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이 월악에 들어왔던 그날도 이렇듯 는개가 왔을 게다. 쏴 하고 내려주면 맘이라도 씻길 텐데 눈이 되지 못한 방울방울은 고요히 세상을 가라앉힌다. 덕주공주와 마의태자의 전설 같은 구름은 모든 걸 희미하게 만들어버렸다. 옅은 길을 붙잡고 닿은 곳은 중원 미륵사지, 옛날에는 무척 큰 절이었다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은……, 사라진 것을 보러 온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는 볼 수 없다며 하늘재에서 내려온 하늘은 아스라한 풍경만을 내어준다.
935년 신라 경순왕은 왕건에게 나라를 넘겼다. 왕건에게 항복한 경순왕은 크게 영접을 받아 호화롭게 행차하였다 한다. 이에 반대한 덕주공주와 마의태자의 행차는 초라했을 게다. 하늘재를 넘어 월악산에 닿은 그날도 이렇게 추적추적 는개가 세상을 하얗게 가라앉히고 있었을 것이다.
평일에 비까지 내리니 관광객은 우리뿐이다. 잊혀진 절에는 커다란 돌로 남은 거북이와 보물 몇 호라는 석탑이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다. 안으로 걸어가자 덩치 큰 불상이 멍하니 있다.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미륵리마애석불이다.
갓을 쓴 머리는 크고 팔은 짧고 다리는 단순하게 치마를 입은 듯 적당히 선만 그었다. 어린애가 찰흙으로 주물러 만든 것처럼 조잡해 감흥이 없다. 얼굴만 천년 세월을 비껴간 듯 하얗고 섬세하게 조각된 것이 유난히 두드러진다.
주민들은 불상이 신통해서 그렇다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불상이 며칠 동안 땀을 흘린 적도 있다지만, 학자들은 화재에 그을려 얼굴만 새로 조성했을 거라고 한다. 어느 쪽이든 믿고 싶은 걸 믿으면 된다.
정면에서 보니 석탑과 석불이 반듯하게 일렬로 선 게 한눈에 보인다. 그 뒤로 월항삼봉의 산덩이가 희미하게 겹쳐 있는데 쉬 눈을 뗄 수 없는, 한국적인 그림이다. 넓은 절터는 주춧돌이 있던 흔적만 남아 이제는 풀과 나무가 세월의 공터를 메우고 있다. 잊혀진 절터의 몽유도원도 속을 거니는 게 좋았고 아름다웠다.
해가 쨍한 사람이 북적거리는 날 다시 찾으면 지금의 미륵사지라 믿지 못할 것이다.
아침이 되어도 흐림은 가시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을 거라는 일기예보를 위안 삼아 보덕암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올라갈 땐 무거운 짐을 도맡아 지고 하산할 땐 쓰레기를 주우며 산행 속에서 덕을 쌓는 홍장천(자이언트트레킹 이사)씨와 산 잘 타는 주부 장명숙(39)씨가 동행했다.
보덕암에선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가 마중 나왔다.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꼬리를 흔들어대는 녀석을 보니 마음이 명랑해진다. 뒤뚱뒤뚱 배불뚝이 새끼 강아지도 한몫한다. 이끼 낀 바위틈으로 흘러내리는 약수 맛이 깔끔하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몸이, 호흡이 변하는 것을 바라보자니 땀이 나긴 하지만 즐겁고 보람 있다.하봉에서 뻗은 주능선에 닿자 수고했다며 월악산이 선물을 준다. 나무 결결이 하얗게 빛나는 상고대를 보자 너나 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우와” 하고 감탄이 터진다. 충주호에서 일어난 안개 입자가 찬바람에 실려와 고지대의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게다.
마침 운 좋게 구름이 걷히며 햇살이 상고대를 어루만지자 장식에 불이 들어온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투명한 빛을 낸다. 인위적인 트리 불빛에 비할 수 없이 맑고 아름답다. 설경 속 어디선가 ‘닥터 지바고’의 라라가 불쑥 나타나더라도 어색하지 않으리라.
비만 오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는데 어느 새 하늘이 맑게 갰다. 몇 년 전 월악산 종주 때 폭우로 비등산로를 헤쳐 탈출하고 다시 능선에 붙어 밤 늦도록 걸었던 고달팠던 기억의 산인데, 이젠 화사한 기억으로 바뀌게 될 듯싶다.
철계단을 올라 중봉 줄기에 이르자 시야가 트이면서 먼 산이 펼쳐진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동쪽의 구름을 뚫고 솟은 소 등짝처럼 푸근한 긴 줄기, 소백산이다. 구름바다 위를 헤엄쳐 가는 동화 속 고래다. 서쪽으로는 송계리가 발아래다. 어찌나 산세가 절벽인지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볼 때의 풍경이다.
중봉을 넘어서자 빛나는 흰색 망토를 걸친 커다란 봉우리가 나타난다. 오늘 산행의 주인공인 영봉이다. 주인공이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주위로 옅은 구름이 피어오른다. 대자연의 특수효과만큼 황홀한 게 또 있을까. 신비로운 장면이 가슴속 깊은 데로 고요히 스며든다. 자연에는 진실한 감동이 있다.
산사면 우회로를 따라 거대한 달덩이를 돌아서니 달의 꼭대기로 이어진 철계단이다. 잡념을 씻어내는 역할을 맡은 긴 계단은 무념무상의 호흡을 이룰 수 있도록 사람들을 지도한다. 이 경지에 닿은 이들이 달 표면에 설 수 있는 티켓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달과 가장 연이 깊다는 산 월악의 절정 그 끝에 설 수 있다.
그 절정을 자주 맛보면 영봉이 왜 신령 영(靈)자를 쓰는지를 알게 된다.
눈이 십 리 이십 리 밖을 넘어 백 리 밖까지 가 닿는다. 구름 속에서 검은 거인들이 깨어난다. 검은 산등성이가 흘러내리는 구름 속에서 차츰차츰 선명해지고 있다.
주흘산 등성이는 구름을 뚫고 상어 지느러미가 불쑥 솟은 게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탁월한 모습이다. 만수봉으로 이어진 남쪽 줄기는 상고대가 녹아내리느라 은빛이다. 부드럽게 빛나는 산의 결에서 모락모락 구름이 핀다.
파란 하늘의 밑바탕에 구름이 화사한 붓질을 하자 검은 곡선의 거인들이 숨을 쉬며 깨어난다. 영봉은 이렇듯 세상을 온통 화사한 빛깔로 터뜨려놓아 산행이 얼마나 매혹적인 행위인지 알려준다.
첫댓글 월악산 산행기를 역사와 함께
재미 있게 써 놓았네요
저는 덕주사와 동창교쪽으로만 가 봤는데
보덕암쪽으로도 한번 가 봐야 겠네요
어릴적에 늘 보던 고향의 월악영봉인데요 전 아직 올라가보지 못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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