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창작교실 8기-후 5차시 합평작(9월 9일 용)
1. 문 / 이태령2
잔뜩 찌푸린 하늘이 어둑어둑해서 새벽쯤이라고 생각했다. 아침 8시다. 식구들 모두 늦잠을 잤다. 특히 아침 잠 많은 아들은 아직 한밤중이었고, 나는 아침회의시간에 늦을 듯하여 부랴부랴 밥만 해놓고 남편에게 뒷마무리를 부탁하며 현관문을 빠져나왔다.
오전에 급한 업무를 마치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니 묵묵부답이었다. 남편도 바쁜가보다 생각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어 전화를 했다. 남편은 뜬금없이 아침에 전쟁을 치르고 나왔다고 했다. 무슨 말이냐고 묻자, 남편은 “저녁에 집에 가보면 안다. 궁금하면 애들에게 직접 전화해보시오.”하고 전화를 끊었다. 큰 아이에게 전화로 아침에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보니, “별일 없었는데”하며, “지금 밖에서 놀고 있어 바쁘다.”며 후다닥 전화를 끊었다. 남편 전화목소리는 결코 별일 없었던게 아닌 듯 싶은데 아이는 별일 없다고 하니 더 궁금해졌다.
저녁에 집에 가자마자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특별히 전쟁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문이 어찌 되었단 말인가...’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하던 중 남편이 퇴근해 왔다.
아침부터 전쟁치뤘다는 남편은 쾡해보였다. 식탁에 앉은 남편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그제서야 입을 뗐다.
아침밥을 챙겨먹이랴 출근 준비하랴 남편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 남편의 입장을 아들은 더욱 알리없었다. 아들은 먹고 난 밥그릇을 그대로 남겨둔 채 다시 잔다고 자기 방에 들어가 버렸다고 했다. 개학이 며칠 안남았는데 계속 늦잠을 자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 몇 번 깨우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해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온 아파트가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아들은 아들대로 자기가 무얼 잘못했냐며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시작되었다. 긴말 듣지 않아도 아침부터 벌어졌을 광경이 그려졌다. 부자간의 신경전은 남편이 아들방문을 있는 힘을 다해 쾅 닫고 나옴으로서 일단락 끝이 났다. 아침부터 아들과 치런 전쟁은 하루 종일 남편의 기분을 지배했을 것이다.
아들의 방문이 닫힘과 동시에 부자간 대화의 문도 함께 닫혔다.
문을 사이에 두고 벌였던 한바탕 전쟁 후, 문은 침묵의 문이 되었다. 문에는 희미하게 작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문짝에 남은 흔적은 작았지만 부자간의 마음의 문에 남겨진 상처는 깊게 자리잡았다. ‘오죽 속상했으면 아침부터 큰소리쳤을까. 그러고 출근해서 하루 종일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 그런 부모 마음을 아들이 알기나 할까...’
아들은 방문에 난 흔적을 본 듯 만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보였지만, 남편은 아니었다. 그 문을 볼 때마다 마음이 많이 불편해 보였다.
평상시에도 아들 방문은 다른 방문보다 열리고 닫힐 때마다, 뒤틀림소리가 심했고 끈끈했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면 가만있는 방문을 세게 닫음으로써 화풀이가 간접적으로 반영되던 곳이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번번히 수난당했을 방문의 애환이 새삼 느껴진다. 나또한 화가 난 감정을 표시내듯 방문을 세게 닫은 적이 많았다. 쾅, 쾅, 콰광
그 순간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의 속은 잠시 시원했을지 모르나. 다른 한쪽의 마음은 얼마나 안 좋았을까. 그 문을 통해 온갖 안좋은 감정을 함께 전해 받았을 터이니 말이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다고 세상이 사라진 것이 아니듯, 문을 닫아버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입이 꾹 닫힌 문처럼 내 얘기를 다 받아들였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안좋게 닫혀졌던 그 문을 여는 순간, 돌아올 파장은 더 커질 수있다. 아무 말없이 있다고 함부로 하다간 어느 순간 아주 큰 고장이 나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불편하다고 생각될때 미리 손을 써서 삐걱거림도 잡아줘야한다.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다. 문은 서로의 교감을 전달할 소중한 통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공간과 저 공간을 잇는 연결선상엔 항상 문이 서있다.
