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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합리성과 노마드 정신의 교직
- 박산하의 수필세계 -
권대근
수필비평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열며
문학의 생명은 감동에 있다고 할 때, 한 편의 수필에는 우리의 메마른 가슴을 울리는 그것이 있어야 한다. 지구촌이라 불리는 요즘 시대에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슈는 무엇일까? 문학가는 인류의 교사여야 한다는 측면에서 수필가는 시대와 역사의 증언자여야 할 것이다. 인간성 상실, 자연 파괴, 사회적 불안과 공포 등 총체적 위기에 처한 현재, 경제적 합리성만이 강조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는 이제 더 이상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인간의 비인간화가 인성 때문이라고 보는 데는 다른 생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도구적’, ‘정합적 이성’만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의 구조가 비인간화를 불러온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회조직과 구조의 개혁은 필수적이다. 한편, 도구적 이성에만 빠져있는 인간 이성의 찰나적 본성을 등한시하는 더욱 단적인 예는 과학기술의 맹목적 발전과 추종을 들 수 있다. 그 대신 이른바 생태적 합리성에 대한 관심과 고려가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인간의식에서부터 생활과 사회구조에 이르기까지 생태친화적인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 생태적 합리성에 근거한 대안적 세계관 모색과 관련해, 특히 우리 전통문화와 생활양식 속에 오늘날 새롭게 되살려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이 수필가 박산하의 일반적 관심사이다.
생태적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생태계 내에서 모든 생명체나 무생물이 유기적으로 엮여 있듯이, 합리성이란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무한히 복잡한 전체적인 맥락에 합당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심’하고 ‘회의’할 수 있는 이성적 힘이 상실될 때 인간은 권력과 그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나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만 좇는 ‘정합적 이성’ 중심의 인간과 사회는 양심과 도덕성을 잃어 ‘비인간화’의 극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 즉 ‘비판적 이성’을 도외시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해내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는 이러한 정합적 이성주의자들이다. 그것은 박산하의 수필 속, 현대 사회와 문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모든 가치를 도외시하는 산업구조, 기술생산의 효율성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과학기술 논리 등이 그것이다. 박산하의 수필은 바로 이 같은 문제점을 떠남의 미학을 통해 찾아내고 있다. 박산하의 수필은 모든 수필이 하나 같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비인간화의 한 예가 될 도구적 이성에 빠진 현대인의 비인간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한마디로 생태수필이다.
II. 생태수필이란?
생태수필의 의미는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전체를 지향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생명의 개념, 즉 생태계 중에서 생명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데 있다. 따라서 생태 수필이란 생명 자체를 노래함으로써 생명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는 수필이며,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가치와 위상, 생명고양의 조건을 살피어 그 중요성을 문학적 상상력 속에 구체화하는 수필을 가리킨다. 때문에 이를 달리 자연 친화적 수필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하겠다.
박산하의 생태 수필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대별된다. 고발, 발견, 전망 또는 신뢰가 그것이다. 첫째 고발의 장은 생태계 오염이나 생태계 파괴의 참상과 그로 인한 생태적 인간 정신의 상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발견의 장은 자연의 근본이자 바탕인 초록의 현장을 찾아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박산하에게 있어서 자연의 발견은 원시적 삶을 의미하며, 여유와 느림의 미학을 뜻한다. 생명의 발견 안에는 유년의 추억이 있고, 꿈이 나래를 펴고 있다. 그녀는 초록의 체온을 통해 삶의 진실을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셋째 전망 또는 신뢰의 공간은 수필가 고유의 감수성으로 아름답고 따뜻한 생태 사회를 보여주어 인류에게 그런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상상력의 보고를 의미한다. 문학적 상상력과 생태학적 인식으로 또 하나의 희망이 될 지구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장이다. 따라서 박산하의 수필집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인간 중심주의, 그에 대한 대안으로 생태문학을 제시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생태사회를 건설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박산하는 수필 <생태적인 삶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로는 벌써 150년 전에 넓고 넓은 미국 땅에서 생태계 파괴가 불 보듯 뻔함을 역설한 사람이다. 멸종 위기의 동식물을 언급하면서 자연 생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선지자의 눈으로 본 것이다. 우리나라는 겨우 최근에 와서야 생태계란 단어가 유행이다. 생태 숲, 생태 공원만큼이나 소들도 생태적으로 키워져야 할 것이다. " 수필가 박산하가 말하는 생태문학은 녹색, 생명, 환경 등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녀의 수필은 단순히 환경문제, 환경파괴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모든 병폐를 생태학적 인식으로 바라보며 녹색의 가치에 대한 감성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내 어릴 적만 해도 소는 식구였다’로 시작되는 수필인 <생태적 삶은>에서는 과학기술의 맹목성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그녀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동시대 내면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허무와 환멸이다. 대량생산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대량 생매장이라는 비인간화의 현장을 생태적 합리성으로 비판하면서 그녀는 인간의 오만함에 고개를 숙이고 만다. 이 수필에서 무엇보다도 주제의식의 상상화가 빛나는 부분은 이 글의 말미, ‘인간에 대한 원망의 눈빛이 산하를 적시고 있다.’라는 부분이다. 여기서 ‘산하’는 삼천리금수강산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가리키기도 한다. 수필의 묘미는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낱말의 다의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연상과 상상의 즐거움을 안겨주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이 수필집은 모두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정자해변>, <술잔 걸어놓고>, <소금의 꽃>, <일산 곶나루>, <곳곳에 얼굴을 걸다>, <무룡 산정에서>, <대곡 이야기>, <강이 하늘을 품을 때> '문학과 생태학'에서는 생태학과 생태문학의 개념을 정리하고 두 학문의 가능성을 짚어본다. 2장은 <이요당 음다기>, <생태적인 삶은>, <만평농장 가꾸기>, <문수산 노을이 질 때>, <무위가 있는 곳>, <크레디트>, <노마드>, <검은 축제>, <유도등을 바라보며 '유럽의 생태주의 전통과 생태문학의 전 단계'에서는 그리스 시대의 신화와 문학에서 독일의 낭만주의 문학까지를 정리했다. 3장은 <일곱별에게 전화를 걸다>, <숲속 음악실>, <사과 향 그윽한 그곳>, <토방에 누워>, <책장>, <세상 속으로 간 아이>, <낙화> , <적寂>, <서어나무>, <이야기가 살아나는 대추나무>, <섶 마루>. 제4장에는 <오어사>, <신화 속>, <씨엠립 하늘 아래>, <흔들리는 사람들>, <오지여행2>, <꽃적삼 바람에 날리던>, <고요를 찾아 갔더니>, <모든 게 녹아버린>, <놋전거리>, <오지여행> 등 많은 작품들이 다양한 체험적 예화와 삽화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되면서, 생태사회를 위한 문학의 역할 그리고 노마드 생성미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III. 펼치며
가. 생태적 합리성과 포드주의
수필은 소중한 경험의 산물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배려의 자세라는 것을 박산하 수필은 말해준다. 박산하의 수필들은 주제의 재료이기도 한 제목에서 이미 생태적 중요성을 다분히 암시하고 있다. 제목은 하나 같이 구체어로 되어 상징성이 크다. 생태적 합리성과 상상력을 주제지향성으로 내세우면서, 우리네 이웃, 정부 당국과 정치인의 안이한 생태인식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비판의 눈길이 있어 박산하는 수필가의 사회적 소명을 다하고 있다고 하겠다. 문학적 안목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 대상의 속성 자체로 재인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그 연결고리의 한 축에는 언제나 인간과 삶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중심적이어서 인간 외 다른 존재의 울음에는 무관심할 뿐이다. 그러나 박산하의 수필에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가치가 물결치고 있다. 이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것은 생태의식이면서 그 의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글솜씨에 있다고 하겠다. 생명에 대한 애정이 배제된 수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21세기 수필가는 생태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수필은 생명체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생태 수필을 통해서 수필을 쓰는 행위는 모순된 현실을 박차고 나오는 탈출구라는 것을 알려준다.
