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주일 추천설교 2022
(()1) 부모를 이렇게 공경하라 (김은호목사)
(02) 네 부모를 기쁘게 하라 (진희성목사)
(03) 노인의 긍지 (장영일목사)
(04) 노인 존중과 효 (안재은목사)
(05) 도전받는 어버이들 (이용호목사)
(06) 어버이의 마음 (김명섭목사)
(07) 참된 효도 (심우갑목사)
(08) 아버지(부모)의 마음을 갖자(김광욱목사)
(09) 성경적인 효도방법론 (한성진목사)
(10) 네 부모를 공경하라 (주금용 목사)
(11) 부모님을 공경하는 법 (김찬종목사)
(12) 기독교인의 가정과 교회 (정필도목사)
(()1)
부모를 이렇게 공경하라
잠언 23:22-26
김은호 목사(오륜 교회)
미국의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웹스터라는 곳에 안나자비스라는 여인이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녀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더욱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친구의 초대를 받아 파티에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으로 흰 카네이션을 달고 그 파티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 이후 이 땅의 자녀들이 일년 중 하루만이라도 어머니를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10만 달러의 어머니의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어머니날 제정을 국내외에 탄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로부터 7년 후 윌슨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시 어머니날 제정을 선포했고 미 의회는 1914년 5월 둘째 주일을 어머이 날로 처음 정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살아계신 어머니의 가슴에는 붉은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며 어머니의 은덕을 기렸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는 흰 카네이션을 자기의 가슴에 달고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며 이 날을 지켰습니다. 우리나라는 1956년 국무회의에서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정하였고 1973년부터는 어버이날로 개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그래서 부모공경에 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도덕과 윤리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 부모 공경의 말씀이 있지만 한 곳만 찾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5:16절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라 엄위하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은 10계명 가운데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입니다. 여기서 첫 계명이라는 말은 십계명 가운데 제 1계명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에 관련된 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십계명은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에 관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제 5계명으로서 인관에 관한 첫 번째 계명입니다.
다른 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만큼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얼마나 복된 약속입니까? 얼마나 수지 맞는 약속입니까?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을 순종하여 복 받은 사람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만은 않습니다. 말로는 쉬운데 막상 실천할려고 하면 잘 안되는 것이 바로 부모 공경입니다. 부딪히는 것이 많습니다. 세대간의 갈등도 있습니다. 외식을 한 번 하더라도 자식들은 피자 내지는 양식집을 가자고 하는데 어머니는 시원한 된장국을 드시고 싶어합니다. 오해로 말미암는 인간관계의 아픔도 생겨납니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어렵듯이 좋은 자녀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꼭 돈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많은 자녀들이 자기는 돈이 없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입니다. 물론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있어야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부모를 공경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모 공경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근거로 부모를 이렇게 공경하라! 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부모를 이렇게 공경하라.
1. 부모의 말을 청종하라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22절)
청종이란 듣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 공경은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것이 효도의 시작입니다. 연세가 들면 하고 싶으신 말씀이 많습니다. 사람은 하고 싶은 말씀을 못하면 병이 나는 법입니다. 저의 아버지도 가끔 저희 집에 오시면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특별히 제가 심방 가고 없으면 제 아내가 있는 부엌에까지 들어오셔서 많은 말씀을 하십니다. 들어보면 새로운 말씀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도 아주 신명나게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들어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다 아는 내용이지만 오늘 내가 부모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축복인 것입니다. 돌아가시면 그 음성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 말씀하시면 감사하면서 들으십시오. 물론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들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틀리다고 무시하지 말고 진지하게 들어 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핀잔하지 말고 그냥 들어 주십시오. 생산성이 없는 말씀일지라도 경히 여기지 말고 좀 진지하게 들어 주십시오. 넋두리도 좀 들어 주시고 푸념도 들어 주세요. 들어줌이 효의 시작입니다. 아무리 좋은 용돈을 많이 드리고 좋은 환경 가운데 거하시게 할지라도 부모의 말을 청종하지 않고 경히 여기면 그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22절)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녀를 돌로 쳐죽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늙어 가는 것만도 억울한데 자녀들에게까지 무시를 당한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옛날 우리 관습에 보면, 정월초 하루 날 아침이 되면 자식들이 집에 있는 경대를 다 치워놓았다가 정월 대보름이 지내고 나서야 그 경대를 다시 갖다 놓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 살이라도 더 잡수신 부모님들이 거울을 보고 서러워 할까봐 그런 것입니다.
사실 늙어지는 것 좋아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실제로 나이보다 더 늙어 뵌다는 말을 들으면 저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늙어지면 더 화장도 하게 되고 치장도 더 하게 됩니다. 화장에 관한 유머를 잘 아시지요. 원래 화장의 본 의미는 20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여자들이 조금 얼굴을 돋보이게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화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에는 변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20대가 화장을 하면 화장이지만 30대가 화장을 하면 치장이고, 40대가 화장을 하면 분장이고 50대가 화장을 하면 변장이고 60대가 화장을 하면 포자이고 70대가 화장을 하면 그것은 환장이다." 늙고 싶지 않아서, 늙어졌다는 말 듣고 싶지 않아서 분장 변장, 포장, 환장까지 하는 마당에 자녀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경히 여김을 받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누가 치매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겠습니까?
여러분 치매의 마지막 증상을 아십니까? 치매의 마지막 증상은 갑자기 부부사이가 좋아지는 거랍니다. 그 이유는 자기 부인이 다른 사람인줄 알고 좋아지낸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의 말씀을 들음으로 시작됩니다. 들어 주십시오.
2. 진리를 소중히 여기라(23절)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라는 말은 진리를 소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산다는 말은 진리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진리는 무엇을 말합니까?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학문도 변합니다. 유행도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님의 고생을 알아주는 것도 중요하고, 효도관광 시켜 드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효도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소중히 여기고 진리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 가운데 살아가십시오.
요한삼서1:3-4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 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1:3-4)
여러분! 사도 요한은 내 자녀들이 진리 가운데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라고 고백합니다.
믿음의 부모는 내 자녀들이 진리를 소중히 여기며 그 진리 가운데 사는 것을 볼 때에 가장 기쁩니다. 그 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습니다. 사업이 잘되어 돈은 많이 벌어도 주일을 성수하지 않으면 그 부모는 괴롭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좀 어려워도 진실하게 살고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면 부모는 그 자녀를 인하여 기쁨을 얻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24절을 보세요.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24절)
자식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아비의 기쁨을 말합니다. 자식이 잘 되면 그 영광을 아비가 누립니다. 이번에 최경주가 PGA에서 우승을 하게 되니까 그 부모가 메스컴으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최경주라는 아들이 아니었다면 기자들이 그 집까지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가끔 자녀들에게 엄마 아빠는 이렇게까지 해 주었는데 너는 엄마 아빠를 위해 해 준 것이 뭐가 있느냐? 라고 불만을 토로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인하여 얻는 기쁨과 즐거움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속 썩여도, 내가 저런 자식을 낳고 미역국을 먹다니 푸념해도 자식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기쁨과 즐거움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식이 우리에게 돈으로 계산될 수 없는 많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진리 가운데서 행함으로 부모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3. 네 부모를 즐겁게 하라(25절)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25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부모를 기쁘게 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모님을 염려하시게 하거나 근심되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잠언17:25절에 보면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누가 미련한 아들인지 아세요? 서울대를 나오고 옥스퍼드 대학을 나와도 부모의 마음에 근심을 심어 주고 부모의 마음에 고통을 안겨 주는 자식은 가장 미련한 자식이에요. 부모 공경은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을 염려하시게 하지 않고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시집보내고 장가보낸 자녀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거에요. 좋은 조건의 사람을 만났는데 허구한 날 투견부부처럼 보기만 하면 으르렁 거리며 싸운다면 그것은 곧 부모의 마음을 근심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결혼했으면 잘 사세요. 그리고 부모님 앞에서 없다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자식은 예사롭게 한 말일 수 있지만 없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간 그 부모는 저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사세요. 없다는 말 하는 사람치고 언제 잘 사는 것 봤어요. 사람은 자기의 입에서 나오는 말대로 되는 것입니다. 허구한 날 없다고 하면 그 말 하는대로 되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부모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4. 마음을 드리며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들이십시오.
26절에"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부모자식간에 마음이 멀어지는 것보다 더 섭섭하고 외로운 것이 부모에겐 없는 것입니다.
효도의 본질은 마음입니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잘 해 드린다 할지라도 마음이 멀어지면 그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오늘날 생활비는 꼭 꼭 보내드리면서도 마음에서 부모님을 지워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정한 효도는 내 마음에서 항상 부모님을 떠나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내 마음을 부모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이 말은 부모님이 살아온 인생의 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거워하라는 말입니다. 부모님이 살아온 인생의 길을 바라보십시오. 어떻게 보면 성공한 자녀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비천한 인생을 살아온 부모님도 계십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그런 비천한 직업을 가지신 부모님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 부모님이 살아온 인생의 길을 인정해 주십시오.
인생은 아무리 열심히 살았다 할지라도 아쉬움이 있고 후회가 있는 것입니다. 실수가 없는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노아를 아시지요? 노아가 어떤 사람입니까?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요 당세에 완전한 사람이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도 자식들 앞에서 실수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왜 우리의 부모님에게는 실수가 없겠어요? 이 세상에 자녀 앞에서 완벽할 수 있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삶에도 아쉬움이 있고 실수도 있고 후회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 대하여 인정받고자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참 훌륭하게 살아오셨노라 는 말씀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자신도 초등학교 좀 다니다 말 정도였습니다. 학문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고고하고 지식 많은 귀족들이 아브라함 링컨을 헐뜯고 괴롭혔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처음으로 상원에 나가서 연설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국회 의원이 그랬답니다. "당신 같이 무식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시게 된 것이 우리에게는 다시없는 불행이요. 당신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 아니요. 그런데 그런 사람의 아들, 그런 천한 사람의 아들을 우리가 대통령으로 모시게 됐다"고 하면서 구두를 벗어서 들고는, "이 구두도 당신 아버지가 만들어 준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모욕적인 말입니까?? 그러자 아브라함 링컨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의원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기억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직업에 충실했고 구두를 잘 만드는 분이셨습니다. 내가 어깨너머로 배운바가 있으니 당신 구두가 고장나거든 가져오시오 내가 수리해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사람입니까? "내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떳떳하게 자랑을 했습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자기의 부모를 자랑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일이 아니라면, 부모님의 직업, 부모님의 선택, 부모님의 삶, 부모님이 살아온 생에 대하여 "잘 하셨습니다. 훌륭하셨습니다. 그 하시던 일을 나는 존경합니다.
이것이 효도예요. 부모님으로 하여금 살아온 생에 대하여 후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걸 자랑하게 만들 수 있도록 부끄러운 일생을 자식이 보상해 주어야 됩니다.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7-8년 전입니까? 모 생명보험회사에서 이색적인 광고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광고는 다름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 스물아홉.... 열네 시간을 기다려서야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당신도 모르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 서른 일곱....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우등상을 탔습니다. 당신은 액자를 만들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방에는 누렇게 바랜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 마흔 셋.....일요일 아침 모처럼 자식과 뒷산 약수터로 올라갔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자식이 아버지를 닮았다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당신은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 마흔 여덟....자식이 대학 시험을 보러갔습니다. 당신은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 쉰 셋.....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내의를 사 왔습니다. 당신은 쓸데없이 돈을 쓴다고 나무랐지만 밤이 늦도록 그 내의를 입어 보고 또 입어 봤습니다.
