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래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도기념물 제33호 비래동고인돌(대덕구 비래동 419, 420)을 잠깐 만났다. 고인돌 2기는 419번지에 있고, 420번지에는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고인돌과 도로 사이에는 철책이 둘러쳐져 있는데 주차장에서 고인돌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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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고인돌은 덮개돌의 절반이 마치 입석처럼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눕혀져 있다. 1963년 새마을 운동 당시 동네 주민들이 덮개돌을 쪼개 표면에 새마을기를 그려 넣었다고 한다. 정확하게 어느 것이 1호이고, 2호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반으로 쪼개져 있는 고인돌이 1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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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개돌 크기는 길이 1.8m, 너비 2.5m, 두께 0.5m 가량이다. 덮개돌에는 알구멍 24개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요녕식동검 1점, 삼각만입형석촉(石鏃) 3점, 붉은간토기 1점이 있다. 요녕식동검은 등대에 돌기가 사라진 중기형이다. 슴베부분은 한반도 남부지방출토 요녕식동검의 특징인 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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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고인돌은 1호 고인돌에서 동쪽으로 약 5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9m, 너비 2.6m, 두께 0.45m이고 표면에는 알구멍 16개가 불규칙적으로 표현되었다. 출토유물은 붉은간토기편 3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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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래동고인돌유적은 1997년 4월 충남대학교박물관이 발굴조사를 담당했는데, 경부고속도로 확장구간에 위치한 것이었다. 비래동고인돌유적 발굴조사는 비래골마을회관 앞 419~420번지 일대의 계단식 논에 고인돌 2기, 또한 경부고속도로 맞은편의 구릉 정상부에 1기를 대상으로 했다. 발굴조사된 고인돌 3기외에 몇 기 더 분포하고 있는 사실도 지표조사 때 이미 밝혀진 바 있다고 한다. 1, 2호 외에는 정확한 위치정보를 알 수 없어 찾아볼 수 없었으며, 문화재 지정도 1, 2호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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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래동고인돌유적은 요녕식동검이 부장된 고인돌로서는 금강유역 최초 사례이다. 돌살촉과 같은 동반유물의 형식으로 미루어 인접 신대동취락유적과 거의 같은 시기로 보이며, 비래동고인돌의 축조 시기는 대략 BC 7~6세기경으로 추정한다. 고인돌형식은 개석식(蓋石式)고인돌에 속하는데, 한국 최초로 봉분형(封墳形) 원형성토부(圓形盛土部)가 확인되었다. 이 구조는 고인돌의 덮개돌을 매장주체부위로 쉽게 이동하기 위한 시설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한편 고인돌 건너편 마을회관 앞에는 오래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긴 세월 동안의 숱한 변화를 묵묵히 바라보고 서 있다. 앞쪽 나무 앞에 있는 설명판을 보면 나이는 570년, 높이는 16m, 둘레는 5.6m 규모라고 한다. 이 동네는 고성이씨세거지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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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시내에도 꽤 많은 고건축 유적이 있는데 다 가보지 못한다. 이번에는 유형문화재 제8호 송애당(松崖堂 대덕구 중리동 115)을 들렀는데 지난 답사 때 들렀던 쌍청당 인근이었다. 대덕구에는 이밖에도 동춘당을 비롯한 많은 고건축 유적이 있으므로 동선을 잘 구성하여 한꺼번에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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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 동춘당 송준길선생의 영향인지 대전과 그 인근에는 은진송씨 관련 유적들이 무척 많은데 이 송애당은 경주김씨 관련 유적이다.
물론 이 집안은 다음 답사지인 정려에서 언급하겠지만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은진송씨와 연결되어 있기는 하다. 송애당은 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때 김경여(金慶餘 1597∼1653)가 처음 지은 별서 건물이다.
그의 호를 따서 송애당이라 이름 지었다. ‘송애(松崖)’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 않는 소나무의 곧은 절개와 높이 우뚝 선 절벽의 굳센 기상을 간직하겠다는 뜻으로, 김경여의 높은 기개와 충성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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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 구조는 왼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온돌방의 뒷편은 반침(半寢)을 만들었으며, 그 아래는 함실아궁이로 사용하였다. 네모기둥의 민도리집인 송애당 건물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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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이 지은 송애정사기(松崖精舍記)가 전하며 상량문(上樑文)은 창건 때의 것은 없고 중수 때의 것만 있다. 중수는 기록상 적어도 두 번인데, 첫 번째는 중수 상량문의 찬자인 송환기(宋煥箕, 1728~1807)의 생존시기로 따져 그 어느 때일 터이고 그 다음은 고종 26년(1889)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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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독전어사(督戰御史)를 지낸 김경여선생은 효종이 즉위하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당시 청나라와 결탁한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고, 우암 송시열과 더불어 춘추대의를 세우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광유(光裕)이며, 모친은 송남수(宋枏壽)의 딸이다.