강은 인류 역사 이전부터 여심한데 공존하는 인간이 자꾸만 생채기를 낸다. 한 때 울산이 그랬다. 공업도시를 만든다고 굴뚝에 불을 당긴지 스무 해도 넘기기 전, 모든 게 진회색으로 다가왔다. 강이 잿빛으로 말하니 하늘도 잿빛으로 응답했다. 공장 벽과 집들 근로자의 작업복도 모두 회색으로 일렁거렸다. 무표정한 도시 얼굴에 컬러는 없었고 내 마음 또한 무채색으로 흘러갔다. 강과 하늘은 말을 잃었다. 수 억만 년의 자연을 망가트리는 데 한 세대가 채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느림을 용서 하지 않았던 것이다.
- <강이 하늘을 품을 때> 중에서-
위의 수필은 공업도시 울산이 생태도시로 바뀌기 전의 모습을 ‘진회색’, ‘잿빛’, ‘무채색’ 이란 언어에 잘 담아내고 있다. 수억만 년의 자연을 망가트리는 데 한 세대가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느림의 미학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진술을 통해 근대 이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근거가 되고 있는 ‘정합적 이성’을 은근하게 비판하고 있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만을 따지는 ‘정합적 이성’ 논리는 개발지상주의를 가져왔고, 공업도시 울산의 태화강은 그래서 썩는 냄새가 진동했던 것이다. ‘강이 등 굽은 물고기로 침묵으로 항의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생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강의 제빛은 청정함일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강은 온몸으로 말한다. 결말부의 “갈대섬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여울이 지면 지는 대로 놓아두라고.”는 부분에서 우리는 4대강 개발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작가의 생태주의적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다. 자연을 노래하되 파괴된 자연을 노래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된 연유는 물론 자연의 변화에 기인한다. 어디에고 순수한 자연은 남아 있지 않고 눈 돌리는 곳마다 모두가 파괴된 자연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수필은 자연히 현실을 비판하는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생산은 더 많은 소비를 강요한다. 협박용 붉은 광고새가 날아다닌다. 본문보다 광고지면이 많은 날, 난 신문 보기를 포기한다. 상품들은 더욱 가벼워지고 천박해진다. 사람들은 되도록 빨리 싫증을 내야한다. 패스트푸드에 패스트패션이다. 다소비에 놀란 빙하가 꿈틀하고 만년설이 무너진다. 섬들은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산들은 제 모습을 찾는다. 문제될게 없는 것 같기도 한데 문제가 있다는 지구.
- <무룡산정에서> 중에서-
한적한 오후 작가는 산을 오른다. 산정에서 공업단지의 연기를 보면서 “연기는 밥이요, 땀이다/ 연기는 눈물이다/ 연기는 돈이요, 독이다, 소멸이다”는 시를 읊으며 번잡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온다. 결말부는 산의 충고를 듣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작가라면 미세한 산의 발신음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공감과 설득을 위해 작가는 동화의 원리로 결말부를 마무리하고 있다. 위의 수필 역시 ‘생산은 더 많은 소비를 강요한다.’는 진술로 인류의 행복에 과학과 기술이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성을 파괴하고 영혼이나 마음 등 모든 비과학적 영역을 삶으로부터 추방시키며 자연과 생명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한다. 다소비는 포드주의의 소산이다. 포드주의는 대량생산을 위한 경쟁의 산물이다. 더 많은 재화의 생산과 많은 물질의 소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함으로써 인간을 갈수록 탐욕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다소비에 빙하가 꿈틀하고, 만년설이 무너진다. 섬들은 바닷속으로 들어간다.’는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설득적으로 전해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고샅길 따라 당집을 찾아 오르는 길은 옛길 그대로다. 당수나무는 거대한 조선소 안에 들어가 그곳까지 보호하려고 갔나보다. 바닷가라 일찍 매화가 피어나는 곳, 급작스런 도시화로 어쩌다 남겨진 도심 속의 오지. 이 해안을 잘 보존하는 방법이 없을까. 점진적으로 해안을 잠식해오는 거대기업, 곳곳에 철통같은 초소가 가진 자의 경계임을 알린다. 어촌은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깃발인데 해안을 먹은 공룡은 일 년 내 기름진 깃발이 펄럭인다.
