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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좋은 말씀 스크랩 칼 폴라니를 환경사상가로 읽다
그빛을 찾아서 추천 0 조회 35 10.01.02 15: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환경과생명 2009년 여름(60호)호>

칼 폴라니를 환경사상가로 읽다
-시장의 자연 지배와 황폐화를 예언한 선구자

                           조명래(본지 편집인, 단국대 교수)


1. 들어가는 말: 시장과 자연의 만남에 대한 예고

시장(원리)에 맡겨라! 1998년 환란을 겪은 뒤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화두의 하나는 바로 시장의 신뢰에 관한 것이다. 환란이 시장원리에 반하는 한국적 ‘정실(crony) 자본주의’에서 기인하였다면, 환란 이후의 새로운 경제건설은 ‘시장원리’에 굳건히 기초해야 한다는 믿음은 우리사회의 여론 주도층 대부분이 품고 있는 것이다. 시장자유를 추종하는 믿음, 즉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그래서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이념적 지형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조명래, 2009).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정책운용의 이념만 아니라 시장을 통한 경쟁과 경제적 욕망의 끝없는 추구를 부추기고 정당화하는 일상규범과 같이 되었다. 그래서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있는 데도 보수언론에 의해 유포된 ‘경제 되살리기’ 담론은 국민적 신앙과 같이 변질되어 이를 정치적 의제로 내건 세력이 급기야 정권까지 잡는 빌미를 주었다.
모든 길은 경제적 융성으로 모아져야하고, 그 융성의 방식은 모든 걸 ‘시장’에 맡기는 데 있다는 믿음이 마치 진리와 같이 추앙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의 확산과 함께 우리사회는 언젠가부터 시장이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를 ‘시장지배사회’로 부를 수 있다 (조명래, 2002). 시장지배사회에서는 삶 전반이 자유경쟁이란 허울로 작동하는 승자독식의 정글법칙에 따라 배열될 뿐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환경의 모든 요소들이 상품화되어 시장거래 속으로 편입되어간다. 이는 돈과 자본의 논리가 삶의 내부는 물론이고, 그를 둘러싼 외부 환경전반으로 파고들어 세상을 온통 허구적 상품의 가치 사슬로 엮어 놓고 있음을 말한다. 그 결과 크게는 지구생태계를 구성하는 거시적 단위들(강, 숲, 대기, 바다 등)이 상품으로 개발되고 훼손되고 있고, 작게는 생명을 구성하는 미시적 단위들마저 상품으로(상품으로 장기이식, 체세포를 이용한 장기배양, 유전자 조작 등) 조작되고 교란되고 있다. 시장지배사회의 출현은 인간사회의 시장화를 넘어, 자연의 세계마저 시장화를 초래하고 있고, 이는 곧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위기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시장지배사회로의 전환과 그에 의한 사회적, 환경적 위기의 발발은 21세기 우리가 성찰할 수 있는 삶의 가장 근본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 반세기 전에 이러한 역사단계의 출현을 예측한 사상가 있으니, 이는 바로 칼 폴라니(Karl Polany, 이하 폴라니라 칭함)다. 그의 대표 저서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은 인류의 긴 역사 동안 전체 사회 속의 한 부분으로 통제받던 시장영역이 19세기 후반들어 독불장군같이 튀어져 나와 사회 전체를 거꾸로 호령하게 되는 대변화를 추적하고 있다. 이 대변화는, 정확히 말해, ‘시장사회’의 출현을 말한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전지구적 확산에 따른 ‘시장지배사회’의 등장과 같은 현상을 지칭하지만, 폴라니는 그 변화가 이미 19세기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시장사회로의 대전환은 사회 전반이 경제적 욕망과 시장거래 관계에 매몰되고 생명의 기반인 자연마저 상품화되어 인간 삶의 안정성이 전면적으로 해체되는 상황을 맞았다. 이러한 진단은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른 범지구적 환경 훼손과 생명적 삶의 단절이란 오늘날 현상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반세기 전 폴라니의 예단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폴라니를 주목하는 것은 그의 예단력 때문에 아니라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읽고, 그 속에서 자연에 터해 꾸려지던 인간 삶의 전체성이 해체되는 현상을 해석하고자 하는 그의 사상 혹은 이론 때문이다. 폴라니의 사상과 이론은 주로 경제학 관련 분야에서 논의되어 왔다. 이 점에서 그를 경제학 사상가라 할 수 있지만, 정작 해당분야에선 소수자에 불과하다. 이는 그가 다루는 지식의 영역이 법학, 사회학, 철학, 미학, 인류학, 교육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고, 또한 경제학 분야에서도 경제의 사회성, 제도성, 문화성을 규명하는 ‘경제인류학’이란 장르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폴라니를 자본주의 경제가 환경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 지를 헤아려 볼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한 환경 사상가로 음미로 해볼 수 있다.  
      