◆ 예순하나.....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피웠습니다. 당신은 나이 들고서 처음으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하지만 이제는 희끗희끗한 머리로 남으신 당신.... 우리는 당신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머니의 광고는 이렇습니다.
● 스물하나...당신은 고개를 두 개 넘어 얼굴도 본적이 없는 김씨댁의 큰 아들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 스물여섯...시집온 지 오년 만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시댁 어른들한테 며느리 대접을 받았습니다.
● 서른 둘...자식이 밤늦게 급체를 앓았습니다. 당신은 자식을 업고 읍내 병원까지 이십 리를 달렸습니다.
● 마흔...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당신은 자식이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자신의 외투를 입고 동구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식에게 당신의 체온으로 덥혀진 외투를 입혀 주었습니다.
● 쉰둘...자식이 결혼할 여자라고 집으로 데려 왔습니다. 당신은 분칠한 얼굴이 싫었지만 자식이 좋다니까 당신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 예순...환갑이라고 자식이 모처럼 돈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그 돈으로 자식의 보약을 지었습니다.
● 예순다섯...자식 내외가 바쁘다며 명절에 고향에 못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이 바빠서 아침 일찍 올라갔다며 당신 평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하지만 이제는 깊게 주름진 얼굴로 남으신 당신......
우리는 당신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광고를 보며 울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는 내용의 광고입니다. 우리는 이 광고를 통하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귀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공경하다>는 단어는 '카베드'로서 가치 있게 여기다. 존귀하다. 영광스럽다. 무겁다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부모를 존귀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부모는 구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효가 아닙니다. 부모는 공경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어떻게 공경하여야 합니까?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진정한 부모 공경은 무모의 말씀을 들음으로 시작됩니다. 배우지 못했다고 경히 여기지 마십시오. 진리를 소중히 여기고 진리 가운데서 행하십시오. 부모를 즐겁게 해 주십시오. 기쁘시게 해 드리십시오. 그리고 부모에게 당신의 마음을 주십시오.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온 인생의 길을 인정하여 주십시오. 자랑스럽게 여겨 주십시오.
십계명 가운데 다른 계명은 오늘 범했을지라도 내일 회개하고 다시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은 어느날 갑자기 나와는 상관이 없는 계명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송강 정철은
「어버이 살아 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한번 가신 뒤에 애달프다 어이하리. 생전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고 노랬습니다.
지금 효도하지 못하고 나중에 효도하려 하면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계실 때 한번 더 찾아뵙고 한번 더 전화 드리십시오. 살아 계실 때 더 한번 주물러 주시고 음식을 드실 수 있을 때 더 한번 사 드리시고.. 거동하실 수 있을 때 여행도 시켜 드리십시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달토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높다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02)
네 부모를 기쁘게 하라
잠23:22-26
(진희성목사)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다. 부모님에 대한 효를 다시 한번 반성하며 신앙 안에서 부모에게 효도 할 때 어떠한 복이 임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겠다.
한가지 먼저 생각할 것은 부모라 할 때 나를 낳아 주신 어버이만이 아니며 또한 내가 낳은 자녀만이 자녀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결혼한 일이 없습니다만 아들들이 많았습니다.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했으며 그 외에도 여려 사람을 믿음으로 낳았다고 했다.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복음적으로 볼 때 그처럼 훌륭한 아버지는 없다고 본다. 어버이되는 바울은 아들을 훈계하였고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들음으로 영육간 효도의 본을 보여 주었다.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않다."고 하였다. 스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진정으로 어른들은 다 내 부모요, 어린 청소년들은 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ex) 우리교회 어느 집사님은 토요 열림마당에 나오는 재가 장애인을 보고 '내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은 다 내 아들들이라'하는 마음과 '이 땅의 모든 노인은 다 내 부모님이다'라고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부모가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제 나는 효도 할 길이 없다고 하며 지난날에 불효한 것이나 후회하면서 눈물이나 흘리는 자녀는 효도 할 수 없다. 이제 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으면 내 친구의 어머니도 있고 내 이웃의 어머니도 있으며 또한 이 땅에도 버려진 어머니들이 많이 있다. 내 아버지는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이 땅에 아버지의 연배되시는 분은 얼마든지 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효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시간에는 효도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효는 첫째, 목적이 무었이냐가 중요하다. 누구를 위한 효냐하는 것이다. 정말 부모님을 위함이냐 아니면 나를 위함이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선행이라도, 아무리 굉장한 일이라도 그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을 때에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비록 구제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가 칭찬을 받기 위해서, 내가 복 받기 위해서, 내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효도를 한다면 그 효도는 완전히 타락된 효도이다.
둘째로, 효는 그 방법이 문제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가? 흔히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소홀히 하다가도 돌아가시고 나면 야단스럽게 굴면서 효자인 척 한다. 산 부모는 모셔봐야 이득이 별로 없고 죽어서 귀신이 되어야 복을 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얼마나 잘못된 방법인가? 목적이 그릇되고 방법이 잘못되면 미신적인 데로 빠져든다. 우리는 무엇을 효도하며 왜 효도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효도를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나이 많은 부모님을 자랑으로 생각해야한다. 사람들의 수명이 점점 길어지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노인들의 수는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노인이 대접을 받는 사회가 아니라 소외당하고 외롭게 사는 시대이다. 부모님이 오래 살도록 해 드리는 것과 장수하시는 부모님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효도이다. 엡6:2-3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다. 장수의 복은 효도하는 가정에 주시는 복이다. 따라서 나이 많은 어른들이 있고 그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가문의 자랑이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늙으신 부모님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나를 위해 평생을 바치시다가 고생하시는 모습이 아무리 초라해 졌다 할지라도 자랑으로 여겨야 한다. 잠6:23 [의인의 아버지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했다. 의로운 자녀가 되어야 한다. 아무개 아들, 아무개 자부가 아니냐고 칭송 듣는 것이 효도이다.
성경에는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임을 말씀하신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축복권이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부모가 자녀에게 복을 빌면 자녀가 복을 받는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 효도가 바로 복을 받는 기준임을 알아야 한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선포 할 수 있고 자식은 그 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녀에게 복을 빌었다. 이삭도 야곱에게 복을 빌었다. 이삭은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큰아들, 작은아들을 구별 할 수 없었지만 그가 빈 복은 그대로 임했다. 그러므로 장수하신 그분의 자녀됨을 자랑 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적인 개념으로 볼 때도 부모의 죽음이 자식들의 책임이며 세상 떠나게 된 부모님을 잘못 모셔서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하며 죄인의 모습으로 옷을 입는 것이 상복이다. 그런데 요즈음 장례식에 가 보면 상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옛날에는 상주가 죄인이기 때문에 수염도 안깍고 세수도 안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빨간 루즈까지 입술에 바르고 희희닥 거리며 웃지를 않나, 농담을 하지 않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완전히 잘못 되었다.
둘째로, 마음 편하게 모셔야 한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ex) 서울 중앙청 뒷 쪽에 효자동 이라는 동네가 있다. 이곳을 효자동 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가 있다고 한다. 옛날 어떤 할아버지가 실수하여 자다가 손자를 깔아 죽였다. 그 할아버지는 자기가 실수하여 손자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염려하여 아미를 몰래 안고 나와서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죽은 아이를 보고 "아 불효 자식아, 할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만들다니." 하면서 그 죽은 아이의 뺨을 호되게 때렸다. 그랬더니 죽은 아이가 살아났다. 이 일을 임금님이 듣고서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 이름했다는 이야기다. 어쨋든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편하게 모시려는 것이 진실된 효도이다.
셋째로,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효도이다.
요한3:4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 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라고 했다. 내 아들이 진실하게 살고 내 딸이 아름답게 사는 그것 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고 더 즐거운 일이 없다는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모의 말씀에 대해서는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슨 토론을 열심히 하다가도 "이것이 전승이다." 하면 절대 따르게 된다. 전승, Tradition이 무엇입니까? 전승이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부모님들의 교훈들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나 부모의 말씀을 업수히 여기지 않고 존중한다. 이것이 신앙의 지혜이며 그 신앙적 효도가 복을 받게 하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속여도 부모는 자식을 속이지 않는다. 거짓으로 부모를 기쁘게 해서는 않된다. 불의로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 효도가 아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효도하고 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루 한 두번은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어머니, 우리집에 어머니는 꼭 필요한 분이십니다. 어머니는 꼭 계셔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부모님 하시는 일이 다 옳고, 그 교훈, 그 뜻이 옳았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 효도요 그리고 기쁨으로 그 길을 따를 때에 그것이 바른 효도이다. 부모님의 귀를 즐거워하는 것이 참된 효도이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참되 효도이다. 의인의 후손은 번성하며 은혜를 입는다. 시 37: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했다. 내가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며 나 또한 좋은 부모가 되어 후손에게 복된 길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형통한 복이라도 당대에 끝나 버리면 큰 비극이지 복이 아니다. 그래서 시 128:6에 가정의 복을 말씀하시면서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찌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찌로다]고 하였다. 대를 이어 내려가는 축복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좋은 것을 심어야 한다. 믿음의 씨았을 심어야 한다.
ex)곽 선희목사님 책 가운데 이런 간증이 있다. 이북에서 피난 내려올 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손에는 성경책 한 권만이 달랑 들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재벌도 부자도 아니지만 하고 싶은데로 구제하고 선교를 한다고 했다. 사실상 한국 교회 가운데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이며 소망 교회가 하는 일은 대단하다. 그렇게 된 이유를 곽 목사님은 자기가 선해서가 아니라 다 조상 덕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얻어먹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밥도 달라고 오고 쌀도 달라고 오면 할머니께서 손에 잡히는 데로 많이 주시곤 했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하시기를 '내가 죽거든 일 주일 동안 거지 잔치를 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돌아 가셨을 때 소를 잡아 일 주일 동안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모두 불러 대접을 했다고 한다.
그 선조들의 신앙과 심어놓은 의로운 행위가 지금 자기에게서 거두고 있다는 얘기다. 내가 지금 부지른히 심어 놓으면 내 후손이 절대로 걸식하지 않는다. 솔직히 유산은 물려주지 않아도 신앙적 유산을 물려주면 어디를 가든지 귀인을 만날 것이다. 복받지 못할 짓만 하면서 복을 달라고 비는 사람만큼 답답한 사람은 없다.
오늘 우리는 부모상이 좀 달라져야 한다.
1) 훌륭한 아버지는 돈 많고 비싼 외제 장난감이나 뭐든지 사 달라는 대로 척 척 사주는 아버지가 아니다. 2) 훌륭한 아버지는 지위가 높아 교장 선생님도 쩔쩔매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작년에 어느 외국 신문에 나온 기사 가운데 자랑스러운 아버지는 다음의 다섯가지 조건을 충족 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첫째, [때로는 엄마를 몰아내라]는 것이다. 하루종일 엄마가 아이를 치마폭 속에 넣고 있으면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이따금 엄마를 빼 돌리고 아이들과 아버지가 집안을 어지럽히기도 하고 자기를 끼리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해야한다.
둘째, [아이들을 자연으로 끌어내라]는 것이다. 등산도 좋고 야외 천막 생활도 좋다. 그래야 아이들이 순수하고 강하게 자란다.
셋째, [시선을 아이들과 같은 높이에 두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언제나 서서 말하면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아버지에게 눌리게 된다. 그러면 부모 자식간에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넷째, [아침에 얼굴을 맞대라]는 것이다. 퇴근이 늦은 아버지가 아이들과 마주앉는 기회는 이른 아침 이 외는 드물다. 그 기회 마저 놓치면 부자간에는 틈이 생기게 된다.