거대한 선박을 만들기 위해 도크가 세워지고, 방파제도 생겨났다. 뾰족한 바위를 오르내리며 한 남자가 낚시를 한다. 밀려드는 수초더미로 간간이 잡아내는 그의 손은 신이 났다. 갯지렁이 속, 미늘에 속아 방심하던 복어 한 마리 끌려 나왔다.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가시 돋아내며 배를 내민다. 저 많은 가시를 키우기 위해 제 몸 또한 얼마나 많은 독으로 뭉쳐진 것인가. 사람들은 그 지독한 독을, 사람도 너끈히 죽이는 그 살과 피를 먹느라 독이 든 줄을 까맣게 잊고 침을 삼킨다. 멸치 떼처럼 움직이는 회색 옷들이 니켈의 푸른 독에 물들고 있다.
- <일산 곶나루> 중에서 -
바다는 자연의 일부분이지만 우리네 삶과 친숙하다. 거기에는 빛과 어둠, 생성과 소멸 등 일상적 생존이 모두 함유되어 있다. ‘가난한 깃발’과 ‘기름진 깃발’의 대비는 이를 잘 말해준다. 작가는 아이가 유치원에 갈 때쯤, 시내로 이사를 하고 이십 년이 지날 때쯤 설화가 있는 일산진을 찾아 꽃처럼 앉아있는 강태공들을 보며, 다시 산업자본주의의 위기를 생각한다. ‘거대기업’, ‘철통 같은 초소’, ‘공룡’, ‘기름진 깃발’, ‘거대한 선박’, ‘지독한 독’ 등의 언어에서 우리는 작가가 얼마나 대량생산 산업체제가 인간을 인간다움으로부터 소외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라왕의 ‘신하들이 선유도를 즐겼다는 미인섬에 미인들은 없고 강태공들만 꽃처럼 앉았다.’는 표현은 한 개인이 내외적으로 소외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수필은 현대인은 갈수록 고립되고 고독해지게 되며 ‘참다운 자기’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확신이 없어 불안과 방황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가진 자에 확장 속도에 비해 서민들의 운신은 좁고, 감내해야만 해야 한다.’는 진술에서 역시 작가는 생태 파괴를 일삼는 거대자본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겨누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리석을 밟고 출근하고자 한다. 그게 모두가 가능한 일이라면 삶은 또 밋밋할까. 대리석을 밟으며 유명세를 타던 사람들의 학력위조가 아침안개 걷히듯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울산에는 가짜대학졸업생보다 진짜대학졸업생이 가짜가 되어 노동현장에 가야하는 삶이 있다. 얼마나 현실적이고 우울한 마이너리그의 삶인가. 이런 일도 가짜가 드러나면 그날로 회사를 떠나야 한다니. 학업을 인격완성으로 가는 과정으로 보지 않고 학력을 잣대로 사람을 마음대로 부리려는 무모함이 그 속에는 있을 것이다. 대학졸업생이 생산근무를 못한다는 것은 교육정책과 기업과의 모순이기 전에 직업의 선택을 막는 너무나 슬픈 뒤진 시대의 일이다.
- <소금의 꽃> 중에서 -
작가는 대형할인점에서 커피색에 가까운 구릿빛 얼굴에 헬멧 끈 자국만 엷게 붉은 살빛을 간직한 근로자를 보고, 공업도시의 울산의 외면에 다시 비판의 일침을 놓는다. ‘울산에는 가짜 대학 졸업생이 진짜 대학 졸업생이 가짜가 되어 노동 현장에 가야하는 삶이 있다.’는 진술에 담긴 함의는 대기업을 향한 젊은이들의 맹목적인 집착이라고 해야겠다. ‘대기업 점퍼가 대접받는 몰개성한 도시’, ‘회색과 청색으로 오가는 단순한 색의 진폭’, ‘철 블록 공장으로 직선이 되어가는 해안선’을 바라보면서 작가는 후대에 미안함을 갖는다. 그녀는 곡선이 사라진 도시, 문명의 이기가 뿜어낸 열기로 생태의 심각한 변형을 걱정하고 있다. ‘울산은 지금 화엄의 꽃이다.’, ‘경제수치로 보면 만개한 꽃이다.’, ‘울산의 화엄은 잠 못 잔 천개의 손, 천 개의 눈이 피워낸 소금의 꽃이다.’는 반어와 역설의 미학이 담긴 진술에는 자동반응성 속에 갇혀버린 인간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산업사회의 기계화된 생산방식과 삶의 방식이 인간으로 하여금 ‘편리’의 신화에 빠져들게 하고, ‘즉자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수필 속의 삽화 두 편, 서머셋 몸의 <달고 6펜스> 주인공 이야기와 작가가 캄보디아 여행에서 본 변형된 자귀나무 꽃 이야기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정서적인 접근성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매우 성공적인 주제의식의 구체화 전략이라고 하겠다.
시가 어느 날 네루다를 찾아간 것처럼, 나에겐 요원하던 시는 잘 오지 않고 농사가 짓고 싶었다. 허나 도시에서는 땅이 없으니 꿈같은 이야기다. 시골 가려니 어느 하나 내려놓지 못하고 어정쩡한 삶들이 가고 있다. 그러던 차에 개발지구에 빈 터가 나왔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가장 먼저 심고 싶은 건 흙에다 내 마음을 내리는 일이었다.
- <느림을 위한 에튀드> 중에서 -
인간은 자연에서 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고, 우리네 조상들이 이러한 거대 문명을 건설하기 전에는 자연 속에서 먹고 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면 인간이 자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사실일 법하다. 작가는 이 수필을 통해서 무위자연 사상을 전파하고 있다. 요컨대, 동양인의 전통적 사유에 따를 때 오늘날 인간 삶과 문명은 새로운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전체적이며 근본적인 삶의 실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바로 무위자연인 것이다. 존재 본질로서 ‘무’, ‘공’을 깨닫고 삶의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느림의 미학뿐만 아니다. 잊고 있거나 잊혀져 가는 것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진정 돌아가야 할 세계에 대한 발견과 인식이 이 작품의 존재 의의이며 가치인 것이다. ‘흙에다 자신의 마음을 내리는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완고할 정도의 애정이며, 자기를 실존케 했던 운명적 존재에 대한 애착이기도 하다. 변화의 질주 속에서 흙을 가슴에 지니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을 일이다. 흙은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도시인에게 커다란 위안의 공간이다. 그녀의 수필은 삶의 옆에 또는 삶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생활이며, 그 삶의 체험이 자신의 수필 속에 절실하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난 여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군살 같은 물건으로 인해 내가 쉴 곳이 점점 좁아지는 것도 모르고 부족함만 외치고 있다. 지금 등짐을 지고 있는 것도 무거운 데 더 얹으려 하다 보니 나의 얼굴은 어둡고 맑지 못하다. 몸도 많이 지쳐있다. 회색 옷 한 벌 달랑 걸어 놓은 여승의 방 안을 본다. 그들을 볼 때마다 부끄러움이 끝없이 다가선다. 이 공간에 주어진 시간동안이라도 짐을 벗기로 한다. 잡다한 인연 애써 끊는다. 인공적인 미인보다 좋은 생각, 선한 마음으로 자연적인 미인을 이곳에서 발견한다. 태어날 때의 무구한 모습, 그 모습에 난 너무 많은 때를 입혔다.