한사람과 다른 사람을 잇는 곳에도 마음의 문이란게 서있다. 아픈 기억이 오래 머물면 상처를 남기고, 마음의 문에도 빗장을 걸게 된다. 아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들과 남편사이에 서로의 단절된 문을 잘 다루어서, 아픈 기억이 오래되어 딱지로 굳지 않고, 마음의 문에 영원한 빗장을 잠그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며칠 후 남편은 아들의 어긋난 방문에 다시 관심을 보인다.
문짝이 맞지 않아 더 크진 소음과 삐걱거림을 줄이기 위해 남편은 경첩을 살살 조였다 풀었다했다.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레 문을 열고닫기를 반복하며, 기름칠도 해본다.
슬그머니 아들이 남편 옆으로 다가가 연장을 건내주며 조수 역할을 한다. 미세하게 뒤틀린 문과 문짝을 맞추느라 두 부자는 머리를 맞대고 말없이 조이고 풀기를 계속해본다.
둘다 서툰 솜씨 탓에 반나절이 걸려서야 문 수선은 끝이 났다. 이제 아들의 방문은 소음도 많이 줄고 끈끈함도 예전보다 줄어들어 부드럽게 열린다. 남편과 아들사이에 흐르던 침묵의 문도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함께 방문을 고치는 과정에서 부자간의 마음도 보이지 않게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했을지도, 서로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빗장도 같이 걷어내고 있었을 지도...
2. 라디오 DJ 체험하기 / 임선빈1
1. 가끔 나가는 상록봉사단에서 ”라디오DJ체험하기“로 한 날이다. 9시50분에 명촌에 있는 울산시청자미디어센터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였었다. 일행들이 기다리지 않도록 10분전에 도착했다.
2. 1층로비에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기에 내가 제일먼저 도착했나 생각하며 기다리려는데 안내데스크에서 2층으로 올라가라며 엘리베이터로 안내해주었다
3. 2층에 올라가보니 이미 세사람이 와 있었다. 서로 인사를 하며 잠시 앉아 있으려니 계단으로 예쁜아가씨가 방글방글 웃으며 올라오고 뒤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만나기로 한 일행중 마지막분이 도착했다.
4 계단으로 올라오는 아가씨도 이곳을 찾아온 손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앞에 오더니 오늘 체험하러 오신분들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자기는 오늘 체험을 도와줄 이곳에서 근무하는 강사라고 소객했다. 일행들이 너무 젊고 예쁜 아가씨라며 칭찬했더니 젊게 봐주셔서 감사하다며 중학생 아이가 있는 워킹맘이라며 한바탕 웃었다.
5, 리모콘으려 우리가 앉아있는 앞 벽면을 켜니 벽면이 두쪽으로 나뉘면서 김윤아라는 이름과 체험시 주의 사항들이 나왔다. 역시 미디어센터답다.
6. 시청자미디어센터는 경기, 수원, 인천, 강원, 부산, 울산, 광주 대전, 충북, 세종 등 전국에 10곳이 있는데 유사시에는 방송국으로 데체할 수 있도록 내장시스탬이 갖추어져 있는 곳이라고 했다.
7. 국민 누구나 가까운 미디어센터를 이용할 수 있으며 사용료는 무료인데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을 잘 모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울산은 보통 1개월전 예약을 해야만 사용이 가능한 상태라고 설명을 덧 붙였다.
8. 화면 설명이 끝난다음 오늘 체험해야 할 기본 골격만 있는 대본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가 방송해야 할 주제는 ”친구“ 였다. 기본 틀은 주어진 대본이였지만 그 안의 내용은 우리가 즉석에서 11시 까지 작성 곧바로 녹음에 들어가야 했다.
9. 워낙 팀웍이 잘되여 있는 팀이라서 막힘이 없었다. 나한테 주어진 역할은 친구를 그리워 하는 사건 2개를 만들어 방송하라고 했다. 11시 까지는 채 30분도 안 남은 것 같은데 아무도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난 학창시절 3총사로 똘똘 뭉쳐다니던 친구를 몹시 그리워 찾는 내용 1건과 절친했던 친구가 천국에 간 애뜻한 내옹을 소개하기로 생각하며 원고를 썼다. 내차례가 왔을 때 그때를 회상하며 원고를 읽고 녹음했다.