2. 생애의 전개: 격동기 체험의 지적 승화

폴라니는 188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캐나다 피커링에서 1964년 운명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19세기 부르주아 자본주의가 20세기 시장 자본주의로 탈바꿈하던 격동기였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폴라니는 다섯 나라를 옮아 다니면서 제국주의, 러시아 혁명, 양차대전, 파시즘, 식민지 해방, 냉전 등을 온 몸으로 체험하였다. 이 체험은 독서, 사유, 글쓰기, 논쟁 등을 통해 그의 사상과 이론으로 승화되었다 (제임스 스탠필드, 1998). 1958년 1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폴라니는 ‘격동의 시대, 세계인의 삶은 유목민의 삶이었다. 어디 한 군데 정착하지 못했고, 쫓기듯 대륙과 대륙을 넘나들었다. 생계는 불안정했지만, 사상은 풍요로웠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의 사유와 사상은 이렇듯 정치사회적 격변에 쫓겨 활동공간을 옮겨 다니면서 심화발전 하였다.  

1) 1886-1919: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절

폴라니는 비엔나에서 태어났지만 부다페스트에서 자랐다. 폴라니 형제들은 지적이고 정치적 소양을 깊이 갖춘 부모의 열정을 이어받았다. 어머니 세실 오올이 운영한 살롱에는 부다페스트 전위예술가들(아방가르드)이 늘 드나들었는데, 이곳의 지적인 자유분방함은 폴라니가 토론그룹을 통해 활동을 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임스 스탠필드, 1998). 덕분에 폴라니는 고등학생이던 열여섯에 사회주의 학생조직에 참여하면서 마르크주의와 사회민주당과의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교조적 사고를 싫어했던 그는 1907년 이곳을 탈퇴했다. 이러한 사유 패턴은 그 후에도 반복된다. 부다페스트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하는 그는 1908년에 학위를 마치지만, 법학대학원에 다시 들어가 1912년 졸업하면서 변호사가 되었다.
대학시절 그는 전공보다 마르크스주의나 사회학 등 인문학 전반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데 더 열성적이었다. 실제 1908년 그는 헝가리의 자유주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상당수가 참여하는 ‘갈릴레이 서클’을 만들어 초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 서클은 어머니가 운영하던 살롱의 손님들이 관여하였던 세기말 반문화 운동을 일반적인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이 시기 그는 게오르크 루카치, 오스크카 자스지, 칼 만하임 등과 교우하면서 ‘이상주의와 인민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젊은 시절의 사상을 형성해갔다. 사회주의자인 그가 교조적 마르크주의(특히 마르크스의 결정주의)나 사회주의에 늘 일정한 거리를 늘 둔 것은 이러한 사상적 학습 때문이다 (제임스 스탠필드, 1998).
1914년엔 헝가리 급진당 창당을 도우면서 당비서를 잠시 맡았지만 폴라니는 근본적으로 반정치적 성향의 소유자였다. 1915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폴라니는 기병대 장교로 참전하지만 폐병으로 인해 1917년 군복무에서 면제되었다. 부다페스트로 돌아온 그는 정치활동을 잠시 재개하지만 막 들어선 공산주의 정부(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가 그가 편집장으로 있던 ‘자유사상가’를 폐간하자 1919년 비엔나로 피신(사실상 망명)했다.

