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후의 문명과 문명이전의 문명
중국 산동성 태산과 고차박물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 이 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 건마는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2009년 4월30일 오후3시 23분 이 태산에 올랐다. 조선 중종과 선조시대의 문인, 서예가, 관리이던 양사언이 노래한 태산은 해발 1545m로 우리나라의 태백산(1566.7m)보다 21.7m가 낮다. 중국에는 태산보다 높은 산이 부지기수로 많다. 그런데도 왜 태산이 천하에 제일 높은 산이라고 했을까.
중국 역사상 황제 칭호를 가진 왕은 368명이고 이중 72황제가 직접 태산을 올라 제사를 지냈다. 진시황제도, 한나라 한무제도 옥황대제(玉皇大帝)를 우러러 보며 국가의 발전과 자신의 만수무강을 기원 했을 것이다. 태산은 중국 산동성에 있다. 산동성은 평야가 대부분이고 이 태산만이 우뚝 솟아 있어 가장 높을 산으로 여기기 쉬웠다. 또 태산 부근에는 공자가 태어나 유학을 펼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연고로 태산의 이름은 동방예의지국까지 알려졌을 것이다. 거기다 조선 중기는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이 대단했다. 더구나 수많은 황제가 직접 태산에 올라 제사를 지낸 산이니 천하의 명산이요 천하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옥황대제를 모신 사당을 오르기 직전 해발 1500m가 넘는 산마루에는 10-
30m에 이르는 바위가 성벽처럼 둘러 있다. 이 바위에 당 송 원 명 청 등 중국 역대 국가의 대 문장가들이 온통 글을 새겨 바위병풍을 이룬다.
與國函寧 體乾潤物(여국함녕 체건윤물-나라와 더불어 만백성이 편안하고/사람마다 건강하고 생산물은 넘쳐나다) 五岳之尊(오악지존-오악중 가장 으뜸) 등 글귀가 수없이 많다. 이 바위벽은 바로 ‘문명 중국’의 역사요 중국 역사의 실체를 증언한다. 태산은 1987년 세계복합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중국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예부터 산악신앙이 있었고 전국시대 오행사상의 영향아래 5악을 숭배했다. 5악은 동악(東岳)-산동성 태산(泰山 1,545m), 서악(西岳)-섬서성 화산(華山1,997m), 중악(中岳)-하남성 숭산(嵩山1,440m), 북악(北岳)-산서성 항산(恒山 2,017m) 남악(南岳)-호남성 형산(衡山1,290m)이다. 태산이란 이름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불렀다.
지금 보다 몇 백 년에서 천 여 년 전 어떻게 이 바위 절벽에 매달려 글을 새겼을까. 물론 문장가들이 글을 써주었겠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새기는 작업이 한 달이나 두 달로 끝날 일이 아니지 않는가. 돌에 새긴 글은 글이 아니라 시간을 새긴 것이고 그 다양하고 빼어난 필체는 인간 한계에 도전한 석수(石手)들이 바친 혼신의 결정판이다. 해발1500m에 있는 바위벽에서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비가 내림에도 개의치 않고 바위에 매달린 채 사시사철 글을 새긴 석수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인생은 무엇이며 영욕을 무엇이며 문장과 학문은 인간의 영혼인가, 이를 새기는 건 인간의 운명인가. 문명이나 문화는 인간의 욕망인가 의지인가. 얼마나 많은 돌장이들이 목숨을 바쳐 이 바위에 문화의 꽃을 피었을까.
옥황대제를 모신 누각 앞뜰에는 검은 비석이 하얀 돌기둥 두 개 가운데에 보호 받듯 서 있다. 그런데 이 검은 비석에는 아무런 글자가 없어 무자비(無字碑)라고 한다. 무자비는 한(漢)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세웠다. 왜 무자비를 세웠을까. 후세의 사가들은 이사춘추(裏寫春秋)라며 그 의미를 기린다. 이사춘추는 “글자를 써놓지 않은 비석 속에 춘추시대 역사가 다 들어 있다”는 뜻이다. 말없는 말이, 말하는 말보다 의미심장한 뜻을 지닌 경우도 적지 않지 않다. 글자 없는 이 비석이 인간의 욕망과 권세와 문명과 문화까지 덧 없음을. 모든 것이 시간 따라 무(無)로 돌아감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바위병풍 아래와 옥황대제 누각에는 많은 관광객이 파시를 이룬다. 중국인이 대다수고 한국인도 적잖았다. 중국인들은 오악 중 으뜸인 태산을 오르는 것을 일생의 영광으로 여긴다.
오늘 날 중국의 명소에는 산이든 호수든 호텔이 있다. 태산은 바위산이라 꼭대기에 나무가 거의 없다. 옥황대제를 모신 누각도 바위산이다. 이 누각 옆에도, 위에도 호텔이 자리 잡았다. 이들 호텔을 세우면서 태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일부 파괴해 안타깝다. 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 아침과 저녁을 맞는다면 해돋이와 석양의 황홀함은 대단 할 것이다.