그는 이곳에서 예학의 태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동문후배들인 송시열 송준길 등과 더불어 이 당과 인근의 쌍청당(雙淸堂) 동춘당(同春堂) 그리고 비래암(飛來菴)을 번갈아 오가며 도학(道學)과 문필을 더 깊이 닦아서 회덕(懷德)이 갖는 문향(文鄕)으로서의 명성을 더욱 더 드높였다. 당세에서는 그와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 시남(市南) 유계(兪棨)를 아울러 ‘호서삼학(湖西三學)’이라 불렀고 또한 이 분들에다 창주(滄洲) 김익희(金益熙)를 더 쳐서 ‘사유생(四儒生)’이라고도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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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애당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유형문화재 제24호 은진송씨정려각(恩津宋氏旌閭閣 대덕구 법동 205-5)은 소유자가 경주김씨송애공파종중인 것으로 미뤄 연관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짐작대로 이 정려는 송애당 김경여의 어머니 송씨부인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때 나라에서 내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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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이름이나 관직을 적은 것을 정려, 혹은 정려기라고 하는데 정려각은 이 정려기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이다.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위에 낮은 네모꼴 주춧돌과 그 위에 다시 윗면만 8각 단면으로 깎은 네모난 긴 초석을 놓고 짧은 두리기둥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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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공포의 구성은 무출목 이익공계이다. 측면과 후면의 창방 위에 장화반을 1구씩 배치하여 건물을 한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공포 수법은 조선후기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아쉽게도 문을 잠가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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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찾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준비했던 대전시 민속자료 제1호 대덕법동리석장승(대덕구 법동 213)은 근처까지 가서 방향감각을 잃는 바람에 꽤나 애를 먹은 뒤에 만날 수 있었다. 문화재청에 있는 주소인 ‘대덕구 법2동 77-8번지, 95-2’은 엉뚱한 곳(어쩌면 처음 이 장승이 있었던 곳 주변일 수 있겠다.)이 검색되거나 아예 검색이 되지 않는다. 위에 괄호 안에 넣은 주소가 현재 장승이 있는 곳이 맞기는 하지만 이 주위 도로 전체의 주소이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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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동장승은 보람아파트(법동 191-1) 단지 101동 바깥쪽 동춘당로와 계족로가 만나는 사거리 모퉁이에 남장승이, 길 건너에 여장승이 있다. 인근에 주차가 만만치 않으므로 보람아파트 101동 옆에 있는 출입구를 통해 단지로 들어가 주차하고 다시 나와 101동 건물을 우측에 두고 사거리까지 걸어가는 것이 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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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동장승, 혹은 법천골장승은 거친 자연석에 눈·코·입 등을 다듬어 표현한 남·여 한 쌍의 돌장승으로, 높이는 각각 153㎝, 126㎝이다[내 측정치와는 다소 다르다]. 예전에는 법천골 마을 한복판을 흐르는 냇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천하대장군, 왼쪽에 지하여장군을 두었는데, 이 일대를 재개발 하면서 대덕구청 정원 등을 거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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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승의 몸체에는 ‘천하대장군’, 여장승의 몸체에는 ‘지하여장군’이라 새겨 놓았고, 둘 다 머리 위에 모자 모양을 표현하였다. 각진 얼굴 형태를 가진 남장승은 강인함이 엿보이고 굳게 다문 입은 무언가를 다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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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승의 대략적인 규모는 높이 160, 머리 높이 60, 머리 폭 3,5 두께 60, 하단 폭 50, 하단 두께 40cm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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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입과 턱선을 둥글게 처리하여 순한 인상을 주는 여장승은 남장승과는 달리 귀를 만들어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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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승의 대략적인 규모는 높이 140, 머리 높이 50, 머리 폭 40, 두께 30, 하단 폭 55, 하단 두께 60cm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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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승과 여장승 옆에는 각각 선돌이 서 있는데 남장승 옆의 것은 길쭉하여 남성을 상징하는 듯하고, 여장승 옆의 것은 펑퍼짐하여 여성을 상징하는 듯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아래 사진은 남장승 옆 선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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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돌은 장승을 보필한다는 말도 있고, 여장승 옆 선돌은 여자 아이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지하대장군을 도와주는 조수(助手)라고도 한다. 한편 이 선돌들은 장승 내외(內外)의 아들과 딸이라고도 한다. 또는 아기장승이라고도 부른다. 아래 사진은 여장승 옆 선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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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나무장승이었던 것을, 약 300여 년 전에 다시 돌로 세운 것이라 한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장승은 선돌이 같이 있는 점이 특이하며, 조선시대의 장승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가치 있는 민속자료이다. 음력 정월 14일 밤 12시경이면 산신제를 지낸 후 장승제를 지내는데, 마을의 액운을 막고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라 한다.
[인용 설명문 출처: 대전역사박물관,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