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관광 출입문 | ||||
1 | 2 | 중앙 통로 | 3 | 4 |
흰머리소년 | 흰머리소년 | 갈 대 | 나 병 남 | |
5 | 6 | 7 | 8 | |
허 브 | 허 브 | 김 태 영 | 김 성 곤 | |
9 | 10 | 11 | 12 | |
백 가 이 버 | 백 가 이 버 | 이 범 식 | 이 범 식 | |
13 | 14 | 15 | 16 | |
백 가 이 버 | 백 가 이 버 | 이 광 철 | 이 광 철 | |
17 | 18 | 19 | 20 | |
이 상 훈 | 이 병 님 | 윤 점 숙 | ||
21 | 22 | 23 | 24 | |
잎 싹 | 잎 싹 | 백 민 선 | 백 민 선 | |
25 | 26 | 27 | 28 | |
성 덕 |
성 덕 |
이 태 훈 | ||
29 | 30 | 31 | 32 | |
33 | 34 | 35 | 36 | |
영 빈 네 | 영 빈 네 | |||
37 | 38 | 39 | 40 | |
고 용 호 | 양 홍 영 | 임 주 형 | 임 주 형 | |
41 | 42 | 43 | 44 | 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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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異山 각 지명 유래
무작정 지리산을 떠나는것 보다 각 지명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알고 떠나면 좀더 즐거운 산행이 될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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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姓三裁)
삼한시대에 마한군에 밀리던 진한왕이 전란을 피하여 지리산 심산 유곡으로 찾아 들어
달궁 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피난할 때, 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재(八郞裁), 서쪽 능선은 정 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므로 정령재,
동쪽은 황 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케 하였으므로 성삼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피아골
'피아골'은 지리산의 관문인 노고단의 등너머서 섬진강으로 향하는 물줄기가 동남쪽으로
깊이 빠져나간 큰 계곡이다. 6.25동란 직후 '피아골'이란 영화 작품이 나왔던 탓으로
흔히들 동란 때 이곳에서 동족상잔의 피를 많이 흘려 피아골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나 그것이 아니고 오랜 옛날부터 불러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이름이다.
그 어원을 살펴 보면 옛날에 속세를 버리고 한적한 이곳 선경(仙境)을 찾은 선객들이
이곳에 오곡 중의 하나인 피를 많이 가꾸었던 연고로 자연히 피밭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
그후 점차 그 발음이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라 한다
뱀사골
'뱀사골'이란 이름의 유래는 뱀사골 계곡 초입에 있는 석실(石室)건너편에 배암사란
사찰이 있었던 데 따른 것으로 '배암사골'이란 이름이 변하여 생겼다는 것이일반적인 견해이다.
배암사 역시 정유재란 때 불타버리고 없는데, 이 사찰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아 뱀이 많고
적은 것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뱀사골은 용이나 뱀과 관련된 이름을 가진 명소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요룡대(搖龍臺)는 용이 머리를 흔들며 승천하는 모습을 의미하는 곳이며 탁용소(濯龍沼)는
큰뱀이 탈피하여 용으로 변신하는 장소, 또 뱀소는 용이 되지 못 한 이무기가 살던 곳을 뜻한다.
이밖에도 병(甁)모양의 병소, 암벽이 병풍을 두른 듯한 병풍소, 산신제를 올리던 곳이라는
제승대, 소금장수가 소금가마니를 물 속에 빠뜨렸다는 간장소, 뱀사골의 상류 일대를
지칭하는 들돌골 등이 유명하다.
노고단(老故壇, 1,506m)
노고단은 지리산의 3대 주봉의 하나로서 종주 능선상의 서쪽 기점을 이루고 있으며
등행 교통의 요지로서 화엄사, 천은사, 만복대, 피아골, 뱀사골 등 등행코스는 모두 이곳을
경유하게 된다. 노고단 정상은 길상봉(吉祥峰)이라 불리며 정상에서 완만한 경사가 서향으로
이루어진 30만 평의 넓은 고원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은 옛날 신라시대부터 지리산의 산신 선도성모(仙挑聖母)를 모시는 남악사(南岳詞)가
있었던 민속신앙의 영지로서 성모신을 국토수호의 성신(聖神)으로 받들어 나라에
서 해마다 봄가을이면 중사(中詞)의 예(禮)로서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시화연풍(時和年豊)을
비는 제사를 모셔 왔으며 그 유풍(遺風)은 신라, 고려, 조선의 삼조에 걸쳐 전승되어 왔다.