10. 녹음이 다 끝나고 우리팀 한 사람이 다행히 usb를 가지고 간 것이 있어 녹음한 것을 다운 받아올 수 있었다 단원들에게 음성파일로 전송되어왔다. 폰에서 녹음파일을 열어 들으니 우리팀에서 선택한 노래의 선곡도 주제와 잘 맞았고 진행도 매끄럽게 잘되여 있었다. 평소 본인들 음성 답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깔끔한 목소리들이다.
11. 소중한 체험이었다. 다른 필요한 미디어 교육도 이곳에서 실시하는지 확인해보고 내 시간 여건들과 맞는다면 교육을 받아보고싶다. 바쁘게 발전하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이해하며 살아가려면 역시 늘 배운다는 것이 필요한것같다. 소중한 체험을 한 하루였다.
3. 꽃/ 양경호1
1. 꽃이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존재인가?
나는 원래부터 꽃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좋아 하지도 않는다. 그런 내가 국화를 키우게 되었고 그 꽃에 오랫동안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은 큰 아이 때문인 것 같다.
딸만 둘이었던 나는 큰아이가 24살 되던 해 봄, 상상 할 수도 없는 사고로 큰 아이를 잃어 버렸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역경들과 부딪치면서 살아왔지만 딸아이의 죽음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떠한 아픔과도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서도 씻을 수 없는 고통 그 자체였다. 어린생명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우연히 국화농장을 가게 되었다.
2. 늦은 가을 쌀쌀한 바람 마다않고 힘차게 피어나는 국화의 강인한 꽃봉오리들 속에서 큰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큰아이는 다섯 살 되었을 때부터 엄마 없이도 할머니 밑에서 굳세게 잘 자랐다. 대학졸업식을 마친 며칠 후 ‘이제는 다 키웠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며칠 후 큰일을 당한 것이다.
3. 지금 농장의 꽃들은 자신의 고운 모습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곱고 예쁜 내 아이는 자신의 꽃을 채 피우기도 전에 꽃잎 지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의 가슴속에 모든 것들을 다 묻어 놓은 채.......
4. 곱고도 아름다운 국화꽃에 취해있던 나는 갑자기 그 꽃을 키워보고 싶어졌다. 아무 땅에나 심기만 하면 다른 꽃들처럼 잘 자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농장주인의 설명을 대강만 들어봐도 만만치가 않았다. 보통 노력가지고는 예쁜 꽃을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결심한 마음을 포기 할 수는 없었다. 각오를 단단히 한 다음 농장주의 가르침에 따라 꼼꼼히 배우고 몸에 익혔다.
5. 그 후 국화를 키우는 일로 나는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꼼짝 못하게 되었다. 이 녀석들은 나를 잠시도 자기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 이였다. 나 역시 큰아이 돌보듯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를 알았음인지 고맙게도 잘 자라 주었다. 그 덕분에 큰 아이를 잃어버린 슬픔을 조금씩이라도 달랠 수 있었다. 이른 봄이면 그 아이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 아이를 큰아이로 잘 키워서 여러 곳에 골고루 시집을 보냈다.
6. 청명한 가을날, 큰아이는 예쁜 꽃이 되어 종합병원으로 위문을 갔다. 그곳에는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었으며 그들의 쾌유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오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을 치료하는 의료진과 그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예쁘고 고운미소로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큰 아이는 병원뿐만 아니라 노인복지회관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다. 너무 곱고 예뻐서 할머니들로부터도 인기가 대단했다. 그들도 젊었을 때는 꽃보다 더 곱고 예뻤기 때문에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웠기 때문이리라.
7. 큰 아이는 가을이 되면 가장 바쁘다. 교회에 전도도 하러간다. 교회의 목사님이 중국에 전도하러 가야하는데 드는 여비가 만만치 않다. 어쩔 수 없이 길가에 나와 예쁜 몸매를 헐값으로 팔았다. 자금을 급히 마련하려면 헐값으로라도 받고 팔아야 한다.