- <무위가 있는 곳> 중에서 -
부질없는 욕심과 이치에 맞지 않은 집착에서 벗어나 인위적인 삶을 버리고 이치에 닿는 삶을 공명정대하게 살 때 인간은 장쾌한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다는 것이 무위자연의 본래 의미다. 작가는 금남의 집인 석남사에서 무위의 사상을 사유하며, 묻은 때를 씻어내고 있다. 동양에서는 자연의 질서와 인간 삶의 질서가 다르지 않다는 대원칙에서 철학이 출발한다. 즉 자연이 무위의 비획일적인 질서에 따라 움직이듯이, 인간도 자연이므로 인간의 삶도 무위의 비획일적인 질서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이다. 이 수필은 서양의 목적론적 존재론의 노예로서 삶이 온통 인위적인 성취와 부질없는 불만족의 연속으로 일관되는 불행을 그만두고 동양적 사유 전통을 우리가 회복할 때 ‘인간의 얼굴을 한 인간의 삶’이 열린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군살 같은 물건’, ‘너무 많은 때’ 등의 어휘는 부질없는 욕심의 삶을 성찰적으로 반성하며, ‘태어날 때의 무구한 모습’ 즉 인간의 본 얼굴‘을 가지고 싶다는 염원의 발로로 보인다. 이로써 박산하의 문학적 관심은 인간의 현주소를 밝히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경고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주택단지가 들어온다는 집 주위엔 빈터가 많다. 동천강 줄기 따라 산 그림자 늘어지고, 붉은 저녁놀이 밀려오면 호미 하나 들고 텃밭으로 간다. 강을 가로 질러 공항담벼락을 에돌아간다. 세계바람을 양 날개에 묻혀 돌아와 고단하게 몸을 부리는 새 한 마리 점점 크게 다가온다. 놀고 있는 백로들이 화들짝 날아오른다. 유도등 따라 얌전히 내려앉는 거대한 은빛 날개, 머리 위에서 눈 깜짝할 사이 활주로에 미끄러진다.
텃밭 가는 길, 이런 풍경들이 하나의 덤이다. 언제부턴가 천석고황이 도져 초원만 보면 신열을 앓는다. 산 아래 계곡 물소리 들리는 외진 곳에 농막이라도 좋으니 가고자하나 그건 나 혼자 간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가족이 일터와 가까워야 하는 절박함이 더 큰 현실인 것이다. 궁여지책으로나마 찾은 것이 빈터 텃밭 가꾸기다.
-<만평농장 가꾸기> 중에서
산 속에 고급 별장을 지어 삶으로서 타인과의 차별적 우월감으로 우쭐댄다면 전혀 자연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이는 돈 자랑일 뿐이다. 타인들의 시기와 질투심만 조장하는 악을 저지를 뿐이다. 생태적 상상력을 찾는 깨달음에 숲속 별장이 다소 도움이 될 거라는 변명도 실은 억지스러운 거짓이다. 공기 좋은 농촌에 산다고 다 자연으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는 역시 똑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과욕에 쪼들려서 하루하루 사는 게 괴로우면 이는 자연으로 돌아 간 것이 아니다. 박산하는 흙을 만지고 싶어 한다. 언제부턴가 30여 년 동안 포장된 도시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젠 자연에 귀속되어 흙을 밟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집 주위 빈 터에 텃밭을 가꾸며 자연과 함께 하며 흙과 사귄다. “어딜 가나 넘치는 차량, 세파에 휘말려 늘 바쁘다는 사람들, 개성 없는 공산품은 산과 바다를 이룬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 가면 넘치는 물건들로 머리가 어질어질해 돌아온다. 저 많은 물건을 누가 다 쓰는지, 쓰고 난 쓰레기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괜히 나만의 걱정인 것 같다.” 작가가 문명의 이기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생태파괴주의 상황을 염려하고 있음이다. 입양되었던 아이가 이제야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안 것처럼 거대한 탑에서 나는 연기와 기계에 둘러싸인 인간들이 녹빛 자연을 그리워하며 하나둘 흙과 친해지고자 하는 생태담론을 이 수필은 잘 보여준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생태담론의 의의는 본래 자연에 기대어 살던 인간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본연적인 끈을 끊으려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날, 그리고 미래에 예측되는 우리들의 문제는 자연과의 단절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절 이후의 우리의 선택이 문명이기라는 게 문제다. 작가는 빈 터 텃밭 가꾸기를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말해준다.
밭이랑만 골골이 이어진 산골에 인재가 나는 건 왜 일까. 요즘 아이들은 복잡한 도시에서 사람과 차를 피해 다니다 보면 아이들은 제 몸 하나 버텨내기도 힘들다. 그러다보니 남을 배려 할 심성이 엷어지고 일방적 지식에 아이들의 뇌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지도. 이러다 종내 에고가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져 타인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호연지기를 키울 여유가 없으니 다들 바쁘기만 한 것이다.
나는 원한다. 늦은 퇴근을 한 후 언제라도 술 한 잔 할 수 있는 사람. 문학을 이야기 하고 시절을 논 할 줄 아는 사람. 사소한 일들은 안개꽃 보듯 부드럽게 응시하고, 생을 이야기할 때는 작약 꽃처럼 붉은 마음으로 환히 피어나게 희망을 노래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나이와 남녀를 구분 할 일이 아니다. 원한다면 내가 그런 친구가 되어주면 된다.
