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8/31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The Scream'
2006 - 도난 당한 뭉크의 두 작품 ‘절규’ ‘마돈나’ 회수 발표
도난당했던 뭉크의 <절규>와 <마돈나>가 다시 돌아온다.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작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걸작 <절규>와 <마돈나>가 도난된 지 2년 만에 회수됐다고 오슬로 경찰이 31일 밝혔다.
경찰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지난 2004년 8월22일 오슬로 소재 뭉크 미술관에서 복면한 무장괴한 2명에게 도난된 이들 그림이 2년 만에 경찰작전을 통해 회수됐으며 그림들의 상태는 예상보다 양호하다고 발표했다.
이베르 스텐스루드 경찰 수사책임자는 "성공적인 작전을 통해 오늘 오후 그림들이 우리 수중에 들어왔다"면서 노르웨이 경찰이 지난 2년간 그림들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그림의 회수와 관련해 어떠한 보상도 지불된 바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제 남은 것은 전문가들이 그림들의 진위 여부를 판명하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이 그림들이 진품인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5억 크로네(7900만 달러)로 추정되는 뭉크의 대표작 <절규>는 현대인의 불안을 상징하는 걸작으로 꼽혀왔고, <마돈나>는 1억 크로네(1580만 달러) 상당이다.
회수된 작품 가운데 한 작품에는 해진 곳이 있으며 다른 작품은 테두리에 미미한 손상을 입은 것으로 오슬로 시의회 관계자가 전했다 스텐스루드는 그러나 그림의 자세한 회수 경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당장 언론에 공개하기도 힘들다고 덧붙였다.
지난 5월에는 3명의 용의자들이 뭉크의 그림 도난과 관련해 4~8년형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그림들의 행방은 파악되지 않았으며 이에 오슬로시 당국이 200만 크로네(약 3억원)의 보상금을 내거는 등 국제적인 회수작업이 진행돼왔다.
2004년 8월 도난 당시 경찰은 “2~3명의 무장 괴한이 총기로 박물관 직원을 위협하며 두 작품을 내놓으라고 해, 아우디A6 승용차를 타고 빼앗은 그림과 함께 도주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건 당시 박물관 관람객들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는 줄 알고 공포에 떨었다. 당시 사건을 목격한 한 관람객은 노르웨이 NTB통신과 인터뷰에서 “범인은 검은색 복면을 하고 있었으며 총처럼 보이는 물체로 여성 보안요원을 제압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신문들은 당시 뭉크미술관에서 두 작품을 빼앗아 달아나는 두 용의자의 모습이 폐쇄회로 TV에 찍힌 장면을 보도했다.
도난사건 당시 뭉크 박물관을 찾았던 프랑스의 한 라디오 프로듀서인 프랑수아 카스탕은 “이 박물관의 기이한 점은 작품들을 보호하기 위한 어떠한 장치도 없다는 점”이라며 “경보기도 없다”고 지적했다. 카스탕은 “작품들은 철사로 벽에 걸려있을 따름”이라며 “작품을 세게 잡아 당겨 철사를 끊으면 되는데 내가 목격한 바가 바로 이랬다”고 덧붙였다.
한편 노르웨이 일간 다그블라데트(Dagbladet)는 최근 “은행강도 죄로 수감중인 조폭 두목 데이비드 토스카가 검찰청의 토아 악셀 부시 주임 검사에게 자신의 사면을 조건으로 <절규>와 <마돈나>의 행방과 반환을 주선하겠다는 비밀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해, 도난미술품 회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했다.
두 작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조폭 두목 토스카는 오슬로 시 역사상 가장 큰 은행강도가 벌어졌을 당시 13명의 무장 갱단을 지휘, 경찰관 1명을 사살한 후 700만유로를 강탈, 도주에 성공했으나 2005년 봄에 스페인에서 체포돼 19년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오슬로에서 복역 중이다. 토스카가 재판을 받았을 당시 그의 입에서 뭉크 명화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가로 형량의 감경을 요구하리라고 사람들은 기대했었으나 당시에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뭉크의 대표작 <절규>는 유명한 만큼, 미술품 도난세력의 주요표적이기도 하다. <절규>는 지난 1994년 2월에도 도난당했으나 약 3개월 만에 훼손되지 않은 채 발견되어 회수되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외신종합 /한겨레 2006-09-01
2001 - World Conference Against Racism
UN, South Africa, 31 Aug-7 Sep 2001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2009.asp
1997 - 영국의 전 왕세자비 다이애나(Diana Frances Spencer) 사망
다이애나 [Diana Frances Spencer, 1961.7.1~1997.8.31]
1997년 8월 31일 영국의 전 왕세자비 다이애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다이애나는 1961년 올소프 자작(후의 스펜서 백작)과 그의 첫 아내인 프랜시스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1981년 2월 24일 찰스 왕세자와 약혼을 발표했고 1981년 7월 29일 결혼했다. 성대하게 치러진 결혼식은 전세계로 생중계되어 당시 '세기의 결혼식'으로 불렸다. 이후 다이애나는 전세계 가난한 어린이들과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들을 돕는 등 자선 활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언론의 사생활 침해에 시달렸으며, 남편 찰스와의 불화로 고통받았다. 마침내 1992년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별거에 들어갔으며, 1996년 8월에 이혼이 확정되었다.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는 연인이었던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있는 장면을 찍으려는 파파라초의 추격을 피해 고속 질주하다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영국 국민은 물론 세계 각국이 그녀의 죽음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침묵을 지키던 영국 왕실도 관례를 깨고 장례식 장면을 전세계에 방영토록 허락했다. 또한 영국 정부는 항구적으로 다이애나 기념사업을 관장할 위원회를 설치했다. /브리태니커
- Independence, 10th Anniv.
