절 체류형 보양 및 휴양관광지로, 산악자전거대회 등 천혜의 자연경관에서 펼쳐지는 마운틴페스티벌이 펼쳐지는 동적인 레포츠 관광지로의 키워나갈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 ‘태조왕건’ 촬영세트장에 이어 최근 당포리를 무대로 드라마 ‘황금사자’가 촬영되고, SBS 대하드라마 ‘연개소문’ 촬영 세트장과 영상테마파크가 석탄박물관 주변에 들어설 예정이어서 이제 문경은 국내 최대 드라마, 영화 촬영지로 확실히 뿌리내릴 전망이다.
이와 함께 전통찻사발축제를 비롯한 마운틴페스티벌, 산악인 합동시산제, 경상감사 교인식 및 도임행사 재현, 문경새재 맨발걷기 대회 등 부가가치 높은 다양한 축제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 또 국내 최초 철로자전거 운행, 전통도자기 체험장 운영, 영강레프팅, 산악자전거, 과거길 달빛 체험 여행 등의 체험 관광상품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또 통과형 관광지가 아닌 2박3일 머무는 종합관광지로 발돋움하기 위해 (주)문경레저타운 설립, 골프장과 스키장 등을 조성 중에 있고, 지역개발에 주민들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시민주 공모로 이루어진 문경관광개발(주)을 통해 문경새재 인근에 첨단 위락시설 설치 등 제2도약을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그 외에도 다목적 캠핑장 조성과 자연생태공원 및 전국 최초의 명상웰빙타운 조성도 추진 중에 있다.
이와 함께 관광과 주민소득이 연계되는 활동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전통도자기를 비롯하여 지방문화재로 황실가 가양주인 호산춘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문경사과, 명아주로 만든 효도 지팡이 청려장 등은 전국적인 명성을 확보했다. 또 문경한우, 약돌돼지, 영지버섯, 문경한과와 쌍샘배, 칡즙칡차, 청국장과 오이지, 도토리 전분 등의 특산품을 지속적으로 개발해나가고 있다.
문경의 지난 100년의 역사는 피와 땀과 용기로 일궈낸 희망 찾기의 역사로 요약된다. 일제 강점기에는 열사들의 항일 저항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6.25 전쟁기에는 치열한 격전으로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천혜의 땅이 물려준 석탄산업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상업도시로 발전하였으며 이제는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두인 건강과 웰빙 관광의 휴양 안식처로 변모해가고 있다. 각종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우리 고장은 이제 ‘한국의 할리우드’로 도약하고 있으며 흙길이 잘 보존되어 트래킹 코스로 더없이 좋은 문경새재 옛길은 ‘21세기 도보여행 일번지’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큰 인기를 누릴 전망이다. 그 동안 가꾸어온 갖가지 볼거리 즐길거리 관광자원은 청정 문경의 온갖 농특임산물과 더불어 문경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건강과 웰빙의 참행복을 선사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화위복의 역사는 절망하지 않고 피와 땀으로 일궈온 문경인들의 쉼없는 희망찾기의 결과물이다. 21세기 문경(聞慶)은 지명의 어원을 이루는 문희경서(聞喜慶瑞)의 의미대로 앞으로도 늘 기쁜 소식과 상서로운 일들이 샘솟는 웰빙의 문화관광의 고장으로 영원히 발전을 거듭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