다섯째. [어린이들에게 꿈을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신조와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라」고 말씀 드린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가 되어야 하며 또 자녀들에게 기쁨을 받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이다.
땅에서 형통하고 장수하는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자자손손 이어지는 가정되기 위해서 효성을 다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란다.
(03)
노인의 긍지
잠언16장 31절
(장영일목사)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1. 노인 문제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노인에 대한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 사회 문제로 대
두되고 있는 노인 문제는 앞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2000년 현재
65세 이상 노인이 337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7%, 2020 년이 되면 그 배가되는 14%를 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대구 시내의 인구 250만 4 천 여 명중 65세 이상의 노인이 5.3%를 차
지하고 있는데, 이중 치매 노인이 1997년 현재 약 6 천 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
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전국민을 국민 연금에 가입시켜서 미리 노후를 준비케 하고 있습니
다. 그러나 경제문제만이 해결책은 아닙니다. 노인의 문제는 정신적인 것입니다. 젊은이 때
와 달리 인내심이 떨어지고 용기를 상실한 체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려는 심리적
자세를 치료해야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의 여러 작품가운데 대표작이 「노인
과 바다」입니다. 이 소설로 그는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함께 탔습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소
설 이름에 담겨져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상대입니다. 바다는 엄청 험
난한 곳이기에 노인은 어울리지 않는 곳입니다. 노인은 인생의 항해를 이제 다 마치고 바다
를 떠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노인을 바다에 다시 내어보내어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을 리얼하게 묘사하면서 작가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노인의 독백이 많이 나옵니다. 독백은 외로운 노인의 심리를 극적으로 표현하
는 방법입니다. 그러면서 노인의 삶에서 인내와 용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주인공 노인의
이름은 산티아고입니다. 그는 자기의 신조 하나를 만들어 냅니다 - "인간은 패배하게 만들
어져 있지 않다. 인간은 비록 죽음을 당할지언정 결코 패배하지는 않는다." 헤밍웨이는 이
외로운 노인을 통하여 이른바 문명의 발달에 따르는 정신적 침체와 마비에서의 탈출을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잃어버린 인내심, 용기, 그리고 희망을 되찾자는 부르짖음입니
다.
2. 백발의 영화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
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
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아직도 잡을 것이 남아 있음을 알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정신이 곧 속 사람을 날마다 새
롭게 하는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원로 장로님 두 분이 계십니다. 그 외 여러 은퇴하신 장로님들이 계십니다만 이
두 분은 아직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분은 팔순이 넘었는데 농장을 아직도 경영하시고
손수 일하시어 작물을 거두시고 계십니다. 그 뿐 아니라 금번에 컴퓨터까지 익혀서 우리 교
회 홈페이지에 들어와 게시판에 글을 남기셨습니다. 그 글에 "목사님 컴퓨터는 나의 밥입니
다"고 하시며 의욕을 보이셨습니다. 어느 은퇴하신 권사님도 그랬습니다. 또 다른 한 분 원
로 장로님은 지금도 매일 옥상에 마련해 둔 글방에 올라가셔서 사군자를 그리시며 묵필을
쓰시며 창작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3. 참 귀감이 되시는 분들이십니다.
오늘 성경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노인 시절을 극히 높여 표현 한 것입
니다. 백발에 대하여 가진 우리들의 선입견은 부정적입니다. 과거에 저희 어머님 살아계실
때 머리 염색을 하셨습니다. 귀찮은데 왜 하시느냐고 여쭈어 보면 하시는 말씀이 "흰 머리
는 추저워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색깔에 대한 것보다는 노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싶
어하시는 뜻이고 "노인은 추하다" 혹은 "흰 머리카락은 푸대접받는다"는 이유이기도 할 것
입니다.
이제 우리 어른들께서 스스로 노인시절을 영화롭게 여기는 자긍심을 가지고 삶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셔야 합니다. 지미 카트 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시절 보다 은퇴한 후 지금이
더 아름답다고 인터뷰를 하시며 책까지 만드셨습니다. 그 분은 세계를 다니며 헤비타트 운
동(무주택 자에게 집 지어주기 운동)을 하시면서 영화의 면류관을 쓰고 계십니다.
노인 문제의 해결책은 다른 사람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창조적인
일을 해나가려는 의지에서 생겨날 것입니다. 자녀들과 젊은이들에게 효를 가르쳐서 노인문
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스스로 힘을 가져야 합니다. 스스로 남은 생의 목적
을 세우고 의지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4.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오늘 설교 본문에서도 노인의 영화는 "의로운 길에서 얻는다"(It is attained by a
righteous life)고 했습니다. 자기의 바른 삶에서 얻게 되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
보다는 다른 것으로부터 영화를 누리려고 하면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문학 작가였던 오노레 드 발자크가 쓴 「고리오 영감」이 있습니
다. 주인공인 고레오 영감은 장사를 해서 부를 축적한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두 딸이 있었습니다. 그는 두 딸을 통하여 자기 삶을 변화시켜보려고 비정상적인 부성애를
보여줍니다. 큰딸은 아버지 돈으로 귀족 신분을 사서 귀족과 결혼하게 되었고, 작은딸은 아
버지 돈으로 은행가가 되어 사회적 신분 상승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돈은 있지만 아직도
상인이라는 신분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신분 상승을 한 두 딸은 아버지를 부끄러워합니
다. 친정에 오는 이유는 아버지의 돈을 빼앗아 갈려는 이유였습니다. 나중 고레오 영감은 딸
들에게 돈을 다 써버려서 집도 없이 하숙집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병이 드는데, 두 딸들은
그 소식을 듣고도 병 문안도 가지 않고 결국 임종도 지키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대로 다 해 주고 대신 효를 받으면 된다는 생각은 이처럼
벌써 프랑스에서는 200년 전에 무너져버렸습니다. 이젠 우리 사회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젠 자녀에게 효의 윤리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부모가 의로운 길을 걸어가면 절
로 그 효를 얻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노인들이 자기 삶에 대한 당당함을 가지고 삽시
다. 목에 힘주고 허풍을 떠는 노인이 아니라 바른 삶을 살아온 결과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
지고 존경받는 어른들이 됩시다.
(04)
노인 존중과 효(孝)
딤전5:1-2
(안재은목사)
사회가 다원화되고 과학화되어 감에 따라 더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미 의무
교육도 중학교로 그 학력을 높였고, 대학도 대학원 중심의 고급 인력 배출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구세대에서 배운 학식은 그 가치가 평가 절하됨에 따라 노인들의 가치나 그
위치가 좁아져 가고 있음이 사실인 것입니다. 또한 명예 퇴직과 조기 은퇴라는 말은 고령의
가치를 더욱 폭락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현대사회는 의학의 발달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인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노인들의 치매가 30만 명에 이르고, 노인은 그 자녀와 가정에 점점 더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이 때에 노인 존중과 부모 존중 사상을 신앙적으로 바로
이해하면서 바른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일은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부모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 지에 대한 성경적인 지침이 요구되어 집니다.
1. 경노(敬老) 사상
(딤전 5:1,2)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여기서 '늙은이'는 헬라어 '프레스뷔테로스'로 '장로'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자
적인 의미로는 그대로 '나이 많은 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늙은이를 '꾸짖지'(에피플렉세
스)말라는 말은 '주인이 노예를 향하여 퍼붓는 거칠거나 우악스런 질책과 같은 것'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노인들이 가정에서나 사회적응에 있어서 어떤 약점이 보이더라도, 그들이 나이 많은 연
장자들임을 고려하여 그에 합당한 예우를 갖추어 온유한 태도로 권면하라는 말입니다. 노인
들은 실제적으로 기력이 쇠하여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기가 어렵고, 지적수준이 떨어져 무능
할뿐더러, 경제적 능력이 없어 자녀들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실 말
로만 노인 공경이지 실제로는 무시하고 그들을 소외시키는 것이 현실인 때에 성경은 그들을
권하되 온유한 태도로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요즈음에는 가정에서 노인 뿐 아니
라 일반 부모들도 자녀들에게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새로운 지식이 옴에
따라 간단한 전자제품조차도 조작할 줄 모르게 되어 자녀들에게 무시당하는 시대가 된 것입
니다.
현재 2-30대는 그들의 노년이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지식의 간격이 더 짧아져
서 적응하기 힘들고 더욱 소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의 연령층
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권하다'(파라칼레오)는 어떤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 옆으로 따로 불러내는 것을 가
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노인을 대할 때, 권면하며, 위로로 저들의 약한 부분을 감싸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인 존중은 성경이 지적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입니다.
(레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
는 여호와니라
보통에 경우에 있어서 제 아무리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해도, 상대방을 향한 모욕적인 질책은
상대방을 감화시켜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하물며 노인을 대할 때는 더욱 더 세심한 보살핌이 요구됩니다.
맹자는 "나의 늙으신 부모를 생각하여, 남의 부모도 공경하라'(老吾以及人之老)고 했습니다.
연장자들은 때로는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거나 이해 못할 사고방식으로 무례한 행동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연장자들을 젊은 세대는 이해하지 못하고 쉰세대로 구분하고 소외시키
려 합니다. 그렇더라도 성경은 그들에게 대적하듯 대하지 말고, 존경과 그 권위를 인정해 드
리며 권고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이 쓸모 없는 존재인양 무시되거나 경시되거나 소홀히 여겨지거나 간과되거
나 소외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애정과 존경과 존중의 태도를 갖고 마치 부모
를 대하듯 해야 합니다. 경노우대(敬老優待)라는 용어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으로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잠 16: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이이 선생은 "무릇 사람과 대할 때에는 마땅히 화(和)와 경(敬)을 힘쓸 것이니, 나이가 나보
다 배가되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십 년 위가 되면 형으로 섬기며, 오 년 위라도 조금 존경해
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고령화와 과학의 발달로 더 많은 노인 문제를 예견하고 있습니
다. 예비 노인들이 사실상 더 큰 문제입니다. 세계 판도는 은퇴 이후의 제2의 인생을 준비하
려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직업훈련을 하고 있는 직장인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또한 개인
적으로도 노년이 쉽게 다가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에 개인적, 교회적인
최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현재 실시하고 있는 무료 급식뿐 아니라, 노인들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더 좋은 프로그램을 구상해야 할 것입니다.
2. 효(孝) 사상
(잠 23: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이스라엘 사회에서 부모 봉양은 자녀들의 의무로 시대를 초월한 하나의 종교적 의무에 속하
였습니다. 그래서 부모 공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십계명 중 제 5계명에도 있는 것
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장수의 복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
이 길리라
한편 예수님께서는 마땅히 자기 부모를 공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핑계
로 자기 부모를 돌보지 않는 자들의 외식에 관하여 질책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눈에 보
이는 자기 부모를 올바로 섬기지 못하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막 7:11-13)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
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
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한편 초대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전통이 그대로 이어졌으며, 효에 대한 가르침이 계속 베풀
어졌습니다.
(골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얼마 전 TV 프로그램을 통해 어떤 아이가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기자의
질문에 "부모님과 싸우면 자신이 이긴다"고 서슴없이 대답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라고 했습니다. 세대가 많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일례인 것입
니다.
몇 년 전에 어떤 타 교회 집사가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충신교회 성도가 그
의 어머니를 괴롭히는데, 동네가 다 알 정도여서 목사님께 알려 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목
사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였지만, 성도로서 부모공경을 교회에서 가르치고 실천해야 함을 교
훈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요즈음 결혼 조건에 시부모를 모시지 않는 것을 내놓는 것은 비일비재한 예가 되고 있
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부모 공경과 더불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을 강조하고 있으며(엡 1-3, 골 3:20), 목회 서신에서도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딤전 5:4). 그렇게 함으로 그는 성도에게 효도가 율법의 약속과 일치하는
중요한 계명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출 20:12, 신 5:16).