1991 - 키르기스스탄 독립
19세기 제정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로 1864년에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제정러시아는 유목지의 국가 소유를 선언하고, 그 중 가장 좋은 토지를 러시아 이주민에게 대부분 분배하면서 러시아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원주민을 전시 후방 작업에 강제 징집, 노역에 동원하자 대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러시아혁명 직후에는 지주들에 의한 반소(反蘇)저항운동이 있었으나 1920년경 진압되었다. 1917년 혁명 후, 키르기스스탄은 소비에트 투르키스탄의 일부가 되었고, 1924년 중앙아시아가 지역적으로 재조직되어 국가가 창설될 때, 종래의 투르키스탄에서 분리, 키르기스자치주가 되었다. 1926년에는 키르기스자치공화국이 되고, 1936년에는 키르기스스탄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구소련 연방의 해체에 따라 1991년 8월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국가로서 주권을 선언하였다. 키르기스스탄은 1991년 독립 후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정하여 언론의 자유와 정당결성의 자유가 보장되고, 시장경제의 법적 기반을 정비하여 가격과 기업활동이 거의 전면적으로 자유화되었다. 국영기업의 사기업화와 농지의 재분배 등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개혁이 진척되었다. 또한 민족간 여러 세력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naver
1989 - 영국 앤 공주와 마크 필립스공 결혼 16년 만에 이혼
앤(Anne) 공주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공(公)의 장녀로 켄트주(州) 베넨든여자학원을 졸업하고, 1973년 대위 M.A.P.필립스와 결혼하였다. 승마술에 뛰어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마술경기에 영국대표로 출전하였다. 1981년 런던대학교 총장에 취임하고, 1986년 국제승마연맹회장이 되었으며, 1988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naver
1986 - 핀란드의 법률가, 정치가 케코넨(Kekkonen, Urho Kaleva) 사망
케코넨 [Kekkonen, Urho Kaleva, 1900.9.3~1986.8.31]
핀란드의 정치가이자 법률가. 피엘라베시 출생. 1928년 헬싱키대학을 졸업하고 1936년 동 대학에서 민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36년 농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 이후 법무장관 ·내무장관을 역임하였다. 1950년 총리를 거쳐 1956년 대통령에 취임, 1962 ·1968 ·1978년 연속해서 재선되었다. 비동맹중립정책을 취하여 1961년 베를린위기 때 소련으로부터 압력을 받았으나 직접 소련을 방문, N.S.흐루쇼프에게 자국의 입장을 양해시킴으로써 국민의 두터운 지지를 획득하였다. 1981년 건강악화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네이버
- 'Family Group'
- 'The Sovereigns', 'King and Queen' - Henry Moore and 'Reclining Figure'
- 'Rocking Chair I'
- 'Grosse Liegende Nr. 5'
1986 -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Moore, Henry) 사망
무어 [Moore, Henry, 1898.7.30~1986.8.31]
반농반광부(半農半鑛夫)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장학금으로 사범교육을 받고, 1916년 모교의 교사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7년 군대에 입대, 프랑스 전선에 출전하였으나 부상으로 본국에 송환, 수술을 받았다.
1919년부터 일찍이 희망한 조각을 배우기 위하여 리즈의 미술학교에 입학, 1921년에는 런던 왕립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 동안 대영박물관에 다니면서 원시미개문화의 조각에서 자연재료에 밀착한 단순한 형체를 연구하였다.
1925년에 장학금으로 파리와 이탈리아를 연구, 여행하여 당시의 전위조각의 동향에 접할 수 있었다. 귀국하여 1931년까지 왕립미술학교의 강사, 1939년까지 첼시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동안 외부의 동향도 소화하면서 독자적인 작풍을 추구해나갔다.
1930년대에는 C.브랑쿠시와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영향 아래 지극히 보수적인 영국 조각계에서 전위적 작가로서 추상적 형체를 조각하여 1930년대 말부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노샘프턴에 있는 성마태성당의 《성모자상》(1943) 등의 구상적 작품, 그리고 전후에는 일련의 독특한 인체상으로 변천하여 유네스코 본부의 《옆으로 누운 사람》(1957∼1958) 등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시종 일관하여 그의 작품에 공통된 것은 재료의 성질을 존중하면서 유기적이고 단순한 원초적 형체로써 대상의 내적 생명을 표출한 점이다. 1948년에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국제조각대상을 받았고 공공 기념비 제작에도 공헌하였다.
