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대 문성왕실록
1. 불안감에 시달리는 문성왕과 해상왕 장보고의 죽음
(? ~ 서기 857년, 재위기간 : 서기 839년 7월 ~ 857년 9월, 18년 2개월)
문성(文聖)왕은 신무왕의 장남이며, 정종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김경응이다. 839년 윤 정월에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7월에 신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위에 오르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궁복 또는 궁파로도 불림)의 공을 헤아리는 일이었다. 장보고는 신무왕의 즉위에 막중한 역할을 하였고, 휘하에 신라 관군에 맞먹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까닭에 그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서를 내려 이렇게 말했다.
“청해진 대사 궁복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아버지 신무왕을 도와 선왕의 대적을 격멸하였으니, 그의 공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문성왕은 조서와 함께 그를 진해장군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장복을 하사하였다.
장보고를 먼저 챙긴 뒤에 김예징을 상대등, 의종을 시중, 양순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조정을 개편하였다. 이들은 모두 신무왕의 즉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하들이었다.
하지만 문성왕의 치세는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다. 재위 2년(840년) 4월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에 시달리더니, 그해 겨울에 큰 기근이 닥쳐 백성들을 굶주림에 시달리게 하였다. 거기다 이듬해 봄에는 도성 전역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런 혼란을 틈타 일길찬 홍필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관군을 동원하여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그가 섬으로 도주하는 바람에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이미 수년에 걸친 왕위 계승권 다툼으로 인해 지방 조직이 와해되고 있었고, 지방의 인심도 왕실에 등을 돌린 상태였다. 홍필을 체포하지 못한 것은 바로 그런 현실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국이 뒤숭숭한 상황에서 또 하나의 첨예한 문제가 생겼다. 문성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지방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들이려 하였는데, 조정 대신들이 대거 일어나 반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유인즉, 장보고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려 한 것은 신무왕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무왕은 장보고의 군대를 빌리면서 자신이 왕이 되면,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무왕이 재위 7개월 만에 죽는 바람에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장보고는 문성왕에게 약속 이행을 요구하였고, 문성왕 또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는 것이 국정 안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신라는 전통적으로 왕비를 왕족 내부에서 간택해 왔다. 서라벌 귀족 출신들로 구성된 조정 대신들은 그런 전통을 앞세워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힌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장보고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김우징(신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약속한 일을 문성왕이 뒤집었으니, 장보고가 발끈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장보고가 약속 이행을 주장하며 불만스러워하자, 문성왕은 그가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달려오지 않을까 염려했다. 이미 장보고 군대의 위력을 경험한 만큼 문성왕이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문성왕이 노심초사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염장이라는 장수가 왕을 찾아와 말했다.
“조정에서 저를 믿어 주신다면, 저는 맨손으로 궁복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겠습니다.”
염장은 힘이 장사이고, 용맹이 뛰어난 장수였다. 문성왕은 그의 의지를 믿고, 장보고를 죽이라는 밀명을 내렸다.
밀명을 받은 염장은 거짓으로 왕을 배반한 척하고 청해진으로 내려가 장보고의 부하가 되었다. 장보고는 한눈에 염장이 뛰어난 장수임을 알아채고 그를 매우 극진하게 대접하고자 잔치까지 열어 환영하였다. 그런데 그 술자리에서 염장은 불현듯 일어서더니, 그곳에 진열되어 있던 긴 칼을 뽑아 장보고의 목을 쳐 버렸다.
막상 장보고가 죽자, 그의 부하들이 염장에게 굴복하였다. 염장은 장보고의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장보고가 애써 가꿔 놓은 해상왕국 청해진이 와해되고 말았으니, 이때가 문성왕 재위 8년(846년)이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세운 것은 흥덕왕 3년인 828년이었다. 그는 원래 평민 출신으로 남해의 섬에서 태어났는데, 무예가 뛰어나고 바다에 익숙하여 청년 시절에 친구인 정년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갔다. 거기서 당나라 서주의 무령군에 머물며 당군의 장교가 되었다가, 당이 혼란에 휩싸이자 신라로 돌아와 완도에 청해진을 세웠다.
바닷가 출신인 그는 당나라에서 해상 무역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당시 당나라의 혼란으로 인해 선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바다에는 해적이 들끓었다. 그들은 무역선들을 습격하여 물품을 강탈하였는데, 이 때문에 각국은 무역에 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목적은 이들 해적들을 소탕하고, 해상 무역의 안전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이는 곧 당, 신라, 일본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이기도 했다.