(딤전 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
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진정으로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부모가 구원받고 천국가게 하는 것임을 기억할
때, 불신 부모님을 모시고 교회 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효도는 선의 특별한 부분이 아니라, 보은(報恩)의 행위로서 인륜의 근본에 속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일평생을 통해 베풀어주신 희생에는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다 보답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효도 없는 자녀의 삶은 배은망덕(背恩妄德)한 생활
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모를 섬길 수 있습니까?
첫째로, 노인을 진정한 가정의 일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의 일을 물어보고 상의해 보
십시오. 그들의 정신건강도 좋아질 것입니다. 그들의 지혜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노인에게 역할을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이 열심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은 11시 기도회를 통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서로 교제하며, 또 수양관 관
리에 그들 나름대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계십니다.
셋째로, 노인에게 자신들의 생활(Schedule)이 있음을 기억하게 해야 합니다. 친구도 만나고,
배우러 다니고 할 때 그들의 삶이 더 기름지고 풍성해 질 것입니다.
3. 경노효친(敬老孝親)의 상급
성경에는 불효자에 관하여는 엄중하고 그 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한편 효자에 관하여는 그 상급에 대하여 분명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신 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와 같아서, 자녀들은
당연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일 뿐 아니라, 땅에서 받게 될 축복과도 연관이 됩니다.
(엡 6:2,3)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바울은 이 계명이 갖는 내용상의 중요성에 대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진술하면서 가
장 먼저 이루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첫 계명'이란 성도의 가정 생활에 있어서 으
뜸가는 계명이라는 뜻으로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명령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차원에서 그 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어떻게 그 부모를 믿음으로 섬기겠으며, 또 그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이 약속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큰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첫째, 형통하게 됩니다. 특히 이러한 축복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까지 대대로
미칠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시 112:2,3)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둘째, 장수하게 됩니다. 장수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주시는 복으로 부모를 순종
하는 자에게도 동일하게 내려 주십니다. 모든 일에 형통하며 건강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에게 내려 주시는 큰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결론
현대 사회에 요구되는 많은 지식 그리고 더 나아가 고령화 사회는 점점 더 노인 문제를 야
기 시킵니다. 또 노인은 노동력 감퇴와 경제력의 약화로 사회와 자녀로부터 소외되고 마음
이 늘 외롭습니다.
성경은 경노사상을 부모 공경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늙은이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길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편 부모가 존중되는 가정 질서가 없이는 어느 개인의 행복도 얻어내
기 어렵다. 기독교는 효의 근원을 하나님께 둠으로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을 신앙적 차원
에서 명령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잘 섬기고, 그들이 삶에 활력을 느낄 때, 가정에는 기쁨
과 즐거움이 오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될 줄로 믿습니다. 어버지 주일을 맞이하여 이러한 복
이 성도님들의 가정에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05)
도전받는 어버이들
엡6:1-3
(이용호목사)
통계에 의하면 자식들에게 학대받는 노인들이 전체 노인인구에 8%라고 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높은 비율입니다. 노인들은 친족들이나 사회적으로도 학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낳아서 기른 자식들에 의해 학대받는다는 것에 대단히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이런 노인들이 늘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적인 현상을 염두에 두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부모공경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새겨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양과 공경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했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순종하라는 것과 공경하라는 것은 의미가 서로 통하지만 그러나 구분이 있습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것은 부모를 기쁘게 한다는 차원이고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거운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순종하는 것과 공경하는 것을 동시에 다 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효의 가르침이 아니라 신앙행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것과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서로 하나된 개념이고 그와 같은 영적이고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부모를 무겁게 대하라'는 말입니다. 부모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큰 비중을 두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보다 더 깊은 뜻은 부모답지 못해도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어린이 약 7천명이 아버지로부터 매을 맞고 학대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숫자이지만 그외에도 수없이 될 것이라고 추산을 합니다. 어린이를 학대하는 부모도 있을 것이고 부모답지 못한 부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공경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답지 못해도 부모됨을 인정하고 부모됨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고사성어 가운데 '견마지양(犬馬之養)'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유래는 아들을 셋을 둔 어느 가정에 아버지가 부인을 잃고 외롭게 사는데 노년이 되어가자 기력도 쇠하여지고 자신감도 없어지는데 더욱 마음이 괴로운 것은 자식들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점점 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버림받지 않을까 위기감을 느껴서 지혜를 발휘하여 목공소에 가서 큼직한 궤를 하나 맞췄습니다. 궤 안에 유리조각으로 가득 채우고는 자물쇠를 잠그고 마루바닥 밑에 넣고 출입할 때마다 보이게 했습니다. 큰 아들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버지는 지금 말할 수 없고 내가 죽거든 열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큰 아들의 호기심은 더해가고 궤를 차보니 찰랑이는 소리에 금화가 들은 것으로 착각하고는 큰 아들이 그때부터는 완전히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둘째 아들도, 셋째아들도 마찬가지로 착각하게 되어 아버지를 잘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큰아들이 아버지의 호화장례를 치르고 삼오제가 지나 드디어 궤짝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유리조각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궤 맨 밑바닥에 '네 어버이를 공경하라'는 글이 써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굉장히 분개했지만 둘째아들은 형님의 모습을 보고는 가책을 느끼고 펄쩍뛰는 형님을 만류하면서 우리가 궤를 봉양했지 아버지를 봉양했냐고 우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며 뉘우치고 통곡할 때 동생과 며느리 모두가 뉘우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부양과 공경은 다릅니다. 우리는 곧잘 부모를 부양합니다. 잠자리를 드리고, 음식을 드리고, 옷을 드리면서 부모부양은 잘 합니다. 그러나 부모공경이 없는 부양이 이 땅에 굉장히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부모에 대한 효를 근본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부모의 주머니를 보고 부모를 섬기지 사실상 부모를 정신상으로 이미 학대하고 있는 자식들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만큼 부모공경은 높은 도덕입니다.
부모를 기쁘시게
부모를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돈으로 효를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세태는 돈으로 효를 사서 드립니다. 그러므로 부모마음이 상처를 받습니다. 60세 이상 노인인구가 318만명인데 그 가운데 놀랍게도 130만명(40%)이 몸이 건강하면 자녀와 따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불편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 통계는 오늘 우리 사회에 부모님들이 자식들과 함께 살면서 마음이 불편해 있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부모의 마음을 읽으면서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특히 홀로된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자식들은 지혜롭게 관찰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고양진미로 부양하셔도 부모님은 상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두 가지 실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느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이 할머니는 아들이 넷이 있는데 명절때만 되면 아들네가 모여 한바탕 전쟁을 합니다. 어머니를 모시는 문제 때문입니다. 이것이 한 두 번 거듭되자 어머니 마음에 한이 맺혔습니다. 어느 명절에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한달씩 모시기로 정한 자식들의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들은 어머니는 자기가 갖고 있는 용돈을 모아 갈 길을 준비키로 결심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러 왔을 때 너희들 집에는 안간다고 하면서 그때부터는 시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무리 자식들이 가서 말려도 이 어머니의 마음은 돌이켜지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헐벗고 병든 상태로 있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하다고 기자에게 말했지만 기자가 떠난 뒤에 어머니는 구석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중학생의 효행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동식이는 점심때만 되면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습니다. 동식이 도시락에는 돌이 나오거나 머리카락이 안나올 때가 없습니다. 비록 눌려서 떡이 된 도시락이지만 동식이는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도시락을 맛있게 먹으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친구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지 않고 선생님이 방문을 하려 해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옆자리 친구가 과제물로 인해 동식이 집에 가게 되었는데 동식이의 엄마는 놀랍게도 장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동식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머니, 오늘도 도시락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학교로 전해지고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모신다는 이 문제에 대하여 거창한 효도의 원리를 적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면 됩니다. 부양이 아니라 공경을 해드리면 됩니다.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순종이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효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효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근본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부모를 부모 자리에 세워주고 부모를 공경만 한다면 그 부모는 자식들의 효를 통해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부모공경을 잊어버리고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놓고는 어떤 부양책도 부모에게 효가 되지 못합니다.
믿음의 재산
오늘 저는 연만하신 우리 어버이들에게 귀한 권면의 말씀을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영원한 재산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집니다. 인생에는 놓칠 수 없는 재산이 있습니다. 이 재산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실직을 당하고 왜 자살을 합니까? 자살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실직은 직장을 잃었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나는 이제 필요 없는 인간이구나, 이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구나, 나는 이제 희망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바로 실직당한 사람의 정서라는 것입니다. 연애하다가 실연한 친구가 자살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참 못난 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평생 같이 살자고 약속한 사람이 배반을 하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인간은 약해 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병을 앓아본 경험이 있지만 중병을 앓고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의 심정은 죽음을 느끼는 자리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늙음은 우리를 약하게 만듭니다. 죽음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병들었다고, 내가 늙었다고, 내가 실직을 당했다고, 내가 명예를 잃어 버렸다고 믿음까지 놓치면 안됩니다. 믿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아야 하는 인생의 재산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순간을 허용합니다. 왜 믿음이 약해집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돕지 않고 침묵하시기 때문에 약해집니다. '예수 믿어봐도 별수 없다.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신다.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데 하나님은 왜 도와주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침묵하는 그 순간에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고비를 넘겨야 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약해져 있기 때문에 강하신 여호와를 더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변의 평가 때문에 믿음이 약해집니다. 옆에서 말하는 것이 상처가 되어 그만 믿음을 놓아버립니다. 옆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그것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의 어떤 평가 때문에 믿음을 놓친다면 인생의 모든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이유없는 고난도 오지만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그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이 되길 바랍니다. 믿음은 정년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믿어야 합니까? 내 목숨 다하는 그 순간까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을 놓아 버리는 인생은 아무 것도 안됩니다. 나이가 들어가셔도 믿음은 청년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노인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룬 일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우리 인생의 영원한 재산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의지하리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로님이 계시는데 수년전에 저녁을 먹고난 후 복통이 있어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니 암초기로 발견되어 깨끗이 수술하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룻밤 복통의 고통은 영원한 고통을 예방하는 경고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우리를 약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때를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무슨 고통이 와도 믿음을 놓아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 붙잡고 있으면 길이 있습니다. 그 믿음 가지고 남은 때 복되게 사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어느 가정에 부부가 골프를 좋아합니다. 부부는 서로 가벼운 내기를 걸곤 하는데 골프를 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이가 반갑게 맞으며 누가 이겼냐고 물었습니다. 아빠가 대답을 않자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아빠가 졌지? 아빠가 졌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골프는 이기려고 치는 게 아니라 재미로 친다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총명한 아이는 두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아빠가 더 재미 있었어?" 이기는 것과 재미는 함께 갑니다. 게임은 이겨야 재미가 있습니다. 부모공경은 중요한 우리 인생의 게임입니다. 부모공경을 지고 내 인생의 보람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부모공경의 게임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모공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모두 누리시기 바랍니다.
(06)
어버이의 마음
잠 23:17-26
(김명섭목사)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자녀들을 낳으시고 기르시느라 애쓰신 모든 부모님들에게 우리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몇 해 전 신문에 기고되었던 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스물아홉 살에 나는 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내가 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나는 초조하게 무려 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서른일곱 살에 그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우등상장을 타왔을 때, 그걸 액자로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습니다. 누렇게 바래질 때까지… 마흔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에 입학한다고 입학시험을 치르게 될 때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그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되었다고 합니다.