만년의 작풍은 순수 추상의 포름도 아니고 재현 묘사의 사실형식도 아닌, 그의 말에 따르면 유기적 구성의 형식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구상적인 형식은 현실의 재현적인 형식이 아닌, 자유롭게 구성된 형체의 표현이다. 조각을 위한 소묘도 많은데, 《런던 방공대피소 풍경》(1940)이 유명하다. 《와상손》은 한국의 호암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한국에서도 지난 1982년과 1983년에 호암갤러리와 현대화랑에서 작품전시회가 있었던 데 이어, 1995년 11월 포스코센터에서 《모자상》 등 5점이 전시 소개되었다. /naver
- Adm. Pavel S. Nakhimov (1802~1855)1986 - 소련 여객선 나키모프 제독호 침몰승객과 승무원 천2백34명을 태운 소련 여객선 나키모프 제독(Admiral Nakhimov) 호!1986년 오늘 흑해 북쪽 노보로시스크(Novorossiisk)항 근해에서 화물선과 충돌했다. 이 여객선은 충돌 15분 만에 두동강이 난 채 침몰했다.8백36명이 헬리콥터로 구조됐지만 448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모두들 잠이 든 자정 녘에 사고가 발생해 피해가 컸다.나키모프 제독호는 1925년 독일이 건조한 배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이 노획해 사용하다가 이 사고로 최후를 맞이했다. /YTN
1983 - 필리핀 야당지도자 아키노 장례식
1983년 8월 21일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3년간의 미국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 마닐라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트랩을 내리는 순간 괴한의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아키노의 살해범은 현장에서 경호원들에 의해 사살됐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던 아키노 전 상원의원은 필리핀의 민주회복을 위해 투쟁해왔다.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피살되고 열흘이 지나 거행된 장례식에 운집한 백만여명의 필리핀 국민들은 아키노 살해의 배후로 마르코스 대통령을 지목하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아키노가 피살된 후 불붙기 시작한 민주화 시위로 마르코스 대통령의 21년간의 장기독재는 3년후인 1987년 마침내 무너지게 되었다. (오늘의 역사) /WHAT'S on KOREA
http://whatsonkorea.com/korean/history.ph?uid=539&se=list&page=42&keyfield=&key=&wk_code=
- Lech Wałsa (1943~ )
1980 - 폴란드 자유 노조가 폴란드 정부로부터 인정받다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 설립과 파업을 보장하는 협정서 체결
폴란드 그다니스크의 레닌조선소에서 제1부수상 야루젤스키와 파업위원장 바웬사간에 자주관리노조의 설립과 파업을 보장하는 합의협정서가 1980년 8월 31일 조인됐다. 이로써 7월 이후 폴란드 전역에서 전개된 노동자 파업이 막을 내렸다.2개월에 걸친 파업의 발단은 7월 재정파탄에 직면한 폴란드정부가 고기값 인상을 발표해 노동자들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반에 보였던 파업 노동자들의 열기도 명확한 정치적 프로그램 부재로 와해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을 지속적인 노동운동으로 전환시킨 사람이 전기공 바웬사였다.바웬사는 1970년 불법파업의 중심인물로 당시에는 그다니스크 레닌조선소에서 해고된 상태였다. 8월14일 조선소 담을 넘어 진입한 바웬사는 파업을 지도하는 파업위원장에 선출됐다.사태수습에 나선 정부가 바웬사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다른 지역 노동자들의 호소로 바웬사는 8월17일 그다니스크-소포트-그디니아 3개지역의 연합파업위원장이 됐다. 위원회는 정부에 파업권 승인과 자주관리노조 설립, 검열 완화, 표현의 자유 등 16개 항목을 요구했고 정부는 마침내 이날 연합노조 `연대`의 결성을 승인하는 합의서에 조인했다. /조선
1971 - 경부고속도로 노선 이름 지정
1971년 8월 31일 노선 이름이 서울-부산간고속도로(고속국도 1)로 지정되었고, 2002년 5월 1일에 변경된 새로운 구간 체계에 따라 시점과 종점이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금호분기점∼동대구 인터체인지 17.25㎞ 구간은 중앙고속도로와 중복되고, 남이분기점∼비룡분기점 32.11㎞ 구간은 중부고속도로와 중복된다.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 전 구간이 왕복4차선 도로로 준공, 개통된 뒤 1985년 4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남이∼회덕 간 21.7㎞ 구간이 중부고속도로가 건설될 때 왕복6차선으로 확장되었다. 기존의 철도·국도와 중복을 피하면서 수도권과 영남공업지역 및 인천항과 부산항의 2대 수출입항을 연결하는 대동맥 역할을 하며 전국을 1일생활권으로 묶고 있다. /naver
1969 - 미국의 프로복싱 선수 로키 마르시아노(Marciano, Rocky) 사망
마르시아노 [Marciano, Rocky, 1923.9.1~1969.8.31]
매사추세츠주(州) 출생. 미국 출생의 이탈리아계(系) 백인으로 1947년 3월 17일 프로로 데뷔하였으며, 1952년 J.왈콧으로부터 세계 타이틀을 빼앗고, 1956년 무패의 기록으로 은퇴할 때까지 6차례나 타이틀을 방어하였다. 세계 헤비급의 역사를 장식한 백인 챔피언으로, 1959년 복싱 전당(殿堂)에 들어가게 되었다. 1969년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였다. 전적은 49전 전승 43KO이다. /naver
1967 - 서울역서 증기기관차 퇴역, 디젤기관차 등장
한국에서 디젤기관차는 1951년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UN군에 의해서 운행되었으며, 휴전 직전까지 50여 량의 디젤 전기기관차를 UN군에서 군 및 군사장비를 수송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휴전과 함께 UN군이 철수하자 SW형 4량만은 그대로 존속하여 구내입환용으로 운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1956년 3월 15일 충북 제천읍에 부산공작창 기관차공장 제천분공장이 창설되어, 본격적인 디젤 전기기관차의 운용을 시작하였다. 그후 한국도 디젤 전기기관차에 대한 정비와 운전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 또 디젤 전기기관차의 성능이 인정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AID차관에 의해 디젤 전기기관차가 도입됨으로써, 1967년부터는 증기기관차는 퇴역하고 대신 한국 철도동력차의 주종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978년 11월 현대차량(주)에서 최초의 국산 디젤 전기기관차를 생산하여 철도동력의 현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naver
- 'The Messanger' - 'Les Poissons Noir'
- 'Boats at Collioure' - 'Still Life of Graprs and Raisins'
1963 - 프랑스 입체파 화가 브라크(Braque, George) 사망
브라크 [Braque, George, 1882.5.13~1963.8.31]
파리 근교 아르장트유 출생. 피카소와 함께 큐비즘(입체파)을 창시하고 발전시킨 작가로서, 20세기 미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건축장식에 종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으며 1900년 파리로 나와 아카데미 쥘리앙에 들어간 후 포비슴(야수파)의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1907년부터는 세잔의 구축적(構築的)인 작풍에 열중하여 이를 연구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피카소와 알게 되어, 협력하여 큐비즘을 창시, 이 획기적인 사고(思考)를 분석적 큐비즘의 단계에서 종합적 큐비즘으로 전개하였다.