- <꽃적삼 바람에 날리던> 중에서 -
자연과 인간의 삶은 끈끈한 핏줄로 연결된 일종의 공동운명체라고 할 수 있다. 생태계는 인간 경제활동의 모태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의 활동에 되먹임 작용을 한다. 우리 수필이 삶의 여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작가가 ‘꽃적삼 바람에 날리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문명 이기에 대한 비판이다. 평자는 ‘생태’ 문제가 절실한 이 시기에 박산하가 이런 생태수필을 기획했다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최근에 이르러 생태계와 경제활동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큰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경제활동이 지구생태계가 지탱할 수 있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우려와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생태계와 생태학적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근시안적 시장원리에 의존한 결과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이 뒤늦게나마 박산하 수필에 의해서 알려지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고 하겠다. 인류 사회는 궁극적으로 평화와 생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알트의 주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유상종이라 했으니, ‘생을 이야기할 때는 작약 꽃처럼 붉은 마음으로 환히 피어나게 희망을 노래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작가 주변에 많이 모여들기를 기원해 본다.
나. 노마드 정신과 생성미학
박산하 수필의 출발점은 언제나 ‘떠남“에서 시작된다. 여행을 하다보면 자기 사고의 한계를 벗어난 사물을 만날 때가 있다. 만물에 민감한 촉수를 가진 작가의 눈으로 대상이 다가올 때, 그 순간 작가는 감동으로 이어지는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된다. 박산하의 수필 작업은 일상적 삶의 구속으로부터 자유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의 기록이다. 작가가 수필을 쓰면서 생활의 안정과 행복을 느끼는 데는 여행이란 ‘떠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행을 떠나서 자연을 만남으로서 비로소 한 편의 수필이 완성됨을 볼 때, 작가에게 여행은 문인으로서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행복을 느끼게 하는 제일의 질료다. 정휴 스님은 ”사람도 물도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썩기 마련이다. 인생은 강물처럼 흘러야 새로운 만남을 체험할 수 있다. 고정된 틀로써는 전체를 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고집을 갖게 되며 본질을 직관하는 시력이 약해진다. 왜냐하면 고집은 정신적인 군살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떠남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고 썼다. 수필 <이요당 음다기>에는 ”자연에 동화되어 차를 마시는 즐거움이 어디에 비하랴“라는 진술이 있다. 겨우내 앉은 백설, 동박새 울음소리 불러내며 차를 마시는 호사도 ‘떠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박산하는 산과 강 그리고 바다를 좋아한다. 산은 인위적인 삶과 대비되는 공간이다. 비록 인간의 삶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산 속에서 산과 더불어 영위될 경우 우리가 간단히 자연이라고 말해 버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산은 본래부터 자연의 축소판이다. 모든 진실이 그 안에 있고, 모든 인간적인 체온이 그 안에 있고, 신비한 힘 또한 그 안에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악인이 없다는 말도 산의 신성함을 토대로 한 말일 것이다. 강은 어머니다.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는 모성애로 문화를 꽃피운 보배다. 인류 역사의 시원으로 인류와 함께 늘 공존해 온 것이다. 바다는 인간에게 있어 환경인 동시에 문화다. 미래로 가고 있는 수필 속에서 바다는 중대한 화두 이상의 무엇을 가지고 있다. 물의 총합으로 표징되는 바다, 생명의 원천으로 화합과 끌어안음의 바다에 관한 소재로 수필을 쓴다. 그러므로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자연을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산과 바다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은 생활에 지친 현대인에게 위안과 안식을 주는 힘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가 자신의 수필적인 재료를 자연에 둔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하겠다.
작가의 내부에는 언제나 닦고 자리잡은 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떠남은 단지 공간이나 시간의 이동만은 아니다. 과욕, 집착, 기득권, 악습, 구태에서 이런 것들이 떠남의 본질이다. 이 수필은 미래는 떠남을 실행한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임을 말해준다. 수필 <씨앰립 하늘 아래>가 캄보디아 유적을 제재로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깊은 작가가 '문화 유적’을 그 대상의 하나로 설정하고 쓴 글이다. 작가는 한나라의 지도자가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민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거지나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교훈도 들려준다. 여기에는 작가의 문화에 대한 사랑과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을 향해 떠나온 이가 현대인이다. 자연적인 삶과 문명적인 삶을 두루 경험한 작가의 기억 속엔 원시의 향수가 살아 있다. 그리움의 텃밭은 언제나 지나간 시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기억의 시간에 대한 반추를 통해 애틋한 애정, 원시의 순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박산하에게 '앙코르왓'는 바로 그러한 존재다. 지구촌 어디를 가나 멋을 아는 여유로운 자들을 만나기에 그녀는 여행이 즐거운 것이다.
밤이 깊어가자 호텔 측에서 영업시간이 끝났다고 야외 전등을 내린다. 그들은 우리의 기분을 읽은 듯 고맙게도 촛불을 켜 준다. 이국하늘 아래서 느껴보는 촉촉한 인간적인 면이다. 지구촌 어디를 가나 멋을 아는 여유로운 자들을 만나기에 여행은 즐거운 것이다. 아직 캄보디아는 치안이 녹록하지 않은 곳이라 더욱 따뜻한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튿날 덜컹거리는 비포장의 도로와 은근히 찌는 덧 한 햇살, 어마어마한 앙코르 유적을 보면서 도저히 감당할 힘이 없다. 향이 진한 모든 것들이 코끝에 와 닿는데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다니는 불운을 겪는다. 건강이 따라주지 않는 여행은 고행길이다. 종일 굶고 다니다 저녁에 우유 한 잔과 빵으로 보낸 기아의 날을 체험한 것이다.