쉰세 살에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 내의를 하나 사 왔을 때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고 일단 나무랐지만 밤이 늦도록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며 행복해했다고 합니다. 예순한 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 멀찍이 서서 나이 든 후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고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저 자나 깨나 부모는 자식 생각을 하며 지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하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부모님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다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보내셨다. 하나님께는 등이 없으시기에 어머니를 보내셔서 아기를 업어주셨고 가슴에 없으시기에 어머니를 보내셔서 안아주셨으며, 하나님께는 젖줄이 없으시기에 어머니를 보내셔서 젖을 먹여 길러주셨고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로 돌보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 땅에서 계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진정으로 우리를 용서해줄 수 있는 분은 어버이밖에 없습니다. 어버이의 용서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는 어버이의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본문 17절과 18절 말씀에 보면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어버이들은 자식에 대한 천륜의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려인의 풍속 중에 고려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효의식이 희박한 민족에게서 행해졌던 것인데 나이 많고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부모를 깊은 산에 갖다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삶이 힘들어 젊은 사람들이라도 살아남기 위하여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한 방편이었던 걸로 압니다.
한 집에 고령의 어머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를 고려장하기 위해 어머니를 업고 산에 올라가는데 어머니가 자꾸 허리를 젖히면서 나뭇가지를 꺾어 던지곤 해서 아들이 제대로 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을 합니다. “어머니, 내 등에 딱 붙어있어야지 왜 몸을 들어서 나뭇가지를 던집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고려장하고 네가 집으로 돌아갈 때 혹시 길을 잃어버릴까 싶어서 길을 찾게 하려고 나뭇가지를 꺾어 던졌단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은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자기는 어머니를 고려장하려고 업고 가는데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아들이 집에 돌아갈 길을 잃을까 싶어서 나뭇가지를 꺾어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를 고려장하지 않고 집으로 모셔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부모의 자식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버릴 수 있어도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 말씀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연법이라고 부르는데 자연법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주신 양심의 법입니다. 부모에 대한 도리는 양심의 명령이요 부모는 하나님의 마음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님의 눈물에서 하나님의 눈물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부모님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국내 교도소에 수감된 어떤 분이 수감생활에 대한 참회의 글을 썼습니다. 제목이 <어머니의 눈물> 입니다. “작년 겨울 첫 면회를 오신 어머니께서는 창 너머로 고개 숙인 채 땅만 내려다보고 있는 이 불효자식에게 한 마디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어머니께서는 “춥지” 그 한 마디를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셨습니다. 이 한 마디를 하시고 억지로 눈물을 참으시느라고 어머니의 눈가는 붉어지더니…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것은 그냥 눈물이 아닌 피눈물이었습니다. “춥지” 겨우 그 한 마디 하시고 면회시간을 다 보내버리신 어머니는 성경책 한 권을 남기시고 떠나가셨습니다.”
그 후 다시 면회가 없으신 어머니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을 무렵, 형이 면회를 왔을 때 형에게 어머니에 대한 불평을 말하자 형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야, 이 놈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니. 너 어머니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하고 말하더랍니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그가 다그쳐 묻자 그의 형은 어머니가 며칠 전화를 안 받으셔서 찾아가보니 엄동설한 추위 속에서 자식의 죄가 당신의 죄 때문이라고 방에 불을 피우지 않고 같이 감옥생활을 해야 한다며 자식과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다가 몸져누우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은 계속됩니다. “금수만도 못한 내 두 눈에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나는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이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눈물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를 거스림이 하나님을 거스림입니다. 부모를 순종함은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존재의 방식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요, 약속된 복을 누리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언 23:26 말씀에 보면 “내 아들이 내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라이언 화이트라고 하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라이언 화이트가 열세 살 때에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게 되는데 수술 과정에서 수혈이 잘못되어 후천성 면역 결핍증(에이즈)에 걸렸습니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이 병원에서 잘못한 사건으로 인해 그대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의사들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오히려 염려하는 부모를 위로하며 날마다 기쁘고 행복하게 보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이 방송매체를 통하여 전 미국에 전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이 소년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소년은 5 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기독교 잡지에 실려서 더불어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미안하다. 나는 아무 것도 너에게 해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전 지금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았지만 아빠가 제게 준 것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빠는 제게 천국열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고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믿게 해주셨고 말씀을 통하여 영생을 얻도록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버이의 사랑을 그 누가 흉내 낼 수 있겠습니까? 어버이는 내게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언제나 편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 옛날 어머니는 우리가 아파 누워 있을 때 열이 오른 이마에 손을 대시고 “네 대신 내가 아파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하시면서 기나긴 밤을 대신 아파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시며 홀로 지새우셨습니다. 부모님은 누가 뭐라 해도 자식을 믿어주시고 끝까지 지지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배반하고 버린다하여도 끝까지 믿어주고 도와주고 밀어주시는 분은 이 세상 가운데 어버이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평생 동안 목회를 부지런히 하고 70 세가 되어서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교회 장로님들이 목사님 앞에 나와서 “목사님, 이제 은퇴하시니까 우리 교회에서 목사님께 여생을 지내실 집을 하나 마련해드리겠습니다”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집문서를 꼭 쥐고 계세요. 틀림없이 사업하는 자식들이 와서 집문서를 내놓으라고 할 테니까 그 문서를 내놓으시면 목사님 부부는 길거리에 앉게 됩니다. 그러니 집문서만큼은 내주지 마세요.”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은퇴하셨습니다.
은퇴한 후 교회에서 사준 집에서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맏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에 처하니까 아버지에게 와서 “아버지 집문서를 빌려 주세요. 잠시만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만 장로님들의 당부도 잊은 채 어려움을 당하는 아들 내외가 가여워서 집문서를 내어주었습니다. 그 후 아들의 사업은 부도가 나서 파산하여 아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도망을 갔고 그 노부부는 길거리에 나앉았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노부부는 자식들을 원망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큰 상처를 입히고 가면 마음속으로는 괴로워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자식욕은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성공과 기쁨은 부모의 큰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자녀가 성공해서 행복하게 잘 살면 그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부모의 마음은 흡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모님의 마음을 잘 알아드리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6:2 말씀에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고 했습니다. 어버이 주일에 어느 교회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에베소서 6:1-3 말씀을 읽으라고 하니까 이 대목을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격하라”고 읽었답니다. 공격이 아니라 공경입니다. 순종이 의지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단어라면 공경은 정서적 측면이 강조된 단어입니다. 즉,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존중하라는 말입니다. 순종이 외적활동을 강조하는 말이라면 공경은 내적태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부모님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즉 제가 사춘기를 막 시작할 때 부떠 중학교 3학년때 까지 어머니는 큰 양은다라이에 떡을 담아 머리에 이시고는 떡 장사를 다니셨습니다. 예전에도 하셨던 일이지만 한동안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넉넉지는 않았어도 먹고 살만은 했기에 별 문제는 없었는데 시골 살림에 자식들 도시에 내보내서 공부를 가르치는 일은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에 가기 전 어머니의 떡 다라이를 지게에다 지고 시골장이 서는 곳에 갖다 드리기도 했고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동네에서 다니다 떡을 팔러 다니시는 어머니와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날 학교에 가면 반 아이가 “너희 엄마 우리 집에 떡 팔러 왔더라”하는 친구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그 때는 철이 덜 들어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그런 어머니가 부끄럽게도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생각해보니 우리 어머니는 훌륭한 분이셨고 정직하고 당당한 분이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신앙의 대장부시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몸이 고되고 힘드셔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새벽예배에 나가 눈물로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땅 한 평, 논 한 평 물려받지 못했습니다만, 부모님의 신앙과 정신은 물려받았음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대전 큰 형님 댁에 계시는 어머니를 뵙고 왔는데, 이제는 기력도 없으셔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시고 말씀도 어눌하셔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셨습니다. 당신의 고생과 수고를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자식들을 위하여 끝까지 헌신하신 어머니의 모습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26 절 끝부분에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길은 여러 가지지만 부모님의 길, 신앙, 성격, 철학, 이상,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내가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하여 후회와 아쉬움을 가지고들 계십니다. 그래서 때때로 자녀들에게 잔소리를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지 못했지만 너는 지혜로워야한다, 나는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너만은 열심히 해서 좋은학교에 가야한다, 선하게 살아라, 의롭게 살라고 하시는 것은 과거에 대한 후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술을 즐기는 자와 사귀지 말라, 게으른 자와 사귀지 말라, 단정히 행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길은 부모님의 길, 선택, 그의 살아온 생을 인정해드리고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부모님의 마음속에는 무언가 생을 잘못 살았다는 후회가 있을 때 부모님은 잘 살았다고, 훌륭하게 사셨다고, 부모님의 삶은 그런 상황 속에서 더없이 성공한 삶이었다고 인정해드리는 것이 부모공경의 도리인 것입니다.
옛날 조선시대에 어느 임금님이 서울을 떠나 개성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개성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요청하기를 “내가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임금님의 용안을 한 번도 뵙지를 못했는데 죽기 전에 임금님의 용안을 멀리서라도 뵙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임금님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렸다가 오십 리 길을 어머니를 업고 어느 길가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지나갈 때에 잘 보이도록 해드렸는데 임금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궁으로 돌아온 임금님은 그 때 어머니를 업고 있던 그 사람을 궁궐로 불러들이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서 “너는 효자다”라고 하면서 상으로 금 백 냥과 쌀 한 섬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한 불효자가 돈을 벌기 위해 원치도 않는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나가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내용을 보면 상을 받을 것이 아니라 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임금님은 신하에게 금 백 냥을 주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그 사람의 의도를 낱낱이 고했는데 임금님의 말씀이 “효도는 흉내만 내어도 좋은 것이니 상을 주라”고 했다는 말에 그 사람이 진짜 효자가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 공경이 진심으로 우러나지 않는 분이 있다 할지라도 흉내라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옵기는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부모공경의 도리를 통하여 여러분의 인생이 복 되고 진정한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7)
참된 효도
살전5:16-18
(심우갑목사)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자식된 자들이 어버이의 은혜를 생각하고 어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효도하는 법을 익히고 실천을 다짐하는 주일이 어버이주일입니다. 본문에 의지하여 참된 효도를 살펴봅시다. 사람이라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장려하는 일이지만, 문제는 참된 효도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서 열심히 효도를 한다는 것이 효도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을 보면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효도를 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잘 보고 마음에 새겨서 우리 모두 하늘 아버지께, 그리고 육신의 부모님께 참된 효도를 다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참된 효도는 부모님이 자식에게 요구하는 뜻대로 사는 데 있습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요구하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을 원하며, 어떤 부모는 공부는 못해도 상관없으니 건강만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부모는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자식이 돈만 잘 벌면 좋겠다고 합니다. 어떤 부모는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면 좋겠다고 해서 아침마다 운동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연습을 하게 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이 나쁜 짓만 안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이 참 믿음만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렇듯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바는 각각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모든 부모가 자식이 자기보다 더 잘 되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지만 너만은 나보다는 잘 살아라 하는 것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소원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식을 향하여 가지는 뜻 가운데서 가장 좋은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 아버지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를 향하여 가지신 뜻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는 것이 부족하고, 생각하는 것이 좁으며, 보는 것이 이 세상에 국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자식에게 바라는 것도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가지는 뜻이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이 세상을 뜬 후에 저 세상에 가서 보면,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되므로, 육신의 자식을 향하여 가지는 뜻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늘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뜻과 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요구한 대로 자식들이 살아가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효도를 하기 원한다면 하나님 아버지에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뜻이 곧 나의 육신의 부모님이 가지신 뜻이라고 생각하고 이 요구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식에게 좋은 뜻을 가졌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향하여 가지신 이 뜻보다 더 좋은 뜻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께서 가지신 뜻이 무엇입니까?