8. 큰아이가 예쁜 꽃이 되어 가고 싶은 곳이 또 있다. 고아원이다. 그 곳에는 큰아이처럼 부모 없이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있어서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을 위로하러갔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엾고 외로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든 다면 이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곳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두 손을 불끈 쥐고 굳세게 살아달라는 메시지를 담고 가야한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희망과 생명의 길을 열어줄 지혜라는 것을 분명히 심어주고 와야만 한다. 큰아이는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곳을 갈 때는 가장 예쁘고 강한 모습으로 간다.
8. 이렇게 하여 나는 국화꽃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은 15년이나 지속되었다. 앞으로도 그 사랑은 계속 될 것이다. 해마다 오는 봄은 국화를 부를 것이고 늦은 가을 그 꽃은 큰아이가 되어 나를 부를 것이다. 큰아이와 국화꽃은 하나가 되어 우리들의 삶속에서 올해에도 가을하늘에 깊은 향기를 품어낼 것이다.
4. 사천왕 /윤경희1
1. 초등학교 3학년 토요일이었다. 친구들과 냇가에서 놀다 산 위에 있는 절에 올라갔다. 30분 정도 가파른 산길을 올라 절 입구에 들어서니 사천왕이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의 몇 배가 되는 크기에 잔뜩 치켜 올라간 눈썹, 불거져 나온 부릅뜬 눈, 고통에 일그러진 작은 형상을 발로 밟고 당장이라도 무기로 우리를 때릴 듯한 모습이었다. 동화책에서 보던 괴물의 형상이었다. 그 기세에 주눅이 들어 움찔하던 것도 잠시, 초등학생의 호기심은 두려움을 뚫고 올라왔다.
2. 코가 못생겼다, 저 괴물은 좀 착해 보인다는 외모 품평부터 왜 절 입구에 괴물을 세웠을까? 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창살 위에 놓인 동전을 보게 되었다. 동전은 창살 위와 사천왕 발 인근 바닥 곳곳에 있었고, 10원부터 500원까지 다양했다. 50원짜리 과자 하나가 소중했던 우리에게 동전이 여기저기 놓인 채 개방된 공간은 유혹의 장소였다. 100원짜리 몇 개 가져가서 과자를 사 먹을까? 라는 말을 누군가 했지만, 사천왕의 부릅뜬 눈과 큰 칼은 그 생각을 금방 거두게 했다.
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같은 유혹을 느끼고 돈을 가져갈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돈을 가져가지 못하게 숨기기로 했다. 창살 위나 손이 닿는 거리에 있는 돈을 모두 사천왕 뒤쪽 공간으로 힘껏 던졌다. 당시 키가 창살만 했기에 멀리 던지기 위해서 폴짝폴짝 뛰기도 했다.
4. 주말이 지나고 학교에서 만난 우리는 누구라고 할 거 없이 울상을 지으며 팔과 다리가 너무 아프다고 했다. 이렇게 동시에 아픈 이유는 사천왕 앞에서 저질렀던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잠시나마 다른 사람의 돈을 탐했던 나쁜 마음과 다른 사람이 놓아둔 동전을 마음대로 던졌던 행동에 사천왕이 저주를 내렸다고 결론 내었다.
5. 학교를 마치자마자 우리는 절에 올라갔다. 그리고 사천왕 앞에 나란히 서서 빌었다. 우선 돈을 가져가고 싶었던 마음을 반성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져가지 않았고, 돈을 던진 건 좋은 의도였으니 오해를 풀고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에 아픔은 씻은 듯이 사라져서 사천왕의 저주가 풀렸다고 안심했다.
6. 신체의 고통은 사라졌지만 나쁜 생각이나 행동을 하면 저주가 내릴 수 있다는 두려움은 가슴 한편에 남았다. 어디선가 사천왕이 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소한 행동까지 조심하곤 했다.
7. 성인이 되어서 사천왕은 괴물이 아니라 불법을 지켜주는 수호신이고 밑에 깔린 건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귀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허탈한 생각까지 들었다. 팔과 다리를 아프게 했던 저주는 산을 오르내리고 동전을 던지느라 생긴 근육통이었다.