- <씨앰립 하늘 아래> 중에서 -
수필은 삶의 경험이 녹아 있어야 향기가 나는 글이라고 하였다. 그리움이 된 추억이 녹아 있는 이국의 풍경이 배어 있는 글이면 더욱 수필다운 체취가 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의 일부로서 문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살기를 원한다. 박산하가 인류의 문화유산을 찾고, 산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는 것은 그 원시성에 대한 흠모 때문이다. 문명은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었지만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은 주지 못했다. 작가의 움직이는 행위가 단순히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면 수필은 맛을 잃기 쉽다. 박산하의 여행 과정이 수필이 되는 것은 순수 영혼을 발견을 통해 잃어버린 원시의 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문명과 거리가 먼 순수 동심의 세계에 대하여 무한한 애정을 지닌 사람이다. 작가는 우리의 문화가 세계로 전파되는 현장을 가는 곳마다 보면서 행복을 만끽한다. 이러한 행복이 여행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파악하는 것이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다. 다음 수필은 일본 여행을 통해 작가가 풀어놓는 핵 문제 해결에 대한 기발한 착상이 재미있게 들린다.
과학이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타인에 의해 죽어가는 확률이 늘어간다. 질주하는 차량, 천장과 마루가 모호한 한 지붕 아래의 집단 주거, 지하철의 공동운명은 나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된다. 더욱이 핵은 말해 무엇 하랴. 핵을 가진 자는 만용을 부릴게 아니라 핵 보유세를 내야 할 것이다. 갖지 못한 나라의 사람은 물론, 전 인류를 위협하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그들은 당연히 보유세를 내야 한다.
우리에게 평화의 전도사 같던 미국은 왜 심장이 찔렸을까. 일본 나가사키 상공에 나타난 검은 구름모양의 버섯은 왜 이곳에 안착했을까. 원인은 묻어둔 채 당한 것에만 분개 한다면 그들의 정신은 이미 평화를 가장한 공격인 것이다. 산 너머 훤히 보이는 북쪽의 땅, 지구상에서 가장 빛바랜 생각으로 민족주의와 주체성을 가장한 불행한 나라. 동족끼리 사람답게 살자고 보내준 쌀과 돈과 장비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 <모든 게 녹아버린> 중에서 -
수필은 정화된 감정을 바탕으로 하는 관조의 문학이어야 한다. 수필을 쓰는 큰 의미는 대상의 본질을 발견하는 데 있다. 작가는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원폭 피해자들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동정의 가치를 살려내려고 한다. 이를 통해 그녀는 문명과 원시의 공존 가치를 말하고자 한다. 한국인 희생자의 모습을 들추어내면서 작가는 깊숙이 숨어있는 애국심도 불러낸다. 이는 인간으로서의 향기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의 한 방편으로 모색된 수단이다. 좋은 수필에는 사람의 냄새, 인간이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기 마련이다. 박산하의 수필이 근본적으로 뿌리박고 있는 곳은 인류애요, 평화에 대한 의지다. 그녀는 전쟁의 참혹을 떨쳐내고 이제 관광지가 된 나가사키를 통해서 평화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창의적이지 못한 현대 과학의 위험성을 ‘핵’이란 소재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과학이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타인에 의해 죽어가는 확률이 늘어간다.’는 진술을 통해 원시와 함께 살아가려는 의식이 우리의 가슴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현실 인식에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이웃의 삶도 함께 생각하는 성찰의 반영인 것이다.
내려오면서 긴장이 풀려 망고를 몇 개 주워 먹었다. 비바람에 떨어진 망고들이 날 유혹했다. 소년에게 부탁해 말 위에서 먹는 이 맛, 지금 즐기지 않으면 영원히 이풍경을 대면하지 못 한다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친다. 망고를 보면 이국적일뿐 아니라 폴 고갱이 생각났다. 「타히티의 여인들」「망고나무 아래서」등 그의 그림들을 보면서 남국의 정열적인 생활을 동경하기도 했다.
고갱은 증권거래소에서 일을 하다 마흔이 되던 해 훌쩍 집을 나가 그림을 배운다. 그러다 몇 년 후 가장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타히티에 정착을 한다. 맨발로 살아도 흉이 없는 나라에 가 자유, 그 자체를 몸에 감고 색을 풀어낸 화가. 열세 살의 헌신적인 여인을 두면서 편안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남자. 만년에 육체적으로 행복한 고통도 따랐겠지만 그 행복한 비명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떠난 자만의 그림 위의 날갯짓이었으리.
- <오지여행 2>에서 -
작가는 ‘떠난 자’만이 누릴 수 있던 행복, 즉 노마드 정신이란 주제의식을 구현하기 위해 여행에서 본 망고와 관련된 그림을 연상하고, 고갱의 일화를 소개한다. 유명한 화가인 고갱의 그림과 전기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수필은 미술에 대한 조예를 기반으로 하고 해서 창작된 것이다. 이러한 통섭적 접근을 통해 작가는 고갱의 그림과 삶의 관련성을 노마드 의식과 연결시켜 주제화하는 데 성공한다. 최소한 박산하는 미술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거나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필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미적 세계와 철학성을 깊이 있게 형상화하여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이 수필은 기행수필의 문제를 잘 극복하고 있다. 오지 여행에서 마주친 자연과 사람의 만남으로 성립되는 소중한 관계가 정겨운 강물처럼 출렁이고 있어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들 작품은 판에 박은 듯한 안내문 같은 정보 전달, 소개 형태의 기행 형식에서 탈피하고 있어 예술적 감흥을 준다. 주제의식이 통섭의 도움을 받아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감촉, 개인적 체취가 강하게 풍겨 기행수필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현실 세계에서 나그네의 부정적 이미지가 큰 것은 우리 민족이 농경시대의 정주(定住)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미래의 세계는 정착이 곧 퇴행성을 불러올 것이다. 미래라 할 것도 없이 지금 우리는 엄청난 유목생활을 하고 있다. 모바일 폰 하나로 사무실이 없어도 이 복잡한 시대를 집시처럼 잘도 살아가고 있다. 걸어 다니며 멀리 있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머잖아 몸에 입는 컴퓨터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유희하는 유목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문학은 현실보다 수세기를 앞선다든가. 예나 지금이나 시인은 방랑한다. 매월당이 그랬고 괴테가, 영원한 여행자 스티븐슨이 그러했다. 타고난 예지력으로 분출하는 기를 자연에 쏟아 부어야 했던 그들, 선인들의 방랑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될듯하다. 나그네를 ‘멈추거나 소유하지 않는 것, 에고를 벗어나 모든 방향으로 열려진 그 무엇’의 이미지로 그리고 싶은 것이다. 그 무엇이 인간과 대자연의 합일이라면 시인은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 <노마드> 중에서 -
떠남의 형태는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과 자연이 합일된다면, 그녀는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문학은 그 자체로서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인간적 진실과 그 형상화를 통해 문학적 가치를 확인받는 것이다. 그녀의 언어는 물 흐르듯이 고요하게 흐르다가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큰 소리를 내다가 이 시대 삶의 자유분방하고 격렬한 몸짓으로 변화한다. '현실 세계에서 나그네의 부정적 이미지가 큰 것은 우리 민족이 농경시대의 정주(定住)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나그네’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 속에서 우리는 떠남의 미학을 구축하고자 노력하는 작가의 성실성과 조우할 수 있다. 수필이 인간의 삶에 기여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의 발견을 통해 그렇지 않은 것을 추방하는 일이다. 당연히 고양해야 될 가치인데도 사라져 갈 때, 그것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도록 가치화하는 것이다. 평자는 노마드 시대의 도래를 선언한 이 작품의 역행적 가치에 주목한다. 작가는 역사 앞에, 자신의 소신 앞에서 당당해야 한다. 진실 하나의 힘만 믿고 세상에 대해 부끄럽지 않다면 그것으로 자랑스러울 수 있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여기서 찾아야 한다.