2.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가지신 뜻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요, 다음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요, 마지막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뜻을 더 세밀하게 살펴봅시다.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육신의 부모님의 뜻입니다. 기뻐하면서 살아야 참된 효자가 됩니다. 자식을 기를 때에 항상 우는 아이는 부모의 마음에 근심덩어리입니다. 반대로 웃으며 자라는 아이는 부모의 즐거움이요, 가족의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 앞에서 기뻐해야 하는 것인데 이 이치는 어른이 된 후에도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기뻐하면서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울기만 하면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근심 중에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기뻐하면서 살아서 참된 효도를 합시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육신의 부모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기 원하십니다. 물론 다 아는 사건들이지만 기도하여 보고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처럼 자식은 부모님께 모든 일에 대한 보고를 잘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부모님께 아뢰고 행하는 것이 참된 효도입니다. 그리고 보고를 잘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을 받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보고할 때에 정직한 보고가 되어야 합니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보고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육신의 부모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취사선택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식은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를 왜 이 모양으로만 길렀어요." 하면서 원망한다든지," 다른 부모는 자식에게 잘해 주는데‥‥‥‥ 하면서 비교하여 불평하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부모의 마음은 자식에게 모든 것을 주고픈 마음뿐입니다. 이러한 부모님의 모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자식이 효자입니다.
3. 왜 이 3가지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기 위함이라기보다 자녀들을 위해서입니다. 항상 기뻐하면서 사는 사람은 육신이 건강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사람을 쇠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선 음식을 잘 소화하지 못하고, 체내에 신진대사가 활발하지 못하니 힘이 없고 따라서 병균이 침입할 패에 막아 낼 힘이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생활은 육신이 건강하게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고 이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도 기뻐하며 삽시다. 육신의 건강이 부모에게 큰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영혼 건강의 비결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호흡 장애를 받는 사람과 같아서 그 영혼이 쇠약해집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데 무엇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우리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기도하면 시험에서 이기게 되고, 기도하면 기쁨의 생활을 더 잘하게 됩니다. 이처럼 부모에게 보고를 잘하면 그 관계가 항상 활발해집니다. 막힌 것이 없으며, 화기애애한 가정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생활 건강의 비결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습관이 있어야 사람에게도 감사하게 됩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관계 속에서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서로 원수가 없을 터이니 결국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감사해서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됩니다.
이기심에서 발로된 효는 참된 효가 아닙니다. 물려받을 만한 유산 때문에 효를 가장하는 것은 참된 효가 아닙니다. 참된 효는 성경에서 가르친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08)
아버지(부모)의 마음을 갖자
누가복음 15:11-32
(김광욱목사)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 주일은 80여년전 미국의 동부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신앙이 독실한 자비스(Jarvis)라는 부인이 26년간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에게는 안나라는 딸이 있었는데 어머니를 따라 주일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녀는 어릴적 어머니께서 학생들에게 제5계명을 설명하면서 "학생들은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에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뜻을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라고 하셨던 말씀을 생각하면서, 신앙을 실천하려고 어머니의 추도일에 오신 손님들에게 카네이션 꽃묶음을 안겨주었는데 여기에서 어머니 주일이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1913년 미국의 의회는 5월 둘째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정하고 모성을 존경하며 축하했던 것이 우리나라에도 받아들여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버이 주일로 발전되어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이라고 해서 몇 안되는 우리 교회학교의 아이들이 정성을 다해 만든 카네이션을 여러분들의 가슴에 달아드렸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어머님은 어디에 계신지요?
대부분의 농촌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부모를 공경해야 할 분 보다는 공경받아야 될 분이 더 많은 우리의 현실은 저로 하여금 어버이 주일에 무엇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참으로 갈팡질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여덟살 먹은 아이가 아버지를 고소하고, 아버지가 자기의 딸을 사창가에 팔아버리는 시대입니다. 가정에서 효나 사랑이란 단어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84세의 할머니가 항상 폭력을 휘두르는 할아버지와 이혼하기 위해 소송을 내어 결국 법원이 처음에는 기각하였으나 나중에 이혼을 결정하여 늦게 까지 해로한 한 가정이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다만 오늘의 시대적인 상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마을에도 나이드신 할머니들이 혼자 사시는 분들이 여럿 계신데, 그 가정들마다 다른 사정이 있겠지만 그래도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모두 가슴에 꽃을 여러 개씩 달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서울의 막내가 보낸 꽃 하나, 큰 손자가 보낸 꽃 하나, 그 꽃을 보면서 저는 그래도 흐뭇하기만 합니다. 아직 저도 나이가 많지 않아서인지는 모르나 왠지 카네이션을 달기가 쑥스럽거든요!
오늘 저는 거의가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께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함을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이 세상으로 보내시어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는 항상 자식을 생각합니다. 이미 부모가 된 여러분은 자식의 일이라면 끔찍이 생각하십니다. 아마도 오늘 자녀가 여러분을 보러 왔다면 아마도 이 자리에 계시지 않으실 분이 거의 대부분일 것입니다. 교회 오는 것 보다 자녀들과 함께 있기를 더 원하고 자녀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여러분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큰 믿음은 없다 하더라도 바로 부모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마음은 세상의 부모의 마음보다 더 넓고 큰 마음입니다.
① 먼저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줄 재산의 몫을 미리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믿고 줍니다. 비록 아들이 그것을 다 탕진한다고 하더라도 아들을 믿고 아무 말도 없이 줍니다. 사회 경험도 부족하고 사업 수완도 없는, 그저 부모 밑에서 용돈이나 받아서 쓸 줄 알았던 아들이지만 부모로서, 아버지로서 이 아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많은 댓가를 치룬다 하더라도 아들만 다시 돌아와 제자리를 찾기만 한다면, 자기 자신을 깨달아 알고 바로 서 준다면, 재물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이 아버지는 아들의 이러한 실패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재물이 없어지더라도 아들을 다시 새롭게 얻으려는 것 때문에 크나 큰 결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부모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② 그 다음은 자녀들을 인정합시다. 잘못하더라도 인격적으로 대해 줍시다. 못한다고 윽박지르거나 야단치거나 때리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아들 딸임을 기억하며 사랑해 줍시다. 내 아들이 비록 죄를 짓고 감옥에 가 있더라도 내가 낳은 자식은 내 자식인 것입니다. 호적에서 파 버린다 하더라도, 아들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더라도 내 자식은 자식입니다.
③ 바로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몇 해전 우리를 경악케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아픈 이야기입니다. 요즈음같은 시대에 아들을 생존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부모가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조기유학을 보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용돈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것도 모자라 고국에 돌아와 부모에게 더 많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주는 돈마다 탕진하는 것을 알고 있는 부모가 더 이상 돈을 줄 수 없다고 버티자 그 젊은이는 부모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왜 부모를 죽였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돈이 탐이 나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박한상 군의 이야기입니다.
자식의 기를 꺽지 않고 키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쟁쟁한 학벌을 지니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돈의 귀중함도 모르고 부모도 몰라보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애쓰기 전에,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바르게 사는 법을 어려서부터 심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④ 신앙의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이 박한상 군도 고등학교 시절에는 참으로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었던 아들입니다. 그런데 대학입시를 앞두고 부모는 교회보다는 학교에, 공부에 더 치중을 하라고 했습니다. 한상 군을 고등학교때 신앙으로 지도했었던 전도사님은 아직도 그 점이 안타깝다고 하였습니다. 자녀를 바른 신앙과 믿음으로 키우려고 하지 않았던 부모는 너무도 큰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자녀를 인정하고,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 신앙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⑤ 자녀가 감동되도록 부모의 역할을 다합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기의 몫을 다 주었습니다. 이미 아들은 아버지에게 받을 것을 다 받아 자기 힘대로, 아니 돈의 힘으로 살아 보았지만 실패의 연속입니다. 재물도 떠나갑니다. 친구도 떠나갑니다. 오직 자기를 맞아주는 곳은 더럽고 힘든 돼지 우리였습니다. 여기서 이 아들은 비록 재물은 잃었지만 인생의 귀한 아버지의 품(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아들은 인생이 비록 죽은 자와 같은, 돼지와 같은 인생이었지만 깨닫고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귀중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높이 평가해주는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인 것입니다. 아들은 여기서 아버지에게 감동하고 있습니다. 상거가 먼 데에서 벌써 아들을 알아보고 버선발로 뛰어나와 아들은 부둥켜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하는 모습에서 부모의 행동에 놀라고 있습니다. 황송해 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15:21)."
이제 아들은 더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음에도 "나를 품군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라고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더 좋은 것을 허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릅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15:22)" 누덕 누덕 기웠고 돼지 똥냄새나는 옷을 입은 그는 또 한 번 감동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한 번 더 감동할 일이 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잔치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아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할 수밖에 없는 종의 모습으로 왔으나 아버지는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다시 깨달은 아들을 무지무지하게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후반부에 보면 맏아들이 돌아와 동생을 비아냥거립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둘째를 감싸안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둘째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녀를 감동시킬 수 있는 부모, 자녀에게 떳떳하여 양심에 꺼리낌이 없는 부모가 될 수는 없을까? 이러한 부모를 둔 자녀는 아무리 해도 나쁜 길로 갈 수 없으며 효도를 하지 말라고 해도 효성이 지극한 자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감동받고 자란 아이들은 어디가 달라도 다릅니다. 부모에게 사랑받고 자란 아들은 어디가 달라도 다릅니다. 온실에서 화초처럼 키우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가정에서의 교육이 제대로 안되고 있는 실정이라는 교육보고서가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르게 사는 부모로서 자녀들을 바르게 가르쳐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신앙 안에서 살도록, 감동받으며 살도록, 바르게 살도록 하여 어디에서든지 인정받는 자녀가 되도록 하여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09)
성경적인 효도방법론
잠1:8-9
(한성진목사)
오늘은 5월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성경적인 효도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적인 효도관이란 성경에서는 효도를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효는 십계명 중 사람에게 대한 계명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계명입니다. 이 효도의 계명은 는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보다 더 강조되는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우리 기독교가 불효의 종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부모님이 계신 분들은 더욱 효도 잘할 수 있기를 바라고, 안 계신 분들은 자손들에게 효를 가르치시기 바라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를 이렇게 공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성경이 말씀하는 효도는 무엇입니까?
1. 성경은 부모의 말씀을 듣는 효도를 가르칩니다.
잠1:8-9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 말씀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에 가정의 제사장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가르치는 말씀은 곧 성경이었고 설교였습니다. 오늘날도 가정의 제사장은 누굽니까? 바로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손들을 가르치고 기도하고 축복할 의무와 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온전히 부모의 교훈을 들어야 했었습니다.
여기서 부모공경의 귀중한 힌트를 주는데 이처럼 부모 공경은 말씀을 잘 들어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모 중에 불신자도 계시니까 그 말씀대로 하지 못할 내용도 간혹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힌트는 부모를 어떻게 섬기느냐? 그 말씀을 들음으로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옳든지 그르든지 일단 그 인격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잘 들어드리는 것입니다.
어느 중풍병에 드신 분 가족들이 어린아이 취급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을 들어드리고 높이고 존경해 주니까 마음의 문을 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전도하고 기도해 주자 몇 일만이 나아서 퇴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담학에서도 남의 말을 성의 있게 들어주라고 합니다. 그것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연세 들면 소외된 기분이 들고 슬프고 외롭습니다. 그래서 내가 존재해 있다는 의식마저도 크게 위축되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말씀을 들어드릴 때 이 모든 외로움도 위축도 소외됨도 다 사라지게 됩니다. 말씀 존중에 곧 하나님 존중이듯이 부모의 말씀 존중이 곧 부모 공경입니다. 이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첫째가는 방법입니다. 성경이 교훈하는 이 공경법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성경은 순종하는 효도를 가르칩니다.