또 1912년경에는 P.클레와 그림물감에 모래를 섞는 등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징집되어 부상하였으나, 소집이 해제된 1917년부터 다시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피카소가 카멜레온처럼 자주 변모하는 데 비해 그는 자신의 본래 개성에 따라 차분히 큐비즘의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초기에는 풍경을 주로 그렸고, 중기 이후는 정물·실내·인물 등을 주제로 삼았는데, 그 구성의 밑바탕에는 항상 이성(理性)과 감각의 미묘한 조화를 최대로 중시하는 프랑스인적인 전통이 풍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감은 만년에 이를수록 더욱 우아한 세련미를 더하였다. 주요작품에 《앙베르항구》 《레스타크의 짐들》 《기타를 든 남자》 등 다수가 있다. /naver
- Ramon Magsaysay
1962 - 장준하(張俊河), 막사이사이상 수상
막사이사이상 [Magsaysay Award]
1957년 비행기 사고로 급서한 필리핀의 전(前)대통령 R.막사이사이의 품격과 공적을 추모·기념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제적인 상.
1958년 3월 1일 록펠러 재단이 공여한 50만 달러를 기금으로 막사이사이 재단을 설립하여 해마다 정부 공무원, 공공사업, 국제협조 증진, 지역사회 지도, 언론문화 등 5개 부문에 걸쳐 각각 5만 달러의 상금과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한국인으로서는 1962년 장준하(張俊河), 1963년 김활란(金活蘭), 1966년 김용기(金容基), 1975년 이태영(李兌榮), 1979년 장기려(張起呂), 1980년 엄대섭(嚴大燮:장서가), 1986년 제정구·정일우, 1989년 김임순(金任順), 1996년 오웅진 신부, 2002년 법륜 스님, 2005년 시민운동가 윤혜란, 2006년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박원순, 2007년 공공봉사 부문의 김선태 목사 등이 수상하였다. /naver
장준하(張俊河, 1918년 8월 27일 - 1975년 8월 17일)는 대한민국의 정치가, 언론인, 사회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의주 출생으로 일본 도요 대학 예과를 거쳐 니혼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4년 1월 일본군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전선에 투입되었으나, 7월에 탈영하여 수천킬로미터를 걸어 충칭의 광복군에 가담하였다. 해방후, 귀국하여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김구의 경교장을 나와 1947년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의 교무처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장준하는 곧 족청을 떠나고 말았다.[1]
6·25 전쟁 후 장준하는 1953년 《사상계》를 창간하고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1967년에는 정계에 입문하여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0월 유신이후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중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12월 신병악화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출감하였다. 이후 민주화 세력의 규합에 힘썼으나,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추락사로 사망하였다. 시신의 귀 뒤에 뭔가로 얻어맞은 듯한 자국이 있었으며 높은 절벽에서 추락한 사람이 몸에는 상처 하나 없어서 타살설이 있었으나 경찰은 실족사로 발표했다. 자서전으로 《돌베개》가 있고, 1962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위키백과
- Underwater Scene Painting,
Independence, Aug 31, 1962
1962 - 트리니다드 토바고, 영국으로부터 독립
1950년 독립을 위한 신헌법이 공포되었으며, 사회학자이기도 한 E.윌리엄스의 지도하에 인민민족운동(PNM)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1956년 9월에 자치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초대 수상으로 에릭 윌리엄스(Dr. Eric Williams)가 취임하였다. 그 후 카리브 해역의 영국식민지 연방화의 움직임이 구체화되어 1958년 서인도연방이 성립되었고, 1959년에 트리니다드와 토바고는 영국령서인도제도연방((Federation of West Indies) 일원으로 편입하였다. 그러나 1961년 자메이카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단독 독립을 결정하자 트리니다드와 토바고도 1962년 8월 트리니다드토바고라는 이름의 영국연방 자치국으로 완전독립하였다. 이로써 서인도연방은 붕괴되었다. 독립 후 인민민족운동의 윌리엄스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발족되었으며, 1976년 8월 신헌법을 제정하고 9월에는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국가 원수를 종전 영국여왕에서 대통령으로 변경하였으나, 영연방의 일원으로 계속 남기로 하였다. /naver