8. 사천왕에 대한 오해는 모두 풀렸지만 지금도 사천왕문에 들어설 때는 경건한 마음으로 옷매무시를 가다듬는다. 그 앞에 서서 용서를 빌고 있는 세 꼬마를 내려다보며 웃음 지었을 사천왕은 이제는 포근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작은 잘못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어린 나가 현재의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5. 선생님, 나의 선생님 /홍미애1
1. 수강생이 건네준 송편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커피 한잔으로 여유를 부릴 때였다. 휴대전화 소리에 화면을 보는 순간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마나 반가운지, 여고 은사님이었다. 얼른 전화를 받아들고 안부를 묻고 답했다. 선생님 목소리는 세월을 훌쩍 넘어 여전히 따뜻한 울림이 있다.
2. 몇 달 전 시청에서 회원전을 할 때였다. 선생님을 뵙고 싶어 연락이 되었고 접근성 있는 전시 장소라 흔쾌히 만나러 온다고 하셨던 선생님은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으로 못오시게 되었다. “너를 언제 만날 수 있을까? 편한 시간을 알려다오. 맛있는 밥 먹자꾸나." 하시며 미안해하신다. 되려 내가 송구한 마음이 앞선다.
3. 오래전 두 번째 작품전에 한 아름 꽃을 들고 함박웃음으로 제자의 전시를 기뻐해 주셨다. 축사를 맡은 선생님은 전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오랜 제자로 여고 시절 회상해보니 꿈많은 문학소녀였다며 나를 소개했다. 순간 당황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여러 방면 잘하지 못한 제자를 좋은 기억으로 채워주고 힘 실어 주는 선생님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런 선생님께 좋은 일에는 주고받으며 근황을 알렸고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연결 끈이 이어져 왔다.
4. 선생님을 만나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 세일러복에 주름치마 단발머리 소녀로 되돌아간다. 보일 듯 말듯 여린 사춘기 감성으로 선생님을 우러러 받들고 존경했던 소중한 그 시절. 그때의 기억을 소환해 본다면 전교생 모두에게 선생님의 인기는 고공행진이었다. 내 기억에 선생님은 막대기를 들고 있는 적이 없었고 늘 학생 편으로 다가갔고 먼 거리에서 일찍 교문을 들어서는 선생님은 학교 구석구석 살피시고 제자들 사랑이 넘치는 진정한 교사였다. 목소리가 좋아 학교 행사 때마다 노래와 지휘를 맡았으니 가는 곳마다 함성이 터졌다.
5. 선생님을 처음 가까이하게 된 것은 학년 전체가 강당에 모였을 때였다. 가슴팍에 붙어있는 이름표를 새겨본 선생님은 내 이름을 한번 부르시더니 아버지를 잘 안다며 교무실로 나를 불렀다. 어떻게 아실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뒤떨어진 공부가 더 걱정되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기 절정에 있는 선생님과 가깝게 지낼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마침 YWCA 동아리 담당교사였기에 나 역시 회원으로 합류하였다. 선생님의 따뜻한 모든 것이 좋아 늘 주변을 맴돌곤 했다. 선생님 수업이 돌아오면 옷매무새를 다듬고 거울을 보는 날이 많아졌다. 수학과는 거리가 먼 나였지만 선생님 과목을 등한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지라 내 인생에 처음으로 예•복습을 열심히 했던 시절이다.
6.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지워지지않는 기억이 있다. 연필을 깎다가 칼날에 손이 베인 어느 날 양호실로 뛰어가 광범위한 소독제인 빨간약을 바른 후 붕대를 감쌌다. 의아해하던 양호 선생님. 나는 작은 상처에 비해 붕대를 넓게 싸맨 것이다. 선생님의 관심을 받을 기회는 이때라는 생각으로 교무실 주변을 맴돌며 서성거릴 때 드디어 묵직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섬광처럼 나타났다. 가슴이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누런 광목으로 둘러 싸맨 손목과 내 표정을 번갈아 보며 “어쩌다 이렇게 되었니?“ 하시며 놀라 걱정하는 선생님께 내 속마음을 들킬까 봐 기어가는 목소리로 도망치듯 숨어버렸던 일들이 어제 일처럼 가까이 스쳐 지나간다.