노고단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구례군 고유의 민속 명절인 곡우절(매년 4월 20일), 약수제 민속제전도
이에서 유래하며, 노고단이라는 명칭도 지리산 신령인 선도성모를 마고(痲故)할미로 존칭하여
부르게 된 데서 연유한다.
신라시대에는 이곳이 화랑들의 심신 수련의 도장으로 애용되었으며 과거 일제 30년 동안
유럽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이 50여 동이나 있었던 곳으로서 한여름에도 차가운 샘이 솟고,
기온이 서늘하며, 고원의 경관이 아름다워 동양 제1의 피서지로 유명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별장이 모두 불타버려 별장을 노고단 서남능선 약15km 지점의 왕시루봉으로 옮기게 되었다.
특히 봄 철쭉, 여름 원추리, 가을 단풍, 겨울 설화의 아름다운 경관은 모두 노고단을
지상 낙원으로 꾸며 주며, 그 주위에는 종석대(種石臺), 관음대(觀音臺), 집선대(集仙臺),
문주대(文珠臺), 청연대(靑連臺), 만복대(萬福臺) 등 명승지가 둘러 서있다.
그리고 가끔 남해에서 운무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날이면 갑자기 구름 바다가 운평선(雲平線)을 이루는
노고운해(老故雲海)의 장관을 이루는데 이 경관은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로 손꼽는다.
임걸령(林傑嶺, 1,320m)
임걸령은 노고단에서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8km거리 능선상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령(高齡)인데도 불구하고 우뚝 솟은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노고능선이 동남풍을 가려주니
녹림(綠林)속에 자리한 아늑하고 조용한 천혜의 요지이며 샘터에서는 언제나 차가운 물이 솟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날에 녹림호걸(綠林豪傑)들의 은거지가 되었던 곳으로
의적(義賊) 두목인 임걸(林傑)의 본거지였다 하여 '임걸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샘터에서 피아골쪽 암벽 밑에 막(幕)터가 있으니 이곳을 '황(黃) 호랑이 막(幕)터'라 부르며
옛날에 약초꾼 황(黃) 장사가 눈이 내리던 겨울밤에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자다가 지혜와 용기로
큰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노고단에서 임걸령까지는 약 4km의 거리이며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임걸령에서 반야봉을 향하여
가파른 오르막 능선길을 한동안 숨가쁘게 오르다 보면 평지가 나오고 계속 능선길을 가다가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면 약 2km 지점에 작은 고개가 나오는데 이곳을 노루목 삼거리라 부른다.
노루목은 반야봉에서 내려지르는 산줄기가 산중턱에서 잠깐 멈추었다가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 보는것 같은 천연의 암두(岩頭) 전망대를 이루고 있어 부르게 된 이름이다.
해발 1,500m의 노루목 암두 전망대에서 눈 밑에 펼쳐지는 피아골 원시림 계곡을 내려다 보노라면
원시림 속의 정적에서 풍겨 나오는 유적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반야봉(般若峰, 1,728m)
반야봉은 지리산 3대 주봉 중의 하나로 반야(般若)란 불교의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지혜를 뜻하는 말이니 지리(智異)와 이언동의(異言同義)로 상통하는 명칭이다.
반야봉은 지리산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수려 장엄한 이 산의 전경을 고루 한눈에 전망할 수 있으니
정상에서 바라보는 광대한 산세의 기상은 장산 거악임을 실감케하며, 반야봉에서 바라보는
낙조(落照)의 기관(奇觀)은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약 600m 거리에 있는 반야봉의 북봉은 아름드리 구상나무 거목의 상록 원시림
지대를 이루고 있어 창연한 경관 속에 태고의 정적이 깃들어 있다.