1957 - 말레이시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말레이시아를 점령했고, 이듬해 1월 31일 영국군은 싱가포르를 포기했으며 2월 15일 영국군은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말레이시아로 재진주한 영국은 1946년 싱가포르를 제외한 말레이시아 전역을 하나로 묶는 말라야연합(Malayan Union)안의 도입을 시도했다. 말라야연합이 술탄의 권력을 박탈하고, 화인과 인도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레이인들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1948년 2월 1일 말라야연방(Federation of Malaya)이 결성되었다. 압둘라만(Tunku Abdul Rahman, 1903~1976)이 이끄는 UMNO는 1950년대에 들어 화인, 인도인 집단과 선거협약을 맺어 1954년 동맹당(Alliance Party)으로 확대되었다. 동맹당은 1974년 국민전선(Barisan Nasional)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현재까지 집권 여당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1955년 총선에서 동맹당은 총 52석 중 51석을 차지하여 독립 이후 주도 정당으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선거 결과를 배경으로 말레이시아의 독립과 헌법 제정에 관한 사항을 영국과 신속히 협상하였고, 1957년 8월 31일 드디어 독립하였다. 1961년부터 말레이시아 정부는 사바, 사라왁, 싱가포르, 브루나이를 말레이연방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책에 착수하였고, 1963년 브루나이를 제외하고 말레이시아연방을 수립하였다. 1965년 싱가포르는 연방에서 탈퇴하였다. /naver
1918 - 미국의 작사가, 대본작가 러너(Lerner, Alan Jay) 출생
러너 [Lerner, Alan Jay, 1918.8.31~1986.6.14]
작곡가 프레더릭 뢰베와 함께 브로드웨이 뮤지컬 〈브리가둔 Brigadoon〉(1947)·〈너의 마차를 페인트칠하라 Paint Your Wagon〉(1951)·〈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1960)·〈캐멀롯 Camelot〉(1960)과 영화 〈지지 Gigi〉(1958)를 만들었다.
러너 상점(Lener Stores, Inc.)을 경영하던 부유한 소매상 부모에게서 태어난 러너는 영국 햄프셔의 비데일즈 학교와 코네티컷 주 왈링퍼드에 있는 코에이트 학교, 뉴욕 시의 줄리어드 스쿨과 하버드대학교(1940년 이학사학위 취득)에서 공부했다. 하버드에서 헤이스티 푸딩(Hasty Pudding) 쇼에 대본을 제공했다. 1940~42년에 500편 이상의 라디오 대본을 썼으며, 그동안 뉴욕 시에 있는 극장식 클럽 램브스에서 뢰베(그당시 극장 노래를 작곡하고 있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음)를 만났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첫번째 브로드웨이 작품은 실패했지만 2번째로 만든 작품은 5개월 동안 장기공연을 할 만큼 성공작이었고 1947년 〈브리가둔〉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의 5번째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는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 Pygmalion〉을 각색한 것으로 미국의 뮤지컬 역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컬럼비아방송사에서 제작한 이 작품은 런던과 뉴욕에서 연속적으로 가장 오래 공연된 작품으로 기록되었으며 11개 국어로 번역되어 20개국 이상에서 공연되었다. 또한 미국 내에서는 여러 해 동안 순회하면서 공연되었고 여러 번 재공연되기도 했다. 브로드웨이 출연진에 의한 음반은 500만 장 이상 팔렸으며 영화는 7개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횝쓸었다. 〈브리가둔〉·〈너의 왜건을 페인트칠하라〉·〈캐멀롯〉 역시 영화로 만들어졌다. 러너와 뢰베가 바로 영화로 만든 〈지지〉는 9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 /브리태니커
1908 - 미국의 작가 사로얀(Saroyan, William) 출생
사로얀 [Saroyan, William, 1908.8.31~1981.5.18]
캘리포니아 프레스노 출생. 15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독학으로 문학공부를 하여 26세 때 첫 단편집 《공중그네를 탄 용감한 젊은이 The Daring Young Man on the Flying Trapeze》로 등단하였다.