7. 왜 그랬을까, 선생님은 그때 일을 기억하실까. 늦었지만 꼭 고백하고 싶은 일이다. 이렇듯 아름다운 여고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향기롭고 빛나는 청춘이었다. 학교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졸업식 날 선생님과 헤어짐이 더 슬퍼 눈이 붓도록 울었던 친구들과 나였다. 그 많던 울보 친구들은 다 어디 갔을까. 담임을 한 번도 맡은 적 없었지만, 사제 간의 깊은 정으로 여기까지 왔다. 선생님과는 어떤 주제를 정하지 않아도 숭늉 넘어가듯 편안하고 항상 따뜻한 분위기로 이끌어주신다.
8. 그러고 보니 긴긴 얘기로 아버지를 만나러 집에 오신 적도 있고 나의 결혼식에도 먼 발치에서 지켜본 선생님. 이 나이 먹도록 만남이 이어진다는 선생님을 나의 지인들은 놀라움으로 부러워한다. 그럴 때마다 내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선생님은 나의 지킴이가 되고 곧은길로 가도록 인도해 주었다. 선생님이 무조건 좋았던 이 모든 과정이 세상을 밝게 보고 꿈을 키우고 이치를 깨치며 살게 한 내 여고 시절 선생님의 은혜였다고 말하고 싶다.
9. 선생님의 모든 것이 좋았고 잘 따랐던 나는 이제 중년 그 너머의 나이가 되었다. 세월이 돌고 돌아 그 옛날 싱그러웠던 지난날을 회상해본다. 빛바랜 추억은 한 편의 영화 처럼 붉은색이 되었다가 어느 날엔 파스텔색으로 변하고 여러 색깔로 스쳐 간다. 그러기에 먼길 돌아 뒤엉켜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줄 수 있는 선생님은 늘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바빠 뒤돌아보지 못했던 날들. 건조한 삶에 힘들어하며 살아가느라 바쁘다는 핑계만 둘러댔을 뿐, 굴비 한번 대접 못 한 제자를 어여삐 여기시는 정 많은 선생님을 나는 언제까지나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 그대로다.
10, 수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에 힘이 났다. 제자의 전시에 함께 못했다고 미안해하시는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 온도는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아마도 삶을 지탱하는 데 있어 어떠한 바람이 불어도 잘 밀어내고 슬기롭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붕대로 손목 전체를 감싼 어느 날 선생님을 놀라게 했던 철없던 그때가 문득 그리워진다.
6. 이사에 대한 꿈/예수백1
1. 신혼 초에 장만했던 교외의 조그만 주택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오랜 기간 살다가 몇 년 전에 이사를 할 수가 있었다.
2. 당시만 해도 건축업자들은 천편일률적인 설계도로 단독주택을 지어서 팔았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관을 빨간 벽돌로 멋지게 마무리한 단층집이었다. 멀리서 보면 아늑한 양옥으로 지어진, 그럴듯하게 보이는 집이었다.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젊은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주택매매계약을 했다. 가을이 한창 깊어 갈 즈음, 길일을 택해서 이사를 했다. 처음으로 가져보는 내 집이라 마냥 즐거웠다.
3. 이사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겨울은 예년보다 더 추웠다. 어느 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안방의 천장과 외벽이 접하는 부분에 물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깥 날씨가 춥고 방안에서 밥을 먹다 보니 수증기 때문에 그러려니 생각했다. 물기를 없앨 양으로 평소보다 연탄을 더 많이 땠다. 방바닥이 따뜻해지는 것에 비례해서 외벽 전체에 물이 더 많이 흘러내렸다. 마치 사명대사 비석에 흘러내린다는 땀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라나 우리 집에 큰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4. 시간이 지날수록 벽과 벽지 사이의 물기 때문인지 벽지는 시커먼 곰팡이로 도배된 것 같았다. 벽지가 벽에서 분리되어 방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아내와 나는 늘어진 벽지를 다시 붙이려고 했지만, 벽에서 배어져 나오는 물기 때문에 금방 떨어져 버렸다. 벽은 시커먼 곰팡이가 슨 후미진 창고를 연상케 했다.
5. 방안에 곰팡이가 있으면 곰팡이의 씨앗인 포자가 날아다닐 것은 분명했다. 우리는 그때 갓난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곰팡이 포자가 아이의 호흡기에 해로움이 될 수도 있어 아기를 불도 때지 않은 다른 방에 옮겼다. 늘어진 벽지를 뜯어내고 걸레로 벽을 깨끗이 닦아내고서야 약간 안심할 수 있었다.