반야봉 남쪽 중턱 경사진 고원에 군략하는 철쭉 꽃밭은 지리산에서 세석평전 다음가는 철쭉지대로서
5월 하순경 꽃이 만발하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절경을 이룬다.
반야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가면 절벽 아래에 묘향대가 있다. 이곳은 옛부터 불도들이 수도하는
유적한 선암(禪庵)으로 유명하다.
토끼봉
토끼봉은 정상이 밋밋한 초원지대와 구상나무 상록수림 지대로 정연하게 구분되
어 있어 마치 인공적으로 조성한 훌륭한 정원처럼 그 경관이 매우 우아할 뿐 아니
라 반야봉의 웅장한 모습이 서쪽에 솟아 있고 북쪽은 뱀사골, 동남쪽은 화개골의
광활한 지역을 덮고 있는 울창한 수해(樹海)의 전망이 누구나 잠시 발길을 멈추고
쉬어가기에 알맞은 고봉이다. 정상 초원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지보등'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연하천(烟霞泉, 1,480m)
연하천은 명선봉의 북쪽 가슴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산지대임에도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 속에서 흐르고 있다 하여 연하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연하천은 언제나 수림 속의 맑은 공기와 싱그러운 풀향기, 꽃향기가
그윽한 지대이며 여기서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약 2km 지점의 삼각고지에 이른다.
삼각고지는 해발 1,470m의 돌출봉으로서 좌우로 탁 트인 백무동과 화개골을 시
원스럽게 볼 수 있어 저절로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곳이며, 이곳에서 좌측으로 북
쪽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여원재와 삼정산을 거쳐 실상사로 내려갈 수 있다. 삼각고
지에서 다시 종주 코스를 따라 능선길로 내려가다 형제봉으로 오르는 길목 왼쪽
능선 위에 형제 바위라 불리는 10여m 높이의 우뚝 솟은 큰 선바위를 보게 되는데
언뜻 보기에는 한 개의 큰 석상(石像)처럼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등을 맞
대고 서 있는 두 개의 석상임이 분명하다. 이 형제 바위에 얽힌 전설은, 옛날 지리
산에서 두 형제가 수도하고 있을 때 산의 요정 지리산녀의 간곡한 유혹을 받았으
나 형제가 다 같이 이를 물리치고 도통성불하고, 성불한 후에도 집요한 산녀의 유
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형제가 서로 등을 맞대고 너무 오랫동안 부
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서 그대로 두 개의 석불이 되었다고 한
다.
벽소령(碧宵嶺, 1,350m)
벽소령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45km에 달하는 지리산 종주 등반 코스의 중심
부에 위치해 있으며, 고도가 가장 낮은 산령으로서 예로부터 화개골과 마천골을 연
결하는 애환 어린 산령으로 유명하거니와 지금은 화개에서 마천까지 38km의 지리
산 중앙부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횡단 도로다. 벽소령은 광대한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룩한 고개로서 그 주위에 높고 푸른 산능들이 겹겹이 쌓여 유적한 산
령을 이루고 있다. 달밤이면 푸른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서 오
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벽소령
의 달은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다.
선비샘(1,500m)
덕평봉을 등지고 남쪽 상덕평 능선에 샘터가 있으니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는
데 수량은 비록 적으나 마르는 일이 없고 그 주위가 평탄하고 넓어서 야영하기에
적합하다. 그 샘터 위에 초라한 고분이 하나 외로이 자리잡고 있으니 이 무덤과 샘
에 얽힌 한 화전민의 서글픈 사연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연민의 정과 쓴웃음을 자
아내게 한다.