1939년에는 첫 희곡 《내 마음은 고원에 My Heart’s in the Highlands》를 발표하였으며, 1940년 《너의 인생의 한때 The Time of Your Life》가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이어 어린 시절을 생생한 문체로 그린 단편집 《내 이름은 아람 My Name Is Aram》(1940) 장편소설 《인간희극 The Human Comedy》(1943) 《록 워그럼 Rock Wagram》(1951) 등으로 유명해졌다. 주로 가족과 이웃 등 친숙했던 사람들을 모델로 인간성의 선함과 삶의 가치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점이 그의 작품세계의 특징이다. /naver
1907 - 필리핀의 대통령 막사이사이(Magsaysay, Ramon) 출생
막사이사이 [Magsaysay, Ramon, 1907.8.31~1957.3.17]
막사이사이는 1953~57년 대통령을 지낸 필리핀의 정치가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후크발라하프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해 필리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를 발판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말레이 혈통 기능공의 아들이었던 막사이사이는 루손 섬의 지방도시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고학으로 호세리살대학을 마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루손 섬에서 게릴라 지도자로 활동했다. 미군이 필리핀을 탈환하자 고향인 삼발레스의 군정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2차례에 걸쳐 삼발레스 지역의 하원의원을 지냈다. 그는 엘피디오 키리노 정권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자 곧 후크단 반란 진압에 나섰다. 이후 막사이사이가 보여준 반란 진압과정은 현대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반게릴라 작전으로 평가받았다. 1953년 반란은 성공적으로 진압되었으나, 키리노 행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함으로써 많은 정적들을 만들어 2월 28일 국방장관에서 해임되었다. 같은 해 실시된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막사이사이는 필리핀 사회의 전면적인 개혁을 공약했으나 의회의 비협조로 인해 좌절을 겪어야 했다. 막사이사이는 통치 기간 동안 강력한 반공주의를 표방했으며, 필리핀은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의 가맹국이 되었다. 그의 업적을 추모·기념하기 위해 막사이사이상이 제정되어 매년 정부공무원·공공사업·사회공익·언론문화·국제협조 등의 부문에 걸쳐 시상한다. /브리태니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함께 싸우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과 아이들의 자유를 위해서이며,
나아가 아이들 다음 세대의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 라몬 막사이사이
1896 - 프랑스계의 캐나다 신부, 시인, 소설가. 민속학자 사바르(Savard, Félix-Antoine) 출생
사바르 [Savard, Félix-Antoine, 1896.8.31~1982.8.24]
그의 작품에는 열렬한 프랑스 민족주의 성향과 캐나다 자연경관에 대한 사랑이 드러나 있다. 1922년 로마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1943년 퀘벡에 있는 라발대학교의 교양학부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여 1950년 학장이 되었고 1957년까지 재임했다. 산문시이자 소설이라 할 수 있는 〈 강(江)의 주인 Menaud, maitre-draveur〉(1937)·〈학살 L'Abatis〉(1943)·〈한밤중 La Minuit〉(1948) 등의 작품에서 그가 벌목과 개척에 상당한 지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강의 주인〉으로 1945년 프랑스 아카데미와 1961년 문학 대배심으로부터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에 관한 이야기를 쓴 〈마르티누스와 거지 Martin et le pauvre〉(1959)와, 자유시 형식으로 된 〈미친 여자 La Folle〉(1960)라는 희곡을 썼다. 후기 작품으로 〈Le Bouscueil〉(1972)·〈우르술라의 돌 La Roche Ursule〉(1972)·〈담화 Discours〉(1975) 등과 〈침묵의 국경에서 Aux marges du silence〉(1975)라는 시집 1권이 있다. /브리태니커
- Inauguration of Queen Wilhelmina, Cent.
1880 - 네덜란드의 여왕 빌헬미나(Wilhelmina) 출생
빌헬미나 [Wilhelmina, 1880.8.31~1962.11.28]
원명 Wilhelmina Helena Pauline Maria. 오라녜가(家)의 빌렘 3세의 딸. 1890년 부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으나,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섭정하였다. 1898년 그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며, 다음해 결혼하여 1909년 왕녀 율리아나를 낳았다.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에 걸친 그의 치세기는 국내의 계급대립과 국제적 분쟁이 끊이지 않은 어려운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중립을 지켜 평온을 유지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군의 침공으로 정부를 런던으로 옮겼다(1940∼1945). 식민지 지배의 종말과 대관(戴冠) 50년 축제를 기하여 왕위를 율리아나에게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1959년 《회상록》을 출판하였다. /naver
- '도쿄의 여인' - '이치요의 초상'1878 - 일본의 화가 가부라기 기요카타[鏑木淸方] 출생
가부라기 기요카타[鏑木淸方, 1878.8.31~1972.3.3]