엡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했습니다.
여기 주 안이란 순종의 범위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이 용어에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주 안에 있는 성도이기 때문에 순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혹시 불효를 한다해도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 할지라도 믿는 우리들은 달라야 됩니다. 이 세상 풍조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좀 그런 예화 같습니다만 어느 탤렌트 보니까 기독교인입니다. 그가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가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신혼여행 가면서 어머니 모시고 가기가 쉽습니까? 사실 함께 가자고 해도 같이 갈 부모님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함께 갔다면 그만큼 원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라스베가스에서 행원권에 당첨이 되서 수십 억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행운권이 나오고 물론 예화가 좀 그렇습니다만 효도하다가 잘되는 것을 보고 보기가 좋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에게 어떻게 하든 우리 성도들은 주 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첫 계명대로 신자들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으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 순종함으로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 섬기는 방법이나 육신의 부모 섬기는 방법이나 같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부모도 섬기지 못하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잘 섬겼다고 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섬기듯이 육신의 아버지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모 섬기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 섬기는 것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어떻게 하셨습니까?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이란 먼저 그 뜻에 기쁨을 표시하는 것이고 순순히 따르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셨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순종한 것을 보세요. 젊은 아이를 잡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이삭은 도망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3.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를 가르칩니다.
엡6:2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했습니다.
여기 공경이라는 말은 “높이 평가하다, 가치를 두다” 라는 의미로 함축적으로는 “존경하다, 공경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공경하다라는 용어는 요5:23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낱말로 쓰인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으로 섬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섬기듯 존경하고 받들어야 합니다.
이 효도하는 것을 누가 보시느냐? 우리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그러므로 효도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장래를 복되게 하십니다. 이 효도에 관해서 딤전5:4에는 이렇게 교훈합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먼저, 효를 가르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효도한다고 하면 막지 마십시오. 하게 하십시오. 그것이 자손들에게도 복 받는 것입니다. 어제는 어느 노 목사님 고희를 맞이하여 그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어 가서 참석하고 왔습니다만 자녀들이 효도한다고 하면 하라고 하십시오. 저녀들을 효자 만드는 것이 그들이 복 되는 길입니다.
그 다음에는 효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아름다운 제사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육신의 부모님에게 했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불효하는 자는 절대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율법에는 불효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출21:15에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했습니다. 출21:17에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잠30:17에는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했습니다. 잘잘못을 떠나서 어떻게 부모에게 함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 원리는 육신의 부모나 믿음이 부모나 영의 아버지 하나님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노아의 자손들 중에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었지만 함은 그 허물을 덮지 못하고 발설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다가 효행한 두 사람은 복을 받았지만 함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왜 그랬을까요? 부모 공경이 무너지면 신앙은 물론 사회의 모든 기강까지 다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4.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는 효도를 가르칩니다.
잠23:25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잠15:20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했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의로워야 합니다. 잠23:24에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부모를 늘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즐겁게 해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5. 부모에게 전도하고 기도하는 최고 사랑의 효도를 가르칩니다.
수2:18에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했습니다.
여리고 성의 라합이 회개고 온 가족을 전도하여 구원시키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육신적으로 잘 해드려도 전도하지 않으면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한 복된 천국에 가게 해 드려야 합니다. 반면에 절대로 불타는 지옥에는 가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속히 돌아가시면 자유롭게 신앙 생활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생각만큼 불효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하여 천국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도 이렇게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말씀을 듣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공경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기도로 대화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를 잘 공경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애굽기 20:12
(주금용 목사)
어느 시골마을에 아름다운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연못에는 고기가 자라고 소와 말들이 와서 물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못에 이상한 독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물고기들은 죽어갔고 소와 말들도 더 이상 물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연못에 버드나무를 심어줌으로 버드나무의 뿌리가 깊이 스며들어 독초가 빨아들이던 양분을 다 빨아버려서 독초를 다 죽였다고 합니다.
우리시대의 독초가 언제 죽느냐 우리의 가정에 효도를 심을 때 다 죽어지고 가정이 살고 사회와 민족이 사는 역사가 있습니다.
유교가 효를 가르치는 것 같고 기독교는 불효의 종교라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사문제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유교보다 더 효도를 가르치는 종교가 기독교임을 아십니까? 유교의 효는 대부분이 형식과 겉치례의 효도입니다. 기독교만큼 효를 강조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인간의 도리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고 부모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경은 그 어떤 종교나 철학에서 강조하는 것보다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더 많이 강조하고 있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 말씀이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공경하라"는 이 말은 명령어로 공경해 주세요가 아니다. 공경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공경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과 부모님이며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라." 이렇게 말씀했고, "부모를 공경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불효자와 하나님께 범죄한 자에게 내려지는 징벌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내려지는 징벌이나, 불효자에게 내려지는 징벌이나 그 징벌이 같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제1-5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명령하고 있고, 제6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데에 있어서 첫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증거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증거는 살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적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거짓 증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통해서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절대로 살인하지 않습니다. 간음하지 않습니다. 도적질하지 않습니다. 거짓 증거하지 않습니다. 또 절대로 남의 것 탐하지 않습니다. 이런 죄를 범하면 불효 중의 불효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면 더더군다나 부모를 공경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모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또 부모공경은 부모님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면 부모만 기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살아갈 때, 누가 기뻐하시냐?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십니다.
불효는 무서운 겁니다. 불효는 부정 부패의 근원입니다. 대통령의 막내아들이 부정으로 축재함으로 아버지에게 불효를 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것이 불효자입니다.
불효는 무신론과 죄악의 밑거름입니다.
말세의 징조는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집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샌다". 집에서 부모님께 잘하는 사람은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어디서도 잘합니다. 교회에서도 잘합니다. 부모님께 하듯 목사님에게도 잘 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생명을 주신 분이시기에 공경합니다.
부모가 나를 낳아 주신 것만 가지고도 공경을 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많고 많은 인간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친척관계, 이웃관계가 있는데 그 중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만을 따로 떼어서 십계명에 언급하셨겠습니까?
부모와 자녀 관계는 하나님께 속한 생명 창조의 연속인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했듯이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잘 났던 못 났던 나 같은 생명 이 땅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는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다고 하면서 부모에게 대드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부모가 돈이 좀 있고 여유가 있으면 효도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효도는 아닙니다. 부모님께서 우리를 낳아 주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효도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이상하게도 자녀를 오냐 하면서 잘 키워준 자녀들은 효도를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것을 더 요구함을 봅니다. 그런데 잘 키우지 못한 아이들은 오히려 낳아준 것 하나만으로도 효를 아끼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낳아 주신 것만으로 공경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지금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부모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부모가 나를 많이 해 주었다, 안 해 주었다 그것 때문에가 아닌 것입니다. 부모가 나를 낳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인 것 입니다.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한글학자 양주동 박사가 지은 노래가 "노래중의 노래"라고 불리우는 곡이 있습니다 "어머님 은혜"라는 노래입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코끝이 찡하는 이유는 부모님의 사랑이 우리 가슴속에 와 닫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모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버이 은혜를 생각하면 한마디로 "다 베풀어주신 사랑" 이라고 표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자식 위해 다 포기하시며 베푸셨던 그 사랑이 느껴져야 비로서 효도를 할 수 있는 기초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님 칠순잔치에서 이 노래를 함께 부르는데 우리 온가족은 끝까지 부를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피로 낳으셨습니다. 눈물로 기르셨습니다. 땀흘려 교육시키셨습니다. 진자리는 당신이 누우시고, 마른 자리 골라서 우리를 뉘어주셨습니다. 먹을 만한 것 자식 주시고, 물만 마시고, 부모님이 허리띠 졸라매시면서 배가 출렁 출렁 고생하시면서 사신 것 아닙니까? 부모님을 우리를 피로 낳아주시고, 눈물로 가르치시고, 땀흘려 교육시켜 주셨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런 말합니다. "가정은 최초의 학교요, 부모는 최초의 교사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식들을 좋은 것 먹이려고 먹을것이 없을 때 누릉지를 불려서 먹으면서 그것도 부뚜막에서 아무렇게나 드시면서도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신 그 헌신, 돈이 없어서 소고기는 못 먹고 돼지고기를 먹을 때 살은 자녀들을 주시고 비개는 어머님께서 드시면서 나는 비개를 더 좋아한단다 하시면서 드신 그것이 이제 나이가 들어서 병으로 찾아와서 고생하시는 그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밥이 없으면 우리들을 먹이시려고 배가 아파서 못 먹겠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더 많이 먹이시던 그 모습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어머니의 공통된 사랑입니다.
빵집을 하셨는데 그 빵을 만드시면서도 자녀들을 공부시키시려고, 행상을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고생하신 그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그런 고생 때문에 결국에는 풍도맞으시고 관절이 안좋으셔서 고생들 하시는 어버이의 사랑을 잊는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성도님들 살아생전에 부모님께 잘 하십시다. 부모님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십시다.
부모 돌아가시고 난 후에, "그 때 좀 더 효도할 걸", "좀 더 공경할 걸", "걸, 걸" 후회하지 마시고, 오늘 하나님 명령하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노아의 세 아들을 압니다. 셈, 함, 야벳. 함은 자기 아버지가 너무 포도주를 마시시고 실수해서 바지가 내려갔을 때, 형 셈과 동생 야벳 에게 아버지 흉을 봤습니다. 그러나 형 셈과 동생 야벳은 "아니야, 그렇게 하면 안 돼." 뒷걸음질 쳐서 아버지 부끄러운 것을 다 가려주었습니다. 부모님의 치부를 가리워 주고 오히려 그 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아낌없이 돌보아 드리십시다. 한가지 유념할 것은 자기의 상관을 욕하고 교회 안에서도 목사님에게 부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모님께 효도가 없습니다.
성도님들 모든 사람들에게 다 좋게 하면서 믿음 안에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에베소서 6장 1절로 3절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유가 무엇인가 효도를 하면 마음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효자에게 장수의 복과 형통의 복을 함께 주십니다. 영혼이 잘 됩니다. 범사가 형통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장수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녀가 형통합니다. 사업이 형통합니다. 또 친척과 형제가 다 형통합니다. 부모를 업신여기면서 하는 모든 사업은 될 리가 없습니다.
효자가 많은 나라, 가정마다 행복하고, 학교 교육이 잘 되고, 그 뿐이 아닙니다. 경제가 삽니다. 나라가 삽니다. 또 이 사회 위계 질서가 바르게 되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효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세요. 즐겁게 해드리세요. 혼자 되시면 시집, 장가도 보내드리시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세요, 노인네가 돈 밖에 모른다고 하지 마시고 돈을 좋아하시면 돈을 드리시면 됩니다. 소일거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나이가 들었다고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효도중의 효도는 부모의 권위를 세워 가는 것이며 그 부모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주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우리와 세대 차이가 있어서 잘 몰라서 그러신다고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학생 열 댓명을 모아 놓고 질문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아버지가 어느 때 가장 불쌍하다고 느껴집니까?"
결과는 이렇습니다.
첫째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야단 맞을 때이고
둘째는 아버지가 밤늦게 회사에서 돌아와 가방을 힘없이 내던지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흐느껴 우실 때이고,
셋째는 아버지가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말고 갑자기 나가셔서 혼자 복권을 맞추어 보실 때였답니다. 가슴아픈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입니다. 그러니 가정에서 자녀들이 무엇을 배울수 있단 말입니까?