옛날 덕평 아랫 마을에 이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노인은 조상 대대로 내
려오는 화전민의 자손으로서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난에 쪼달리며 평생을 살아
야 하는 박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배우지 못 하여 무식한 데다 인상마저 못
생겨서 그 인품이 몹시 초라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대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
나 노인은 평생에 한번이라도 사람들에게서 선비 대접을 받아 보았으면 하는 소망
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늙어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형제에게 유언을 하되, 자신이
죽거든 그 시체를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효성스런 아들들은 후일
그 아버지의 유해를 샘터 위에 매장했다. 그로부터 매년 지리산은 찾는 등산객들이
이곳을 지날 때는 꼭 샘터에서 물을 마시게 되고 또 물을 마실 때면 반드시 노인
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게 되어 노인은 생건에 그리도 한이 됐던 선비
대접을 무덤 속에서 받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으리라. 후일 이 동네 사람들이 이
노인의 불우했던 생전을 위로해주기 위한 소박한 인정으로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
르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칠선봉(七仙峰, 1,576m)
칠선봉은 작은 7개의 암봉이 높은 능선 위에 자리잡고 아름다운 선경을 이루니
마치 일곱 선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노는 형상 같다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며 기암
괴석으로 이루어진 비경의 암봉들을 구름이 스쳐 지나갈 때면 더욱 아름답고 고요
한 운치를 돋구어 준다.
세석평전(細石平田, 1,400~1,714m)
세석고원은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하여 옛부터 세석평전이라 일컬어 왔다. 세
석고원의 최고봉인 촛대봉에서 서남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펼쳐지는 광활
한 세석평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넓은 고원으로서 그 주위가 12km나 된다
고 하며 상, 중, 하로 식물 분포가 구분되어 있다. 상층은 황량한 초원지대로서 지
보초, 좁쌀풀, 산새풀 등 여러 종류의 초생(草生) 종류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중
간층은 철쭉이 군락하는 관목지대이며, 하층은 구상나무와 물참나무 즉 상록수와
활엽수가 혼유림을 이루고 있어 등고선별 식물생태의 자연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장터목(1,650m)
천왕봉(天王峰)의 자매봉인 제석봉(帝釋峰)의 남쪽능선 고개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른다. 장터목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矢川) 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장터목 고개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오르면 제석
봉, 제석봉 정상은 넓은 고원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6.25동란 직후까지도 수천 그
루의 아름드리 구상나무 거목들이 원시림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는데 자유당
말기에 파렴치한 인간 송충이들의 무자비한 도벌로 인하여 애석하게도 그토록 울
창했다는 수림은 사라지고 황량한 초원으로 변하여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
었다. 제석봉을 넘어서 고색 창연한 고사목의 앙상한 선골(仙骨)들이 암벽 기슭에
위태로이 나열하고 있는 고산지대의 특이한 선경을 감상하며 가파른 몇 개의 봉우
리를 숨가쁘게 넘고 남으면 천왕봉을 지키며 하늘과 통한다는 마지막 관문인 통천
문(通天門)에 이른다. 동굴 입구에 고색창연한 옛날 필적으로 '通天門'이란 대각자
(大刻字)가 암굴 동문의 신비와 위엄을 더해주고 있는데 옛부터 부정한 자는 출입
을 못 한다는 전설이 있다.
천왕봉(天王峰, 1,915m)
천왕봉은 지리산의 최고봉 천주(天柱)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지리산의 웅
대한 기상을 상징하고 있다. 정상에는 청석표주(靑石標柱)와 지리산 산신령을 봉안
하는 성모사(聖母詞)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성모 숭상의 유적인
천왕성모의 석상과 마야부인상이 그 옛날 모셔 있었다 하며 토속적 산신 신앙의
거룩한 대상이 되었다 한다. 동서 남북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 거칠 것 없는 천왕
봉 정상에서의 전망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으며 특히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석양낙
조의 기관(奇觀)도 좋거니와, 새벽 동녘 하늘가에 끝없이 펼쳐지는 구름바다의 운
평선에서 떠오르는 천왕봉 해돋이의 장관은 천지 개벽을 보는 것 같은 천하의 기
관으로서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손꼽고 있다.그러나 높은 천왕봉의 정상은 언제나
구름에 쌓여 있어 쾌청한 날을 만나보기 어려우니 예로부터 삼대적선을 한 사람이
라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는 해학적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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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