본명은 가부라기 겐이치[鏑木健一]. 메이지 시대[明治時代:1868~1912]의 도쿄와 도쿄 사람들을 그린 풍속화로 유명하다. 소설가 겸 언론인이었던 조노 사이기쿠[條野採菊]의 아들로 태어나 1891년 우키요에[浮世繪:에도 시대의 풍속화] 화가인 미즈노 도시카타[水野年方]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17세 무렵부터 신문삽화 작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901년에는 동료들을 모아 우고카이[烏合會]를 조직해 천박한 풍속화나 삽화로 전락해버린 우키요에를 개선시키는 데 힘썼다. 새 시대를 맞은 도쿄와 그 일상생활을 깊이있고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이치요 여사의 무덤 一葉女史の墓〉·〈그쳐가는 소나기 晴行く村雨〉·〈쓰키지 아카시 거리 築地明石町〉 등이 있다. ... /브리태니커
- Italy 1000 (Banknote) 리라(Lira)
몬테소리 [Montessori, Maria, 1870.8.31~1952.5.6]
안코나에서 태어났다. 로마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우고, 동 대학 부속병원의 정신병과 조수가 되었다. 1898년부터 2년간 로마의 국립 특수교육학교에서 일한 다음 로마대학교에 재입학, 7년간 실험심리학과 교육학을 배웠다. 1907년 3~6세까지의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 ‘어린이의 집(Casa dei Bambini)’을 열어, 이른바 몬테소리법(法)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사들의 권위주의적 교육에 강력히 반대하고 어린이의 권리존중을 주장하여 어린이의 신체 및 정신의 발달을 북돋우는 자유스러운 교육과, 어린이 하나하나의 활동리듬에 알맞은 개성발전교육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교육 방향이 어린이들로 하여금 자율성과 자발성을 배울 수 있도록 하며, 자기개발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또, 감관(感官)의 훈련이야말로 모든 정신발달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고, 갖가지 놀이 도구를 고안하여 감관을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저서로 《가정에서의 어린이 Das Kind in der Familie》(1926) 《교회에서의 어린이 The Child in the Church》(1929) 《인간 가능성의 교육 To Educate Human Potential》(1948) 등이 있다. /naver
1867 -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 Charles-Pierre) 사망
보들레르 [Baudelaire, Charles-Pierre, 1821.4.9~1867.8.31]
1867년 8월31일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46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정착된 선(善)보다는 악(惡)을 택했고 굴종적인 도덕보다는 불행한 투쟁을 택했던 반항아 보들레르. 실제 그는 특이한 여성관계와 수치스런 병으로 인한 육체의 황폐함 그리고 46세 때 실어증에다 반신불수의 병고를 안고 생애를 마감한 기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퇴폐적인 작가라고도 부른다.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살았지만 20세기 독자를 향해 시를 썼던 보들레르는 상징주의의 첫 봉우리로 평가받는다.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20세기 상징파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보들레르를 향해 발레리는 "그보다 위대하고 재능이 풍부한 시인들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시인은 없다"고 찬탄했다.
1821년 파리에서 서른 네 살의 나이차가 나는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보들레르는 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의부 밑에서 성장했다. 리옹의 사립학교와 리옹 왕립중학교를 거쳐 루이 르 그랑 중학교에서 수학했으나 18세 때 품행관계로 퇴학을 당했다. 성년이 된 보들레르는 의붓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센강의 생 루이섬에서 호화판 탐미생활로 2년 만에 날려 한정치산자가 됐다. 24세 때 '1845년의 살롱'을 출판, 미술평론가로 데뷔했으며, 문예비평, 시, 단편소설 등을 잇달아 발표, 문단에서 활약하는 한편, 1848년 의붓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2월혁명의 폭동에도 가담했다.
첫 시집 '악의꽃'은 외설과 신성모독죄로 기소당해 출간 한 달도 되기 전에 압류되고 벌금형과 6개 시편의 삭제 판결을 받는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그의 만년은 오래도록 동거해온 잔 뒤발과의 결별, 어머니와의 지속적인 불화, 최악의 금전적 궁핍 그리고 마침내는 실어증으로 채워졌다. 보들레르는 방탕과 정신질환을 시인의 상표처럼 만들어버린 시인이지만, 상상력만이 아니라 논리와 분석을 섬긴 미술평론가이자 번역가이기도 했다. 사후 82년 만인 1949년 프랑스 최고재판소는 보들레르의 시에 대해 유죄원심을 파기했다. /조선
1821 - 독일의 생리학자, 물리학자 헬름홀츠(Helmholtz, Hermann von) 출생
헬름홀츠 [Helmholtz, Hermann von, 1821.8.31~1894.9.8]
독일의 생리학자 ·물리학자. 포츠담 출생. 프리드리히 빌헬름 의학연구소를 졸업한 후 베를린의 자선병원 외과의사로 근무하고(1842), 포츠담에서 군의(軍醫)가 되었다(1843∼1848). 그 동안에 부패와 발효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1847년 베를린의 물리학회에서 ‘힘의 보존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것은 마이어와는 독립적으로 보다 정리된 형식의 에너지보존 원리를 보편적 법칙으로서 확립한 것이다.
1848년 군의로서의 의무를 끝내고, 베를린의 미술학교 해부학 강사, 쾨니히스베르크대학 생리학 교수가 되어 신경 자극의 전파에 관한 연구를 하였으며, 미소시간(微小時間)측정법을 연구하는 한편 전기학 연구를 시작하였다. 1851년 검안경(檢眼鏡)을 발명하고, 1855년 본대학으로 옮겨, 해부학 ·생리학 교수로서 생리광학(生理光學)과 생리음향학을 연구, 독자적인 분야를 개척하였다.
입체망원경을 발명하였고, 유체역학(流體力學)을 연구하여 유명한 소용돌이의 정리를 제출하였다. 그 후 곧 G.R.키르히호프의 초빙을 받아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겨, 청각 및 음향학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기하학의 공리문제에 몰두하였다.