2) 1919-1933: 오스트리아 비엔나 시절

1919년 빈에 도착한 폴라니는 큰 수술을 받았고, 그리고 빈 교외의 하숙집에서 헝가리 망명자로 와 있던 ‘일로나 두친스카’를 만나 1923년 결혼에 이르게 된다. 당시 ‘인간이 겪는 고통’의 근원을 찾기 위한 번민에 빠져든(‘대괴수’란 제목의 글도 씀), 폴라니는 ‘결정론’(계급결정론, 토대결정론, 시장결정론 등)에 바탕을 둔 사회학이론이나 경제학이론을 거부하면서 마르크스 자본론과 함께 오스트리아 경제학자들의 주요 저작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자유주의 사상의 대부인 하이에크의 스승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사회주의 경제의 실현가능성을 둘러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인간의 사회적 실존문제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시장 자유주의와 대결하게 되는 폴라니 사상의 정초가 바로 이때부터 본격 구축되기 시작했다. 이 정초는 그가 1924년부터 1938년(실제 근무는 1933년)까지 ‘오스트리아 대중경제’란 잡지의 부편집장 겸 특집 논설위원으로서 일하면서 더욱 굳건해졌다. 저널리스트로서 폴라니는 세계의 정치경제적 사건들을 분석하거나, 기고를 통해 밑에 깔려 있는 대세의 흐름을 예측하고자 했다 (카리 폴라니-레비트, 2009). 그는 특히 19세기 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를 회복하려던 여러 실패한 시도들(예, 파시즘, 사회주의, 뉴딜정책 등)을 분석하면서 시장자유주의 혹은 시장자본주의를 세계화된 관점으로 읽고자 했다. 비엔나 시절 폴라니는 소모적이라 할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유럽 현대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분석, 경제학, 사회학, 문학, 미학 등에 걸친 광범위한 연구, 빈 노동계급과 그 문화에 대한 관찰, 페이비언주의나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 등은 모두 그가 미국과 영국에서 출간하는 후기 저작에 담겨졌다. ‘오스트리아 대중경제’지의 공공연한 좌익이었던 폴라니는 오스트리아 파시즘의 발흥으로 잡지에 대한 검열이 강화되자 1933년 영국으로 피신했다. 나치 점령으로 1938년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글은 계속 쓰지만, 이때부터 폴라니는 시장 자본주의의 기원인 영국을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칼 폴라니, 2002).

3) 1933-1947: 영국시절  

1933년 영국으로 이주한 폴라니는 왕립국립문제연구소, 노동자연합, 기독교사회주의단체 등이 주관하는 각종 모임을 통해 강연을 하거나 글을 발표하는 일에 매진했다. 특히 첫 2년간은 런던대학과 옥스퍼드대학의 시민대학에서 사회교육을 하거나 노동자교육연합에서 노동자 교육을 하면서 영국의 사회경제사나 노동현실을 천착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기독교 사회주의단체에 관계하면서 기독교 공동체 문제 등과 관련된 글을 쓰거나 편집하는 일도 함께 했다. 이 이간 동안 그는 또한 뉴욕의 국제문제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의 초청으로 미국의 38개 주를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했다. 미국에서 그는 특히 뉴딜정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칼 폴라니, 2002).
영국을 중심으로 이러한 체험하면서 폴라니가 각별히 주목하게 된 것은 영국 노동자 계급의 삶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계급사회에 대한 혐오감과 인간에게서 인간다움을 빼앗아가는 시장사회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사회가 경제적인 것으로 조직되고 사적소유가 극단적으로 발전하면서 초래된 기독교 공동체의 상실을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이루어졌다. 1933년에 출간된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 특히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The 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 of 1844)’에서 마르크스가 다룬 ‘상품 물신성, 대상화, 소외’에 대한 문제의식은 영국을 모델로 하는 시장자본주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폴라니 인식의 정초가 되었다. 이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와도 구분된다.
즉, 그가 자본주의를 혐오했던 까닭은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이유 때문에 아니라 ‘비인간되고 저열한 존재가 되며, 문화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칼 폴라니, 2002). 그에게 런던과 버밍햄, 맨처스터의 빈민가, 웨일즈의 석탄계곡, 2백5십만명의 실업자 얼굴에 새겨진 절망감, 지역의 어리석은 계급구조 등은 모두 영국의 노동자들이 ‘사악한 사탄의 맷돌들’의 노역꾼이 된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카리 폴라니-레비트, 2009). 그에게 영국의 시장경제모델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나타난 파시즘은 이러한 도덕적, 물질적 퇴락의 극치로 읽혀졌다.
순회강연 중이던 1940년 미국의 전쟁참여로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폴라니는 미국 버몬트에 있는 베닝톤 대학에서 객원으로 초빙받았다. 여기서 폴라니는 1941-1943년 사이 영국에서 체험하고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대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을 집필했다. 이는 훗날 그의 대표 저서가 되었다. 1943년 영국으로 갔던 폴라니는 전쟁이 끝난 뒤 콜롬비아 대학의 객원교수로 임명되면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 왔다.