넓은 평원에 야자 잎으로 얼기설기 엮은 집. 두 평의 물위에서도 꽃을 가꾸는 여인들, 겨울이 없으니 얼어 죽을 일이 없다. 지상의 물이 다 마를 때쯤이면 하늘이 비를 준다. 우기가 시작 되는 것이다. 문명이기가 없어 약간은 불편할 것 같으나 그리 불편 할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연과 한 몸이다.
원색의 꽃이 피어나고 망고, 야자, 두리안이 익어가는 곳. 그 과육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문명이기로부터 애초에 받은 것이 없으니 돌려줄 빚도 없는 사람들. 밤잠 줄이며 일한 우리네는 세금이며 카드대금이니 날만 새면 올가미를 쓴다. 어느 쪽이 행복에 다가가 있을까.
- <오지 여행 1> 중에서
삶이 지니고 있는 허위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 수필의 소명이기도 하다. 힘든 오지 여행을 하면서 삶의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는 떠남을 통해 존재의 근원적 깊이에 더 가까이 가 닿으려는 보편적 욕망을 풍요롭게 보여주고 있다. “문명이기가 없어 약간은 불편할 것 같으나 그리 불편할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연과 한 몸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그녀는 인생의 진리를 깨우친다. 작가는 치열한 문학적 탐구 정신으로 제재를 주제화하는 과정을 잘 파악해서 그것을 다시 언어로 형상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감동은 자기만의 독특한 체험에서 나온다. ‘경험’을 넘어선 ‘체험’은 생경함과 신선함을 주면서 감동을 주기 때문에 수필미학을 구축하는 것이다. 수필가의 유일한 도구가 언어이듯이, 박산하의 유일한 표현 도구 역시 언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누구나 숙명적인 표현의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러나 작가는 특유의 언어감각으로 이를 잘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주제의식의 상상화로 빛나는 결말부 마지막 문장, “밤잠 줄이며 일한 우리네는 세금이며 카드대금이니 날만 새면 올가미를 쓴다. 어느 쪽이 행복에 다가가 있을까.”라는 진술은 박산하의 문학적 저력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 수필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천착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작가의 지성적 성찰을 잘 드러내어 보여준다고 하겠다.
구겨진 마음도 푸르게 펴주는 겨울바다. 바다는 금박을 뿌렸다가 때론 고래뱃속 같은 너울파도로 다가온다. 부단히 제 몸을 쳐서 늘 싱싱함을 간직한다. 또한 온갖 생명을 받아주는 바다, 이 바다가 고요해지면 그 속이 보인다했다. 허나 어디 바다가 녹록히 고요해 주던가. 내 마음이 고요해야 바다도 고요한 것이다. 해변을 걸으며 생각한다. 내 마음의 고요는 어디까지 흐르고 있을까. 살아 숨 쉬는 것들, 어디까지 품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문득 겨울해풍에 뜨거운 바람이 몇 오라기 얼굴을 때린다.
- <정자 해변> 중에서
인문학의 대상으로서 바다가 지닌 진정한 의의는 상상의 모태일 것이다. 바다는 자기 변화를 부단하게 추구하면서도 원래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존재이고, 닫힘에서 열림으로, 맺힘에서 풀림으로 나아가는 출구이며, 떠남과 벗음의 자유를 가르쳐주는 역동성의 공간임을 작가는 <정자 해변>를 통해 말해주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쿠퍼랜드 교수는 모범적인 수필가는 “방랑자요, 게으름뱅이요, 구경꾼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인용한 대목을 살펴보면, 작가는 노마드 정신으로 뭉쳐져 있어서 모범적인 수필가의 길을 한 치 오차도 없이 걷고 있다. 생각의 폭을 넓혀 나가는 데 떠나는 것이 안성맞춤이다. 가정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우주를 살피는 것은 곧 자아를 찾는 작업이다. 수필은 또한 자기의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자아 성찰은 바로 자기 내면의 자아를 바르게 세우는 작업인 것이다. 작가가 ‘떠남’을 꿈꾸는 것은 자아를 찾기 위함이다. 그래서 작가는 <정자 해변>란 작품을 통해서 자유에 대한 가치와 주체에 대한 성찰의 의미를 고양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수필은 뿌리내릴 수 없는 예술가의 자유정신을 문학적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부처의 모습이 평온한 것은 수많은 고행 후, 고요히 평정된 내면의 세계가 밖으로 나타나는 낯빛일 것이다. 인간의 가장 고요하고 평온한 순간을 잡아낸 붓다의 얼굴, 반쯤 뜬 눈과 다문 입 크게 열린 귀의 여유로운 모습 말이다. 그렇게 비슷하기 위해서라도 우린 지루한 비행기를 종일 타고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한다. 풍경소리에 홀려 산사도 가고, 들꽃에 매료되어 벌판을 한없이 걷기도 한다. 좁혀지는 가슴을 넓히려 부단히 일상을 탈출하는 것이다.