1869년부터 물리학으로 연구주제를 옮겼고, 1871년 베를린대학 물리학 교수가 되어 전기역학(電氣力學) ·유체역학 ·광학 ·기상학 ·인식론 등에 공헌하였다. 열역학(熱力學) 이론의 열화학 및 전기화학에 대한 적용의 업적이 있다. 또한 빛의 분산이론, 지각(知覺)에 관한 삼원색설(三原色說) 등도 유명하며, 철학자로서는 초기의 신칸트파에 속해 있다. /naver
1811 - 프랑스의 시인, 비평가, 저널리스트 고티에(Gautier, Théophile) 출생
고티에 [Gautier, Théophile, 1811.8.31~1872.10.23]
프랑스 문학의 감수성이 초기 낭만주의 시대에서 19세기말의 탐미주의와 자연주의로 바뀌던 시절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파리에서 주로 살았고 샤를마뉴 중학에서 제라르 드 네르발을 만나 평생 우정을 맺었다. 원래는 그림을 공부했지만, 얼마 후 자신의 참된 소망은 시를 쓰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낭만주의 운동에 공감하여, 빅토르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 Hernani〉가 1830년에 파리에서 처음 공연된 뒤에 일어난 문화적 투쟁에 가담했다. 〈낭만주의의 역사 Histoire du romantisme〉(1874)와 〈당대의 초상화들 Portraits contemporains〉 (1874)이라는 책에서 이 시대를 익살스럽게 회상하였는데, 특히 〈당대의 초상화들〉에서는 친구인 오노레드 발자크를 잘 묘사했다. 〈청년 프랑스 Les Jeunes-France〉(1833)에서는 자신을 비롯한 낭만주의자들의 지나친 행동을 풍자했다. 〈괴짜들 Les Grotesques〉(1834~36)은 낭만주의 작가들보다 먼저 개인주의를 제창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에 대한 책이다.
고티에의 최초의 시들은 1830년에 발표되었고, 마법사의 손아귀에 들어간 젊은 화가를 이야기체로 묘사한 장시(長詩) 〈알베르튀스 Albertus〉는 1832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낭만주의의 신조에 등을 돌리고 예술을 위한 예술(예술지상주의)의 옹호자가 되었다. 〈알베르튀스〉에 붙인 서문과 소설 〈모팽 양 Mademoiselle de Maupin〉(1835)은 그의 견해를 표현하고 있는데, 전통윤리를 무시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최고라고 주장해 문단에 상당한 물의를 일으켰다. /브리태니커
1749 - 러시아의 작가 라디시체프(Radishchev, Aleksandr) 출생
라디시체프 [Radishchev, Aleksandr Nikolayevich, 1749.8.31~1802.9.24]
러시아 문학과 사상에 혁명적인 전통을 세운 러시아의 작가. 귀족 출신으로, 모스크바(1757~62)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사학교(1763~66)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했다(1766~71).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모든 계층의 국민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장 자크 루소와 같은 작가들이 펼친 감성예찬론에 영향받아, 가장 중요한 작품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여행 Puteshestvie iz Peterburga v Moskvu〉 (1790)을 썼다. 그는 이 작품에서 가공(架空)의 여행이라는 틀 안에 자신이 보아온 사회적 불의와 비참함, 잔인성에 대한 온갖 사례를 모아놓았다. 이 책은 농노제·전제정치·검열제도에 대한 고발장이지만 라디시체프는 이런 사회 상황을 모르고 있을 예카테리나 대제를 깨우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다음해에 나온 이 책은 때를 잘못 만나 그는 즉시 체포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뒤 시베리아 유형 10년으로 감형되어 1797년까지 시베리아에 있었다.
라디시체프에 대한 혹독한 조치는 개혁에 대한 자유주의적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1801년 그는 알렉산드르 1세의 사면을 받았고 관리로 등용되어 제반 개혁법을 기초했으나 1년 뒤 자살했다. 그의 작품이 문학적으로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명성은 대단했으며 그의 사상은 후세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1825년 전제정치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지식인·귀족의 정예집단인 데카브리스트들도 그에게서 힘을 얻은 것이었다. /브리태니커
1740 - 프랑스의 루터교 목사, 박애주의자 오베를린(Oberlin, Johann Friedrich) 출생
오베를린 [Oberlin, Johann Friedrich, 1740.8.31~1826.6.1]
프랑스 보주 지역의 가난한 교구민들을 영적·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일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 중류 가문에서 태어나 신학을 공부했고 1758년 스트라스부르대학교를 졸업했다. 한때 교사생활을 했으나, 1767년 일생 동안 그의 활동 중심지가 된 발더바흐 보주 마을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교구민들의 생활수준을 높이기 위해 마을학교를 세웠으며, 부모들이 일하는 동안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오베를린의 교육방법은 실제적인 필요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여러 가지 점에서 유치원 창시자인 독일의 교육자 프리드리히 프뢰벨의 방식과 비슷했다. 그는 독특한 교육방식으로 교육을 받으러 온 성인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오베를린은 일부 성인 학생들에게 도로와 다리를 건설해서 마을이 고립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설득했다. 수확량을 늘리기 위한 농작물 개량실험을 권장했으며, 농사 정보를 나누기 위한 정기모임을 열었다. 또한 현대적인 농기구를 대량으로 사서 원가에 팔고, 자신이 설립한 은행을 통해 구매자금을 지원했으며, 젊은이들이 스트라스부르에서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지역산업 발전을 위해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오베를린은 교파를 초월하여 자신이 집전하는 예배에 칼뱅주의자들과 로마 가톨릭교도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합리주의와 신비주의가 결합된 그의 설교내용에는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와 스웨덴의 신비주의자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 대한 존경심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의 휴머니즘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열광적인 호응으로 나타났지만 혁명정부와 나폴레옹 제정 양 시대에 걸쳐 변함없는 존경을 받았다. 미국 오하이오 주의 한 마을과 대학은 물론, 농아와 맹인을 위한 독일의 오베를린하우스에도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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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