4) 1947-1964: 미국시절

컬럼비아 대학의 객원교수로 임명을 받지만, 부인의 일로냐의 공산당 경력 때문에 미국입국이 거절되자, 그의 가족들은 캐나다 토론토 인근 피커링에 정착했다. 이후 폴라니는 배편으로 피커링과 뉴욕을 오가는 생활을 6년간 이어갔다. 폴라니는 1947년부터 1953년 퇴임할 때가지 콜롬비아대학에서 ‘일반경제사’를 주로 강의했고, 아울러 경제제도의 기원에 관한 연구도 수행했다. 퇴임 후에도 경제성장의 제도적 측면에 대한 연구를 계속 진행하여, 그 결실을 1957년에 출간된 ‘초기제국의 교역과 시장’에 담아냈다.
이 책에 실린 폴라니의 논문 ‘제도화 과정으로서 경제’는 당시 경제인류학을 주도하던 정통학설에 도전하여, 경제학계에 이른바 ‘형식주의-실질주의(formalist-substantivist) 논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칼 폴라니, 2002). 이렇게 해서 일생동안 시장사회에 맞췄던 그의 연구초점은 전통사회로 옮겨졌는데, 이는 주저 ‘대전환’에서 그가 설정한 주요 명제들을 다른 상황을 통해 실험하면서 시장사회에 대한 그의 해석을 보다 일반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진행된 연구과제를 끝낸 폴라니는 ‘기술사회의 자유’란 주제로 돌아왔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냉전으로 세계 균열이 나타나자, 폴라니는 ‘인간조건의 불변성과 문화적 차이의 실체에 대한 지식을 통해 세계평화’에 헌신하는 ‘공존(Co-Existence)’이란 잡지를 창간하는 데 마지막의 혼신을 기울였다. 창간호의 인쇄를 지켜 본 뒤 폴라니는 1964년 4월23일 피커링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3. 사상의 구성

폴라니의 사상에서 핵심은 시장자본주의라는 현대 문명의 그늘을 근원적으로 성찰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대안을 찾는 데 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을 구성하는 데는 인간들이 겪는 고통의 근원을 고민하는 축과 그 고통의 원인을 사회적 존재 조건, 즉 정치경제적 제도를 고민하는 축이 맞물러 있다. 전자가 인간의 사회적, 도덕적 실존에 관한 인문학적(오웬적) 사유라면, 후자는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사회과학적(마르크스적) 사유라 할 수 있다. 폴라니가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비판하는 사회주의자이면서 다른 사회주의자와 구분되는 것은 사회성의 정초에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선택이 깔려 있는 점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사람-사회’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그의 천착은 ‘사회경제학’이란 지식영역을 열었고, 또한 ‘공동성 혹은 공동체성’을 원리로 하는 사회주의적 대안을 모색하는 실천영역을 가능성으로 남겼다.

1) 인간주의

다른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폴라니도 사유의 단절을 겪지만, 변함없었던 것은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란 데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는 시장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인간상인 ‘호모에코노미쿠스’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폴라니에게 인간은 ‘경제적 이익의 추구’라는 하나의 본질로 환원되는 존재가 아니라 햄릿(Hamlet)과 같이 ‘의미와 결단’으로 삶다운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본질을 이루는 존재다. 인간에 대한 폴라니의 이러한 인식은 ‘총체적 존재로서 인간’을 강조했던 오웬(Owen)의 입장을 따른 것이다 (칼 폴라니, 2002).
때문에 폴라니는 시장자본주의에 의한 인간파괴를 주목하지만, 이는 단순한 경제적 박탈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총체성이 상실 되거나 억압되는 측면으로 바라본 것이다. 영혼을 가진 총체적 존재로 바라본 폴라니에게 인간은 자연에 터한 사회의 집단적 문화와 가치체계의 형성을 통해 온전한 삶을 살아간다. 인간사회의 역사도 궁극적으로 자연에 의존하는 인간 본성의 자기실현과정으로 인식된다.