마음이라도 맞는 사람을 만나 자연에 동화되어 차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 건조한 인정과 수많은 얼굴 속에 더 이상의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제 항상 고요해지고 싶은 나이가 되었다. 먹구름 속에 하얀 뭉게구름 피어나듯 한 겹 뚫고 나오니 모든 게 홀가분하다. 가난하나 뜯어보면 불편함도 없는 나의 생활. 고요히 살다보면 어느 날 모든 게 수류화개水流花開일 것이다.
- <술잔을 걸어 놓고> 중에서
바쁠수록, 빠를수록 유유자적한 친구 한둘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다. 생이 조여 올수록 삶의 여백을 가져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작가가 매화가 절정인 3월 중순, 봄의 감흥 따라 작괘천으로 발길을 옮긴다. 우리의 전통적 삶 속에 원래 ‘빨리 빨리’는 없었다. 모든 삶 속에 ‘차근차근’이라는 단순하지만 철학적인 지혜가 스며있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되면서 우리는 속도의 노예가 되었다. 작가는 이런 점을 경계하고 있다. 알찬 삶은 빠르게 사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천천히 되돌아보고 본질적인 것을 얻는 데서 온다. 이 수필에서 작가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발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규격의 세계로부터 시대의 우수 속으로 떠나가는 예술가들의 ‘방랑’이라는 동적 행위를 만나 새로운 에너지와 활기를 생성해내는 모습을 산뜻하게 형상화해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자유로운 정신세계의 밑바닥을 만져본 사람만이 증언할 수 있는, 예술가 정신 내지는 방랑정신 그 자체로부터 원초적 역동성의 한 단초를 포착해낸다. 고행 속에서 삶의 진가를 확인케 하는 그 역설적인 활기가 작품 전체를 휘감고 있는 고요하고 평온한 정적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다. ‘고요해지고 싶은 나이가 되었다’는 말로 떠남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작가의 유랑 예찬에 박수를 보낸다. 그녀는 붓다의 얼굴을 닮기 위해, 좁혀지는 가슴을 넓히려 부단히 일상을 탈출하는 것이다. 마음이라도 맞는 사람을 만나 자연에 동화되어 차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 이것이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모든 인간은 떠나고 싶어 한다고 하지 않는가. 떠남을 통해 우주와 소통하면 구도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오늘도 떠남을 기대하는 박산하는 진정한 ‘떠남’의 작가다.
VI. 닫으며
박산하 수필집에서 눈길을 잡아 끈 것은 생태적 합리성을 내세운 포드주의 비판과 떠남을 통해 자신을 바로 세우고 삶의 역동성을 설파하는 작가의 당당한 노마드 정신이었다. 자연과 노마드에 대한 꿈과 동경은 바로 중심 바깥으로 던져진 존재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삶의 변증인 것이다. 그녀의 수필이 주는 맛은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길러 올려진 언어가 진정성의 분위기를 뛴다는 데 있다. 앞에 설정된 것이 인식 구조로서의 수필 미학이었다면, 미학 구조로서의 수필로 볼 때, 박산하 수필의 탁월성은 작품성에 있다고 하겠다. 탄력성 있는 문체와 형상력, 질서 정연한 구성의 체계성과 주제 전개의 논리성이 생태문학이라는 승화된 주제의 설정에 따라주었기 때문에 감동을 주었다고 할 것이다. 대부분의 수필들에서 독자들은 함축적 문장과 낯설게 하기로 형상화된 멋진 문장을 조우하게 된다. 깔끔한 문장은 감각적 미감을 전달하면서 리얼리티를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좋은 수필의 일곱 가지의 관점, 1) 삶에 대한 통찰력, 2) 사물을 보는 안목, 3) 투명하면서도 깊은 울림, 4) 풍부하면서도 절제된 감성, 5) 평이하지만 신선한 문체, 6) 개성 있는 시각, 7) 미의식뿐만 아니라 통섭의 차원에서도 그녀의 수필은 어느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다. 일상을 현실이라는 인식에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이상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용기 때문일 것이다.
박산하가 ‘지금, 현재, 여기’를 지향하면서 ‘있어야 할 것’들에 관심을 놓고, 수필의 주제지향성을 ‘생태적 합리성’과 노마드’로 설정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 행위는 대상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인식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의 인식 대상과 행위가 바로 사회 현실이고 역사 현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프란츠 알트가 생태학과 경제학간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단순한 이론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상황 속에서 접목시키고 있는 차원에서 그녀가 생태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처사다. 위에 다뤄진 작품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환경의 관점이 아닌 모든 생명체와 인간이 동일한 가치선 상에 있다는 생태 자연의 관점으로 제 만물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수필가의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산하 수필이 생태문학의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이제 수필은 그 위상을 높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에서 인식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빠져나간 신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태 문제를 주제의식으로 삼고, 생태문학의 카테고리 속에서 수필가의 관심이 생명을 향하는 것은 작가적 사명을 다하는 일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으로 변용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박산하는 생태주의라는 주제에 맞게 제재를 하나로 통일하고, 정서의 객관화를 통해 주제를 구체화해서 인식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기법으로 좋은 수필을 탄생시켰다고 하겠다. 문학이 문학다워야 한다는 것은 언어예술로서의 문학 정체성을 작가가 확고히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어쨌든 생태와 평화에 대한 의식이 절실한 이때, 박산하가 수필가로서는 드물게 생태라는 본질적 문제에 눈을 떴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박산하 수필의 가치는 단순히 체험을 얘기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이랑 자신이 생각하는 상상의 세계를 섞어 묘사하며, 그 곳에다 자신의 철학을 심어 놓는 데 있다. 따라서 그의 수필은 향기를 내면서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에세이문학상, 청강문학상, 울산문협 올해의 작품상, 한국에세이문학상 등에 빛나는, 중견 작가로서 박산하는 성실성을 무기로 여러 문예지에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떠남을 통해 토속적이며, 전통적인 우리 것의 미학성 찾기에 눈길을 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당위적 명제와 진리를 찾고 있기에 그녀의 글은 손맛과 눈맛, 글맛까지 두루 낸다. 수필가의 정신적 건강함과 생태 수필집의 가치가 한데 어우러져 한국수필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길 바라며, 이번 출판을 계기로 해서 더욱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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