같은 날 밤 8시30분 산동성 유방(潍坊)시 고차(古車)박물관을 관람했다. 박물관은 청도와 제남을 잇는 제청고속도로에 있다. 박물관은 보통 저녁 6시에 관람이 끝나는데 우리 측 가이드가 사정 사정 해서 8시까지 오면 관람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도중 고속도로 공사관계로 도로를 우회하는 바람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했지만 박물관 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박물관은 불을 켰고 어둠을 털고 일어나 비로소 제 모습을 되찾았다.
고속도로는 바로 박물관 진입로가 있다. 박물관 주차장에서 하차한 뒤 전시관 정문을 들어간다. 약간 경사진 복도를 내려가 한참을 들어가니 박물관 전시실이다. 초등학교 교실 8-10개정도를 합한 넓이의 땅 바닥에 말과 마차의 화석이 그대로 붙어 있다. 말 머리와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났지만 지금도 막 달려날 갈 것 같은 말 화석. 사람이 앉는 자리와 바퀴가 그대로 화석이 됐는데 말이 윙하고 일어서면 덜컹하고 마차가 그대로 조립 될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완벽한 화석이다.
이 막차와 말은 지금부터 2700년 전 동주 때의 전차라고 한다. 2700년 전이면 한반도는 아직 고구려나 신라가 등장하기 약400년전 이다. 이 박물관에는 이밖에도 상나라 때 유물로 마차, 말, 사람이 미이라로 전시돼 있었다. 동주나 상은 문명 이전의 문명이다. 2700년 전에 이렇게 힘찬 말과 튼튼한 마차를 쓴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마차의 주인공을 누구일까. 이 부근 어디엔가 땅속에 있을 것인데 예산상의 문제로 아직 찾지못하고 있단다. 이 주인공이 나타나면 2700년 전 역사는 다시 한 번 안개를 걷고 우리들에게 뚜벅 뚜벅 다가 올 것이다.
태산이 문명이후의 중국 문명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면 고차 박물관은 역사의 여명기 중국 문명의 또 다른 면모 즉 문명이전의 중국 문명을 증언하고 있다.
이 화석은 고속도로 개설 공사를 하다 발견 됐는데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고속도로를 옮길 수도 없었다고 한다. 역시 중국은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경악시키고 있다. 이 전시장 바로 위가 고속도로이므로 고속도로가 천장이고 천장 위로 자동차 통행한다. 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밤이라 그런지 너무 요란하다. 우리는 자동차가 달리는 고속도로 아래 땅속에서 2700년 동안 땅속에 있었던 유물을 보는 추억도 갖게 됐다.
약40분정도 고차박물관 화석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중국이 얼마나 큰 나라고 그 역사가 얼마나 긴지 실감 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 밑의 땅속 전시관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 한다.
고차 박물관과 태산을 관광은 이번 여행의 모든 것을 압도했다. 우리가 여행한 나머지 부분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우리는 2009년 4월28일 인천국제여객터미널 제2부두에서 뉴 골든 브리지5호를 타고 4박5일간 중국을 여행하러 갔다. 이배는 3만톤의 화객선이다. 첫날은 배에서 먹고 잤다. 다음날은 산동성 청도국제여객부두에 내려 본격적인 중국 여행에 들어갔다. 강태공 사당 등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3일째(4월30일) 오전에는 공자 태어난 고향, 공자묘지, 공자사당, 공자후손 마을 등 공자 유적지를 집중적으로 보았다. 오후는 태산을 올랐고 저녁에는 고차 박물관을 관람했다. 태산은 걸어 오르는 게 아니라 버스와 케이블카를 탔다.
다음날(5월1일)은 연을 만드는 양가부민속촌과 청도 맥주공장 관람을 하고 저녁5시 우리가 타고 온 그 배를 탔다. 5월2일 인천국제여객터미널 제2부두에 도착, 하선 수속을 완료하고 택시를 탄 시각은 오전 11시30분이다.
산동성(山東省)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 원고를 끝맺는다. 중국에는 23개성(대만 포함)이 있다. 우리나라 행정구역으론 도에 해당하지만 규모가 엄청 크다. 산동성은 성중에서 3번째로 작지만 넓이가 한국의 1.5배이고 인구는 6000만명. 산동성에서 제일 큰 도시는 청도이고 500만명이 사는데 유동인구를 포함하면 800만명이라고 한다. 산동성의 대표적 농산물은 밀이고 지금은 공업지역으로 날로 그 모습이 바뀌고 있다. 우리 기업들이 가장 많이 진출 한 곳도 산동성 이다. 중국을 여러 번 여행했지만 이곳만큼 식사가 좋은 곳도 없었고 사람들도 도시도 순박한데다 크게 불편한 게 없어 이번 여행은 마음에 들었다.
4박5일 동안 문명이전의 문명인 고차박물관과 문명이후의 문명인 태산을 을 둘러본 것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여행 후 3개월이 다 돼 가는 이제야 이 원고를 매듭 해 김빠진 맥주 같은 글이 될까 걱정이다. (2009.6.22)
첫댓글 울 나라에는 4천4백여개의 산이 있고 그 중 등산을 할만한 산이 1천 3백여개 국장님 다 가보셨여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