2) 마르크스주의

영혼을 가진 인간이 겪는 고통에 대한 폴라니의 사유는 그 고통을 강제하는 근대 사회의 작동 방식에 관한 것으로 이어져 있다. 이는 곧 ‘사탄의 맷돌’로 부른 시장경제에 대한 폴라니의 성찰을 말한다. 사회주의라서 폴라니의 이 성찰은 19세기 부르주아 자본주의가 20세기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에 기본적으로 입각해 있다. 그러나 폴라니에게 마르크스는 인간주의의 연장선에서 읽혀진다. 부다페스트 시절, 폴라니는 마르크스를 탐독했지만, 결정주의에 빠진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이 자기행동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책임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배치된다고 하여 그를 거부했다. 비엔나 시절인 1920년대 폴라니는 ‘인간성과 자연이 직접적이고 인격적이며 투명한 관계를 맺는 사회주의 경제모델’을 찾는 과정에서 마르크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잉여의 원천으로서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를 밝히려는 마르크스의 입장이 인간 소외와 삶의 불안정을 강제하는 시장의 지배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그의 입장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로부터 다시 멀어졌다.
폴라니가 마르크스를 다시 찾은 것은 1933년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이 출간되면서이다.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마르크스가 보인 상품 물신성, 대상화, 소외의 문제의식이 시장에 의한 인간의 도덕적, 문화적 퇴락과 비인간화에 대해 폴라니가 갖는 문제의식과 유사하게 읽혀졌다. 이렇게 해서 폴라니에게 초기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는 모두 인간본성의 자기실현이 좌절되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시종일관되게 고민한 ‘하나의 마르크스’였다 (칼 폴라니, 2002).

3) 실체주의

호모에코노미쿠스로서 인간은 경제적 욕망을 무한정 추구하는 가운데 모체인 사회로부터 ‘이탈된 경제(disembedded economy)’를 독자적인 영역으로 만들어 냈다. 이는 사회로부터 시장의 분리이자 탈구를 말한다. 자율적 조정력을 갖춘 ‘형식화된 시장’은 스스로가 법칙이 되어 사회를 역으로 지배한다. 시장 지배하에 경제화(economizing)는 더 이상 인간의 실존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희소성과 욕망의 무한성에 의해 추동되는 경제적 이득 추구 그 자체가 된다. 말하자면 경제는 삶의 총체성을 떠나 독자적인 질서와 법칙으로 형식화된다는 뜻이다. 시장사회의 출현은 경제의 형식화에 따른 결과이고, 주류 경제학은 이를 경제학의 법칙과 이론으로 표현하고 있다. 폴라니는 역사적 자료의 고증을 바탕으로 ‘형식주의(formalism)’ 경제담론이나 관점을 거부한다. 대신 그는 전체 삶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생산하고 교환하며 소비하는 경제의 실체성을 주목하면서 ‘경제 인류학’이란 ‘실체주의(substantivism)’ 경제담론과 관점을 확립하고자 했다.
폴라니의 이러한 사상은 ‘가정(householding)과 돈벌이(money making)’이가 결합된 생활문화를 경제의 실체로 봤던 아리스토텔레스로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에 관한 실체론적 개념은 교역과 가격 등 경제문제를 사회적 재생산과 관련된 삶의 실체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래서 사회는 경제보다 우위에 있다. 사회가 문화적으로 무엇이 재생산되어야 하고 무엇이 공정한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결정에 지배되는 교환을 자연적 교환(natural exchange)이라 불렀다. 공동체와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재생산하기보다 오로지 단순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비자연적 교환은 폴라니에게 이탈된 경제, 즉 형식주의 경제가 조직되는 시장사회 출현의 근거가 되었다.

4) 공동체 사회주의

시장이 인간의 본질에 적합한 자연적인 제도라는 시장신화는 허구라는 것이 폴라니의 믿음이다. 이 허구는 인간사회를 시장원리로 구축하면서 진보를 꿈꾸는 유토피아 이데올로기로까지 변질되어 있다. 근대의 비극은 바로 이 시장 유토피아가 현실의 권력으로 작동하면서 인간의 삶 전체가 시장의 법칙에 의해 지배 받는 모순이 전면화된 데 있다. 이 모순은 자연과 교호하는 사회적 삶의 안정성을 해쳐 그에 따른 저항을 야기할 뿐 아니라, 자신의 터전인 사회의 기본조직을 파괴하여 시장 스스로의 지속성을 위태롭게까지 한다. 시장자본주의의 이러한 모순을 폭력적으로 극복하는 가운데 파시즘이 출현했다. 그러나 파시즘적 해결책은 민주적 정치영역을 철폐해버리고 사회에 (시장에 종속된) 경제생활만 남김으로써 삶의 도덕적, 물질적 퇴락을 더욱 촉진할 뿐이다 (칼 폴라니, 2002).
폴라니의 대안은 결국 ‘사회주의’다. 그러나 그가 꿈꾸는 사회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결단에 바탕을 두고 인격적 존재로서 인간 간의 관계로 건설되는 것이다. 이는 상품거래란 허구적 틀로 맺어지는 시장사회의 인간관계가 비인격적인, 비주체적, 반자연적인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결국 시장적 인간 결합체를 인격적, 주체적, 자연적 결속체이자 공동체로 회복하는 것이 폴라니 사회주의의 핵심이다. 길드사회주의를 예로 하는 공동체 사회주의에서 경제과정은 사회과정에 배태된(reembedded) 호혜성과 재분배의 형태로 이루어지되 지역과 문화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분권자치 틀에 담겨져야 한다. 이 공동체에서 인격적 인간관계는 자연과 인간본성에 순응하면서 지역의 시공간적 리듬과 조화를 이루면서 결속되고 지속된다는 점에서 생태공동체 원리를 일정하게 내포하고 있다 할 수 있다.