장보고는 해안 주변의 장정들을 모아 병력을 형성했고, 그들을 기반으로 해적 소탕전을 펼쳤다. 그 결과 해안에 들끓던 해적들이 거의 사라지고, 장보고의 군대는 날로 늘어 1만으로 불어났다.
세력을 키운 장보고는 중국 산동성에도 거점을 마련하고, 그곳에 이민 가있던 신라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김우징(신무왕)의 부탁을 받고 혁명에 가담하여 민애왕을 죽이고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키는 산파 역할을 하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중앙 정치에 가담한 것은 실수라면 실수였다. 서라벌의 귀족들은 평민 출신인 그가 조정에 진출하는 것을 꺼렸다. 그런데 장보고는 신무왕의 약속만 믿고 자기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만들려고 하다가 오히려 반역자로 몰려 목숨을 잃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
장보고의 죽음은 단순히 서민 출신의 한 인간이 중앙 귀족으로 진출하려다 좌절된 사건 정도로 취급될 일이 아니다. 그의 죽음으로 18년간 유지해 온 청해진이 와해되었고, 그것은 곧 해상 무역의 혼란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신라, 일본, 당을 오가는 해상 무역상들은 청해진이라는 귀중한 안전판을 상실했던 것이다. 이는 세 나라의 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다.
또한 장보고의 힘으로 등장한 문성왕의 지지기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라벌 조정에는 이미 양순이나 흥종 같은 장보고 인맥이 진출해 있었는데, 그들은 문성왕의 정치를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보고가 살해됨으로써 양순과 흥종 등은 정치권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또 다른 불만 세력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중에서 밀려난 양순은 장보고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흥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히 반란은 진압되어 양순과 흥종 등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정국은 한층 더 혼란으로 치달았다.
문성왕은 그런 와중인 재위 9년(847년)에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여 왕실의 위엄을 다졌다. 그러나 849년 9월에 이찬 김식과 대흔이 또 한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주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거기다 대아찬 흔린이 연루되어 함께 처벌되었다.
김식, 대흔, 흔린 등도 양순이나 흥종처럼 청해진의 후광을 입어 등용된 인물인 듯하다. 그런 까닭에 문성왕은 851년에 여전히 반란의 불씨로 남아 있던 청해진을 완전히 혁파하고, 그곳 사람들을 모두 벽골군으로 옮겨 살도록 조처했다.
그런 가운데 문성왕은 또 한 번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852년 11월에 태자가 죽은 것이다. 그리고 5년 뒤인 857년 9월에 그도 세상을 떠났다.
능은 공작지에 마련되었다.
2. 문성왕의 가족들
문성왕은 두 부인에게서 아들을 하나 낳았다.
첫째 왕비는 박씨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고, 문성왕 3년에 당나라 책봉사에 의해 왕비로 책봉된 기사만 남아 있다. 아마도 박씨는 소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왕비는 문성왕 4년 3월에 입궁한 이찬 위흔의 딸이다. 이때 그녀를 왕비로 맞이한 것을 볼 때, 첫째 왕비 박씨는 이미 죽었거나 방출당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왕비는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는 문성왕 9년에 왕태자에 책봉된다. 그러나 이 왕태자는 문성왕 14년에 죽었다.
그런데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문성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때 죽은 왕태자에게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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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왕 시대의 세계 약사
문성왕 시대 중국의 당나라는 무종과 선종 연간이다. 도교를 숭상하던 무종은 불교를 탄압했다. 그래서 사찰 4만여 곳을 부수고, 승려 26만 명을 환속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선종이 즉위하여 폐사를 복구하고 안정을 되찾으려 했으나,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국정이 혼란에 빠진다.
이즈음에 서양의 프랑크 왕국에서는 루트비히 1세가 죽고, 아들 셋이 서로 영토 다툼을 벌여 결국 3개국으로 분할되고 말았다. 이때 노르만족이 성장하여 파리를 공격하고, 데인족은 캔터베리와 런던을 침공하였으며, 사라센족은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로마를 포위하기도 했다. 교황 레오 4세가 즉위하여 동맹군을 형성하고 사라센족을 격퇴하였다.
출처 :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웅진닷컴). 박영규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