6. 아내는 그날 이후 내내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졸랐다. 아내는 신규 분양아파트 조감도 선전물을 펼쳐놓고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32평형 A B타입, 28평 A B C타입...’ 같은, 건설회사가 발행한 홍보용 팜플렛이었다. 한눈에 쏙 들어오는 평면도만 보아도 아파트 내부를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아파트는 현관, 거실, 부엌, 안방, 아이들 방, 거실, 안방에 딸린 부부 화장실 등의 근사한 용어를 썼다. 일반 주택은 큰방, 작은 방, 목욕탕, 연탄창고 등과 같은 촌스러운 용어였다. 아내는 아파트 생활이 얼마나 편리한지 다 알고 있었다. 나도 골치 아픈 주택을 떠나 편리한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은 마음은 아내와 같았다.
7. 봄이 되었다. 조그만 마당이지만 옹기종기 심은 화초들에서 새싹이 움텄다. 담벼락을 타고 있는 장미 덩굴을 손보고 있는데 대문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집을 팔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선뜻, 적당한 가격이면 팔겠다고 했다. 마당을 한 바퀴 둘러 보고 나서, 다시 오겠다던 그 사람으로부터는 한 철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아파트 이사계획을 몇 번이나 세웠는지 몰랐다. 한차례 커다란 실망을 겪은 후, 나는 적극적으로 이 집을 팔고 아파트로 옮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8. 퇴근길에 보아두었던 복덕방에 가서 집을 내어놓았다. 이제는 기다리면 되겠거니 하면서 희망에 찬 이사를 상상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집을 보러오는 사람이 없었다. 몇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기에 복덕방에 가서 물어보니, 사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 잊고 지낸다고 했다. 나는 과감히(?) 내 집 판매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나는 이 집에서 영원히 살기로 작정했다. 나의 결정에 아내도 마지못해, 아니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다. 동시에 아내는 따뜻한 물 나오는 아파트에서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환상을 머리에서 지워내야 했다.
9. 이사를 포기하고 몇 년을 갖은 방법으로 결로 방지공사를 했다. 조금씩 개선은 되었지만, 결로와 함께 찾아오는 곰팡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한 지인이 2층을 증축하면 결로현상이 해결된다는 말을 듣고, 증축계약을 했다. 돈은 많이 들겠지만, 마지막 희망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완공해달라고 부탁도 건축업자에게 곁들였다.
10. 그해 늦은 가을, 우리는 그토록 바랐던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비록 대문 밖 이사가 아닌 증축된 2층으로 이사였지만, 지긋지긋한 1층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었다. 지인의 말대로 1층 외벽에 결로현상은 일어나지 않았고, 외풍도 없어 따뜻했다. 1층에 들어 온 세입자도 만족해했다. 2층에서 담 너머 볼 수 있는 전망은 덤이었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에게 쉽게 인사도 할 수 있었다. 1층도 2층도 단열이 잘 되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아내와 나는 이 좋은 집을 버리고 하마터면 아파트로 이사할뻔했다고, 이사했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하면서 지금까지 잘 참아냈다고 서로를 위로했다.
11.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2층 안방 천장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장롱을 비켜 세우고 세숫대야를 갖다 놓았다. 이런 낭패가 또 어디 있는지. 겨우 1층의 악몽에서 벗어나는가 했더니 이제는 천장에서 빗물이 새다니.
아내와 나는 탄식했다. 진즉 어떤 방법을 쓰던 이 집에서 탈출했어야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천장 쪽은 우리와 무슨 악연이 있길래 가는 곳마다 물기가 붙어 다니는지 알다가 모를 일이었다.
12.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이제는 옥상 방수에 나서야 했다. 방수 페인트를 이리 바르고 저리 바르면 어느 누가 우리 집을 사러 오겠나. 흠다리가 버젓이 보이는 집을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1층에서 2층으로 하는 이사 한 번이면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 숙명인가. 남들은 이사를 스무 번 서른 번도 넘게 잘도 하건만, 이사 한번 마음먹은 대로 못해보는 것은 또 무슨 괴이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