4. 시장사회로의 전환과 인간과 자연의 상품화

폴라니의 대표 저서 ‘대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은 그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자본주의의 존재양식을 밝혀내는 것이라면, 폴라니의 ‘대전환’은 시장자본주의 혹은 시장사회의 존재양식을 밝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폴라니는 사회란 모체에서 경제(시장)가 어떻게 떨어져 나와 하나의 자기조정적 체제로 기능하면서 모순을 야기하는 지를 규명하는 것으로 책의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좀 더 풀어 보면, ‘자유방임적 자본주의가 1750-1850년 사이에 영국에서 탄생하여 1930-1940년 사이 유럽과 미국에서 끝장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19세기 국민경제, 국제 경제의 통합적 거래양식이었던 비규제적 시장교환의 독특성을 역사적으로 밝혀냄으로써, 왜 시장경제의 구조와 그 작용이 사회를 분열시켰는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광범위한 사회통제로 이어지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칼 폴라니, 1991: 368).
시장사회로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논하기 앞서 폴라니는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경제가 사회적 관계에 묻혀있었고 사회경제체제도 ‘호혜성’, ‘분배’, ‘살림살이’ 등 공동체 원리를 바탕으로 하였음을 강조한다 (칼 폴라니, 1994, 1998).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시장교환이 지배적인 거래양식이 되면서 이를 독자적으로 담아내는 경제(시장)가 사회로부터 분리되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19세기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자율적 시장 규칙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경제체제다. 여기에는 실체론적 경제(substantive economy: 생계와 결부된 실질적인 재화와 용역의 제공활동)와 함께 형식론적 경제(formal economy: 생계와 무관하게 ‘조금 써서 더 많이 얻으려는(economizing)’ 합리적 이윤추구 활동)가 혼재되어 있지만 점차 후자에 의해 압도되었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 사회는 시장의 법칙과 이념에 의해 지배되는 ‘시장사회’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시장사회는 세력균형체계, 국제금융본위제, 자기조정 시장, 자유주의 국가를 축으로 하여 작동하지만 ‘자기조정 시장’이 중심으로 이룬다.
자기조정 시장은 시장의 가격 기제에 의해 재화의 생산과 분배 질서가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경제영역을 말한다. 그러나 자기조정은 시장 자체의 자율적 조정과 작동만 의미하지 않는다. 생산은 시장 판매를 위한 것이고 모든 소득은 시장판매로부터 나오는 ‘경제의 사회적  과정’ 전반이 시장기제에 의해 조정되고 작동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먼저 생산 혹은 산업을 위한 모든 요소가 상품으로 거래되는 시장이 존재해야 한다. 여기에는 이미 상품화된 요소(재화와 용역)만 아니라 상품화되지 않았거나 상품화되어선 안될 요소(예, 노동, 토지, 화폐)까지 망라한다. 말하자면, ‘생산-판매-소득’을 위한 것이라면 (즉, 형식론적 경제에서) 모든 것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구매되는 것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이 변형을 ‘상품화’ 혹은 ‘시장화’라 부를 수 있으며,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선 개별 요소를 둘러싼 기존의 사회적 관계나 구조/제도를 바꾸는 것이 필히 따라가야 한다(예, 토지를 상품화하기 위한 사적소유권제의 확립)