자녀들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세워주는 가정적인 분위기 참으로 귀합니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신명기 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엡6:1~3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6:3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효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또 인생의 본분입니다. 또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말미암아 축복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전달자이고, 양육의 책임자이시며, 신앙생활의 전수자인 부모님에게 효를 행하는, 그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그 부모를 공경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11)
부모님을 공경하는 법
에베소서 6:1-3
(김찬종목사)
오늘은『부모님을 공경하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정의 시작은 부부입니다. 부부의 가정생활을 통하여 자녀가 출생하게 됩니다. 그 자녀가 장성하면 역시 부모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들이 생육하고 번성토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은 내 존재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말은 예의 바르게, 겸손하게 섬기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최고의 방법은 첫째,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자녀들은 언제나 부모님께 순종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에 단서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부모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불신자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순종은 주 안에서입니다.
불신 부모님들 가운데 자식이 교회 다니면 나중에 죽어서 제사 밥 못 얻어먹게 된다고 반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의 뜻에 따르면 그것은 옳은 순종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로 부모님과 신앙상의 문제가 있다면 부모님의 구원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면서 부모님이 기분 좋을 때 대화로 풀어야 합니다. 제사 밥 차려놓으면 진짜로 오셔서 드실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은 형식입니다. 부모님들이 잘 납득하실 수 있도록 설명하면서 차라리 살아 생전에 좋아하는 음식 한가지라도 더 해드리고 생일도 잘 기억하면서 용돈도 부족하지 않게 드리는 것이 진짜 부모님을 공경하는 방법입니다.
믿는 자녀들은 불신자 때 보다 모든 일에 더 성실해야 합니다. 직장생활, 학교생활, 가정생활에 더 성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신가족이 인정해줍니다.
"우리 애들이 교회에 나가더니 더 성실해졌어..." "우리 애들이 교회 나가더니 공부도 더 잘해...." 이런 식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부모님께 순종하면서 시키시는 일에 성심성의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다니면서 성실하지 못하면 전도는 되지 않습니다. 가정 복음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도리어 교회부흥에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우리는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이나 이웃과의 생활에 무엇보다 성실해야 복음이 증거 됩니다.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는 죄 없이 종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임했습니다. 가정총무로 승진했습니다. 그래도 교만하지 않고 성실했습니다. 그 주인은 불신자였지만 그 불신자 눈에 요셉이 믿는 자로 비쳤습니다. 그러니 인정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죄 없이 감옥에도 들어갔지만 거기서도 성실했습니다. 그랬더니 전옥이 그를 인정했습니다. 감옥의 제반 사무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성실한 청년이 되게 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 눈에 그것이 비쳐졌습니다. '요셉과 하나님이 함께 하는구나'하고 불신자들이 인정했습니다. 그때 복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처녀 때 예수 믿었다가 믿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고 불신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성실한 결혼생활을 하여 남편과 시집식구를 구원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서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결혼하고 나서 신앙를 잃게 되는 경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충만하지 않아서입니다. 기도하지 않아서입니다. 해보려고 생각도 해보지 않고 그냥 불신자들에게 이끌리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불신가족과 같이 마귀의 자녀가 되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부인들에게 전도해보면 "우리 시부모님 죽고 나면 예수 믿을 거예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시부모님은 지옥 보내고 나는 예수 믿어 천국 가겠다는 것입니까? 잘못되어도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것은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믿는 자와 해야 합니다. 전도하기 위하여 결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도록 부모님도, 결혼을 앞둔 본인들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를 잘 믿던 남자 청년들도 믿음 없는 배우자를 만나 신앙생활을 완전히 외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는 배우자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불신자였다가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 신앙을 가지게 된 분들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간단히 정리하면 부모님을 공경하는 최고의 방법은 불신 부모님께 복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살아 계실 때 아무리 효도를 잘 한다해도 부모님이 예수 믿지 않으면 부모님을 영원한 고통이 계속되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신 부모님이 계시는 자식들은 부모님께 복음을 전해 드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단둘이 살아가던 부녀가 있었는데 딸은 예수를 잘 믿는데 아버지는 살인강도였습니다. 딸이 아무리 권유해도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강도 짓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딸은 생각다못해 한가지 결단을 내렸습니다.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유서를 쓴 후에 빈 가방에 신문지를 가득 채우고 변장을 하고 아버지가 숨어서 강도 짓을 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딸인지도 모르고 칼로 찌르고 가방을 빼앗아 갔습니다. 집에 와서 가방을 풀어보니 신문지만 가득 들어있고 피로 쓴 딸의 유서가 들어있었습니다. 딸의 유서에는 '저는 아버지가 지옥 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이 길을 택합니다. 이 글을 보시고 부디 예수 믿고 천국에서 아버지를 만나기를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통곡하며 회개하고 자수하여 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믿어 구원을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다가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부모님을 예수 믿도록 해야 최고의 효도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두 번째 방법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어떻게 할 때 부모님은 기뻐할까요?
1)자녀들이 건강할 때 부모님들은 기뻐하십니다. 자식이 병이 들면 부모님들은 마치 당신들이 아픈 양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잘 관리하여 건강하도록 해야 합니다. 건강은 규칙적인 생활과 적당한 운동을 할 때 주어집니다. 건강은 영혼이 잘될 때 주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 주어집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2)형제끼리 우애 있을 때 부모님들은 기뻐합니다. 형제끼리 화목할 때 부모님들은 기뻐합니다. 자녀들은 성년이 되면 독립하여 각기 살림을 나게 됩니다. 직업도 각기 다릅니다. 그러다 보면 서로 만나기도 힘들게 되고 교류관계가 멀어지게 됩니다. 그때 부모님들은 마음 아파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정기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형제끼리 부모님의 재산을 가지고 탐욕을 부리면 안됩니다. 대개 형제간의 불화는 재산문제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탐욕 때문에 싸울 때 부모님은 너무 슬프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간은 화목해야 합니다. 양보해야 합니다.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때 부모님은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효도입니다.
3)세상적으로 자기 몫을 잘 감당할 때 부모님은 기뻐합니다. 직장생활, 가정생활을 잘 할때 부모님은 기뻐하십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주부로서 자기 몫을 잘할 때 부모님은 기뻐하십니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직장인으로서 자기 몫을 잘 할 때 부모님은 기뻐하십니다.
4)다른 어른도 잘 섬길 때 부모님은 기뻐하십니다. 웃어른에 대하여 예의 바른 행동을 할 때 기뻐하십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을, 직장생활에서는 상사를, 교회에서는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받들어 섬겨야 합니다. 예전에는 군사부일체(軍師父一體)라고 했습니다. 임금님과 선생님과 아버지를 한 마음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기본예의가 깨어지면 안됩니다. 웃어른을 잘 섬길 때 부모님은 기뻐하십니다.
5)신앙생활을 잘할 때 부모님은 기뻐하십니다. 예배생활에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봉사생활에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부모님은 기뻐하십니다. 교회에서 하기 힘든 일,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할 때 부모님은 기뻐하십니다. 그 봉사도 꾸준해야 합니다. 한 두 번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바른 봉사가 아닙니다. 기도생활도 꾸준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부모님이 기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효도했을 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본문 6장 3절입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첫째, 형통의 복입니다. 잘된다는 것은 형통을 말합니다. 사업의 형통입니다. 직장생활의 형통입니다. 학교생활의 형통입니다. 사회생활의 형통입니다. 대인관계의 형통입니다. 하는 일마다 형통입니다. 이는 목사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해주는 보장입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찬송가 434장 1절)
부모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혹시 부모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는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장수의 복을 주신다 했습니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복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장수는 자식들에게 부담이 됩니다. 그러므로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은 복 가운데 최고의 복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장수하면서 무엇하시겠습니까? "선교해야지요. 전도해야지요. 복음전파 해야지요. 주의 이름으로 봉사해야지요" 그런 자세로 살면 하나님은 더 힘을 주셔서 건강하게 해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의 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2)
기독교인의 가정과 교회
엡 5:22-33
(정필도목사)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같은 소원을 가진 사람도 있
지만 개개인마다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소원 가운데 하나는 천국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 조차도 천국과 같은 좋은 곳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국에 관하여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습
니다만 천국은 한마디로 영원히 행복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천국에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으며, 아픔도 없고 고통도 없다고 했습니다. 늙고 병들고 쇠하는 일도
전혀 없습니다. 서로 미워하거나 질투하거나 싸우는 일도 없고, 오직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라고 천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천국은 참으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가장 좋은 곳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가서 살게 됩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면 천국에 들어가서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5:24을 보면 예수님께서 좬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좭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
는 사람은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아직 천국에 들어
가지는 않았어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을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갔습니다.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점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판잣집에서 사는 어려운 형편
이었고 아버지도 안 계신 어찌보면 불쌍한 아이로 보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먹어도 좋고
굶어도 좋고 아무 걱정이 없는 그야말로 천국을 맛보며 살았습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면 천국을 맛보는 이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아야 하는 곳
이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이고 또 하나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불행하게도 교
회 나온지 오래되어 직분도 가지고 있지만, 한번도 천국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는 사실입니다. 이런 분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도 그저 그렇고, 교회라는 곳도 그렇고 그런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교회생활에 대한 기쁨도 없고 가정생
활 안에서도 기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지만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들 중에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
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
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 사람이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변했는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평생 교회에 다녔어도 사랑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있다면 이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분입니다.
요한일서 3:10과 14-15을 보면 좬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니라좭, 좬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
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좭고 말씀했습니다. 또 마태
복음 5:43-44를 보면 예수님께서 좬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
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예전에는 자신을 핍박하고 욕하는 사람을 보면 같이 욕을
하고 이를 갈며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나,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부터는 오히려 핍박
을 묵묵히 참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그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그런 변화된 모습의 사람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
구별하려면, 그 사람에게 사랑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따
라서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행복은 사랑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
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지 않았어도 사랑이 있는 곳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
나님의 자녀가 되어야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남녀간의 에로스의 사랑이 아닙니다. 친구간의 우정을 말하는
필레오의 사랑도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의 혈육간의 사랑인 스톨게의 사랑도 아닙니다. 여기
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조건 없는 사
랑입니다. 섬기는 사랑입니다.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성령
충만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17을 보면 좬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좭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게 되고 평강의 복을 누리며 희락이 넘칠 때 비로소 하
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 사람이 은혜를 받아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은혜 받은 사람인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인지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속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있는 사랑을 보면 알 수 있
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18-21에서 행복한 가정이 되는 비결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좬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좭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며 사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고 하면 부부가 먼
저 성령충만함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부뚜막의 소금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소금이 많아도 그 소금으로 음식에
간을 맞추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더라
도 그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
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충분히 느끼고 알 수 있도록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 어떻게 사랑을 나타내야 할까요?
1.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은 섬김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좬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교회가 그리스도
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좭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사실
을 알고 아내는 남편의 권위를 세워줘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려면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을 인정하고 언제나 남편에게 복종하므로서 남편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
랑은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남편을 섬기되 겸손해야 하며 예의
를 지켜야 합니다.
잠언 12:4을 보면 좬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좭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을 영광스럽게 존귀하게 해주는 아내
가 되어야 합니다. 명심보감에도 어진 아내는 남편을 귀하게 만드나 악한 아내는 남편을 천
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출처] 어버이 주일 추천설교 2022|작성자 성경환목사
첫댓글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언29장 1절 말씀).
할렐루야
행복한 밤 되세요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