19세기 말 규제받던 시장이 자기조정 시장으로 바뀐 것은 이런 점에서 그 자체로 사회구조의 완전한 변형을 의미한다. 실제 자기조정 시장이 등장하면서 경제영역(시장)의 자율성을 옥죄었던 전근대적인 정치적, 사회제도들은 대폭 약화되었다. 이를 폴라니는 ‘사회가 정치영역과 경제영역으로 분리’된 것으로 말했다. 폴라니의 다른 표현으로 이 분리는 ‘사회에 묻혀 있던(embedded) 경제(시장)가 이탈한 것’이다. 이탈된 시장은 자기조정 시스템으로 작동하면서 산업의 모든 요소들을 시장으로 끌어드린다. 복잡한 산업생산을 위해 늘어난 산업요소의 안정적 공급이 시장에서 조직(판매, 구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특히 중요한 요소가 노동, 토지, 화폐다. 시장 메커니즘이 노동, 토지, 화폐라는 산업요소들에까지 확장된 것은 상업사회에 공장제가 들어오면서 나타난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들 요소들은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생산된 것으로 아니므로 실제 상품으로 변형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노동은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이고, 토지는 단지 자연의 다른 이름이며,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다. 따라서 노동, 토지, 화폐가 상품으로 묘사되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에 불과하다. 이 요소들이 거래되는 현실의 시장들은 허구의 도움으로 조직된 것이다 (칼 폴라니, 2002).
노동, 토지, 화폐가 상품인 냥, 즉 허구적 상품으로 간주된 채 시장에서 거래되고 생산요소로써의 투입은 각 요소를 둘러싼 기존 사회관계와 조직의 심대한 왜곡을 동반했다. 노동력이란 상품을 소유자가 임의로 처분하게 되면 인간의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 실체는 사회문화적 제도로부터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한 채 해체되고 쇠락하게 된다. 자연 또한 상품으로 거래되고 이용되는 동안 오염되고 파괴되어 온 생명의 삶터로서 본래적 기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화폐가 상품으로 거래되면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돈의 흐름이 경제활동 전반을 지배하게 되어 삶의 불안정화(예, 물가상승, 부도 등)와 함께 상품화가 급속히 진전된다. 결국 돈의 상품화는 ‘시장화’를 촉진해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을 토대로 하여 전개되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 전반을 ‘악마의 맷돌’ 속으로 밀어 넣게 된다. 시장사회로의 전환이 초래한 비극은 여기에 있다. 즉, 자연과 인간의 상품화(시장화)로 인간이 ‘자연과 교호하면서 꾸려가야 할 삶’(이를 생태적 삶이라 할 수 있음) 자체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게 된 것이 시장사회가 초래한 최대의 비극인 셈이다.
그러나 시장의 자기 파괴적 메커니즘에 대한 저항, 즉 사회 보호의 반작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폴라니에 의하면, 시장사회의 경향이 강화되면서, 진짜 상품에 대한 시장적인 조직방식이 확장되는 사회적 과정은 생명적 삶을 지탱하는 데 긴요한 허구적 상품(토지, 자연 등)의 시장적 조직화를 제한하는 사회적 과정과 함께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를 ‘이중적 운동’이라 불렀다. 이 모순된 두 가지 운동경향은 시장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역동성이라고 보면서, 폴라니는 19세기 이후의 사회사 전체를 이중적 운동이란 개념으로 분석했다. 폴라니에 의하면, 현실에서 이 두 대립적 운동은 통일되어 있다. 사회의 생산과정이 시장방식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선 시장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야 하지만, 동시에 시장경제의 올바른 작동은 그 기초가 되는 사회조직의 보호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대립적 운동경향의 결합 위에서 작동하는 시장사회는 그만큼 모순적이다.
이 모순은 실제 제국주의 대립, 외환의 압력, 실업, 계급 대립 등으로 외화 되었다. 그 결과 자유방임적 시장사회는 제1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허물어졌다. 20세기 초반에 풍미한 파시즘, 사회주의, 뉴딜정책 등은 이러한 상황에서 시장경제를 변형시켜 자기 조정적 시장의 기반을 벗어난 사회체제를 건설하려는 시도였다 (칼 폴라니, 1991: 371). 그러나 폴라니는 그 어떠한 시도도 방임적 시장자본주의와 시장사회의 모순을 해소시켜주지 못했다고 본다. 그에게 답은 경제력에 대한 사회의 지배력을 회복하여 시장사회의 비인격화를 없애고 다시 인격적 관계로서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진정한 사회주의의 실현이었다. 공동체 사회주의에 입각한 그의 해법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생태(사회)주의의 해법과 맥을 같이 한다. 폴라니는 이런 점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던 20세기 초반의 생태주의자라 할 수 있다.

5. 맺음말: 폴라니의 환경사상

폴라니는 시장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이를 넘어서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작업에 평생을 바친 20세기 전반부의 비판적 정치경제학자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그의 사상적 토대는 유연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학습을 바탕으로 한 ‘인간주의적 사회주의’라 할 수 있다. 비록 지금껏 그의 학문적 성과가 경제학, 그것도 제도경제학 혹은 경제인류학 영역에서 제한적으로 논의되어 왔지만, 시장자본주의 혹은 시장사회 테제에 대한 그의 분석은 경제학의 어떤 범주(예, 제도주의 경제학)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는 폴라니가 청년시절부터 공부한 마르크스의 ‘총체론적 접근방법(holistic approach)’을 ‘영혼을 가진 인간’에 그의 고민과 결부시켜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유연화 한 것의 결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분명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지만, 마르크스의 중심테제나 교조적 이념으로부터 한참 벗어나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로 쉽게 단정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미국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숨을 쉬고 사상을 발전시킨 사회주의자이자라는 사실이다. 방임적 시장자본주의 혹은 시장사회에 대한 그의 비판적 독해는 그가 사회주의적 사상으로 굳건히 무장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사회에서 경제의 위상에 대한 그의 성찰이 자본주의와 같은 역사체제에 대한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도 그의 안목이 사회주의 사상이란 큰 틀에 기초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폴라니를 20세기 전반부를 산 미국식 사회주의자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환경사상가는 결코 아니었다. 최소한 그가 평생 동안 전개한 이론적, 실천적 작업에서 환경 혹은 생태의 문제는 결코 중심주제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당시의 자본주의 상황에서 환경 혹은 생태문제의 절박성이 지금과 같이 첨예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라니 사상의 근저에는 오늘날 환경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생태적 사유가 깔려 있고, 이 점에서 우리는 그를 환경사상가로 읽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환경사상은 크게 세 차원으로 나누어 그의 전체 사상을 뒷받침하고 있다. 첫째, 그가 자본주의의 문제를 평생 고민한 것은 인간의 실존적 삶 때문이었는데, 그 삶의 정초가 인간-자연의 공존, 이를 바탕으로 한 인격적 삶의 지속, 인격적 주체간의 공동체적 결속에 있다는 그의 관점은 생태주의 사유를 반영한다. 둘째, ‘시장사회로의 전환’에 따른 모순이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기초한 삶의 해체로 나타난다고 본 그의 입장 또한 생태주의 사유를 반영한다. 셋째, 시장사회에서 삶의 해체가 자연과 인간이 허구적 상품으로 바꿔었던 것의 결과인 만큼, 그 해법은 생태주의 원리를 근간으로 하는 공동체 사회주의의 건설에 있다는 그의 관점도 생태주의 사유의 또 다른 반영이다. 이 세 가지 관점이 그의 사상 전체를 구성하는 뼈대라고 본다면, 폴라니는 궁극적으로 생태주의적 시각으로 방임적 시장자본주의를 독해하고자 했던 사상가라 할 수 있다. 다만 그의 환경사상이 언술로서 담론으로서 중심에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따른 시장지배사회의 출현은 폴라니가 반세기 전에 분석하고 예단한 바가 시공간을 넘어 지금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현상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지난 반세기 동안 시장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팽창하면서 지구촌 전체가 ‘시장 사회화’하고 있는 중이다 (조명래, 2002, 2009). 환경문제도 지구적 스케일로 확장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지구적 환경위기를 올바르게 천착해 보기 위해 폴라니적 사유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조명래, 2002, <<녹색사회의 탐색>>, 서울: 환경과 생명.
조명래, 2009, <<지구화, 되돌아보기 넘어서기>>, 서울: 환경과 생명.
제임스 R, 스탠필드, 원용찬 옮김, 1998,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 서울: 한울.
카리 폴라니-레비트, 이재원 옮김, 2009, ‘대안을 향해서: 다시 읽는 <<거대한 변환>>, www.jinbo.net/~copyle/reader/lr3-54.hwp.
칼 폴라니, 박현수 옮김, 1991, <<거대한 변환>>, 서울: 민음사.
칼 폴라니, 이종욱 옮김, 1994, <<초기 제국에서 있어서의 교역과 사상>>, 서울: 민음사.
칼 폴라니, 박현수 옮김, 1998, <<사람의 살림살이>>, 풀빛.
칼 폴라니, 홍기빈 옮김, 2002,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경제계획인가 외>>, 서울: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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